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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를 향한 하나님의 소원 (살전 5: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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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향한 하나님의 소원 (데살로니가전서 5:16-18)

     
소원이란 말은 ‘바라고 원함’이라고 풀이합니다. 소원을 빌고, 소원을 들어주며, 소원을 성취한다고 말합니다.    지금 나에게 없는 어떤 것을 가지고 싶고,  지금 할 수 없는 어떤 일을 이루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소원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가장 바라고 원하는 소원이 무엇입니까?  그 소원이 아름다운 마음이 되어 언젠가 꼭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세상 만물의 주가 되시고 아무 부족함이 없이 모든 것에 풍성하신 하나님도 소원이 있을까요?     

오늘 본문의 말씀 중에 나오는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을 하나님의 소원으로 바꾸어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가 있습니다.    

자녀들이 부모에게 바라고 기대하는 바가 많습니다. 이것도 해주고 저것도 해달라는 끝도 없는 요구를 들어주며 사는 사람들이 자식을 가진 부모들입니다.  대부분의 부모는 자식이 잘되는 일이라면 내 한 몸 부서질지라도 마지막 힘까지 다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부모들 역시 자녀들에게 기대하는 소원이 있습니다. 내가 자식을 위해 이만큼 수고했으니 이 다음에 자식 덕을 보려고 기대를 거는 그런 소원이 아닙니다. 부모는 사랑하는 자녀이기에 조건 없이 댓가를 바라지 않고 온갖 정성을 다해 뒷바라지합니다. 자식을 향한 부모의 소원은 무슨 큰 것으로 호강시켜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자녀들이 큰 탈 없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을 지켜보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습니다.        

엊그제 수능시험이 끝났습니다. 수험생을 둔 부모들 특히 어머니들이 추운 겨울에 철야기도를 하고 새벽 공기를 가르며 새벽기도회 참석하러 교회로 가거나 불공을 드리러 산사를 찾아가 간절하게 기도하는 모습들이 TV 화면과 신문 화보에 등장합니다. 거기 나오는 어머니들의 얼굴에는 자식을 위한 간절한 소원이 담겨있습니다.  몇일 밤을 새워 기도하고 손발이 닳도록 빌며 기도하여 자식을 향한 소원이 이루어진다면 목숨걸고 그렇게 할 분들이 수험생 엄마들입니다.  한편으로는 좀 지나치다 할 정도로 집착하는 부모도 있지만 지금으로서는 내 아들 딸이 입시 성적을 잘 얻어 원하는 대학에 입학하는 것이 부모의 최고 소원이기 때문입니다.   

부모님들이 자식에게 기대를 걸고 마음 졸이는 것 못지않게 하나님도 우리에게 기대를 두고 바라보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에서 말한 식으로 하나님의 소원을 정리해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이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기를 바라십니다. 맨날 울상짓고, 부모와 대화도 하지 않고, 매사에 트집과 불평을 일삼는 아들 딸과 지내야 하는 부모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제발 기쁜 얼굴로 살고 어른들께 싹싹하게 대하며 작은 일에도 감사할 줄 아는 모습 좀 보자. 그게 내 소원이다’ 하지 않겠습니까?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도 자녀들을 향한 기대감이 왜 없으시겠습니까?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맨날 화난 얼굴로 굳어있고, 수심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우울하게 살며, 기도생활도 꾸준하지 못하고, 하는 일마다 원망과 불평을 일삼고 툴툴거리는 자녀를 어찌 좋아하실까요?  네가 정말 나를 믿고 나를 섬기는 사람이라면 얼굴을 환하게 펴고 항상 기쁘게 살고 언제나 기도하는 마음으로 나와 대화하자.  그리고 모든 일에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살아보라’ 하시지 않을까요? 내가 하나님의 입장이 되어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보자는 말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기쁨은 구원받은 하나님 자녀의 삶에서 적극적으로 드러나는 증거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말한 성령의 열매 가운데도 희락이라는 요소가 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사는 성도에게서 자연스럽게 보이는 생활의 열매는 기쁨입니다. 내가 성령충만한 삶을 살고 있는가 아닌가를 점검하는 한 가지 기준은 기쁨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특별한 기쁨을 말씀하십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마5:11, 12) 하셨습니다. 예수 이름 때문에 받는 능욕과 핍박이 도리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기쁨과 즐거움이 됩니다. 하늘의 상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기대하고 바라시는 기쁨은 내가 무엇을 얻고 이루었기 때문에 누리는 것만 아닙니다. 심지어 고난의 자리에서도 기뻐하는 우리의 모습을 기대하십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을 곰곰히 생각해봅시다. 그리스도인들이 아무데서나 실없이 히죽거리고 다니거나 아무때나 싱글벙글 기쁜 얼굴을 해야 하는 천치바보가 되라는 말은 아닙니다. 마음은 근심으로 가득한데 겉으로 기쁜척 가식적인 삶을 살라는 말씀은 더구나 아닙니다. 기쁨은 확실한 믿음과 자신감 없이는 나올 수 없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승리의 예감이 확실하면 지금 잠시 패배하는 듯한 순간을 기쁨으로 견딜 힘이 생깁니다.  분명한 회복의 소망이 있으면 지금 절망처럼 보이는 깊은 골짜기를 통과할 때 노래하며 지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지고 기쁨을 잃고 사는 것은 아무리 기다려도 고통의 끝이 없고 회복의 소망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지금 무엇을 가졌기 때문만이 아니라 장차  주어질 은혜의 선물을 영의 눈으로 바라보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그것은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물이며, 영생하는 물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한 없이 흘러나오는 기쁨입니다.

시내산에서 십계명 두 돌판을 받아 내려온 모세의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나는 것을 보고 아론과 백성들이 그에게 가까이 가기를 두려워하였습니다. (출34:29-30) 

사도행전 6장, 7장을 보면,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던 스데반 집사가 거짓 증인들의 고소로 공회에 잡혀와 심문들 당하였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그의 얼굴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하였습니다.   성밖으로 끌려나가기 직전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목격합니다.  그리고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내가 본다’ 하였습니다. 모세나 스데반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뵈었던 사람들의 공통점은 그 마음은 물론 얼굴이 기쁨으로 충만했더라는 점입니다. 죽음을 앞둔 자리에서조차 빼앗기지 않는 이 기쁨은 내 속사람이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에 푹 잠길 때 자연스럽게 겉으로 드러나는 기쁨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항상 이런 기쁨을 가지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 소원을 날마다 이루어드리는 자녀로 살기 바랍니다.   

쉬지말고 기도하라!  문자 그대로 쉴틈 없이 기도만 하고 지내라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가 호흡하고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기도는 성도의 생활입니다. 시간을 정하여 규칙적으로 드리는 기도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많은 시간에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지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면서 하루 종일 주님과 교제하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곁에 있는 친구에게 조언을 구하듯 ‘하나님 어떻게 생각하세요.  제가 이 일을 해도 괜찮을까요? 하나님이시라면 기뻐하실 일일까요?’ 여쭙는 것이 기도입니다. 급하고 아쉬운 일이 터질 때에만 자리 펴고 철야하며 ‘주시옵소서’ 기도할 것이 아니라 언제나 모든 일에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듯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가 쉬지 않는 기도입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특별한 문제를 놓고 그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드리는 기도가 있습니다.     때로는 밤을 새우기도 하고 식음을 전폐하며 기도에 매달립니다. 한 두번 기도해 보고는 아무래도 하나님이 들어주실 것 같지 않다는 내 판단에서 너무 성급하게 중단해버리는 기도가 얼마나 많은가요?     내 생각에 말도 안되는 불가능한 일은 하나님도 들어주시기 어려우실까요?   그렇다면 기도가 왜 필요하겠습니까?  내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일에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이 개입되도록 청원하는 것이 기도아닙니까?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지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니라’ (겔36:37)   하셨습니다.  때마다 일마다 우리의 필요를 먼저 알고 채우시는 하나님이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주실 것을 손에 들고 계시지만 그것을 귀한 것으로 알고 얻기를 구하는 자에게 즐거이 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린다면 우리는 결코 기도를 소홀히 여길 수 없습니다.‘글쎄 주실려면 주시고 싫으면 관두세요.  전 아쉬울 것 없어요’  이런 식의 태도로 기도하기를 중단하고 말면 하나님도 아쉬울 것 없으시니 도로 거두시지 않을까요?     

그러므로 ‘쉬지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은 언제나 기도하고, 모든 일에 기도하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기도하되 믿음으로 기도하고 감사를 담은 기도를 합시다. 막무가내식으로 떼쓰는 어린아이처럼 기도하고 무례한 아이들처럼 고래고래 고함치며 협박하듯 기도하는 것을 믿음의 기도라고 오해하지 맙시다. 내 뜻 안들어주면 밥 안먹고 죽겠다고 버티는 사춘기 아이들식으로 금식기도하지 맙시다. 내 소원 안들어준다고 삐져서 부모 앞에 ‘나 죽어버릴꺼야’ 하고 소리치며 문 쾅 닫고 나가버리는 못된 자식처럼 하나님 마음 아프게 하는 협박조의 기도를 끈질긴 기도 혹은 믿음의 기도라고 용감하게 간증하지 않기 바랍니다.

기도를 들어주시건 안 들어주시건 그것은 하나님 뜻에 달렸으니 나는 기도할 뿐입니다.    겸손한기도가 하나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는 기도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선물이라는 고백이 담겨있어야 믿음의 기도입니다.  그렇지 않고 ‘내가 떼쓰고 기도했더니 그때마다 하나님이 꼼짝 못하고 쩔쩔매며 들어주시더라’ 이렇게 생각하면 모든 것은 내가 기도해서 이루어지고 얻은 것이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기도응답이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라 나의 노동과 공력으로 얻어진 댓가로 생각합니다. 결국 내가 주인이고 하나님은 나의 심부름군에 불과합니다.    어느쪽이 옳습니까?    

다시 한 번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해봅시다. 하나님은 나로부터 감사와 기쁨이 충만한 기도를 듣고 싶어 귀를 기울이고 계신다고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은 먼저 ‘감사합니다’ 하는 소리를 나로부터 듣는 것이 소원이십니다. 내 기도의 주제와 중심이 ‘해주세요’ ‘주시옵소서’가 아니라 ‘나로 인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 받으며 영광이 나타나길 바랍니다’로 바꾸어지면 얼마나 좋을까요?    

쉬지말고 기도해야 할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기도하기를 쉬는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등한히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이가 멀어질수록 사단은 우리를 넘어뜨릴 기회를 더 잘 포착합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 방울이 피방울 되도록 기도하시던 주님은 피곤하여 곤히 잠든 제자들에게 ‘너희가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 당부하셨습니다. 사단의 시험은 끈질기고 계속적입니다. 약점이 보이면 빈틈을 이용하여 재빨리 접근하여 쓰러뜨립니다.    

기도할 때 기도하지 않고 졸며 자던 제자들은 모두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선생님이 잡혀가는 순간에 베드로는 검을 빼어들고 힘으로 막아보려다 ‘칼을 사용하는 자는 칼로 망한다’는 예수님의 책망을 들어야했습니다. 나머지 제자들은 예수께서 군병들에게 힘 없이 묶여 끌려가실 때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뿔뿔이 흩어져 도망하였습니다. 어제 열심히 기도하였고 믿음이 좋다는 칭찬 받았으니 오늘은 맘을 놓아도 되고 내일도 별 어려움 없이 괜찮으리라는 생각은 나의 착각일 뿐입니다.  한 순간도 방심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식하며 사는 것이 쉬지 않는 기도입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소원은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다정한 대화로 하루를 열고 온 종일 곁에 있는 친구처럼 하나님과 사귐을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드리고 싶지 않으십니까?

범사에 감사하라!  하나님의 또 한 가지 소원은 내가 모든 일에 감사할 줄 아는 성숙한 자녀가 되는 일입니다. 아직 어릴적에는 삐지기 잘하고 투정도 잘 부립니다.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섭섭해하며 내 뜻대로 하지 못한다고 툴툴거립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입니까? 그렇다면 전보다 많이 자라가고 있습니까?  언제까지 아이로만 머물 수는 없습니다. 아이가 좀 자라면 부모의 마음을 헤아릴 줄도 알고 고마움도 표현할 줄 압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감사합니다’라는 인사를 습관적으로 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당연한 것 받는 듯 당당하게 받고 휙 돌아서는 버릇없는 아이보다는 ‘감사합니다’ 말할 줄 아는 아이가 더 큰 사랑을 받습니다.    

아굴의 잠언으로 알려지는 잠언 30:15은 만족할 줄 모르는 욕심쟁이를 거머리에 비유합니다. 거머리에게는 두 딸이 있는데 만족할 줄을 모르고 ‘주세요 주세요’ 한다고 합니다. 사람이나 동물의 몸에 달라붙어 피를 빨아먹는 거머리는 빨판이 양쪽에 있어 한 번 살갗에 붙으면 여간해서 떨어지지 않고 악착같이 피를 빨아내는 생물입니다. 잠언은 양쪽에 달린 빨판으로 피를 빠는 거머리를 가리켜 두 딸이라 비유했습니다. 어떤 거머리는 개구리나 붕어를 죽일 수 있을만큼 대단한 흡착력을 가진다고 합니다. 한 번 달라붙으면 30분동안 자기 몸무게의 10배 정도 피를 빨아먹고서야 떨어져 나가는 거머리에게 강제 헌혈해본 적이 있으신지요?    

어릴 때 동네 방죽이나 개울에서 멱을 감고 나오면 여기저기 거머리가 달라붙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는 모내기 철에 논에 들어갔다 나오면 종아리에 시커먼 거머리가 달라붙어 피를 빨고 있는데 손으로 떼어내면 그 자리가 따끔하면서 붉은 피가 주루룩 흘러내립니다. 농부들은 늘 겪는 일이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논둑에 자라는 쑥을 뜯어 돌에 찧어 상처에 붙이면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그런데 피를 빼앗겨 약이 오른 어떤 아이들은 욕심꾸러기 거머리를 그냥 버리지 않고 피의 복수를 하곤 했습니다.   게걸스럽게 피를 빨아 통통하게 배불린 거머리를 뒤집으면 똘똘 말려 탄력있는 공처럼 되는데 그걸 가지고 괴롭히며 놀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남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거머리가 얼마나 욕심꾸러기 생물인지 짐작이 가시지요? ‘찰거머리처럼 달라붙는다’는 말을 하지요?  만족할 줄 모르고 끝없이 ‘다고다고’ 하며 달라붙는 지독한 떼쟁이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자식들 중에 부모님이 노후자금으로 남겨놓은 돈 탈탈 털어 등골 다 빼먹은 다음 노년에 건강 상하고 가진 물질이 없어 이래저래 힘 없는 어른들을 외롭게 방치해두는 거머리 같은 불효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도 이런 찰거머리들이 달라붙을 때가 많다는 말입니다. 먼저 감사가 있어야 바른 순서인데 감사는 눈꼽만치도 할 줄 모르고 원망스런 투로 내 사정만 들이대고 ‘주세요 주세요’를 연발하는 기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가시와 잡초는 누가 일부러 심지 않아도 여기저기 저절로 왕성하게 자라납니다. 원망과 불평은 잡초와 가시덤불처럼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우리 마음 가운데 불쑥불쑥 자라납니다. 화단에 핀 예쁜 화초는 누군가 거기에 맘 먹고 알뿌리를 심고 물을 주며 가꾸어야 보기 좋게 자라갑니다. 우리의 감사가 그렇습니다. 감사의 마음은 저절로 자라나지 않습니다. 작은 것에서부터 감사하는 법을 배울 때 비로소 감사의 삶이 자연스럽게 됩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감사는 그 씨앗이 얼마나 잘 심겼고 정성스럽게 물주어 자라고 있습니까? 나를 향한 하나님의 바램은 우리 입에서 ‘감사합니다’ 소리를 자주 들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입장을 바꾸어놓고 생각해봅시다. 모든 일에 감사하는 사람과 모든 일에 원망하는 사람 중에 누구에게 더 마음이 가실까요? 나를 향한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고 싶지 않습니까?     
  
도대체 기쁠 일이 있어야 기뻐하고 감사할 일이 생겨야 감사가 나올 것 아닌가 항의하고픈 분들 계십니까? 그렇다면 소망을 어디에 두고 사십니까?  눈에 보이는 사람과 일과 물질입니까? 그래서 사람이 맘에 안들고 성이 차지 않아 마음에 불만이 차오르고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합니까? ‘이 몸에 소망 무엔가 우리 주 예수 뿐일세 우리 주 예수 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 굳건한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는 찬송가사가 기억나십니까?  소망을 하나님께 두고 사십시오. 하나님께서 사람을 바꾸시고 환경을 이기게 도와주시길 구하십시오. 그리고 영원히 마르지 아니하시는 샘물되신 예수께로부터 참 기쁨과 평안의 물을 길어올리게 해달라고 구합시다.    그 외에 다른 곳에는 진정한 소망은 없습니다.     

오늘 읽은 바울의 편지를 받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사정은 인간적으로 보면 기쁨과 감사의 조건이 그리 많은 환경에서 살던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기도를 한다면 정말 살려달라고 매달려야 했고, 힘든 상황들이 어서 속히 우리를 떠나가도록 구해야만 했던 어려운 환경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어떤 교회들보다 바울에게 칭찬을 많이 들었던 사람들입니다. 모진 핍박과 고난 중에도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가 칭찬 받기에 충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어려운 환경일수록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서로 화목하고 귀하게 여기라고 했으며, 연약한 자들을 붙들어 주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오래 참으라고 하였습니다. 혹시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 악으로 갚지 말고 항상 선을 행하라고 당부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항상 기뻐하고 쉬지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을 하라’고 당부합니다.    이런 삶의 자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과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부모의 심정으로 비교하면,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어려움 중에도 믿음을 버리지 않고 어려움 당하는 형제들을 서로 돕는 형제 우애가 든든했던 효자들이라 하나님의 마음이 흐뭇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오실 것을 믿음으로 바라고 소망을 잃지 않고 고난을 참고 견디어냈던 꿋꿋한 믿음의 자녀들이었습니다. 이보다 더 부모를 기쁘게 해드리는 자녀가 어디 있겠습니까? 바울의 마음이 이렇게 기쁨으로 충만하였고 하나님의 마음도 그러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나는 하나님께 어떤 자녀입니까? 하나님의 소원을 만족시켜드리는 사랑스런 자녀로 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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