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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절]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골 3: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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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골 3:15~17)
   

오늘은 우리 한국교회가 추수감사주일로 지키는 주일입니다.   우리가 감사생활을 귀한 것으로 알아야 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감사주일을 앞에 두고 성경에서 여러 많은 감사에 대한 본문을 찾아보았습니다.  구약 모세오경에서 절기를 지키라고 하시면서, 무교절, 오순절, 장막절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구약의 절기들은 추수와 관계가 있었습니다.  

첫째로 지킨 절기는 유월절과 무교절입니다.  무교절이란 누룩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빵을 먹는 절기였는데, 유월절에 이어 한 주간 계속해서 지켰습니다.  무교절은 가나안 땅에 정착하면서 봄철에 곡식을 추수하고 누룩을 넣지 않은 순수한 곡식만으로 감사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가나안 지역의 계절의 변화를 보면 가을의 추수보다 겨울의 우기를 거치고 봄에 곡식을 추수하는 것이 더 풍요하고 양적인 면에도 많은 곡식을 추수하였습니다.  

두 번째 지키는 큰 절기가 오순절인데, 칠칠절이라고 하며 맥추절이었습니다.  이 절기는 유월절 첫날부터 50일이 되는 날이라 하여 오순절이라고 했습니다.   이 날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은 날을 기념하여 “토라전수의 절기”라고도 불렀습니다.  유대인들은 맥추절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이 절기는 보리와 밀을 추수하고 감사하여 지킨 절기였습니다.  

세 번째 크게 지킨 절기는 수장절, 장막절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7월 티슈리월 15일부터 한 주간 수장절을 지켰습니다.   장막절-초막절은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초막을 치고 살았던 것을 기념하지만 일 년 동안 모든 곡식과 과일을 거두어들인 것을 기념하면서 지켰습니다.  가나안에는 우리의 9-10월에 포도, 대추야자, 올리브, 무화과를 거두어들이는데 모든 과일을 추수하고 지키는 절기가 수장절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지키는 3대 절기는 모두다 추수와 직접 관계가 있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지키는 추수감사절은 미국 동북부지역 교회가 추수감사절로 지키던 11월 세 번째 주일을 우리의 추수감사절로 받아들였습니다.  유대인들이 곡식을 추수하고, 또 과일을 수장하고 곧바로 드리는 그런 추수감사의 맛은 없습니다.  

어떤 학자는 한국의 추수감사절은 배추를 수확하고 드리는 감사절기가 되었다, 겨울을 나려는 동면준비 감사주일이 되었다고 꼬집기도 했습니다.  진정한 추수감사가 되려면 추수를 마치고 지키는 절기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 실정에 맥추감사절은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보리와 밀의 생산이 쌀농사의 3%에 불과하고, 밭은 논의 16%정도에 불과하기에 보리나 밀을 거두고 지키는 맥추감사절은 의미가 떨어진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한국의 실정으로 추수하고 지킬 수 있다면, 한 달만 앞 당겨서 10월 세 번째 주일이든지, 우리 고유한 명절인 추석을 지킨 다음 주일로 앞당기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도 많이 있습니다.  

감사라는 말은 참으로 듣기도 좋고, 말하기도 좋은 말입니다.   감사를 깊이 생각하면, 또 다른 감사한 마음이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두 종류의 감사가 있다고 합니다.   첫 번째 감사는 좋은 일, 좋은 결과로 인하여 드리는 기쁨의 감사가 있습니다.  너무나 만족하여 기쁜 마음, 감격스런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입니다.   두 번째의 감사는 눈물로 드리는 감사입니다.  고통 속에서도 눈물 흘리며 드리는 감사가 있습니다.  걱정과 염려가 그치지 않고 어려운 역경에서도 그동안 주님이 베풀어주신 은혜를 생각하며 드리는 성숙한 감사입니다.   이 눈물로 드리는 감사는 기쁨으로 드리는 감사보다 더 위대한 감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사를 말할 때에, 사전감사와 사후감사로 나눌 수도 있습니다.   사전 감사란 그야말로 어떤 일을 앞에 두고, 미리 드리는 감사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맡기고, 하나님이 능히 이루어주실 것을 믿고, 드리는 감사가 사전 감사입니다.   사후 감사라는 말은 어떤 일이 좋은 결과를 가져왔고, 사람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에 드리는 감사입니다.  사후감사도 좋지만, 미리 선불하듯이 사전에 감사하는 사람은 사후에도 감사하고, 감사로 일관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에게 감사해야 합니까? 물론 우리를 죄악에서 구원하여 주시고,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에게 감사 찬송을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온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의 실패와 가난과 역경까지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감사의 제물을 드려야겠습니다.  우리의 살아온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일뿐입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 만나고 대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어린 아이들은 누구에게 고맙다는 말을 잘 들어보지 못하고 자라납니다.  

저의 후배 목사님 중에 성식이란 이름을 가진 목사님이 있습니다.  그는 대기업에서 사회 생활하다가 늦게 목사가 되었는데, 그의 어릴 적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하루는 대고모님이 오셨는데, 어린 초등학생인 성식이에게 ‘고맙다’는 말씀을 아주 진지하게 하셨답니다.  “성식아 참 고맙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열심히 공부 잘 해서 고맙다.”, “부모님 말씀 잘 들어서 고맙다.” “건강하게 잘 크니 고맙다.”, “또 교회 잘 나가서 고맙다.”라고 했습니다.  

그 분은 “착하다”고 하지 않고 “고맙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대고모님은 교회의 권사님이셨는데, 그의 자녀들은 모두 다 내노라 하게 잘 되었다고 합니다.   사람 잘 되는 복이 그 집안에 임하여 모든 자녀들이 사회의 저명인사들이 되었습니다.   그 분은 당신의 자녀들에게도 언제나 “고맙다”고 하셨답니다.   ‘고맙다’는 말을 듣고 자란 자녀들은 고맙다는 말을 배웠습니다.   

그런 말을 듣고 자랄 때 계속해서 ‘고맙다’는 들을 수 있도록 성실하게 자랐습니다.  그들도 감사생활이 습관이 되었고, 그들의 인격을 형성하였고, 그들의 제2의 천성이 되었고, 또 그들의 운명을 결정지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들도 만나는 모든 사람, 대하는 모든 사람, 함께 일하는 모든 사람들, 알고 지내는 모든 사람들에게 고맙다, 감사하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좋은 인간관계가 형성되었고, 그 자녀들은 좋은 인격에 좋은 성품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시인이며 명지대학의 교수이신 신달자선생님은 많은 작품 활동으로 대한민국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시와시학상, 한국시인협회상, 영랑시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입니다.    그는 “감사가 능력이죠”라고 하는 말을 했습니다.   시인 신달자의 화려한 삶 뒤에 감추어진 처절한 고통의 날들이 있었습니다.  대학교수였던 남편이 결혼 후 9년 만에 뇌졸중으로 쓰러졌는데, 무려 24년간 병수발을 하고, 간호하면서 부인은 작품 활동을 해야 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시어머니마저 81세에 척추가 부러지는 낙상으로 9년 동안 움직이지를 못하고 누워있어 수발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동안에 자신은 유방암 수술을 받았고, 항암치료를 받아야 했습니다.  남편이 자살하려고 쥐약을 먹고 죽어가는 것을 살려내야 했습니다.  자괴감과 절망감에 빠진 남편은 자주 자주 부인을 때리는데 어떤 때는 팔이 부러지고 눈알이 터져 나온 적도 있었습니다. 온 몸은 멍으로 푸른 바다를 짊어지고 살았다고 합니다.  그는 인생이란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영원히 싸우고 사랑해야 할 것은 오직 인생뿐”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남편이 살아 있을 때에는 증오심도 억세게 끓어올랐고, 억장이 무너지는 순간도 수없이 겪었습니다.  
남편이 죽는 마지막 시간이 언제냐고 하나님께 물어보려다가 입을 닫은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남편이 숨을 거두는 날, 그는 시간을 멈추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 원수 같은 남편이 죽어갈 때에 신교수는 하나님 앞에서 죽어도 동의할 수 없다고 울었습니다.  

“나를 때려도 좋으니 살아만 있어요.”라고 절규하였습니다.  신교수는 말합니다.  “결혼은 옆에 있어주는 것이다.”  부부란 ‘우리’라는 말을 같이 사용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가 하루하루를 버티면서 살아온 능력은 “감사가 능력이었다.”고 술회하고 있습니다.  “살아있음을 감사하자.   나래도 건강하니 감당할 수 있지, 오늘을 감사하자.”고 감사하고 또 감사하였습니다.

그의 에세이 “나는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웠다”에서 이런 시를 쓰고 있습니다.  “아침에 창을 열었다. / 여보! 비가 와요/ 무심히 빗줄기를 보며 던지던 가벼운 말들이 그립다” 남편을 생각하며 그런 시를 쓰고 있습니다.  건강한 남편이 있는 것을 감사하는 부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24년간 고생만 시킨 남편인데, 그냥 살아만 있어달라고 애원하는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남성들은 부인이 있음을 감사하고, 또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 남자들은 아내가 있음으로 감사한 일도 더 많을 것입니다.  부모님이 계신 분은 감사하십시오. 기도의 든든한 후원자를 두셨기 때문입니다.   자식이 있는 이들은 감사하십시오.  그 자식들 때문에 얼마나 기뻐하였고, 좋아하였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우리 주변의 모든 분들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감사를 어렵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받은 것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이 감사입니다. 고마운 것을 고맙다고 해야 합니다. 그것이 감사입니다.  즉시로 감사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미루면 감사가 되지 않고, 억지가 됩니다.  지금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면서 누리는 모든 것은 사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지금 사는 집, 지금 나가는 직장, 지금 함께 살아가는 식구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의 삶의 태도가 삶의 고도를 결정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살려고 하시면 태도의 전환이 따라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만드시고, 자화자찬 같지만, “보시기에 좋았다”고 감탄하셨습니다.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땅과 바다를 보시면서 좋았습니다.  땅에 각종 나무와 채소와 열매 맺는 나무를 보시면서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낮이 되고 밤이 되고, 태양이 뜨고 달이 뜨는 것을 보시면서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처럼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좋게 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관점이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을 조금만 달리해도 우리 삶은 상당히 달라지는 것을 봅니다. 감사는 삶의 활력을 불어넣어주고 있습니다.  감사는 삶의 원천이 됩니다.  감사는 평범한 식탁일지라도 천국의 잔칫상으로 만들어 줍니다.  감사는 마음의 분노를 쉬게 해주고, 평화를 가져다줍니다.  감사하는 순간 하늘의 소망이 열리고 내일에 대한 희망으로 부풀어 오르게 합니다.

물을 연구했던 일본의 에모토 마사루는 “물은 알고 있다”는 책을 내었습니다.  물에도 눈처럼 결정체 있다고 하면서,  물에 베토벤의 전원 교향곡을 틀어주고 사진을 찍었더니  물의 결정이 맑고 아름답게 되었다고 합니다.  반대로 분노와 반항의 언어로 가득 찬 록 음악의 한 장르인 헤비메탈 곡을 틀어주니, 제멋대로 깨어진 형태를 띠었다고 합니다.  또 감사와 사랑이라는 말을 들려주면 물의 결정이 아름답지만, 욕설이나 불평, 비난 등의 언어를 들려주면 결정이 흩어지고 찌그러들었다고 합니다.  

하물며, 우리가 감사의 말을 들으면 우리의 영혼은 어떻게 변할 것입니까?   이 세상이 물 같은 물질도 좋은 모습, 아름다운 결정으로 변화된다고 하면, 우리의 영혼은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할 것입니까?    감사는 감사하는 사람과 감사하다는 말을 듣는 사람을 함께 변화시킵니다. 

「물은 알고 있다」는 책을 본 후에 한 목사님은 당신이 언제나 마시는 물병에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라는 글을 써 붙이고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물을 마시면서 하나님에게 감사하고, 물에게도 감사한 마음으로 마신다고 합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데, 행복한 사람은 없습니다.  행복이란 언제 감사하는 사람에만 머무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감사는 행복의 원천인 동시에 행복의 열매가 됩니다.  

우리 하나님이 가장 듣기 싫어하시는 말이 원망, 불평, 불만, 시기 질투 그런 말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피조물이 감사하면서 살아가기를 원하시지,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말한 대로 또  당신이 들으신 대로 그대로 이루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입술의 열매를 맺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에게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민14:27)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를 지나면서 원망을 입에 붙이고 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평을 입에 달고 다녔습니다.  그것이 노예들의 나쁜 습관이었습니다. 

애굽의 바로와 그 군대가 추격해오고, 넘실거리는 홍해바다가 가로막고 있을 때에, 모세를 향하여 달려들었습니다.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출14:11-12)고 했습니다. 

민수기 14:28에서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광야에서 죽는 것이 낫겠노라” 그것이 소원이라고 하면 그렇게 하라고 하십니다.  “너희가 사로잡히겠다고 말하던 너희의 유아들은 내가 인도하여 들이리니”(민14:31)라고 하십니다.

“축복받은 삶을 위한 5가지 습관”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하비스트 성서교회를 개척하여 대교회로 부흥시킨 제임스 맥도널드목사님이 쓴 책입니다. 그는 그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기를 당신이 아내와 함께 저녁 외출을 하고 돌아왔다고 가정해보라고 합니다.  늦은 밤입니다.  아이들이 잠자리에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방문을 열어보았는데 아이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집안의 모든 불은 꺼져 있습니다.   정신없이 아이들을 찾아다니는데, 지하실에서 어떤 소리가 들립니다.  살며시 지하실 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갑니다.  아이들이 지하실에 손전등 하나를 켜놓고 모여 앉아 이야기를 합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나 들어보았습니다.  “나는 아빠가 좋은 직장을 구하면 좋겠어.  아빠가 좀 게으른가 봐”  다른 아이가 입을 엽니다. “아빠가 우리 교회의 스미스 아저씨처럼 해주면 좋겠다.  우리 집에는 없는 것이 너무 많아”  또 다른 아이가 목청을 높입니다.    

“엄마 잔소리가 듣기 싫어. 학교에 가라. 방 좀 치워라 엄마는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이제부턴 엄마 말 안 들을래” 아이들의 불평은 끝날 줄 모릅니다.    이런 말을 여러분이 들었다고 하면 얼마나 상처를 받을 것입니까?   그토록 열심히 일하고 최선을 다했는데, 더 이상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화가 치밀어 오르게 될 것입니다.  “괘씸한 녀석들”이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이제 불완전한 부모의 입장을 벗어나 완전하신 하나님의 입장에서 여러분의 태도를 한번 되돌아보라고 합니다.  우리 하나님도 우리의 말하는 것, 앉고 서는 모든 것까지 다 듣고 알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앞에 감사하다는 말을 얼마나 하셨습니까?  

쇠안 키에르케고어는 덴마크가 낳은 세계적인 실존주의 철학자입니다.  44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사랑의 역사’, ‘죽음에 이르는 병’,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책들은 정말 유명한 가르침이 되었습니다.  그가 지은 책 중에는 “들의 백합화 공중의 새”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는 마6:24-34절까지의 말씀을 가지고 “들의 백합화 공중의 새”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는 들의 백합화를 통하여 침묵과 순종과 기쁨을 배웠다고 합니다.  그는 본문을 통하여 사람이라는 것에 만족하였고, 사람이라는 것이 얼마나 훌륭한 것인지를 배웠으며, 사람들에게 어떤 행복이 약속되어 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백합화를 내려다보면서 배우고, 공중의 새를 우러러보면서 또 배우라고 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내려다보며 그동안 받은 은혜에 감사하고,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나의 모든 삶은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세상의 괴로움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리지 말고 백합화를 바라보고, 세상의 역경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리지 말고 하늘을 나는 새를 바라보며 눈물을 말리라고 합니다.  지금도 마음 아파하면서 괴로워하시는 성도들이 있습니까?  우리의 전 삶을 하나님에게 맡기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속에서 살아야겠습니다. 

장신대를 함께 공부하고 나온 7목사의 부부가 30년을 넘게 모여 친교를 나누고 있습니다.   지난달에는 태릉에서 목회하는 목사님 댁에서 모였는데, 그 목사님이 오늘은 자기 말을 들어야 한다고 하도 우기기에 좋은 일이려니 하고 따랐습니다.  오늘은 자기 부인을 진심으로 칭찬해보자고 했습니다.   자기 부인을 칭찬하려고하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걱정이 앞섰습니다.    앞에서 그 목사님이 부인이 자식을 잘 길러주고 화를 내지 않아서 고맙다고 칭찬하였습니다.    

두 번째 저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칭찬할 것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일생 살면서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못한 것이었습니다.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을 따라와서 고생하고, 목회에 어려운 순간도 없지 않아 있었는데 묵묵히 곁에 있어주었고, 친구가 되어 준 것을 감사한다고 말하는데, 어찌나 눈물이 쏟아지는지 제가 눈물을 흘리며 칭찬하고 감사하다는 말을 하여 장난으로 하던 분위기가 아주 진지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목사님을 부인에게 절을 두 번이나 하면서 감사하였다고 하는 간증도 했습니다.    7분의 목사님들이 아주 진지하게 부인에게 감사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 날 사모님들이 입이 벌어졌습니다.  칭찬하고 감사하는 말은 부부사이를 더욱 사랑으로 뭉치게 하고, 성숙하게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후에 저의 가정은 정말 좋았습니다. 제가 울면서 감사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눈물은 한번만 나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감사의 옷을 입고 살아야 합니다.  오늘 사도바울은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골3:15)라고 하셨습니다.  ‘또한’이라는 말을 사용하신 것은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라고 하신 말을 전제하고 하는 말입니다.  평강이 우리의 마음을 주장하게 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우리 마음에 풍성이 거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야 다른 사람들을 지혜로 가르치고 권면할 수 있습니다.   사도는 우리에게 시와 찬송과 신령을 노래를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이 귀한 삶인데, 감사하는 마음으로 찬양하라고 하십니다.  감사가 아닌 노래자랑이 되거나, 실력을 뽐내는 노래라고 하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노래 실력을 보시지 않고, 음정 박자보다는 감사하는 마음을 기뻐 받으시고 있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감사의 생활을 계속하시면 마치 마일리지를 쌓아나가는 것처럼, 나중에 그 감사 마일리지를 유용하게 사용하는 날이 오게 될 것입니다.   감사는 성숙한 인격에서 나오는 것이요, 감사는 그의 천성을 만들어주고, 그의 운명을 결정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주님을 힘입어 살면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루만의 감사가 아닌 우리의 일생이 감사로 일기를 써나가듯이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감사란 하나님의 자녀들이 지녀야할 제일의 덕목입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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