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갈대 상자를 만드는 마음 (출 2:1~10)

  • 잡초 잡초
  • 404
  • 0

첨부 1


갈대 상자를 만드는 마음 (출 2:1~10)
  

무서운 전염병이 퍼지고 있었습니다. 그 전염병은 요즘의 신종플루 보다 천 배, 만 배 무서운 병이었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이 감염되었습니다. 전염병이 퍼지고 있는 곳은 애굽이었습니다. 그리고 전염병에 걸려 죽어 가는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이 전염병의 이름은 <패배주의>였습니다. 이 병의 증세는 두려움, 자포자기였습니다. 이 병이 깊어지면 사람들은 정신을 잃었고, 나중에는 사랑하는 자식을 강에 던져 죽였습니다. 정말 무서운 전염병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무서운 전염병이 창궐하는 한 복판에서도 그 병에 정면으로 대응하는 용기 있는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레위 지파에 속한 아므람이란 남자와 요게벳이란 여자였습니다. 그들도 다른 이스라엘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노예로 태어났습니다. 그들의 조부모도, 부모도 노예였고, 그들도 장성하여 노예로 살아야 했습니다. 

노예에게도 감정은 있어서 그들이 성장하여 만났을 때 사랑을 느꼈고 결혼했습니다. 신분은 노예였지만, 함께 있으면 세상 걱정 없이 마냥 행복했습니다. 그들에게 딸이 먼저 태어났고, <미리암>이란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아들이 태어났는데, 고상한 인물이 되라는 뜻으로 <아론>이라 불렀습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습니다. 비록 노예였지만, 모두들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고, 아이들 키우는 재미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아론이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애굽 왕 바로는 무서운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들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딸이라면 키울 수 있지만, 아들이 태어나면 나일강에 던져 죽이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지상에서 사라질 수도 있는 실로 잔인한 인종 말살 정책이었습니다.

이 명령이 떨어지자 이스라엘 사람들 모두가 슬퍼했습니다.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은 노예살이라는 무서운 병으로 무기력해져 있었는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이 명령은 말기암 환자에게 다가온 참을 수 없는 통증과 같이 백성들을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아므람과 요게벳 부부는 아론이 조금만 늦게 태어났더라도 나일강에 던져야 했을 것을 생각하니, 식은땀이 흘렀습니다. <여보, 이제 아기는 그만 낳읍시다. 미리암과 아론이면 충분해. 아들도, 딸도 다 있는데 뭘 더 바라겠어? 만약 또 낳다가 아들이라도 태어나면 그 땐 어떻게 하겠어?> 그들은 더 이상 아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생명의 일을 사람이 어떻게 가로막겠습니까? 요게벳은 얼마 후 자신이 임신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임신은 기쁨이 아닌 두려움과 눈물만 가져왔습니다. 배가 불러올수록 밤잠을 설쳤습니다. 그들은 태중의 생명이 딸이기를 간절히 바랐을 것입니다.

어느 날 남편이 수심이 가득하여 돌아왔습니다. <여보, 왜 그렇게 얼굴이 어두워요?> <당신 옆 동네 시몬 알지? 그 부인이 엊그제 아기를 낳았는데, 아들이래. 그래서 오늘 나일강에 던지고 왔대. 그 부인은 지금 통곡을 하면서 드러누웠다는군!> 남의 일 같이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해산의 기일이 다가왔고, 아기를 낳고 보니 아들이었습니다. 그것도 너무도 잘 생긴 아기였습니다. 그 아이가 후에 위대한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가 되어 백성을 애굽의 노예살이에서 건지고 가나안으로 인도한 모세입니다. 그가 태어났을 때 부모는 눈물지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방법은 하나뿐이었습니다. 그것은 아기를 나일강에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아기는 처음부터 없었다고 애써 잊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앞뒷집의 가까운 이웃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근심스런 얼굴로 말했습니다. <그래, 어쩔 셈인가? 아직은 아무도 모르지만, 조금 있으면 자네가 아들을 낳았다는 것을 애굽 사람들이 알게 될 텐데......그 때 경을 치지 말고, 지금이라도 아기를 버리고 오게!> 이미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패배주의에 감염되어 포기하라고 말했습니다. 모두 그 병으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날 밤 부부는 밤새도록 머리를 맞대고 밤을 새웠습니다. 두 사람은 결의를 다졌습니다. <우리는 결코 굴하지 않겠다. 아기를 버릴 수 없다. 가는 데까지 가 보자. 버텨 보지도 않고 아기를 강에 던지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본래 우리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렇게 약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요셉 할아버지 이야기를 생각해 봐라. 그 분은 노예살이에다 감옥살이까지 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나중에는 애굽의 총리가 되어 지금 우리를 억압하는 이 사람들을 다스렸고, 이들을 무서운 흉년에서 살려낸 영웅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가 왜 이렇게 약해졌나? 한 번 해 보는 거야. 아기를 숨겨 키우자! 하나님, 아기를 살려 주옵소서!>

애굽 땅 한 구석, 아무 힘없는 젊은 부부의 가슴에 일어난 이 용기는 위대한 변혁을 가져오는 첫 발걸음이었고, <패배주의>란 무서운 전염병에 맞설 항체가 생기기 시작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두려움과 자포자기라는 증세를 이길 수 있는 힘이 생겨나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기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석 달 동안 아기를 깊이 숨겨 키웠습니다. 그 석 달은 저항하기 힘든 거대한 악의 세력과 맞서는 위대한 시간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게 바로 모세가 태어날 때의 상황을 재구성해 본 것입니다. 우리도 살다보면 이런 상황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산 같은 장벽 앞에 설 때가 있습니다. 엊그제 대학입학을 위한 수학능력시험이 있었습니다. 그 날 아침 우리는 한 고3 학생이 뛰어내려 자살했다는 슬픈 뉴스를 들어야 했습니다. 시험장에 들어가야 할 학생이 스트레스를 못 이기고 뛰어내린 것입니다. 그 학생의 심정은 아들을 낳으면 나일강에 던져야 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심정과 같았을 것입니다. 

지금도 수 천 년 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퍼져가던 그 무서운 전염병이 맹위를 떨치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패배주의에 감염되어 있습니다. 증세가 심해져 공포에 질리고,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자포자기하고 있습니다. 과거엔 아들을 강에 던졌다면, 요즘 사람들은 자신을 강에 던지고 있습니다. 너무도 가슴아픈 이야기입니다. 우리나라가 OECD회원국 중 자살율 1위라는 것을 아시지요?

지금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소중한 것들을 던지기 위해 나일강으로 가고 있습니다. 소중한 기회, 소중한 시간, 소중한 가정, 소중한 기업, 소중한 자녀들, 소중한 젊음을 던지려고 합니다. 

여러분, 저는 제안하고 싶습니다. 우리 석 달만 버티는 심정으로 나아갑시다. 사업이 힘들어도 석 달만 버티십시오. 학생들은 공부하기 힘들어도 석 달만 더 버티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가정에 불화가 심하고, 부부 사이가 심각하고, 아이들에게 희망이 안 보여도 석 달을 견디려는 마음을 가지시길 부탁합니다. 

개인만이 아닙니다. 많은 교회들도 나일강 앞에 서 있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교회 부흥을 포기한 채로, 더 멋진 헌신을 포기한 채로, 주님을 위해 더 충성할 각오를 포기한 채로, 에워싼 주변 환경에 짓눌린 채로 나일강 앞에 서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특히 부산이 그렇습니다. <여보, 더 이상 아기를 키울 수 없어. 그러니 내가 오늘 강에 다녀오겠어...>라고 말하는 아이의 아버지처럼 <부산에서는 교회가 부흥되지 않아. 애써도 안 돼>라고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교회들도 석 달을 버티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포기하면 안 됩니다. 다 안 된다고 말해도 우리는 된다고 말해야 합니다. 몇 해 전 모 기독교 단체에서 부산의 1,557개의 교회들 중에서 앞으로 크게 성장해서 한 지역의 버팀목이 될 가능성이 있는 열 개의 교회를 선정한 일이 있었습니다. 영광스럽게도 우리 교회가 그 중의 하나로 선정되었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나머지 아홉 개의 교회들은 모두 인구가 집중되는 지역, 신 개발지역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만이 유일하게 인구가 급속하게 감소하는 지역에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교회의 책임이 큽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기대를 읽어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퇴보하는 지역에서도 교회가 부흥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안 된다고 말하면서 주저앉으면 안 됩니다. 힘들지만 우리는 석 달을 버티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나일강으로 나가고 있는 교회들과 성도들에게 함께 버티자고 말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힘을 내길 원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석 달을 버티는 일에 동참해 주십시오. 

왜 석 달을 더 버텨야 할까요? 그 이유는 우리는 십자가와 부활의 신비를 아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모든 것이 끝나는 죽음의 순간입니다. 예수님이 나일강에 던져진 것과 같은 순간이 십자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순간,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끝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부활하셨습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우리에게 죽음과 같은 고통의 순간이 다가와도, 그래서 패배주의라는 무서운 병에 걸리고 공포와 절망과 자포자기의 증세가 우리를 에워싸도 우리는 더 버텨야 합니다. 절대 나일강으로 달려가서는 안 됩니다. 부활의 능력이, 생명의 능력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결코 주저앉으면 안 됩니다. 

수없이 도전하셨습니까? 한 번 만 더 도전하시길 바랍니다. 이런 우화가 있습니다. 때가 되도 장가를 못 간 노총각 비둘기가 있었습니다. 비둘기는 이미 짝사랑하는 비둘기에게 열 한 번이나 청혼을 했지만, 거절당해서 완전히 낙심해 있었습니다. 보다 못한 참새가 와서 말했습니다. <너, 눈송이 하나의 무게가 얼마인지 아니?> 비둘기 총각은 모른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참새가 자기의 경험을 이야기했습니다. <어느 날 내가 나뭇가지에 앉아 노래를 하고 있었는데 눈이 내리기 시작했어. 

눈은 너무 가뿐하게 내렸기 때문에 나뭇가지에 쌓이는 것 같지도 않았지. 나는 눈송이들을 헤아리기 시작했어. 팔백 칠십 사만 일천 구백 오십 이 송이의 눈송이가 내려앉을 때까지만 해도 나뭇가지엔 아무런 일이 없었어. 그런데 바로 그 다음 한 송이가 그 위에 얹혀지자 그 큰 나뭇가지가 툭 하고 부러지고 말았어> 이야기를 들은 비둘기 총각은 눈 한 송이만 더해져도 나뭇가지가 부려졌다는 말에 용기를 얻어 한 번 더 해볼 결심을 했습니다. 비둘기는 짝사랑하는 비둘기에게 다가갔고, 열 두 번째 프로포즈에 성공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석 달을 버티는 것, 한 번 더 도전하는 것이 패배주의의 전염병을 이기는 항체가 될 줄 믿습니다. 

또 우리가 석 달을 버텨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그 석 달 동안에 상황을 타개할 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태어난 지 석 달이 지나자 더 이상 아기를 숨길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기의 울음소리가 점점 커졌을 것입니다. 그 때 아므람과 요게벳이 할 수 있는 일은 아기를 강에 던지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나일강에 가기는 했으나, 강에 던지지는 않았습니다. 그 대신 갈대 상자를 만들었습니다. 이 갈대는 고대 시대에 종이처럼 사용하던 파피루스를 만들던 재료입니다. 그들은 물이 새지 않도록 정성껏 촘촘하게 엮었습니다. 그리고 갈대 틈새에 역청을 바르고 또 발라 방수처리를 했습니다. 그리고 푹신한 천을 깔고, 아기를 뉘였습니다. 그리고 나일강 가장자리 갈대가 무성한 곳에 상자를 띄웠습니다. 상자는 갈대 숲에 떠 있었습니다. 

<갈대 상자를 만드는 마음>, 이게 바로 그 석 달 동안 하나님께서 아기의 부모에게 주신 지혜였습니다. 그 석 달 동안 그들은 얼마나 생각하고 또 생각했을까요? 아기를 살릴 수 있을 방도를 찾기 위해 얼마나 골몰했을까요? 그 석 달이 지나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갈대 상자를 만들 지혜를 주셨습니다.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 포기합니다.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놀라운 일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쉽게 포기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십시오. 에베소서 5장 24절은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변화를 받아>라고 말씀합니다. 심령은 생각이 머무는 자리입니다. 심령이 변화되면 생각도 변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생각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인생을 살 때, 교회를 섬길 때, 자녀를 키울 때, 사업을 할 때, 한 방향에서 막히면 다른 방향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21장을 보십시오. 제자들은 밤새도록 갈리리 호수에서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 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 그렇게 했더니 153마리의 고기가 잡혔습니다. 그렇습니다. 왼편에서 해결되지 않는 일이라면, 오른편에도 도전해 보아야 합니다. 왼 편에서 실패했을 때, 오른 편을 발견하는 지혜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아이디어, 새로운 방향을 보여주시길 기원합니다. 

성도님들 모두가 절망의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하십시오. 갈대 상자를 만드는 지혜와 열정을 가지시길 기원합니다. 다가오는 12월 6일 초대할 대상을 작정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주십시오. 해 보지도 않고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구역에서는 최선을 다해 기도하면서 힘써 주십시오. 정성껏 갈대상자를 만들어 소중한 영혼들을 담으시길 바랍니다. 

이제 마지막이면서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이들 부부는 갈대 상자에 아기를 띄워 두었습니다. 그리고 딸 미리암을 내 보내서 아기를 지켜보게 하였습니다. 4절을 보면 <그 누이가 어떻게 되는 것을 알려고 멀리 섰더니>라고 했습니다. 이제 가족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지켜보는 것뿐이었습니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습니다. 최선을 다했습니다. 석 달을 견디었고, 갈대상자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거기가 부모의 한계였습니다.

여러분, 한계상황 그 다음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라보는 것, 지켜보는 것>입니다. 미리암이 지켜볼 때 어떤 일이 있었나요? 바로의 딸 공주가 강에 나왔다가 아기를 발견했습니다. 아들을 죽이라고 명령한 사람의 딸에게 발각되었으니 최악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켜보는 자에게 주시는 은혜를 보십시오. 하나님은 공주의 마음을 감동시키셨습니다. 공주는 아기가 이스라엘람의 아기임을 알면서도 사랑하는 마음이 들어 자신의 아들로 키우게 되었습니다. 노예의 아들이 공주의 아들이 되었고, 누추한 움막집의 아기가 궁궐의 아기가 되었습니다. 죽을 위기에 처한 아기가 가장 안전한 피난처를 만났고, 교육을 받지 못해 무지에 방치되었을 아기가 최상의 교육을 받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게 바로 마지막에 할 가장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석 달을 버티셨습니까? 갈대 상자도 만드셨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육신의 눈으로는 갈대 상자를 바라보면서 영혼의 눈으로는 하나님을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이것이 <바라봄의 기도>입니다. <하나님, 이제는 우리 손에서 떠났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더 이상 어쩔 수 없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기대하면서 오직 하나님만 바라봅니다.> 힘이 미치지 못하는 한계선상에 설 때마다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가만히 바라보는 것>은 결코 무기력한 방법이 아닙니다. 그것은 가장 무능해 보이지만, 사실은 가장 강한 방법입니다.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바다 앞에 가로막혔을 때, 뒤에서 애굽 군대가 쫓아올 때, 백성들이 아우성을 치면서 하나님을 원망할 때, 모세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외쳤습니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할렐루야! 아마 모세는 후에 어머니 요게벳과 누이 미리암에게 들은 이야기, 자신이 갈대 상자에 눕혀져 있던 때를 생각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 때도 누이는 바라보기만 했었지. 그래도 하나님은 나를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하셨지. 하나님, 홍해 바다 앞에서 당신을 바라봅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 때처럼 우리를 도우소서>, 이것이 모세의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 후 어떻게 되었나요? 하나님은 홍해를 갈라 육지처럼 건너도록 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잠시 후 우리 모두 <주만 바라볼지라>라는 찬양을 부를 것입니다. 믿음으로 찬양하길 원합니다. 찬양의 가사처럼 사시길 기원합니다. 우리는 오늘 오후에 주님만 바라보면서 비전 센터 기공예배를 드릴 것입니다. 모두 참여해 주시길 바랍니다. 우리 개인도, 교회도 나일강의 절망에서 벗어나 갈대 상자를 거쳐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믿음의 승리를 거두게 되길 기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