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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지막을 쓰는 지혜 (갈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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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을 쓰는 지혜 (갈 11:8)

 
내 용 

11월 감사의 달을 맞이해서 물질 관계 설교를 계속 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물질적으로 매우 빈곤해진 한 여인의 삶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구약에 나타난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왕으로 선택된 많은 사람 가운데서 가장 악하게 평가를 받는 사람이 아합입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이 아합은 이웃 나라 바알 숭배국인 시돈 나라의 왕 엣바알의 딸인 이세벨을 왕비로 맞이한 데서부터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온 나라에서 하나님 믿는 것을 핍박하고 바알 신당을 건축하고 철저하게 바알 종교를 나라에 퍼뜨렸습니다. 

왕가에서 그렇게 하니까 백성들이 왕을 따르지 아니할 때 수없이 많은 불이익을 당하게 됨으로 온 나라에 여호와를 섬기는 정신문화가 완전히 흐려지는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이 문제가 얼마나 심각했느냐 하면 하나님이 바알과 전쟁하시는 그런 기록으로 성경에 나와서 바알을 때려 부수느냐 아니면 여호와의 신앙이 무너지느냐 이런 심각한 이야기가 열왕기상에 계속 나오는 겁니다. 

바알 세력이 그렇게 힘이 있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이 바알 종교를 상징하는 목상을 깎아서 세우는데 그것을 아세라 목상이라고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이 아세라 목상은 여인의 나체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갖다 세우고 맞은편에 남성의 성기를 나무로 깎아 세워서 기독교 신자들이 십자가를 믿음의 상징으로 바라보는 것과 똑같은 의미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젊은이들에게는 이것이 굉장한 매력이 있습니다. 아세라 목상이 의미하듯이 예배의 한 부분이 남녀의 성 교환이 예배 의식이 되기 때문에 웬만한 젊은이들은 거기 안 빠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종교에 힘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은 잘못 흘러가는 역사를 바로 잡기 위해서 일을 시작하시는데 엘리야라고 하는 하나님의 종 한 사람을 선택하셔서 그의 손을 잡고 망가진 역사를 새롭게 세워 가셨습니다. 엘리야가 왕 앞에 가서 말했습니다. 

“당신이 이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와 재앙이 이 나라에 임하게 될 것인데 굶어 죽게 될 것이다.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아니해서 흉년과 기근 재앙이 이 나라를 덮게 될 것이다.” 그랬더니 그대로 되어졌습니다. 온 나라가 다 굶어죽는 어려운 문제가 생겼는데 그 흉년과 기근 속에 엘리야 자신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예언한 엘리야 자신도 이제는 먹을 것이 없어 함께 굶어 죽게 되는 괴로움이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엘리야를 살리기 위해서 “아직 물이 흐르고 있는 그릿 시냇가에 가서 있으라.” 그곳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먹을 것이 없는데 까마귀가 먹을 것을 물어다 주어서 그것을 먹고 살았다는 기록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가서 그릿 시내도 물 한 방울 없이 다 말라버렸습니다. 

그래서 이제 엘리야도 더 이상 살아남기 힘이든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오늘 말씀이 들려진 것입니다. 8절에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유하라. 내가 그곳 과부에게 명하여 너를 공궤하게 하였느니라.” 이렇게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이런 말은 전해들은 엘리야는 희망이 생겼습니다. 

‘아!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실 때가 있었구나. 시돈 땅의 사르밧 과부의 집은 아마 기근이 다 끝날 때까지 충분히 나를 책임질 수 있을 만한 부유한 가정일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그 집으로 안전하게 보내실 것이다.’ 누가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도 이 사건을 언급하고 계신 것이 나옵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예수님도 열왕기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셔서 설교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주신 집을 찾아 엘리야는 희망의 노래를 부르면서 갔습니다. 가서 보니까 거기는 더 절망적인 형편이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본문에 그 여인의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라는 곳에 가서 보니까 “어느 구차스러운 여인이 다 죽어가는 불쌍한 모습으로 나뭇가지를 줍는지라.” 엘리야가 하나님이 어째든 보냈으니까 사막에서 너무 배도 고프고 목도 말라 여인에게 요청했습니다. “물과 떡 한 조각을 나에게 주시오.” 그 여인이 대답했습니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습니다. 거짓말 아닙니다. 감춰두고 하는 말 아닙니다. 정말입니다. 우리 집에는 밀가루 한 움큼, 병 밑바닥에 기름 조금 남았습니다. 이것이 내 소유의 전부입니다. 내가 지금 이렇게 나뭇가지를 줍는 것은 이것을 가지고 가서 내 아들과 그것을 가지고 마지막 식사를 만들어 먹고 죽으려고 합니다.” 

아마 이때 엘리야는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이 하나님의 종을 보내시려면 먹을 거라도 넉넉한 집안으로 보내실 것이지 이런 사람에게 나를 보내신단 말인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무슨 이 모양인가?’ 이렇게 상식적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흉년 심판은 이제 시작을 해서 아직도 몇 년이 남았는데 오늘 저녁 한 끼 먹을 양식 밖에 없는 이 집으로, 그것도 남편도 없이 아들 하나 데리고 불쌍하게 살고 있는 여인의 집으로 나를 가서 살라니 이게 무슨 뜻인가?’ 

그러면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종 엘리야는 그 불쌍한 여인에게 뭐라고 말해야 되겠습니까? “아, 그렇군요. 자매님! 제가 몰랐습니다. 미안합니다. 그러면 어서 가셔서 그 배고픈 아들에게 마지막 한 끼라도 따뜻한 빵을 만들어 먹이시고 그 후를 기다려 보십시오. 조금 전에 제가 모르고 요청한 떡 한 조각 달라는 것은 취소하겠습니다. 모르고 한 말입니다. 제 걱정 마시고 어서 가십시오. 그리고 나중 문제는 하나님께 맡겨보십시오. 제가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기도드리겠습니다.” 

이렇게 해야 인격적인 답변이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오늘 말씀은 엘리야가 그 불쌍한 여인에게 명령하듯 말을 합니다. “가서 네 말대로 하라. 그러나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아니, 지금 떡을 만들 수 있는 재료는 한 움큼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한 사람의 한 끼 식량도 절반이 모자란 그런 상태인데 무엇을 먼저 만들고 나중에 만들어 먹을 게 어디 있다고 이런 말을 하는 겁니까? 

더구나 이 여인의 입장에서 보면 엘리야라는 사람은 생전 처음 만나는 사람입니다. 그에게 아무 의무가 없는 사람입니다. 아마 이 여인의 입장에서 상식적 판단을 한다면 ‘원 세상에 죽을 때가 되니까 별 사람을 다 만나는구먼! 이런 사람을 내가 만나가지고…. 생판 한 번도 보지 못한 웬 남자가 불쑥 나타나서 남편이나 되는 것처럼 “내가 배고프니까 내 것 먼저 만들어오고 너희들은 나중에 만들어 먹어라.”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이런 이야기가 구차스럽게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에 초점을 우리가 맞추어야 합니다. 보통 이 사건은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보호하려는 그런 뜻에서 하셨다는 해석들을 합니다. 저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뜻이 있습니다. 이 여인과 아들, 그리고 시돈 백성들을 살리기 위하여 하나님이 원수의 땅인 시돈 땅으로 엘리야를 보내고 계시는 것입니다. 먼저 이 여인은 누구인가? 엘리야와 국적이 다른 시돈의 여인입니다. 엘리야의 마음에 움직일 수 없는 고정관념이 있습니다. 

시돈 사람을 미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우리나라는 시돈에서 이세벨 왕비가 오면서부터 바알 종교가 온통 나라를 뒤집어엎어 정신문화가 다 망가졌고 하나님을 믿는 고상한 아브라함의 후손의 정서는 다 사라졌고 이로 인하여 이 땅이 이렇게 굶어죽는 하나님의 재앙과 심판이 임한 것이니까 원인은 시돈이다. 이세벨 왕비로부터 이런 일이 벌어졌다.’ 

그래서 어떻게 하지요? 종교 전쟁을 벌입니다. “그러면 너희가 믿는 바알이 참 신인지 내가 믿는 여호와가 참 신인지 우리 내기를 하자. 이 내기에서 승자는 살고 패자는 죽도록 하자.” 그래서 갈멜산에서 바알 지도자 450명을 처참하게 다 죽여 버리잖아요? 지금 엘리야의 마음속에는 다 죽여 버려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시돈이라는 곳은 아예 뿌리부터, 근원부터 없애버려야지 이곳을 그냥 두었다가는 영영 우리나라는 하나님의 재앙과 심판이 끊어지지 않는다. 원인을 제공한 이들을 다 죽여 없애버리자.’ 이런 생각이 엘리야에게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이 사람을 시돈으로 보냈는가? 하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은 바알 종교이지 시돈 백성이 아닙니다. 그 사람들도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엘리야의 마음을 그대로 내버려 둔다면 틀림없이 민족 감정을 위한 종교 전쟁이 끝없이 일어나서 시돈은 피바다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지금 엘리야는 450명 바알 지도자를 다 죽여 버렸잖아요? 그래서 엘리야를 교육시키는 겁니다. 적어도 시돈에 가서 3년 이상 살게 하셨습니다. 

또, 이 집에서 얻어먹고 살게 하셨습니다. 원수 같은 국민일지라도 시돈에 혼자 사는 여인 집에서 3년이나 봉사를 받고 얻어먹었으니 시돈 사람을 미워할 수가 있겠습니까? 생각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아!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은 이렇게 불쌍한 시돈의 백성이 아니라 우상 숭배이다.’ 저는 여러 번 경험했습니다. 일본에 가있는 한국 선교사들은 일본을 나쁘게 말하는 사람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일본 국민이 세계에서 제일 좋은 사람들이고 정직한 백성이고 우리 대한민국은 그렇게 많이 예수 믿으면서 이루지 못한 정직한 사회를 일본 사람들은 예수 믿지 않고 이미 오래 전에 이루었다. 우리는 오히려 부끄럽다.” 맞습니다. 일본 사람 욕하는 한국 선교사 한 명도 없습니다. 엘리야도 그렇게 된 겁니다. 그 전에는 이 사람들을 다 죽여야 된다고 생각했는데 거기 가서 3년을 살면서 시돈 사람의 밥을 얻어먹다 보니까 마음이 순화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은 바알이지 시돈 사람들이 아닙니다. 구약에 수없이 나타나고 있는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절대로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바알이라고 하는 우상 숭배가 하나님의 미움을 받은 것이지 백성들이 받은 것이 아닙니다. 나중에 보면 갈멜산에서 승리했다고 450명을 처형하는 엘리야를 그대로 내버려 두면 시돈 사람들은 죄 없이 다 죽을 수가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엘리야를 그 여인 집으로 보내지 않으셨다면 처참한 종교 전쟁과 민족 감정에 의한 피바다가 되었을 것이고 이 여인과 아들은 정말 그들이 말한 대로 마지막 식사를 하고 그때 죽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을 보내심으로 말미암아 그 참혹한 민족 감정의 종교 전쟁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게 하셨고 기근에 죽어야 될 이 여인과 아들을 살려내시고 시돈 백성들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 여인은 잘한 일이 무엇인가? 엘리야는 처음 보는 사람 아닙니까? 그러나 소문은 들었습니다. 왜? 그 주변의 모든 나라가 엘리야의 영성에 대해서는 다 알고 있습니다. 그 소문만 듣던 하나님의 영적 지도자 엘리야를 지금 이 여인은 1대 1로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지혜로운 생각을 하지요? ‘죽어야 할 운명에 놓였다면 밥 한 끼를 더 먹고 죽으나 안 먹고 죽으나 무슨 유익이 있으리오?’ 그래서 엘리야의 말에 순종합니다. 

다른 것은 모르겠는데 이 여인은 엘리야에 대한 분명한 고백 하나를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엘리야가 하나님의 종인 것을 이미 알고 있었는데 오늘 만나게 되었으므로 내 인생의 마지막 시간은 하나님의 종이라는 이 사람의 말을 한번 들어보자. 그리고 내 소유의 마지막 물질은 하나님의 종이 명령하는 대로 내가 한번 해보자.”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과 인간관계에 있어서 또 다른 진리성 하나를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때로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소원을 보면 이상합니다. 하나밖에 없는 것을 요청하실 때가 많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이삭이라는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모리아 산에 가서 번제 드리라 하셨습니다. “이 나라에 아들들이 그렇게 많은데 하나님이 주신 아들을 왜 희생시키라 합니까? 반드시 이 이삭을 번제로 드려야 하나님이 기뻐하실 무슨 이유가 있는 것입니까?” “잔소리 말아라. 내가 시키는 대로 하라.” 또, “밀가루가 넉넉한 집안에 엘리야를 보내면 안 됩니까? 꼭 그 집에 가서 그 한 끼 식량 밖에 없는 것을 엘리야가 홀라당 먹어 치워야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하신 일을 보면 이해가 됩니다. 

하나 밖에 없는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셔서 죽게 만드셨습니다. “나도 그랬어. 그래서 나도 요구하는 거야.” 어느 날 예수님은 성전에서 많은 사람이 헌금 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 중에 가장 적은 헌금 두 렙돈을 헌금하는 불쌍한 여인을 보고 이 여인이 제일 많이 했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이유가 뭔가? “그것이 그의 마지막 소유였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매달린 강도는 지금까지 나쁜 일만 열심히 해왔는데 이제 죽음 직전 몇 분을 남겨놓고 자기 생명의 마지막 시간에 예수님을 바라보고 선한 말을 한마디 합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 인생의 마지막 몇 분의 시간에 선한 말 한마디를 예수님이 요청한 것이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영원한 생명의 약속을 얻어냈잖아요? 

우리 인생에 마지막 남은 시간을 어디다 쓸 것인가? 마지막 남은 나의 건강을 어디다 쓸 것인가? 마지막까지의 소유는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그러면 언제가 나의 마지막인가? 성경은 언제나 오늘이라고 합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내일 일은 우리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할 일이 생각나거든 지금 하십시오. 내일은 보장이 없습니다. 친절한 말 한마디가 생각나거든 지금 하십시오. 내일은 사랑하는 자가 떠납니다. 불러야 할 노래가 있다면 지금 부르십시오. 

해가 저물면 들을 사람이 없습니다. 미소를 짓고 싶거든 지금 웃으십시오. 당신의 친구가 곁에 있을 때!” 오늘 말씀에 반영되는 가장 큰 의미 있는 교훈은 이 여인은 물질적으로 이 세상에서 가장 빈곤한 자의 모습으로 조명되었다는 것입니다. 한 끼 식량 밖에 없는 상태입니다. 한 끼 식량 후에 어떤 좋은 일이 하나도 마련되어 있지 아니한 절망 상태입니다. 아마 오늘 여기 계신 교우님들 가운데 이 여인과 같이 빈곤한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라고 판단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에게 지극한 관심을 가지시고 당대 최고 영적 지도자 엘리야를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다 제치고 원수의 나라 시돈 땅 바로 그 빈곤한 여인에게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백성과 그 여인 가정을 살려내신 것입니다. 그 여인과 아들은 한 끼 먹은 후 정말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말씀에 평생 먹고 살았다고 했습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그러지 말라.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제가 보니까 물질 문제의 시험 받는 일은 있는 사람들이 더 합니다. 

부자는 망해도 3년은 먹고 산다는 말이 있는데 생활 규모를 줄여 버리면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을 가지고 너무 실망하고 좌절합니다. 재벌 총수도 자살을 해버립니다. 있는 자들이 더 시험을 많이 받습니다. 인생은 때로 부하고 때로는 곤고합니다. 마음을 비우고 좀 더 주님께로 가까이 가보세요. 우리는 이 시돈 여인보다는 다 나은 상태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도 언제나 엘리야를 보내실 것입니다. 어떻게 보내실 것인가? 오늘 말씀이 여러분이 엘리야를 만났다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인간이 사는 세상은 풍족할 때보다는 부족한 때가 훨씬 더 많고 저는 평생 목회하면서 들은 소리가 불경기라는 소리입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의 식량을 하나님이 아셔서 다 내려주시도록 되어 있는데 왜 재앙이고 왜 심판인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지 않기 때문에 그 잘못 가는 개인의 역사나 인류의 역사를 바로 잡을 때는 이런 심판을 내리신다는 것을 오늘 성경말씀이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제 일생에 두 번 물질 문제 때문에 약간 섭섭했다고 할까 시험 받았다고 할까 기억나는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저는 태어나면서부터 어떻게 물질의 영광을 누려보지를 못해서 중학교 다닐 때부터 고학의 길에 나섰습니다. 어려운 고비를 넘고 넘어서 목사 안수를 받기까지 그리고 목사 된 후에도 개척교회를 다섯이나 하고 돌아다녔으니 무슨 물질을 누려봤겠습니까? 부모님의 도움이 전혀 없이 살았으니 무슨 물질 소유가 있었겠습니까? 교인들이 저한테 항상 말합니다. 

목사님은 얼굴 보면 고생 하나 안하신 귀공자 같다고 늘 그럽니다. 그건 제가 인물이 하도 잘 생겨서 그렇게 보이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저에게도 행운의 소식이 들렸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건 나에 대한 하나의 혜택이요 어떻게 생각하면 그것은 나에 대한 당연한 권리요 이런 관계의 어떤 일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그 물질이 어느 정도인가 하면 당시 집 한 채는 넉넉히 될 정도였습니다. ‘나도 이제 내 집을 갖게 되었구나. 고생 다했다. 그러면 그렇지! 주의 종에게도 이런 좋은 소식이 들려올 때도 있어야지.’ 그래서 저는 그때 물질이 주는 흥분에 처음 빠져봤습니다. 

그런데 그 행운은 일주일 만에 두 가지다 꽝으로 끝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솔직히 그때 저는 목사이면서도 하나님이 좀 야속하게 생각되었고 일종의 슬픔마저 생겼습니다. ‘목사도 아이들한테 좋은 것을 좀 주고 싶고 나도 가족에게 좋은 것을 제공하고 싶은 마음은 똑같은데 이게 뭐야? 이럴 수가! 어떻게 내 마음 조절하기 힘들어!’ 일주일 동안 저는 마음고생을 했고 토요일 저녁에 교회에 가서 밤 12시까지 문 다 걸어 잠그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일이면 교인들이 수천 명이 나의 설교를 들으러 오는데 이런 마음을 가지고 내가 설교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내일 하루는 내가 설교를 하지 말고 이 시험 받은 슬픈 마음으로 조용히 뒷좌석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훨씬 낫겠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하나님! 그것을 나한테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게 뭐 그렇게 대단한 일이라고 나한테 위로를 주실 것이지 하나님이 중간에 가로채셔서 꽝으로 만들어 버리시는 겁니까?” 답이 안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주일이 또 돌아오니까 잠을 자야지 설교할 수 있을 것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 성령님께서 나를 다스려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이렇게 기도하고 12시가 넘어서 집에 갔습니다. 주일날은 새벽기도가 없으니까 2시간 더 잠을 잘 수가 있잖아요? 그래서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다가 아침 6시에 알람을 해놓고 ‘아, 모르겠다. 자자.’ 그런데 가족들에게 다 말했습니다. ‘아이들이 우리 아빠 그래도 능력 있다고 좋아했는데 이게 뭐야? 어휴!’ 겨울철 새벽 5시면 캄캄하잖아요? 나는 6시까지 자야 하는데 누가 새벽 5시에 “쾅쾅 쾅쾅!” 문을 두드리는 겁니다. “누구에요?” “목사님!” “아니, 이 캄캄한 새벽에 누구에요?” “목사님! 나 진주예요. 문 열어주세요.” 진주가 누구나면 두 주 전에 와서 바이올린 연주한 제 친구 딸입니다. 

그 얘가 고등학생이었는데 그 얘가 온 겁니다. “진주예요, 목사님!” “야! 이 캄캄한데 웬일이냐?” “목사님! 이거 어제 아빠가 갖다 드리라고 했는데 잊어버렸어요. 그래서 새벽에 생각나서 가지고 왔어요.” “아니, 그게 뭔지 모르지만 새벽에 이렇게 와서 두들기냐?” “아빠가 드리래요.” 그게 뭐냐 하면 성경 구절이 적힌 액자 하나를 들고 온 거예요. “저희 아버지가 목사님한테 좋은 말씀이 되겠다 해서 목사님 갖다 드리라고 하셨는데 토요일에 갖다 드려야 했는데 내가 잊어버리고 있다가 생각나서 갖고 왔어요.” 하나님이 주일날 새벽에 나 설교하러 나가기 전에 그 얘를 나한테 보내신 거예요. “그러니? 고맙다.” 성경구절을 보자마자 뒤로 나자빠졌어요. 

빌립보서 4장 19절!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의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이게 뭐야?” 이것은 물질 관계에 저의 간증 거리가 되었습니다. 지금 그 액자는 제 아들이 가져가야 되겠다고 해서 자기 집에 걸어놨습니다. ‘그렇다.’ 그 액자를 보는 순간 부끄러워졌습니다. 하나님이 저에게 막 책망하시는 듯 했습니다. “나는 십자가에서 너를 위해서 죽었는데 돈 좀 생기려다 안 생긴 것 때문에 목사가 주일 설교 못하냐?” 그겁니다. “너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서 생명까지 바치겠다고 나하고 약속하지 않았니? 

오늘 주일 설교 정말 안할래? 5시야.” 회개했습니다.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주일 그 액자 들고 나가서 설교를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섬기는 자는 식탁이 마르지 않습니다. 믿음이 없어서 그것을 못 봐서 그렇습니다. 너무나 부하게 되려고 하는 욕심 때문에 시험이 오는 것이지 기름이 마르지 않습니다. 여러분! 가난하다고 슬퍼하지 마세요. 가난한 사람들이 예수님 더 잘 믿고 헌금은 더 잘합니다. “내가 너에게 준 게 얼마인데 얼마나 더 줘야 하나님께 물질로 감사하겠니?” 책망하십니다. 여러분, 한 끼 먹고 죽으려고 했던 사람이 평생을 살았죠?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은 변함없이 우리를 살려주십니다. 한 끼 먹고 죽으려고 했던 이 여인은 평생 엘리야 하나님의 종을 만남으로 살았습니다. 넉넉히 살았습니다. 믿음 없는 저희들 책망하여 주시고 믿음 가운데 풍성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추수철이 되었는데도 빈손으로 너무 슬퍼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두의 가정을 주님이 지켜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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