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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간의 회심과 구원 (눅 1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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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회심과 구원 (눅 19:1~10)


구원파라는 단체가 있습니다. 이 단체는 저희 교단에 의해 이단으로 규정된 단체입니다. 
구원파의 특징은''나는 몇 년 몇 월 며칠 몇 시에 거듭났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런 말을 할 수 없다면 그 사람은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없다 이것이 구원파가 주장하는 것이고 이것이 우리가 그들을 이단이라고 규정하는 이유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도 부모가 내가 언제 태어났다고 말해주지 않으면 스스로 알 수 없는데 영적으로 거듭나는 것을 본인이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설령 안다고 해도 그것은 이후에 깨닫는 것이지 그 순간에 그것을 안다는 것은 무리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언제 엄마 뱃속에서 태어났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자기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의식하는 것처럼 사람이 영적으로 언제 거듭났는지는 알지 못하더라도 자기가 현재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있다는 것은 알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삭개오가 어느 시점에 거듭났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가 뽕나무 위에 올라가서 예수님을 바라보려고 했을 때 거듭났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어서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너의 집에 유하여야 하리라 라고 말씀하실 때 거듭났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에 찾아가셨을 때 거듭났습니까. 아니면 삭개오가 자기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약속했을 때 거듭났습니까. 아니면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예수님이 선포하실 때 거듭났습니까. 그것은 삭개오 자신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의 패키지에요. 그렇기 때문에 이 성경 구절이 말하는 것은 예수님 이 계시는 곳에 구원이 있고 예수님이 찾아오시면 구원이 찾아온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언제부터인가 교회 내에 구원의 확신이라는 단어가 회자되기 시작했는데 그리스도인이 자기 구원에 확신을 갖는 것은 유익한 것이고 필요한 것이지만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만 구원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구원을 받은 사람들 중에도 자기의 구원에 대해서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확신은 어디까지나 확신일 뿐이지 그 자체가 구원인 것은 아니에요. 

종교개혁자들이 모두다 구원의 확신에 대하여 가르친 것은 아닙니다. 마틴 루터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강조했지만 칼빈 같은 사람은 하나님의 예정과 하나님의 선택과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다보니까 인간의 역할, 자기 구원에 대한 인간의 역할은 제한돼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칼빈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두려움과 떨림으로 자기구원을 이루어 나가는 것뿐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이라는 개념을 널리 대중화시킨 것은 이십세기 복음주의의 영향입니다. 빌리 그레함 목사를 위시한 복음주의가 초청이라는 것, 결단이라는 것을 트레이드마크 화 했습니다. 초청은 설교가 끝난 다음에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사람을 앞으로 불러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영접기도를 시키는 것입니다. 얼마나 구원을 사람들이 받았느냐, 얼마나 성공적인 집회였느냐를 가늠하는 것은 몇 명이 앞에 나와서 영접기도를 했느냐에 좌우된다고 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복음주의의 장점과 단점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개인의 결정을 부각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행위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그 행위 이것을 통해서 구원에 이른다고 가르치는 것인데 이것은 장점이자 단점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에게 주도권을 준다는 그런 이점이 있지만 그러나 과연 사람의 결단이 얼마만큼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느냐는 불확실합니다. 왜냐하면 빌리 그레함 목사의 집회에서 초청에 응답한 사람들을 몇 년 후에 그들이 지속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를 연구해봤더니 지속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많지 않다는 조사 결과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예수님을 믿겠다고 앞에 나오는 사람이 반드시 제대로 회심했다는 보장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결국 사람이 정말로 회심했는지 정말로 구원을 받았는지를 아는 분은 하나님뿐입니다. 하나님만이 인간의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외적인 기준으로 사람이 정말 거듭났느냐 안 거듭났느냐를 100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한 가지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것은 열매를 통해서입니다. 나무는 열매를 통해서 알리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열매, 그 사람의 삶에 나타나는 긍정적인 변화의 증거를 보면 그것을 통해서 그 사람의 회심이 진정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마는 이것은 단기적인 것이 아니고 장기적인 것입니다. 열매는 장기간에 걸쳐서 맺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스턴트를 요구하는 이 시대에 인스턴트 구원 ․ 인스턴트 확신을 요구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역사를 하나님보다도 앞서려고 하는 것이고 성령보다도 앞서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바람이 부는 것은 느끼지만 어디서 부는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성령으로 거듭난 자도 이러하니라’ 성령의 역사에 대하여 우리가 그것을 경험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신비한 면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가 하나님의 역사가 될 수 있도록 하나님에게 권한을 드리고 하나님만이 결정하실 수 있는 공간을 인정해야지 그것을 사람이 다 검증하고 사람이 다 확인할 수 있어야 된다고 고집하는 것은 그것은 하나님의 영역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의 영역이 있고 하나님의 영역이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가 할 일을 하지만 하나님이 하실 일은 하나님이 하시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 교회를 부흥시키는 것, 또 말씀을 가르치는 것, 전도하는 것, 이것은 사람이 할 일이지만 사람을 거듭나게 하고 사람을 회심하게 하고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사람이 할 일이지만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것까지 사람이 좌지우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구원의 확신이 아니고 구원이에요. 구원. 중세 가톨릭교회가 타락했을 때 면죄부라는 것을 발행했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마틴 루터로 하여금 가톨릭교회에 반발하게 한 것이 바로 이 면죄부입니다. 면죄부가 뭐냐. 당시 가톨릭교회가 대성당을 짓는데 돈이 부족했기 때문에 기금을 모금하기 위한 방법으로써 성도들의 헌금을 유도하기 위하여 그들이 헌금을 하면 죄를 면하게 해준다는 면죄부를 발행한 것입니다. 거기까지는 여러분이 다 알고 계실 것입니다. 

면죄부가 대중에게 엄청난 인기를 끌었습니다. 왜 그랬을까. 우리는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 얄팍한 상술, 헌금을 거두기 위한 그 얄팍한 방법을 사람들이 알고 있었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호응한 이유가 무엇일까. 여기에서 인간의 종교성과 또 죽음 앞에서 선 인간의 두려움, 자신의 영혼의 상태에 대한 인간의 불안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면죄부가 그렇게 얄팍한 상술임에도 불구하고 돈을 내고 면죄부를 산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쉬운 방법으로 구원을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구원 문제처럼 사람들이 확실히 알기 어려운 면이 없습니다. 그것처럼 어려운 것이 없는데 교회에서 돈을 내고 이 면죄부를 사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니까 얼마나 쉽습니까. 그러니까 면죄부를 판 교회도 잘못이 있지만 그것을 산 사람들에게도 잘못이 있는 것입니다. 

사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파는 것입니다.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마약을 파는 사람이 있다면 사는 사람이 있다는 얘기에요. 아무도 안사면 팔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잘 팔린다는 얘기는 사는 사람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면죄부도 마찬가지에요. 교회가 타락하는 것을 반드시 어떤 지도자라든가 목회자의 잘못으로만 치부할 수 없습니다. 동조하는 사람들이 있고 또 거기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런 분위기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영적인 타락은 모두의 타락인 것이지 한 두 사람의 잘못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중세 가톨릭교회의 사건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이 무엇이냐. 결코 쉽지 않은 것을 쉽게 만들려고 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구원과 회심을 하나님이 만드신 것보다 더 쉽게 만들어서 가르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사람은 면죄부를 파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면죄부는 옛날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오늘날에도 그 모습은 다르지만 얼마든지 면죄부를 사람들에게 파는 사람들이 있고 사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구원은 면죄부가 아닙니다. 사죄와 면죄는 다릅니다. 사죄는 죄를 용서하는 것이지만 면죄는 죄를 면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죄의 벌을 면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영화 007 제임스 본드의 00이 뜻하는 것이 살인면허 숫자 아닙니까. 그래서 007이라는 말은 비밀 정보원으로서 살인할 권한을 부여받았다는 뜻인데 구원-license to sin 죄를 지을 수 있는 면허가 아니에요. 죄를 지어도 된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신다는 말은 죄를 지어도 된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십니다. 죄를 사하기 위하여 많은 대가를 지불하셨습니다. 그것을 거저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싸구려로 만들어도 된다는 얘기는 아니에요. 만일 오늘날 누가 복음을 가르치면서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아무리 죄를 지어도 용서받는다고 가르친다면 자칫하면 그것은 면죄부를 파는 것이 되고 맙니다. 제가 과거에 재벌 회장들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세례를 받고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별로 편치 않는 이유는 그들이 죽음 앞에서 구한 것이 정말로 구원이었을까 아니면 면죄부였을까 그것을 생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죽음이라는 현실 앞에서 면죄부를 거부할 사람은 드믑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들이 진정으로 회심하고 구원을 받았느냐? 그건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교회는 면죄부를 쉽게 팔려고 하면 안됩니다. 그건 교회의 사명이 아니에요. 그건 복음을 왜곡시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삭개오를 통해서 우리가 보고자 하는 것은 전형적인 회심과 구원의 사례입니다. 전형적인 회심과 구원의 사례가 여기 나타나고 있습니다. 

첫째로 볼 수 있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호기심입니다. 3절에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했다’고 했습니다. 뽕나무에 올라간 이유가 그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호기심이 있어야 됩니다. 기독교에 대한 관심이 있어야 됩니다. 그 자체가 구원은 아니에요.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를 더 쉽게 나타날 수 있게 합니다. 만약 관심이 없다면 도무지 관심이 없어요. 도무지 알고 싶어 하지 않아요. 그 사람은 아직도 갈 길이 멉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에 대한 호기심 그것이 시작입니다.

두 번째는 초청입니다. invitation. 보통 초청은 주인이 손님을 초청하는 것이지만 기독교에서는 손님이 주인을 초청합니다. 그래서 삭개오가 예수님에게 ‘우리 집에 오시옵소서.’라고 말한 게 아니고 예수님이 삭개오에게 ‘삭개오야 오늘 내가 너의 집에 유하여야 하리라’하고 예수님이 당신을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진리에요. 사람이 예수님 오시옵소서 해서 오시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오고자 하시기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내가 너의 집에 갈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시는 것입니다. 

세 번째 단계가 영접입니다. 예수님이 당신을 초청하시는 결과입니다. 그런데 이미 이 단계에 이르렀을 때 천국의 기쁨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6절을 보면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벌써 영접하는 단계에 천국의 기쁨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벌써 구원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에요. 

네 번째로 삭개오의 진정한 회개가 따릅니다. 그가 말하기를 ‘주여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회개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잘못한 것에 대해서 대가를 지불할 용의가 있는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께 지은 죄가 있고 사람에게 지은 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지은 죄도 회개해야 되지만 사람에게 지은 죄도 회개해야 되는데 사람에게 지은 죄는 사람에게 회개해야 됩니다.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사람에게 지은 죄는 사람에게 회개해야 됩니다. 식개오는 부자가 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었습니다. 이제 그가 예수님을 영접한 다음에 ‘내가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자기의 피해자에게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용서를 구하겠다는 얘기입니다. 

다섯 번째로 그제야 주님의 구원의 선포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구원의 선포. 아마 여러분 중에 ‘그렇다면 정확히 어느 순간에 삭개오가 구원을 받았습니까?’ 이렇게 물어보시는 분이 계시다면 그런 질문은 하지 마세요. 순간을 따지려고 하지 말고 전체를 봐야 됩니다. 구원은 이러한 단계를 거쳐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아기가 태어날 때 엄마 뱃속에서 머리만 나와도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머리만 나왔을 때 아, 이제 됐다 하고 가지 않습니다. 몸이 다 나와야지요. 마찬가지로 우리의 구원도 단계적인데 부분적인 구원으로 만족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어느 장교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 장교가 작전 중에 여자 베트콩을 생포했습니다. 그녀는 배에 총상을 입고 출혈을 하고 있었어요. 그 베트콩이 주머니에서 자기 어린 딸의 사진을 꺼내서 보여주면서 소대장에게 자기를 제발 놔달라고 애원하더랍니다. 

그런데 작전 중에 생포한 베트콩을 놔주면 우리 군대의 위치가 노출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했답니다. 그래서 물에 소화제를 타서 그 여자에게 먹였는데 출혈과다로 결국 사망했습니다. 그 소대장은 마음이 좀 찜찜했지만 어떡케 할 수가 없었어요. 이제 세월이 지나서 그 장교가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꿈에 자꾸 그 여자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너무 마음이 괴로워서 친구 목사님을 찾아가서 의논했더니 그 목사님이 말씀하시기를 첫째로 회개해라. 

둘째로 그 여자의 딸과 비슷한 나이의 베트남 여자 아이를 네가 앞으로 도와줘라. 그래서 이 사람이 딸은 찾을 수 없지만 수소문을 해서 비슷한 나이의 베트남 여자 아이를 매달 얼마씩 돈을 보내주기 시작했는데 그랬더니 더 이상 그 여자가 꿈에 나타나지 않더라고 합니다. 전설의 고향이 따로 없어요. 

제가 그 얘기를 곰곰이 생각하면서 느끼는 것은 우리 조상들도 회개의 원리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오히려 예수 안믿는 사람들이 회개라는 것을 더 이해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그냥 하나님에게 회개만 하면 되는 줄 알지만 그러나 우리 조상들은 내가 누구에게 잘못한 것이 있으면 그 사람에게 용서를 구해야 될 필요성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할 수 있는 분을 몰랐던 것뿐입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대제사장이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대언자이시고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대언하십니다. 우리를 대표하십니다. 그 목적으로 예수님이 사람이 돼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사람들을 대신하기 위하여.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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