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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절] 살아계신 하나님 경험하기⑮ : 감사 (눅 17: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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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계신 하나님 경험하기⑮  : 감사 (눅 17:11~19)


I. 감사를 잃어버린 세대

어거스틴은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이 말씀에 한 마디를 더하라고 한다면 나는 감사를 더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경험하기 14번째 시간 「감사」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감사는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최고의 제물이기도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는 지름길이기도 합니다. 

문학가 “오스카 와일드”의 우화적 소설「지옥의 단편」이란 글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께서 과거에 은혜를 입혀준 몇 종류의 사람을 그 후 다시 만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우화적으로 엮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처음으로 한 주정꾼을 만납니다. 그는 거의 폐인과 같이 된 젊은이였습니다. 예수께서 “왜 그런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하고 물었더니 주정꾼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당신이 걷지 못하던 나를 일으켜 걷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걸어 다닌들 무엇을 먹고살라는 말입니까. 그동안 직업을 구해 보았으나 만족한 직업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 후 세상을 비관하다 이 꼴이 되었습니다. 

그 다음 예수는 한 여자가 창녀가 되어 남자들 사이에서 희롱받고 있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예수는 여자에게 말합니다. “어째서 이런 생활로 되돌아갔습니까?” 창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나를 창녀에서 건져 새 사람을 만들어준 것 같았으나, 창녀에서 발을 씻은들 무슨 행복이 있단 말입니까. 나는 더욱 고독해서 살수가 없었기 때문에 다시 창녀의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세상사람 누구도 내 진실을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그 후 예수는 한 불량자가 정신없이 이웃과 싸움질을 하고 있는 장면에 부딪힙니다. 예수는 그에게 묻습니다. “여보게 청년, 어째서 이런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불량자는 예수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당신이 눈을 뜨게 해 준 옛 소경이었습니다. 그러나 눈을 뜨고 무엇을 보라는 겁니까? 보이는 것이 모두 신경을 돋구고 귀찮고 화나는 세상입니다. 결국 나는 화풀이도 하고, 마구 치고 받고 하는 생활이 나에게 주어진 길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나는 차라리 세상을 보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죽었다 살아나는 체험을 해도 감사를 잃어버리면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일본의 우찌무라 간조의 설교 가운데 「저주받은 심령」에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저주하실 때는 질병과 고통, 실패와 아픔으로 저주하지 아니하시고 감사할 줄 모르는 거친 심령으로 저주한다”고 했습니다. 

말세가 되면 사람들의 심령이 무디어 져서 하나님 앞에 감사할 줄도 모르고 영광도 돌리지 못하고 허망하고 미련한 것에 마음이 어두워진다고 로마서 1장 21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북한과 옛 공산주의 국가 몇 나라를 방문하고 돌아온 한 분의 보고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공산주의 체제 하에 있던 나라를 방문해 보니까 한결같이 가난하게 살뿐만 아니고 저들의 얼굴에는 기쁨이 없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한결같이 거짓말을 잘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없는 말 두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사랑합니다”라는 말이 없고, 두번째는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없다고 합니다. 투쟁으로 얻은 체제이니 만큼 모를 심어도 벼를 베더라도 모심기 투쟁! 벼베기 작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II. 나병 = 저주

오늘 본문에 보면 감사해서 큰 복을 누린 한사람과 감사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예비된 복을 잃어버린 아홉 명의 나환자들의 얘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에 나병환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옛날 번역에 문둥병자라고 번역했습니다만 그들을 천시한 말이 될 수 있습니다. 저희 교단에서는 “한센병” 또는 “한센씨 병”이라고 통일하기로 했습니다.

한센이라고 하는 사람은 노르웨이 의학자였는데 1879년 나병의 병원균을 발견했기 때문에 그분의 이름을 따서 한센병이라 그렇게 부르게 된 것입니다. 이분은 나병요양소에 의사로 재직하면서 나병에 대해 깊이 연구하다가 1879년 나병은 유전병이 아니라 전염병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는 병원균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언젠가 음성 나환자촌 부흥회를 인도한 적이 있습니다. 부흥회 기간 중 만나는 사람마다 눈물없이 들을 수 없는 기가막힌 사연들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한토막! 점심식사를 대접해 주었던 한 집사님의 사연입니다.

집사님은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딸아이 하나를 곱게 곱게 키웠답니다. 이 아이가 학창시절엔 자기가 나환자촌에 산다는 사실을 숨겨야 했기에 친구들에게 부모를 얘기할 수도, 자기 집을 소개할 수도 없었습니다. 자기 동네로 들어오는 버스를 탈 때도 전봇대 뒤에 숨었다가 아무도 없으면 얼굴을 가리고 쏜살같이 버스에 올라탔곤 했습니다. 이런 저런 갈등속에서도 딸은 대학까지 졸업하고 드디어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한센병을 앓았다는 사실을 신랑측에서 알게되면 파혼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아버지 됨을 속일 수 밖에 없었고 온 희망을 걸고 키워온 사랑하는 딸이 결혼예식을 올리는 예식장에서도 다른 사람의 손을 붙잡고 들어가는 딸아이의 모습을 식장 구석진 자리에서 썬글라스를 쓴채 눈물을 삼키며 바라보아야만 했더랍니다.

물론 오늘날은 한센병을 고치는 약들이 나와 이들은 모두 고침을 받은 사람들이었고 의사로부터 더 이상 전염되지 않는다는 완치 선언을 받은 음성나환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식사시간마다 그들의 어려움과 아픔을 간증으로 들으며 밥 대신 눈물을 삼키곤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오늘 나환자들을 바라보는 세상의 눈들이 이럴진데 오늘 본문 성경이 기록되었던 당시의 상황이야 오죽했겠습니까? 당시 나병은 천벌을 받은 병으로 취급했고 부정한 병이라 하여 가족들과 함께 지낼 수 없음은 물론 사람들과 100m 50m 가까이 갈 수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혹시 나환자들 곁으로 지나가려고 하면 저들은 윗 입술에 손을 갖다 대고 “나는 부정하다! 나는 부정하다!” 소리치며 사람들이 다 지날 때까지 엎드려 있어야만 했습니다. 온 몸이 썩어 고약한 냄새가 나고 눈이 골아 앞이 보이지 않고 손가락 발가락이 떨어지고 코가 떨어지는 고통도 고통이거니와 그보다 더 괴로운 것은 사람들의 냉대와 가족들의 멸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의 어느 한 구석진 마을에 나환자 열 명이 함께 모여 살고 있었습니다. 처참한 하루 하루를 지내던 어느 날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본문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12절에 “멀리 서서” 그래서 목소리 높여 외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멀리 서서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소리쳤습니다. 이 외마디 외침 속에는 이들의 한 많은 지난 세월, 아픔이 담겨있었고 살고자 하는 강렬한 소망과 기도가 담겨져 있었던 것이지요. 이때 예수께서 보시고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성경에서 한센씨 병을 진단하여 동네에서 쫓아내기도 하고 또 완치된 것을 확인하여 가족과 함께 살아도 좋다고 하는 증명서를 발급해 주는 사람이 제사장이었습니다. 레위기 14장 3절에 “제사장은 진영에서 나가 진찰할지니 그 환자에게 있던 나병 환부가 나았으면”이라고 기록합니다. 나은 상태에서 제사장에게 찾아가는 것입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순종하기까지는 한 두 가지 커다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① “가서 보이라”는 말씀을 하셨을 뿐 별다른 조처나 보장이 없었습니다. 가서 보이라는 이 말씀은 네 병을 낫게 해 주겠다는 약속은 분명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고름이 나고 진물이 나는 자신의 몸을 뻔히 들여다 보면서 나았다는 믿음을 가질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환자들은 순종하여 갔습니다. 순종하여 갔던 이 믿음이 기적을 가져오게 된 것이지요.

② 한걸음 더 나아가 믿음으로 간다고 길이 훤히 열리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여기에 두 번째 난점이 있었습니다. 한 둘도 아니고 나환자들이 여나무 명씩 떼를 지어 예루살렘 성 한복판에 살고 있는 제사장을 찾아가면 필시 사람들은 길을 막고 돌을 던질게 뻔한 일이었습니다. 때문에 그들의 순종은 죽음을 무릅쓴 순종이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기적이 있었습니다. 죽음을 무릅쓴 순종과 믿음! 여기서부터 능력이 발휘되고 치유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14절 하반절입니다.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미처 예루살렘에 도착하기도 전에 믿음으로 가던 도중에 한센병이 나았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를 부를 때도 여전히 나환자였습니다. “가서 제사장에게 보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그 시간에도 여전히 온몸은 고름으로 가득차 있는 한센병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믿고 순종하여 길을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할렐루야!


III. 기적보다 믿음이 먼저입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왜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현대는 기적의 시대가 아니란 말입니까? 기적의 시대는 끝난 것입니까? 기적은 지나간 것입니까? 

노만 빈센트 필 박사의 말처럼 기적의 시대가 지나 간 것이 아니고 믿음의 시대가 지나 간 것입니다. 기적을 믿을 만한 믿음이 우리 가운데 없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기적을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뿐입니다. 계산하고 따지는 이성은 발달했으나 순종은 퇴색하고 말았기 때문에 기적이 퇴화하고 만 것이지요. 가라할 때 가면 기적을 볼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이 말씀 한 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말씀으로 우주를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분이 말씀하셨다. 아멘! 하고 믿으면 이 시간에도 기적이 일어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말씀의 초점은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기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기적의 의미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적을 관리하는 능력이 중요합니다. 축복보다 중요한 것은 받은 복을 감사하는 믿음입니다. 


IV. 감사를 잃어버린 사람들

한센병이 나았다는 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이지만 당시로서는 굉장하고 특별한 일이었습니다. 죽음의 자리에서 구원받은 것이요 멸망의 자리에서 살아나는 일이었습니다. 저주에서 놓임을 받는 일이었습니다. 이 은혜를 받은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가지로 나타났습니다.

①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감사하는 사람.
② 제갈 길 바빠 감사를 잊어버린 사람이 있습니다.

여기 주목할 만한 사실은 감사를 드린 한 사람은 이방인이었고 한결같이 감사를 잊어버리고 제 갈길 가 버린 사람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어느 면으로 보나 감사할 만한 말씀과 율법과 은혜를 누리고 살아가던 사람이 유대인이었고 감사를 잊어 버려야 된다고 하면 말씀과 율법을 들어보지 못한 이방인이었어야 옳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묘하게도 이 이방인은 돌아와 감사를 했습니다. 부자집 아들이 밥투정한다는 옛말이 거짓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은혜를 많이 누리는 사람들, 그 누구보다 더 부유한 환경속에서 여유있는 삶의 분위기를 누리고 살아가는 사람이 감사할 것 같은데 그러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불평원망이 많은 사람을 보면 누구보다 하나님과 교회로부터 은혜를 입고 사랑받은 사람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감사한 것 밖에 없지 않습니까? 오늘이 구태여 추수감사주일이 아니라 할지라도 우리가 누리고 있는 여러 가지 분복들을 헤아려 보면 진실하게 겸손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해 보면 감사한 것 밖에 없지요. 

저는 결혼하고 처음 대전에서 공군장교생활을 했습니다. 지금은 시집간 딸을 처음 낳았을 때가 이 무렵쯤 되었을까요? 보너스 타고 귤 한 박스를 사서 집에 들어갔습니다. 그 당시 귤 한 박스는 어마어마한 것이었습니다. 어릴 때 너무나도 배가 고파서 사과 하나를 따먹으러 들어갔다 주인한테 얼마나 얻어터졌는지요. 명절날이 되면 할머니가 사과 껍질을 벗기는데 그것 길게 뜯어먹으려고, 할머니가 깎는 사과껍질을 손에 붙들고 쩔쩔맸던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쌀밥 배부르게 먹을 수 있던 시절이 몇 년전 시절입니다. 어릴 때 꿈에도 소원이 쌀밥 배부르게 먹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귤 한 박스를 사 들고 집에 들어간다? 가족이 앉아서 이 귤을 까먹는다? 배가 부르게 귤을 먹는다?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소원이 라디오 집에 두고, 라디오 만한 밧데리 고무줄로 묶어서 라디오 듣고 싶을 때 라디오 들어 보는 게 소원이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얼마나 엄청난 복을 누리고 있습니까? 얼마나 많은 분복을 누리고 있습니까? 그런데 왜 우리는 불평하고 원망하고 짜증 한숨이 그렇게 많은지요? 

오늘 이 말씀을 들으며 주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됩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은혜를 알만한 아홉은 어디 갔느냐? 마땅히 돌아와 감사해야 될 유대인들이 누구냐? 아홉을 찾으셨지요. 주님 제가 왔습니다. 주님 앞에 돌아오는 복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작은 은혜는 시시해서 접어두었고 큰 은혜는 도무지 갚을 수가 없으니 팽개쳐 두었더란 말입니까?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온 자가 없느냐? 귀에 주님의 음성이 들려야 합니다. 

나병환자 열 명에게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꼭 같은 병에 걸려 있었고 꼭 같이 비참한 상황에 처하여 함께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에 관해 들어 알고 있었고, 예수님에 의한 병 고침의 기대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들이 있는 곳 근처를 지나가심을 알고는 함께 큰 목소리로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라고 간구했던 것입니다.

그들 모두에게는 예수님의 권능에 대한 믿음도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며 외쳤던 것입니다. 그들의 병을 고쳐주시겠다는 약속도 없이 그저 대뜸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을 뿐이지만 이에 대해 의아해 하거나 “아니 선생님, 먼저 저희 몸을 깨끗케 해주셔야 저희가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여도 보일 것 아닙니까?” 라고 반문하지도 않았습니다. 

여기까지는 아홉 사람의 유대인과 한 사람의 사마리아인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면 한 사마리아사람이 아홉 유대인과 달랐던 것은 무엇입니까?

사마리아 사람은 그의 몸이 깨끗해진 것을 발견하자 제일 먼저 한 일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가던 길을 돌아와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것입니다. 본문 첫머리에 보면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라고 한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그 마을에 머물러 계시지 않고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고 계셨는데 쉽게 다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을 보면 그 사마리아인은 제사장에게로 가던 길을 많이 가지 않았고, 그의 몸이 깨끗해졌음을 발견하자 지체 없이 돌아서 온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가 같이 가던 동료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혼자서만 슬며시 돌아서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모진 질병과 고초를 함께 나누던 다른 동료 아홉에게 적어도 한 번 쯤은 “여보게들, 우리 몸이 정말 깨끗해지지 않았는가! 나는 예수께 가서 이 사실을 직접 보여드리고 감사해야 되겠네. 같이 가지 않겠나?” 하고 권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게 여겨집니다. 그러나 어쨌든 그들 아홉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언젠가 같은 본문을 가지고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라는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실컷 설교를 해 놓고 아홉이 어디 있느냐 나 자신에게 물어봤더니 어디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아홉 명이 어디 갔을까? 왜 감사하지 못했을까? 상상을 한번 해 보았습니다.

첫 번째 사람, 진짜로 나았는지 확인 좀 해 봐야겠다. 낫기는 나은 것 같은데 재발되면 어떡하지. 이것 저것 복잡하게 따지고 생각하고 받은 은혜를 의심하다가 주님 앞에 돌아오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내가 받은 은혜, 받았다고 그러면 받은 거지 뭐가 그렇게 의심이 많고 복잡한 생각이 많습니까? 생각이 복잡하면 하나님 앞에 감사하지 못하고 기회를 잃어버리고 말더라는 것이지요.

두 번째 사람, 가기는 간다. 그러나 지금은 갈 수 없지 않겠느냐. 몸은 아직 목욕도 못했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 입어야 될 것이고 가면 빈손으로 갈 수 있겠나? 그래서 나중에 천천히 출세한 다음에, 돈 번 다음에, 그런 다음에 깨끗이 기회를 잃어버린 사람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 사람, 내가 진짜 나병이었을까? 아마 간단한 부스럼 정도인데 괜히 나병이라고 진단을 한 걸게야. 나을 때가 되었으니 나았겠지. 그 말 한마디 했다고 났겠어! 그래서 이래 저래 의심하는 사람, 하나님 앞에 돌아올 수 없는 사람입니다. 

네 번째 사람, 예수님이 제사장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라 그러셨지. 그리고 말씀을 묘하게 자기 나름대로 해석합니다. 이 얘기는 틀림없이 제사장에게 가서 내 몸을 보이고 신분을 보장받으라는 말일 게야. 출세 좀 하고 신분 보장받고 그럴 듯한 폼을 잡고 거드름을 피우며 내가 누군지 아시겠습니까? 예수님! 그때 예수님 만나 깨끗함을 받은 누구입니다. 제가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제가 조그만한 중소기업 벤처기업의 사장이 되었습니다. 명함 척 내밀며 좀 거드름을 피우면서 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모양이예요. 그러다가 갈 기회를 잃어 버렸다 그렇게 생각이 되어졌어요.

다섯 번째 사람, 예수님께서 해준 일이 뭐 있어.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라. 그거야 뭐 아무나 할 수 있는 얘기지. 예수님께 찾아가 감사할 일이 뭐 있겠어. 그래서 가지 못하는 사람이 있어요. 시쳇말로 말하면 안수를 해줬나 안찰을 해줬나 쓰다듬기를 해줬나 약을 지어줬나 한번 끌어안아 주길 했나 예수님 앞에 감사할 것 없지. 이또한 예수님 앞에 돌아가지 못할 사람입니다.

여섯 번째 사람, 못된 사람들이 있을 것 같아요. 나병을 앓고 있을 때 멸시하고 천대하던 사람, 그 사람을 늘 묵상하고 낫기만 해봐라 원수를 갚아야지! 그러다가 깨끗이 나으니까 복수하러 달려 간 사람이 있어요.

일곱 번째, 몸은 깨끗하게 나았다. 야~ 이게 얼마 만이냐 한잔하자. 술집에 가서 댄스 한바탕 추고 땀을 흘린 다음에 캬~ 하다가 못간 사람. 한잔 하다가 그만 술에 취해 비틀거리다가 못간 사람이 있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여덟 번째 사람, 얼마나 보고 싶었던 가족입니까? 얼마나 만나고 싶었던 친구입니까? 처가 집에 달려가서는 장인 어른 내 몸이 나았습니다. 그리고 친구들 만나 여기 갔다가 저기 갔다가, 큰 집에 갔다가 작은 집에 갔다가 외삼촌 집에 갔다가 그러다가 그만 감사의 기회를 잊어버린 사람이 있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아홉 번째 사람, 기쁜 마음으로 집으로 달려갔더니 마누라가 고무신을 거꾸로 신었네. 그래서 도망간 마누라 찾아 평생을 보내다가 예수님 앞에 돌아오지 못한 사람이 있을 것 같다는 추측을 한번 해 보았습니다. 주경가가 그렇게 말한 것도 아니고 또 어떤 책에 쓰여진 것도 아닌데 한번 짐작을 해본 거예요. 이쯤 되면 감사할 여유가 없는 게지요. 축복과 은혜를 저주로 바꾼 사람입니다.


V. 은혜의 결론은 감사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다가 은혜를 잊어버릴 수 있어요. 많고 많은 복을 누리고 살아가면서도 다 감사하며 살아갈 수 없는게 타락한 인간이지요. 그러나 절대로 주님 앞에 설 때까지 잊지 말아야 될 것 있습니다.

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날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날 살리기 위하여 하나님은 독생자를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그 분의 옆구리가 터진 다음에야 그 보혈의 은총이 내게 임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하나님의 은혜! 기억하고 사셔야 합니다. 주님께서 주님의 피 위에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셨던 것입니다. 섬기는 교회에 늘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② 부모님의 은혜를 잊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부모님의 은혜를 저버리는 자식을 갖는 것보다는 독사에게 물리는 것이 낫다는 리어왕의 독백이 있습니다. 부모에게 효도하십시오. 부모를 높이십시오.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하늘을 나는 기러기 새끼 한 마리도 어버이보다는 앞질러 나는 법이 없다고 합니다. 시꺼멓게 못생긴 까마귀 새끼 한 마리도 그 어버이 보다 높은 가지에 앉는 법이 없다고 합니다. 배은 망덕한 자식은 까마귀에게 그 눈이 쪼이리라는 잠언의 기록이 있습니다.

③ 날 사랑했던 이웃이나 벗들을 배신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왕정 야사를 보면 물고 물리는 배신과 망덕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고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원수가 됩니다. 이건 몰이 잡배들이나 하는 짓이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할 짓이 못되는 겁니다. 여러분 정치하는 사람들 보십시오. 여기 붙었다 저기 떨어졌다 이합집산과 야합을 밥 먹듯이 하는 사람들. 그래서 이 나라 이 풍토 젊은이들의 가치관이 이 모양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람 앞에 신의와 의리를 지킬 줄 알아야 인간이요 신앙인입니다. 

세상이 복잡하고 복잡한 것 같지만, 직장 생활에 상처가 많고 가정생활에 어려움이 많은 것 같지만 “여보 고마워” “엄마 고마워요” “아버지 감사합니다” 이 말 한 마디면 모든 게 끝이 납니다. “여보 감사해요” 이 말 한 마디면 온갖 은혜를 갚을 수 있습니다. 잘못할 수 있습니다. 실수할 수 있습니다. 허물이 들통날 수 있습니다. 그때 “여보 미안해요. 용서해 주세요.” 이 한 마디면 모든 게 끝납니다. 

성경에 보면 배은망덕으로 인해서 완전히 실패한 인생을 살아간 한 인물이 나옵니다. 가룟 유다입니다. 3년 동안 예수님의 제자로 신임을 받았고 재정을 쥐고 책임졌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자기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이 달라지자 예수님을 은 삼십에 깨끗이 팔고 말았습니다. 자기 스승을 배신했습니다. 그러나 은 삼십냥 가운데 한 푼도 쓰지 못하고 목매달아 자살했습니다. 새끼줄이 터져서 언덕에 곤두박질해서 창자가 쏟아져 나와 죽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단테가 쓴 신곡에 보면 지옥편에 지옥 중에서 가장 밑바닥에서 고생하는 인물이 바로 배은망덕한 사람들, 바로 가룟 유다 같은 사람들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은혜를 받는 것 중요하지요 귀하지요. 그러나 더욱 귀한 것은 받은 은혜를 어떻게 간직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돈을 버는 것이 중요한 일이 아니라 번 돈을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축복 그 이후! 이는 신앙인에게 대단히 중요한 과제입니다. 받은 축복은 감사가 따를 때 온전한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감사는 축복을 완성합니다. 감사는 은혜를 완성합니다. 감사는 축복의 매듭과도 같습니다. 매듭이 없는 새끼줄이 풀어지고 말 듯이 감사가 없는 축복은 그 축복을 지속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3일 동안만 본다면」 이라는 헬렌 켈러의 글이 있습니다. 
“만약 내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유일한 소망 하나 있다고 하면 그것은 죽기 직전에 꼭 3일 동안만 눈을 뜨고 보는 것이다.” 

만약 내가 눈을 뜨고 볼 수 있다면 나는 나의 눈을 뜨는 그 첫 순간 나를 이만큼 가르쳐 주고 교육을 시켜준 나의 선생님 설리반을 찾아가겠다. 지금까지 그의 특징과 얼굴 모습을 내 손끝으로 만져서 알던 그의 인자한 얼굴 그리고 아리따운 몸매 등을 몇 시간이고 물끄러미 보면서 그의 모습을 나의 마음속 깊이 간직해 두겠다. 

다음엔 친구들을 찾아가고 그 다음엔 들로 산으로 산보를 가겠다. 바람에 나풀거리는 아름다운 나뭇잎사귀들, 들에 피는 예쁜 꽃들과 풀들 그리고 저녁이 되면 석양에 빛나는 아름다운 노을을 보고 싶다. 

다음날 이른 새벽에는 먼동이 트는 웅장한 장면, 아침에는 메트로폴리탄에 있는 박물관 오후에는 미술관 그리고 저녁에는 보석같은 밤하늘의 별들을 보면서 하루를 지내고 마지막 날에는 일찍 큰 길가에 나가 출근하는 사람들의 얼굴 표정들, 아침에는 오페라하우스, 오후엔 영화관에서 영화를 감상하고 싶다. 
그러다 어느덧 저녁이 되면 나는 건물의 숲을 이루고 있는 도시 한복판으로 나와서 네온싸인이 반짝거리는 거리, 쇼윈도에 진열돼 있는 아름다운 상품들을 보면서 집에 돌아와 내가 눈을 감아야 할 마지막 순간에 나는 이 3일동안 만이라도 볼 수 있게 하여준 나의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기도를 드리고 영원히 암흑의 세계로 돌아가겠다.

보지 못하는 사람은 볼 수만 있다고 한다면 한번이라도 볼 수 있다고 한다면... 얼마나 그들이 그리워하는데. 여러분 보지 못합니까? 걷지 못하는 사람은 네 발로 걸을 수만 있다면 나는 소원이 없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걷지 못합니까? 배부르게 밥 먹어 보는게 소원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오늘도 배부르게 밥 먹을 수 있는 환경속에서 살아가는데, 잠잘 수 있고 일어날 수 있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고, 잃어버린 것 같지만 아직도 남아 있는 게 많은데 무엇이 그렇게 원망스럽고 불평이 많은지요. 왜 그렇게 감사하지 못하는지요. 


VI. 아홉을 찾습니다.

한 사람의 감사는 나머지 아홉 가지 감사할 수 있을 때 그 기적은 완성이 되어집니다. 아홉 사람은 은혜를 잊어버리고 한 사람만 돌아와서 감사의 찬송을 할 때 예수님은 안타까이 말씀하십니다. 그 아홉 사람은 어디 있느냐!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열 가지 은혜를 받고서도 아홉을 잊어버리고 한 가지만 들고 나와 “감사합니다” 말할 때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불평하고 저것은 감사할 때에 어제는 감사했으나 오늘은 원망할 때에 부분적인 감사를 하고 살아갈 때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앞에 넋두리하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싶지만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니 내가 구원받은 백성이 분명하다고 하면, 천지를 창조하고 우주를 운행하시는 분이 우리 아버지이심을 고백하고 살아가는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 내가 이해가 안될 때도 나는 무조건 감사하겠다. 작정하고 하나님 앞에 감사할 때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이 찾으실 때에 “감사하지 못했던 죄인이 여기 있습니다” 주님 앞에 돌아 올 때 여러분은 축복을 완성할 수가 있습니다. 

저는 8살 어린나이에 홀어머니 손에 맡겨진 버려진 아이와도 같았습니다. 길거리 불량배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고 남들이 학교 갈 때 깡통 들고 이 골목 저 골목을 헤맬 수도 있었겠지요. 남의 집 머슴살이로 평생을 보낼 수도 있었습니다. 힘이 되어줄 친척이나 가족도 없었습니다. 등록금을 내지 못할 때도 찾아가서 등록금 도와달라고 손을 벌릴 수 있는 친척이 없었습니다. 내 인생에 어려운 고비 고비마다 의논할 똑똑한 친척 이웃 하나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 사랑하는 자식을 맡겨놓고 기도하는 어머니 한 분! 어려운 일이 있으나 좋은 일이 있으나, 새벽에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기도하는 내 어머니! 그리고 금요일이 되면 언제나 금식기도 했던 내 어머니! 지금도 주일 아침이면 금식하며 하루 종일 사랑하는 자식을 위해서 기도하는 내 어머니! 그것이 내가 가진 인생에 자산의 전부였던 것을...

인생의 어려운 고비마다 좋은 일이 있으나 어려운 일이 있으나 하나님 앞에 나가서 기도하는 것 밖에는 내가 가진 자원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밥을 굶어 본 적이 없고 옷을 벗어본 적이 없고 공부하고 싶은데 못 해 본 적도 없고 남들 공부할 때 나도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고 누구도 기댈 때가 없었고 누구도 의지할 때가 없어서 하나님 한분의 은혜로 이렇게 살았습니다. 생각만 하면 얼마나 감사한지요. 하나님의 은혜만 생각해 보면 가슴이 든든해지고 세상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여러분이 잘나서 그 자리에 온 것이 아닙니다. 똑똑해서 가진 것 아닙니다. 가질만해서 가진 것 아닙니다. 누릴만해서 누리고 있는 것 아닙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기적 중에 기적 내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 고난을 당해도 온갖 어려움이 있어도 온갖 아픔이 있어도 오늘 내 인생이 끝난다 할지라도 영원한 세상에서 눈을 뜰 것을 영생 얻은 하나님 나라에서 면류관 쓰고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갈 것을, 무엇이 그렇게 감사하지 못하겠습니까? 

감사는 축복 이외에 더 큰 축복을 가져다 줍니다. 예수께서 돌아와 엎드려 감사하는 이 사람에게 뭐라 말씀하셨습니까?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감사는 구원을 완성합니다. 감사는 축복을 완성합니다. 감사는 은혜를 완성합니다. 육신의 병고침을 감사함으로 영혼까지 구원을 받았습니다. 땅의 것을 감사함으로 천국까지 축복으로 받아 누리게 되었습니다. 감사를 몰랐던 아홉 나환자는 기적을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기적 그 이후에 축복을 놓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육신의 고통이 멈춰졌기 때문에 더 이상 예수를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이 얼마나 커다란 불행입니까?

왜 예수님께서 그 아홉을 찾는 것일까요?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책망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나환자들의 코 묻은 돈이 필요해서가 아닙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예수님의 공로를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그 아홉명마저도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그 아홉에게 더 큰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그들이 깨닫지도 듣지도 보지도 누리지도 못했던 더 큰 신령한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예수 선생이시여, 나를 긍휼히 여겨 주소서! 부르짖을 수 있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소중한 믿음이지요. 그러나 그것 가지고 안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 앞에 매달려서 소원을 이루었습니다. 무서운 병이 나았습니다. 소중한 믿음이지요. 그러나 그것 가지고 안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 앞에 돌아와서 더 큰 은혜를 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그 은혜를 우리가 누릴 수 있습니까? 주님 앞에 돌아와야 합니다. 받은 복 가지고 끌어안고 도망가면 안됩니다. 세상으로 흩어지기만 하면 안됩니다. 돌아와야 합니다. 입술이 주님 앞에 돌아와야 합니다. 손발이 주님 앞에 돌아와야 합니다. 그 몸들이 주님 앞에 돌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받은 복이 주님 앞에 돌아올 때에 은혜가 감사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받은 복이 주님 앞에 돌아올 때에 더 큰 복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더 신령한 복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 발아래 엎드려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그랬습니다. 여러분 주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의 고향이 어디셨습니까? 그분은 하늘을 고향 삼아 사시던 분이십니다. 그러나 나사렛 마을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했습니다. 천군천사들의 시중을 받던 분이십니다. 시중을 누리던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주신 분이십니다. 그분이 누구입니까? 하늘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땅을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능하게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셨습니다. 왜요? 나와 여러분을 구원해 주시기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은혜 그 이후! 너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느냐? 네가 받아 누리는 복이 이 땅에 썩어질 것들만을 위하여 쓰여지지 말고 신령한 역사를 경험해야 하느니라. 구원의 역사를 경험해야 하느니라. 주님 앞에 온전히 돌아와야 하느니라. 무거운 은혜로 네게 되돌려 주리라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감사 깊이 만큼 성숙한 사람이요 감사의 크기만큼 행복한 사람이다.
죤 밀러의 말입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 어쩌다 보니 산에서 살았습니다. 
일산에 살다가 울산갔다 부산 갔다 양산에서 다시 일산으로 돌아왔습니다. 

금요일 양산에서 있었습니다. 양산에 계신 목사님들과 바닷가에 나가서 점심을 먹는데 어느 횟집에 들어갔더니 부인이 나와서 영접해 주었습니다. 저를 보는 순간 뒤로 넘어집니다. 손님들을 맞이할 생각은 하지 않고 남편에게 전화해서 여보 여보 4인4색 왔어요. 아니 뭐 4인4색? 4인4색 류영모 목사? 맞아요. 맞아. 남편이 고기 잡으러 나갔다 헐레벌떡 들어왔습니다. 여기 세우고 사진 찍고, 저기 세우고 사진 찍고. 사진을 찍어서 한 방에다 그 집에 왔다 갔던 유명한 정치인들 교계의 유명한 인사들 다 사진을 찍어서 스물 댓명 사진을 찍어 놓았더라구요. 교계에서 이름대면 알만한 사람들 안왔다 간 사람이 없더라구요. 정치인들 수 많은 사람이 왔다 갔고 기업인들 가운데 유명한 사람들은 다 왔다 갔더라구요. 

식사를 하면서 얘기를 듣자하니까 
이 분이 구계교회(김종무 목사)에 출석하는 김상태 안수집사인데 20년 전에 예배당을 지어놓고 수리 한번 하지 못했어요. 겨울에 찬바람이 예배당 안으로 그냥 들어오고 비가 오면 비가 새고 이곳 저곳 갈라지고 찢겨지고 무너졌습니다. 교인들 몇 명 안되는데 목사님 생활비 드리기도 어려워서 예배당 수리할 수도 없습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데 예배당은 낡았는데 찬바람이 씽씽 들어오는데 수리할 비용이 없습니다. 목사님의 손을 붙들고 “목사님 이번에 고기가 좀 많이 잡혀야 성전이라도 수리할 수 있을 텐데요. 고기 좀 많이 잡아야 크리스마스 제대로 보내는데, 크리스마스에 고기가 좀 잡혀야 목사님 회라도 대접할텐데...”

집에 있는 그물을 들고 나가서 기도하고 정치 그물망을 이곳 저곳에 쳐 놓았습니다. 좋은 물 흐르는 곳에는 다른 사람들이 다 쳐놓았고 배를 타고 들어가 빈자리 가운데 고기가 안 다니는 곳에 들어가서 그물을 앞에도 치고 뒤에도 치고 서너군데 쳐 놓았습니다. 

내일이면 크리스마스예요. 24일날 고기라도 몇 마리 건져볼까 해서 나가봤더니 고기가 한 마리 두 마리 들어가는데 아닙니다. 2열 종대로 줄을 지어서 김상태 집사가 배에 앉아있는 것을 본 것인 양 그물로 들어가는 겁니다. 커다란 방어들이 계속 들어가는데 다른 사람들이 쳐놓은 그물로는 한 마리도 안 들어갑니다. 첫 번째 그물을 거두었는데 2370여마리 10kg짜리 한 마리에 169,000원. 그물 하나에 4억원이 걸렸습니다. 

경북 영덕군 남정면 구계리에서 21세기 베드로의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수천마리씩 들어있는데. 예배당 수리하려고 기도하고 쳐놓은 정치그물망에 얼마나 어마어마한 방어떼들이 들어갔는지요. 단 몇 마리라도 옆 집에 들어갔으면 기적이 아니예요. 김상태 집사님 그물망에만 하나님이 쫓아서 보낸 것처럼 일렬로 서서 쫙 빨려들어가는 겁니다. 김상태 집사가 아무리 생각해도 우연히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주신 것입니다. 이 고기는 내 고기 아니고 판돈은 내 돈이 아니로다. 팔아서 몽땅 다 하나님 앞에 갖다 바쳤더니 수리하려던 예배당을 새로 번듯하니 지었습니다. 

이걸 알고 국민일보에서 싣고, 인터넷에 뜨고 방송국에 와서 간증하고 세계에 다니면서 간증하고... 그렇게 유명한 집인 줄 저는 몰랐지요.

이 양반이 세계에 다니면서 간증하고 지나가는 사람이 유명하다고 해서 다오니 가게는 언제나 차고 넘치고 제가 간 날은 민어가 얼마나 많이 잡혔는지요. “목사님 저 떼부자 되었습니다.” “목사님 저 유명한 사람되었습니다.” “목사님만큼 저도 유명합니다.” 

여러분 이게 감사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받은 게 없다구요? 보는 눈이 없었던 것이지요. 내가 누리는 모든 것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그것을 해석할 수 있는 신학적인 안목이 없었던 것이지요. 

감사로 하나님 앞에 영광돌리고 감사로 예배하고 감사로 또 다른 은혜를 매듭짖고 
또 다음 복을 누리는 복된 추수감사절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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