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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창 3: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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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창 3:7~15)


하나님이 만드셨던 아름다운 창조질서는 이러했습니다. 위로 하나님을 모시고 아래로는 자연만물을 다스리며 수평적으로는 이웃과 한 몸처럼 지내는 평화로운 삶이었습니다. 이 때의 우리 자의식은 부모님의 보호를 받던 어린아이처럼 마냥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죄가 들어왔습니다. 죄가 들어온 결과 어떻게 되었나? 이 모든 관계들이 깨어지기 시작합니다. 먼저 눈이 밝아져 ‘나’라는 의식이 생기는 자아의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낯이 두려워 피하는 하나님과의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세 번째는 가장 가까운 이웃에게 핑계를 대고 서로 다투게 되어 이웃과의 관계도 깨어졌습니다. 네 번째는 우리가 다스려야 할 자연 만물이 저주를 받고 인간을 대적하는 일들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모든 죄의 결과는 이처럼 분열과 분리입니다. 타락한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이 분열들을 온 몸으로 경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바로 이런 분열과 분리들을 없애고 하나가 되도록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내 자아가 회복되어 어린아이처럼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아버지라 부릅니다. 이웃과의 관계도 회복되어 서로 사랑하는 법을 알게 됩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을 통해서 만물 위에 평화가 깃들고 제 질서를 찾아갑니다.

자기 자리를 벗어난 아담을 향하여 하나님은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우리가 서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 입니까? 내가 누려야 할 행복이 무엇입니까? 이는 책망의 소리가 아니라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도록 촉구하는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이 관계의 회복의 은혜를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눈이 밝아 벗을 줄을 알고(7)

먼저는 우리 자의식의 분리입니다. 7절에 “눈이 밝아 벗은 줄을 알고”라 합니다. 전에는 자기의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벗은 채로 있었지만 부끄러운 줄을 몰랐습니다. 죄를 저지르는 순간 인간의 천진무구한 마음이 분열되기 시작합니다. 어린아이들이 그렇습니다. 어린아이들은 벗고도 부끄러운 줄을 모릅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자의식이 생기면 자기를 감추기 시작합니다. 전에는 부모와 형제가 한 몸이었지만 이제 불편해지기 시작합니다. 자기만의 방을 갖기를 원합니다. 이런 성장은 독립과 발전을 위해서는 좋지만 그에 대한 대가도 만만치 않습니다. 염려와 두려움이 생깁니다. 혼자라는 외로움도 견뎌야 합니다. 내 스스로 모든 것을 결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많아지는 것이 ‘I’ 곧 ‘나’라는 단어입니다. 3장 10절을 보십시오.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이 부분은 한글 성경보다는 영어 성경이 보다 뚜렷합니다. ‘내가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내가 두려워하여’ ‘내가 숨었나이다’ 하여 네 번의 'I'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나’라는 말이 많아질수록 근심염려도 많아집니다. 내가 내 인생을 책임져야 하고, 내 스스로를 내가 방어해야 합니다. 이 ‘나’는 또한 내 말도 듣지 않습니다. 마음은 오른 쪽이지만 몸은 왼쪽으로 갑니다. 나는 행복을 원하지만 상황은 자꾸 불행하게 전개 됩니다. 내 인생을 내가 콘트롤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서투른 운전자로서 우리 인생이라는 운전대를 잡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분열의 고통에 대해 이렇게 외쳤습니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2-24) 

이렇게 된 가장 큰 원인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나라는 자아가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나’ 란 존재가 살아 있을 때는 갈등과 근심과 두려움 외로움 무기력이 가득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은 바로 이 ‘나’를 잊고 그 마음을 ‘하나님’으로 채우는 일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고백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나’는 죽었습니다. 이제 내 안에 사는 것은 ‘예수’입니다. 내 의는 죽고 예수님의 의로움으로 삽니다. 내 생각은 죽고 하나님의 뜻으로 삽니다. 나의 무능력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능력으로 삽니다. 내 안에 있는 저주와 한계 대신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랑과 행복으로 삽니다.

여러분 다툼이 왜 나겠습니까? 자기가 죽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고전 <장자> 편에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사공이 배로 강을 건너고 있었습니다. 이 때 빈 배가 와서 부딪히면 비록 성급한 사람이라도 화를 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배에 사람이 타고 있다면 사람이 화를 내면서 비키라고 합니다. 여러 번 말해 듣지 않으면 자칫 큰 싸움으로 번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이전에는 화내지 않고 지금은 화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름 아니라 이전에는 빈 배였고 지금은 사람이 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장자는 이 예화를 들며 다음과 같은 교훈을 줍니다. “사람이 모두 자기를 비우고 인생의 강을 흘러간다면 누가 그를 해칠 수 있겠는가?”

동양에서는 마음을 비우라고 하지만 성경에서는 대신 예수로 채우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채울 때 우리는 다툼도 없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산상수훈에서 주님은 사람들을 향하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마6:25)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공중의 새는 심지도 거두지도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않지만 굶지 않고 다 잘 자란다. 들에 백합화는 수고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지만 솔로몬의 모든 영화로도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다고 하였습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여러 이유가 있지만 백합화나 새는 자의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루 분 양식만 있으면 만족합니다. 그런데 자의식이 있는 인간은 이 때문에 만물의 영장이 되었지만 그와 더불어 근심과 염려라는 고통이 수반됩니다. 1년치 양식을 쌓아놓고도 두려워합니다. 오늘 하루 잘 먹고 잘살았으면 행복해야 할 텐데 내일의 염려 때문에 우거지상입니다. 심각한 얼굴의 어린아이들이 있습니까? 있더라도 잠깐 울고 맙니다. 왜 그렇습니까? 부모를 믿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이 ‘I’ 라는 ‘나’가 줄고 ‘주님’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내 안에 주님의 마음이 있고 주님의 생각이 많아질수록 근심과 염려는 사라집니다. 주님은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18:3)고 말씀합니다. 어린아이와 같다는 말은 여러 의미가 있지만 저는 그 마음이 타락 이전의 아담처럼 어린아이와 같은 순진무구한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일전에 ‘더 바이블’이란 성경 영화 시리즈 중 예수님의 생애를 그린 ‘지저스’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이 영화는 2002년도(?)에 에미상과 아카데미 상을 수상한 작품성이 뛰어난 영화입니다. 이 영화가 인상적이었던 것은 예수님의 생애를 그린 이전 영화들과는 달리예수님을 근엄하고 거룩하게 그리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을 마치 어린아이처럼 기뻐하고 뛰놀고 제자들과 장난치는 분으로 묘사합니다. 저는 예수님에 대한 뛰어난 해석이라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실제 이러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마음이 ‘나’가 아니라 ‘하나님’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들이 부모를 믿듯이 온전히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믿는데 무슨 염려가 있었겠습니까? 우리 또한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회복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과 온 우주와 하나 된 마음을 품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8)

두 번째는 하나님과의 분리입니다. 8절 말씀에 보면 동산에 거니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하와가 두려워하여 숨습니다. 전에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지냈습니다.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새를 지으시고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아담은 그 앞에서 그 짐승들의 이름을 지어주며 자랑스러워하기도 하였습니다. 아마 8절에서 언급했던 이 서늘한 시간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 함께 규칙적으로 산책을 나가던 그 시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과 함께 단란한 생활을 하던 에덴의 가정이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산산이 조각났습니다. 신이나 거룩한 존재 앞에서 느끼는 두려움은 인간의 죄의식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은 물로 씻거나 동물로 희생제물을 삼지 않고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을 때 이 물음은 인간을 심판하시기 위한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구원을 주시기 위한 질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인간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이 질문을 통해 인간이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고, 왜 잘못되었는지 깨닫도록 하려는 뜻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렇게 물었을 때 인간은 오히려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달아나고 책임을 다른 것에 전가시키려만 합니다. 

아담은 12절에서 이렇게 핑계를 댑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핑계가 교묘하지요. 자기 잘못을 고백하기보다는 저 여자 때문에 그렇고 그 여자를 주신 하나님도 책임이 있다는 태도입니다. 이 여자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라고 행복해 하던 여인입니다. 우리는 잘 된 것은 자기 탓이고 잘 못되면 다른 사람이나 환경 탓으로 돌리기 쉽습니다.

까뮈가 쓴 <이방인>에서 주인공 뫼르소가 해변에서 사람을 죽입니다. 재판정에 서게 된 이 사람에게 사람을 죽인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으니 그는 단지 ‘햇볕이 따가웠기’ 때문이라 답합니다. 의미도 없고 권태로운 현대인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하였든 자기 잘못은 없고 태양 탓을 합니다. 책임 회피는 계속됩니다. 여자는 13절에서 뱀에게 책임을 전가합니다.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뱀의 말은 없지만 뱀이라고 할 말이 없었겠습니까? 아마 뱀은 당신이 방치해둔 사단이 내게 인간을 유혹하도록 사주를 했다고 할 것입니다. 사단 또한 핑계를 댈 것입니다. 당신이 나를 불행하게 만들어서 복수한 것이며 모든 책임은 하나님 당신에게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 책임을 전가하면 우리 문제가 해결되고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가? 아닙니다. 그러면 더욱 원망만 생기고 문제도 풀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자기책임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문제의 출발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을 때 “예 제가 잘못했습니다. 예 제가 죄를 저질렀습니다.” 하고 답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물론 죄에 대한 대가는 받아야 하겠지만 문제는 바로 여기서부터 풀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이 엉망이 되고 꼬인 이유를 부모나 환경 탓만 하면 풀 수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을 책임지고 받아들이려는 자세를 가질 때 비로소 변화는 거기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예수님 앞에 나아왔던 사람들은 죄의 책임을 전가했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자기 잘못을 인정했을 때 그들에게는 자유함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 전에 나아와 기도했던 세리의 기도를 들어보십시오. 

누가복음 18장 13절입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자기 죄를 인정하는 겸손한 기도를 드렸을 때 세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하심을 얻고 돌아갔습니다. 자기 책임을 인정한다고 할 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다 떠맡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주님이 계십니다. 무거운 우리 책임을 인정할 때 비로소 우리는 그 짐을 주님께 내어 놓을 수 있습니다. 내 짐도 아니라면 어떻게 주님께 내어놓겠습니까? “제 인생이 이렇게 힘듭니다. 제 책임입니다. 하나님께서 제가 허락하신 운명입니다. 그러나 제가 감당하기는 너무 어렵습니다. 주님 저를 도와 주십시오.” 이렇게 진실된 고백을 하며 주님의 도움을 요청할 때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우리 짐을 대신 짊어지실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5절을 원시복음이라고 부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이것은 장차 인간을 구원하러 오실 메시야에 대한 예언입니다. 사단은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의 발꿈치, 곧 그 육신의 생명을 상하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단이 가지고 있던 죄와 사망의 권세를 파하심으로 우리 인생을 구원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이라는 희망이 있습니다. 예수님이라는 든든한 의지처가 있습니다. 이 예수님을 의지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인생의 안식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가(12)

세 번째는 이웃과의 분리입니다. 전에는 한 몸이었지만 이제는 같이 살던 여자가 남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나뭇잎으로 부끄러운 부분을 감춥니다. 사랑하면 하나가 되지만 돌아서면 타인입니다. 12절에서는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하여 선악과를 먹게 된 책임이 여자에게 있다고 책임을 전가합니다. 

16절에서는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여 가부장제 사회의 출현과 남녀의 치열한 권력다툼을 예고합니다. 에덴에서 쫓겨난 이후 두 아들 가인과 아벨을 낳았지만 가인은 아벨을 죽이는 형제살해를 하고 맙니다. 하나님이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창4:9) 가인이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하고 오히려 반문을 합니다. 인간은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적 존재로 부르셨는데 그 하나됨이 깨어졌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원수가 되어버렸습니다. 우리 옆에 있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습니까? 내 경쟁자 아닙니까? 옆에 사람이 잘못되어야 내가 성공하지 않습니까? 곁에 있는 사람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고 내가 밟고 가야할 사물로 전락했습니다.

예수님은 분리된 이웃과의 관계를 회복하러 오셨습니다. 기독교의 가장 큰 계명은 사랑입니다. 특히 이웃사랑입니다. 예수님이 인간이 되시고 십자가에서 자기 몸을 내어주신 이유도 바로 이 사랑 때문입니다. 인간이라는 이웃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십자가로서 당시 원수 되었던 사람들을 하나로 만드셨습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을 하나로 만드셨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로 만드셨습니다. 주인과 노예를 하나로 만드셨고 남자와 여자를 하나로 만드셨고, 갈등하고 원수되었던 자들을 하나로 만드셨습니다. 에베소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엡2:13-15)

우리는 이제 주님처럼 평화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5:9) 막힌 담을 허는 것이 바로 주님의 역사이고 주님의 제자된 자들의 사명입니다. 우리는 갈등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희생하고 조정하는 자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웃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서는 우리는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는 수직선과 수평선으로 이루어집니다. 수직선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의미하고 수평선은 이웃과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이 두 선 중 하나가 빠져도 십자가를 이룰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웃사랑과 너무도 가까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 40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헐벗고 굶주리고 병들고 옥에 갇힌 자를 돌아보는 것은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현재 삶 곳곳에는 원죄의 결과 주어진 분열과 갈등이 우리 사회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이곳에 평화를 이루고 하나님의 사랑을 행하여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주님을 믿는 우리들이 해야 할 일들입니다. 지난 번 서해 NLL상에서는 남북 함정 간의 교전이 있었습니다. 남북한의 갈등은 항상 이런 긴장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가 먼저 침범했고 누가 이겼는가를 따지기 전에 우리는 한 형제입니다. 무려 5천발 가까운 총탄을 쏟아 붓고 우리가 승리했다고 하기에는 그 뒷맛이 씁쓸합니다. 남북간에 평화가 있기를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민족은 원죄의 아픔을 가장 뼈저리게 체험하고 있는 민족입니다. 서로 사랑하지 못사는 우리는 죄인들입니다. 남한은 지금 쌀이 넘쳐 나고 있습니다. 내년까지 쌀 재고가 1천만 섬을 넘어갈 것이라 예상하고 그 보관비로만 무려 4천 7백억이 든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쌀 피자에 쌀 막걸리에 쌀 소비를 촉진하는 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반면에 북한은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리고 있습니다. 

지난 번 세계보건기구 통계를 보니 북한 주민의 3분의 1이 기아선상에 있다고 합니다. 금년도에는 냉해와 가뭄 때문에 80년 만에 흉작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기근 이 갈수록 더 심해 질 것입니다. 60세 이상의 노인들은 “시집, 장가를 간 아들이나 딸들이 식량이 없어 고생하는 것을 보면서 오래 살면 무엇하겠는가? 자식들이 고생하는 것을 보기보다 차라리 편안하게 죽는 것이 좋겠다”라는 말들을 한다고 합니다. 세끼 먹는 사람은 드물고 세끼를 배추를 섞은 죽으로 연명하는 가구도 많습니다. 북한의 산모들이 일반 병원을 가지 않는데 그 이유는 태반 때문이라고 합니다. 병원에서 아이를 낳으면 태반을 뺏어가지만 집에서 나으면 이 태반을 먹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유일한 단백질 공급원이기 때문입니다. 끔찍한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 모습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도와주고 싶어도 북한이 핵을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에 도와줄 수 없다고 합니다. 북한 지도자들은 핵을 포기하면 정권이 위태롭기 때문에 확실한 보장이 주어지지 않는 이상 핵을 포기할 수 없다고 합니다. 우리 국민들은 우리만 잘 살면 되었지 북한은 다른 나라야 우리 살기도 바쁜데 신경 쓸 이유가 어디 있어 합니다. 결국 이 과정에서 죽어나가는 것은 북한 주민들입니다. 다 나름대로 핑계를 대지만 하늘나라에 계시는 하나님께서는 이 모습에 대해 누구 책임이라 할까요? 남북한 누구든 굶주린 북한 주민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죄의 결과입니다. 이것을 극복하고 이웃과의 관계를 회복하도록 예수님은 오셨고 이 평화와 사랑을 실천하도록 우리 신앙인들은 부르셨습니다.

더욱 저주를 받아(14)

네 번째는 자연과의 분리입니다. 13절에서 여자는 피조물인 뱀에게 핑계를 댑니다. 뱀은 저주를 받게 되어 평생 배로 기고 흙을 먹어야 하는 운명이 됩니다. 18절에서는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타락 전에 자연은 인간에게 순종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땅은 인간을 거부하여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만들어냅니다. 이것은 오히려 작은 일입니다. 지진과 해일과 가뭄과 홍수와 모진 재앙으로 인간을 괴롭게 합니다. 반대로 인간은 땅을 정복하고 자연을 남용하거 환경을 오염시킵니다. 이럴수록 자연은 이상고온과 집중폭우 지진과 해일로 인간을 더 공격합니다. 

주님은 이런 자연과의 관계의 회복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로마서에서는 피조물의 탄식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장 19절에서 22절입니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피조물이 썩어짐의 종노릇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썩어짐의 종노룻이 무엇입니까? 인간을 대항하여 지진과 가뭄 홍수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못된 바이러스나 병균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동물과 동물이 서로 대적하여 싸우고 잡아먹는 현실입니다.

이사야서에서는 메시야가 임하면 우리에게 주어질 낙원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이사야 11장 6절에서 9절입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곳에서는 더 이상 상함도 해됨도 없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구원은 이처럼 궁극적으로 자연 만물과 인간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데까지 이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자연만물을 잘 관리하고 환경을 잘 보호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자연에 해를 끼치면 자연이 우리에게 보복을 가합니다. 지금 우리가 전세계적으로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이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 아닙니까? 자연에 오염된 공기를 주니까 자연도 인간에게 이상 기온과 기후로 보복을 합니다. 그런 점에서 4대강에 보를 설치하고 자전거 길을 내겠다는 정부의 정책은 재고를 해야 합니다. 물은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해야 합니다. 막으면 썩게 되어 있습니다. 개발과 경기 부양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을 훼손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한 해의 결실을 하나님께 드리며 감사하는 시간입니다. 여러 일들에서 복을 주시고 또 물질적인 축복이나 건강 사업이나 직장 진로에 복을 주신 것에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 주신 복, 곧 내가 얼마나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하나가 되었나? 내 자신의 탐욕과 책임감에서 벗어나 내 안에 예수님을 모심으로 얼마나 더 자유롭게 되었나? 또 금년 한 해 얼마나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었고 평화의 열매를 맺었나? 자연을 어떻게 보호하고 또 자연이 주는 혜택과 아름다움을 맛보았나? 하는 이런 열매들이얼마나 되는지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이런 회복의 열매들에 감사를 드리고 부족했으면 내년 한 해 이런 열매들로 가득하기를 하나님께 간구하는 귀한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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