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한밤중에 불렀던 노래 (합 3:16~19)

  • 잡초 잡초
  • 693
  • 0

첨부 1


한밤중에 불렀던 노래 (합 3:16~19)


Move1: 살아온 날을 고마워하며 

저는 새벽기도를 마치고 종종 학교 뒷산을 등산을 하고는 합니다. 그렇게 높지 않은 산이지만 등산을 하다보면 저 멀리까지도 환하게 볼 수 있는 맑은 날도 있지만, 한치 앞이 잘 보이지 않을 만큼 짙은 운무에 뒤덮인 날도 있습니다. 저 멀리 남한산성도 보이고, 검단산도 보이고, 북한산도 보이는 화창한 날에 등산을 하고 오면 그렇게 기분이 상쾌하고 개운하지만 잔뜩 운무에 뒤덮여 있는 날은 개운치가 않습니다. 그것은 비행기 여행을 할 때도 종종 경험하는 사실이지요. 사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면서도 시야가 좋으며 마음이 평안하지만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 먹구름 대를 지나갈 때면 무척 길게 느껴지고 불안한 것을 경험합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멀리까지 환히 내다보며 걸어갈 수 있는 한낮이 있는가 하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한밤중과 같은 시간도 있습니다. 살다보면 앞뒤 좌우, 사방이 가로막혀 있는 한밤중과 같은 시간을 보낼 때가 있습니다. 그러한 고난의 시간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안과 초조함 속에서 살게 됩니다. 그러한 때가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길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은 길을 따라 산다는 것은 힘이 듭니다. 갈수록 길은 좁아지고, 다리는 휘청거립니다. 점점 두려움은 커져만 갑니다. 이러한 고난의 시간은 힘이 듭니다. 이런 고난의 시간, 아픔의 사건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 인생길에 늘 주어지는 사건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는 사람이든, 그렇지 않는 사람에게든 이런 고난의 문제는 동일하게 주어집니다. 

신실하게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왜 어려움의 문제가 오는지에 대해 성경은 상황마다에 대해서 상세한 답을 주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 한 가지는 고난의 시간에도 역사하시는 분이 계시고,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아픔도 있고, 고난도 있지만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사실은 분명하게 말씀해 주십니다(롬 5:8).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시련은 찾아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네게 흑암 중의 보화와 은밀한 곳에 숨은 재물을 주어 네 이름을 부르는 자가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줄을 네가 알게 하리라.(사 45:3). 고난의 시간이 힘이 들지만 그러한 ‘흑암의 시간’ 가운데 보화를 숨겨 놓고 계시다고 말씀하십니다. 진정한 믿음의 사람들은 비록 그런 고난과 흑암의 시간을 살 수 있지만 그 가운데서 보화를 캐내는 사람들이고 말씀합니다. 

귀한 기독교 대학으로 발돋움하고 있는 한국 동해 끝자락 포항에 자리 잡은 한동대학은 시작부터 많은 어려움 가운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한 어려움의 시간들을 보내면서 그 대학의 사람들은 믿음의 기적들을 친히 맛보았던 것을 증거하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 대학의 총장의 부인인 김영애 권사님은 한동대학을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산 역사를 증언하기 위해 기록한 책인『갈대상자』서문에서 그렇게 적고 있습니다. 

한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길이었다. 하지만 그 길은 가장 안전한 길이었다. 나는 길목 길목마다 동행해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수없이 지켜보며 그분의 손에 이끌려 길을 떠난 사람은 그 길이 아무리 캄캄하다 할지라도 가장 안전하다고 감히 외칠 수 있는 간 큰 사람이 되어갔다. 단 한순간도 우리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면서 나는 탄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 정말 굉장하시군요. 하나님은 살아계신 분이시군요...’ 그렇습니다. 어려운 삶의 여건에서도 힘 있게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마음 깊은 감사를 드리며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Move2: 인생의 어두운 밤에 

주전 7C의 선지자였던 하박국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갈수록 어려워지는 상황 가운데 그는 살고 있었습니다. 피 토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으나, 하나님께 등 돌리고 살아가던 이스라엘이 전쟁의 위험, 다가오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앞에 서있습니다. 결국 북왕국 이스라엘은 주전 721년에 앗수르 제국에 의해 멸망을 당했었습니다. 북왕국이 망할 때 남왕국 유다는 아주 태연해 했습니다. 자기들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하박국은 더욱 간절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피토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도 그러나 갑자기 앗수르와 애굽을 제치고 강대국으로 부상한 바벨론이 주변의 나라를 공격하여 영토를 확장해 갑니다. 다음 차례는 유다를 공격할 것이라는 소식이 파다하게 퍼지면서 하루아침에 초상집이 되었습니다. 사납고 발 빠르기로 유명한 바벨론의 기병대가 이스라엘을 침공하려고 달려온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이제는 망했구나... 나라도, 교회도, 가정도, 다 망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창자가 뒤틀리듯 무서움을 느낍니다. 입술은 떨리고 뼈가 썩는 것 같은 아픔을 느낍니다. 총체적인 위기 상황 가운데 서있었습니다. 그런 상황 가운데서 하박국은 그렇게 표현 합니다: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3:16)." 얼마나 답답한 상황이었으면 환난의 소문을 듣고 그는 창자가 흔들리고, 입술이 심히 떨렸다고 표현합니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서있습니다. 조국의 흥망성쇠가 달려있는 상황입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답답한 상황에 직면하여 하박국은 그렇게 탄식 합니다: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는 소도 없도다. 짧은 한 절 속에 없다, 없다, 없다....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다.... 없다는 말이 6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암담하고, 절망적입니다. 다시 일어설 수 없는 소생 불가능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완전히 망한 상황입니다. 하박국은 그렇게 인생의 캄캄한 한밤중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런 상황 가운데서 하박국은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난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며 내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인생의 한밤중에 노래를 올려드리고 있습니다. 

Move 3: 한밤중에 올려드리는 찬양 

미국에 유학 와서 처음 만난 지도교수 가운데 한 분은 얼마나 철저한 분이었던지 처음 유학생활 2년 동안은 그분 때문에 참 많이 힘이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돌아보면 학문적으로 참 많은 도움을 주셨던 분이었습니다. 마지막 학기, 그분의 지도를 받아 석사 논문을 쓰고 있을 때 암 진단을 받고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습니다. 다행 초기여서 수술을 받고 항암치료까지 받고 잘 회복되었습니다. 

그 동안 그분은 치열하게 삶을 사시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북미 설교학회 회장도 역임하셨고, 출판된 저서는 많은 학자들에게 회자되면서 각광을 받는 학자로 발돋움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수술 받은 지 5년도 되지 않아 암이 재발했습니다. 온 몸에 암세포가 퍼져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 쾌유를 빈다는 편지를 보냈는데 돌아가시기 며칠 전 써 보낸 편지를 받았습니다. 대략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운용, 나는 지금 욥과 같이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밤을 보내고 있습니다. 견딜 수 없는 아픔이 몰려오면 모르핀의 힘이 아니면 그것을 도무지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단 한 시간도 잠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고통으로 얼룩져 있는 밤에 홀로 서있지만 욥이 고백한 것처럼 그 한밤중에 노래를 주셔서 나로 노래하게 하시는 분(욥 35:10)이심을 깊이 고백하게 됩니다. 당신이 나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다시 건강을 허락해 주셨으면 하는 마음이 나에게도 얼마나 간절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지금 건강할 때는 부를 수 없었던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두고 떠나야 하는 불안감과 안타까움이 있고, 어떻게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 있지만 오늘도 통치하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나니, 내 인생의 깊고 깊은 이 한밤중에도 노래하게 됩니다. 

편지를 받은 지 일주일이 지나지 않아 그분의 부음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는 그 도시를 떠나 다른 도시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고, 거리도 멀었고 학기 중이어서 장례식은 참석할 수 없었습니다. 그분이 돌아가신 후 투병하면서 선포한 설교들, 이런 편지들, 쓴 글들, 일기 등, 병상의 기록들을 모아 가족들이 책으로 엮어 출판을 했습니다. Songs in the Night(한밤중에 부르는 노래들)이라는 제목으로 책이 발간되었는데 그 분의 부친이 책을 한 권 보내주었습니다.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 일기를 보니 저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과 유사했습니다. 그분은 늦게 결혼해서 8살짜리 딸아이를 하나 두고 있었습니다. 
나는 정말 더 살고 싶다. 이제 8살을 넘긴 에이미도 돌봐주고 싶고, 또 자라는 것도 보고 싶다. 설교도 하고 싶고, 설교학도 가르치고 싶다. 또한 설교학계에 내놓은 나의 설교신학도 계속해서 발전시키고 싶다. 49살의 나이로 내 생을 이렇게 끝낸다는 것은 생각하면 너무 아쉽기만 하다. 

그것을 생각하면 말로 다할 수 없이 답답해지고 슬퍼진다. 그러나 그분의 장중에 나의 생애가 있음을 알기에 나는 모든 것을 그분의 손에 맡기고 이 답답하고 캄캄한 한밤중에 나는 홀로 서 있다. 절망할 것 밖에 없는 이 칠흑 같은 밤, 모르핀이 아니면 도무지 단 한 시간도 그 고통을 견딜 수 없는 고통의 밤에 나는 홀로 깨어있다. 그러나 내 인생의 이 한밤중에 주님은 내 입술에 감사의 노래들을 담아주신다. 이날까지 살게 하시고, 이 날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시고, 이날까지 주의 종들을 양육하게 하시고, 이날까지 주의 교회를 돌보게 하심에 감사하며 내 인생의 한밤중에도 나는 노래하고 싶다. 노래하고 싶다.... 

그렇습니다. 한밤중에 노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고통과 절망 속에 서있지만 그곳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았던 사람들...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은 인생의 캄캄한 한밤중에도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남의 이야기이니까 쉽지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절망할 수밖에 없는 시간에 감사가 쉽게 됩디까? 실패한 자리에 서있는데 기뻐할 수 있습디까? 오랫동안 아들에게 지혜주시라고 기도했는데 아들이 대학에 떨어졌습니다. 

집사이기 때문에 입만 열면 무작정 감사가 쏟아져 나옵디까? 갈수록 사업은 안 되고 문을 닫아야 할 상황인데, 입만 열면 무조건 감사가 나옵디까? 앞을 보아도 뒤를 보아도 길이 보이지 않는데 내가 목사이기 때문에 절로 감사가 나옵니까? 이것이 어디 쉬운 일입니까? 감사할 수 없는 상황인데 도대체 어떻게 감사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그냥 쉽게 이 말이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된 일은 아니었습니다. 한밤중에도 노래할 수 있었던 이유가 분명히 있었습니다. 하박국은 어떻게 한밤중에도 노래할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인생의 깊은 밤에 감사할 수 있었을까요? 우리는 그 이유를 찾기 위해 하박국서 1장 말씀부터 찾아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하박국 1장에 보면 하박국은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것은 감사의 기도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원망의 기도였고, 항변의 기도였습니다. 조국이 처한 현실을 보면 눈물이 쏟아져 나옵니다. 부르짖습니다. 절규합니다. 괴로움을 안고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하나님,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이게 말이나 됩니까?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어떻게 하나님이 살아계시는데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아무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잘못을 좀 했기로서니 그래도 하나님을 믿지도 않고 예배하지도 않는 이방인들보다는 더 낫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이방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전을 짓밟고, 강대상을 허물어 내릴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기도라기보다는 차라리 항변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따지고 있습니다. 불경스럽기 짝이 없는 사람입니다. 믿음이라고는 한 자락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도 목회자인데 어떻게 이렇게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렇게 불경스럽기 짝이 없는 기도를 드리면서 항변하고 있지만 하박국에게는 결코 흔들릴 수 없는 확고한 믿음의 고백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역사를 통치하신다... 하나님이 살아계신 분이심을 확실하게 믿기 때문에,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확실히 믿기에 그는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지요. 하나님, 대답 좀 해보세요. 하나님 살아계시는데, 하나님이 통치하시는데 어떻게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하심을 깊이 고백하면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기도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대한 인정이요, 하나님의 통치하심에 대한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데, 이 일이 어떻게 된 것입니까? 이것이 하박국의 항변의 기도의 내용이었습니다. 씩씩거리고 숨을 몰아쉬면서 이 모든 이상한 상황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설명)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렸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께 항변할 만큼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심정을 아시고 그의 항변을 받으셨습니다. 그러한 하박국을 향해 하나님은 말씀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하나님의 말씀은 하박국의 마음을 먹구름처럼 뒤덮고 있던 모든 의아심을 단번에 밀어내는 강한 바람과 같은 위력을 발휘했습니다. 하박국아, 세상 사람들은 재산이 늘어나고, 은행에 잔고가 늘어나고, 부동산이 늘어나고, 큰 집 사고, 큰 차 타고, 아이들이 좋은 대학, 좋은 직장 들어가고.... 세상 일이 잘되어 가는 재미로 산단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재미로 산단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2:4)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와 항변하듯 그의 아픔을 통해 놓는 하박국을 향해 하나님은 말씀을 준비해 놓고 계셨습니다. 삶이 어려우십니까? 답답한 인생길에 서있습니까?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십시오. 그리고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오늘도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설교자들을 통해서 오늘도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배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하박국의 마음은 실로 시원해졌습니다. 극심한 갈증 끝에 시원한 물 한 잔을 마신 것처럼 시원해졌습니다. 하나님이 종내 악의 세력을 물리치고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그는 깨달았습니다. 그는 전율합니다. 그들에게 엄청난 어두움과 아픔으로 다가오는 그 한밤중도 하나님이 통치 가운데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득세하면서 하나님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무시무시한 심판주로 오시는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을 바라보면서 그는 전율했습니다. 비록 자기는 힘이 없지만 그 하나님이 자기에게는 능력이요, 구원이요, 힘인 것을 새삼 깨달으며 그는 전율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이 어쩌면 이렇게도 생생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 고통과 아픔의 현장에 하나님이 우뚝 서 계시는 모습을 본 것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절대 절망의 자리에 하나님이 우뚝 서 계시는 모습을 발견하게 될 때 ‘없음의 상황’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박국은 거기에 우뚝 서계시는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는 그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하나님께서 어떻게 다스려 가시는지 나는 망루에 서서 지켜보리라.... 

3장으로 넘어오면 하박국은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고 있습니다. 3:3에 보면 하나님이 데만에서 부터 오시며 바란산에서부터 오시는도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데만과 바란산은 어디입니까? ‘시내산’과 동일한 지명입니다. 시내산이 어떤 곳입니까?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방황하고 있을 때, 모래 바람 이는 사막길을 얼마큼 더 가야 할지 알 수 없어 방황하고 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다가오셨던 곳이 시내산이었습니다.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광야에서 방황하고 불안해하는 그들에게 말씀을 주시고, 약속을 주신 곳이 시내산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너희는 나의 백성이다, 내 자녀들이다, 내가 돌본다, 내가 다스린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신 자리가 시내산이었습니다. 

과거를 돌아보다가 오늘 나의 삶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생생하게 만나고 있습니다. 과거에 자기 조상들의 삶 속에 역사하셨던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이 오늘 시공을 뛰어넘어 하박국에게도 동일한 감격으로 다가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신학자들은 과거 회상의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지나온 날들을 돌아본 것입니다. 지나온 시간, 지나온 자국들마다에 서 계셨던 하나님의 위대한 손길을 그곳에서 회상하게 됩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의 삶 속에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환난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늘은 비록 어려운 가운데 서있지만 과거에 역사하셨던 그 하나님을 오늘 여기에서 만나고 있습니다. 과거 회상의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기독교 예배는 과거의 회상 능력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예배와 예배 절기를 명령하실 때 그런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사건을 회상하며 살도록 예배의 절기인 초막절, 유월절, 오순절과 같은 절기를 지키게 했습니다. 초대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행하셨는지 회상하고 기억하기 위해서 주일마다 모여 말씀을 듣고 성만찬을 행했습니다. 성만찬(예배) 명령을 주시는 자리에서도 예배를 드릴 때마다 이것을 행하여 주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일을 기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고전 11). 이것은 예배 명령이지요.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행하셨습니까?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것을 기념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기념’이라는 말은 본래 원어에는 ‘아남네시스’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완벽하게 번역이 안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현대 예배학자들은 그 말 그대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때론 ‘회상’(recapitulation)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본래 ‘아남네시스’(anamnesis)라는 말에는 단순히 기억하는 정도가 아니라 과거의 사건을 끌어와서 오늘 여기에서 그것을 다시 맛보는 것, 그것을 경험하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예배는 단순히 십자가 사건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상하신 십자가의 사랑을 여기로 끌어당겨, 바로 여기에서 맛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배의 자리는 그런 자리입니다. 

기독교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사건을 회상하는 것으로서의 성만찬과, 주님의 부활하심과 살아 계심에 대한 선포와 경축으로서의 말씀선포를 중심축으로 합니다. 예배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한 가지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건과 인도하심의 사건을 과거를 회상하는 능력입니다. 하박국은 지금 과거에 조상들의 어려운 삶 속에서 역사하신 하나님, 다가오셔서 말씀하시고, 친히 언약을 체결해 주신 하나님, 그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사건을 끌어당겨 여기에서 맛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람들이 과거를 회상하는 능력을 가질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선물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비전 능력’입니다. 과거에 나를 인도하시고 도와주신 하나님을 오늘 여기에서 만나게 되고, 그분의 신비의 가장자리에 서서 그분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면 한 가지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이지요. 장래에도 나를 인도하실 것을 확신하는 비전 능력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예배학자들은 ‘프로렙시스’(prolepsis)라고 말합니다. 이 라틴어의 의미는 미래의 사건을 끌어당겨서 여기서 맛본다는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장래 하나님 나라에 가서 맛보게 될 어린양의 혼인잔치를 끌어당겨 여기에서 맛보는 것입니다. 주님의 영광 보좌 곁에서 먼저 간 성도들과 24 장로들과 천군과 천사들과 함께 부를 감격의 찬송을 오늘 여기에서 끌어당겨서 미리 맛보는 것이 ‘프로렙시스’입니다. 

기독교의 예배는 이렇게 과거와 미래가 오늘 여기에서 만나는 지점입니다. 과거에 나를 도와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사건들을 끌어당겨 여기에서 맛보는 것이고, 장래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가서 맛보게 될 은혜를 끌어당겨서 여기에서 맛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터질 듯한 감격일 수밖에 없고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춤추는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이 선배들이 그래서 생명을 걸고 예배를 드렸고, 그런 감격의 예배를 경험했기에 그들은 그 모진 환란과 박해도 이길 수 있었던 것이지요. 

한국의 최초의 신학교인 저희 장로회신학대학교는 지난 2001년 개교 백주년을 지냈습니다. 마포삼열 박사 1901년 평양의 자기 집 안방에서 학생 두 사람을 데리고 학교를 시작했는데, 이제 2,500여명의 학생들을 가진 신학교가 되었습니다. 설립자의 아들인 사무엘 마펫 박사가 개교 100주년 국제학술대회 강사로 오셔서 한 이야기가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한국교회의 성장, 장로회신학대학교의 성장은 가히 세계적인 자랑거립니다. 가르친다고 할 것도 없이 서로 가르치고 배우면서 시작되었던 이 학교가 이렇게 큰 학교가 된 것, 수천 명의 한국 사회와 교회의 지도자를 배출하게 된 것은 얼마나 감사하고 기쁜 일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학교의 영광스러운 오늘의 모습만 보지 말고, 이 학교가 피난민 신학교(refugee seminary)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평양에 있던 학교가 왜 서울에 와있는지를 기억하라는 요구였습니다. 민족 분단의 비극과 전쟁으로 인해 평양에서 서울로 내려왔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일꾼을 양육하기 위해 전쟁의 폐허 속에서 피난민 천막 가운데 다시 학교를 시작했습니다. 한국교회가, 한국 사회가 이날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잊으면 안된다는 경고였습니다. 지도자들이 오늘의 영광에 취하여 과거 회상 능력을 상실하거나, 영광스러움에 취하여 비전의 능력을 상실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십시오. 살아오신 지난날들을 돌아보십시오.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참 힘이 들지 않았습니까? 아픔이 있었지만 거기에서 하나님과의 감격스런 만남이 있었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있었고,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로 이날까지 살아왔습니다. 굽이굽이 참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이만큼 살게 되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하나님의 은혜 아닌 게 어디 있습니까? 답답하고 안타까운 날들도 있었지만 돌아온 인생의 구비 구비를 돌아보면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이 없었다면 어떻게 여기까지 이르게 되었겠습니까? 어떻게 이 날까지 살아올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렇습니다. 은혜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면 고백하게 됩니다. 하나님, 내 잔이 넘치나이다. 

오늘 상황이 어렵습니까? 답답한 분들이 있습니까? 오늘의 현실에만 눈길을 두지 말고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십시오. 과거에는 어려움이 없었습니까? 있었습니다. 답답한 일이 없었습니까? 있었습니다. 고통스럽고 밤잠을 이루지 못할 고민들이 없었습니까? 있었습니다. 아프고 힘들던 시간이 없었습니까? 있었습니다. 서럽고 외롭던 시간들이 없었습니까?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여기까지 우리를 인도해 주셨습니다. 도와주셨습니다. 다스려 주셨습니다. 어려운 수렁에 빠진 적도 있고, 늪을 헤매야 했던 시간들도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 때 그때마다 놀라운 은혜들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사람이 언제 잘못될 수 있습니까? 과거를 회상하는 능력을 상실할 때입니다. 어려움은 언제나 있습니다. 하박국은 지금 어려움 가운데 있습니다. 아무리 돌아보아도 감사할 수 없는 상황 가운데 서 있습니다. 그러나 지나온 시간들 속에서 생생하게 역사 하셨던 하나님의 손길을 기억하고, 오늘도 나의 삶의 모든 부분이 하나님의 통치하심(God''s reign) 가운데 있음을 고백할 수 있었기에 어두운 밤에도 노래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인생의 모퉁이를 돌아가면서 참 어렵게만 느껴질 때,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심을 확신한다면 우리도 넉넉히 이기게 될 것입니다. 

특별히 저는 인생길에서 답답해하고 힘들어할 때 하나님께서는 늘 찬양을 통해 응답을 주시는 것을 경험하곤 합니다. 언젠가 답답하고 힘들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모든 것은 뒤죽박죽이 되었고, 부조리한 현실 앞에서 분노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삭여지지 않는 분노감에 붙들려 그해 가을과 겨울, 봄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영성 수련회에서 하나님은 찬양 가운데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상한 나의 마음과 분노로 얼룩진 가슴을 쓰다듬으시며 고백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으시고/ 언제나 공평과 은혜로 나를 지키셨네/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하신 주/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약속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이 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 지나온 모든 세월들 돌아보아도/ 그 어느 것 하나 주의 손길 안 미친 것 전혀 없네.... 

아침안개 눈앞 가리듯 나의 약한 믿음 의심 쌓일 때/ 부드럽게 다가온 주의 음성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마라/ 빗줄기에 바위 패이듯 나의 작은 소망 사라져갈 때/ 고요하게 들리는 주의 음성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외로움과 방황 속에서 주님 앞에 나아갈 때에/ 위로 하시는 주님 나를 도우사 상한 나의 영혼 감싸 주시네/ 십자가의 보혈로써 주의 크신 사랑 알게 하셨네/ 주님께 감사하리라... 언제나 주님께 감사해 

Move4: 하나님은 다 옳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박국은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다가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늘 옳았습니다. 우리가 보는 것과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다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덜 행복한 것을 더 행복한 것처럼 보고, 덜 좋은 것을 더 좋은 것으로 보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행복하고 가장 좋은 것을 정확히 보시는 분이십니다. 가장 좋은 때에 그것을 허락하십니다. 한낮의 더위가 땀 흘리게 하고 답답하게 해도 그때 곡식이 익어갑니다. 한겨울의 추위가 온몸을 얼어붙게 해도 그때 땅 속의 온갖 병충들이 다 죽게 하는 때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옳습니다. 

답답하고 어려운 일을 당하고 있었지만 욥도 그렇고, 하박국도 그렇고, 하나님 앞에 항복하고 무릎 꿇은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들이 우리들만 못한 사람들입니까? 세상 지식으로 우리만 못한 분들입니까? 영적으로 우리만 못한 분들입니까? 그들도 이 계산 저 계산 다 해봤을 겁니다. 그러나 모니터에 비쳐지는 정답은 언제나 한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옳으시다! 어느 회사 선전 문구는 이것입니다. 고객은 항상 옳습니다. 공처가의 십계명 가운데 제 일계명은 그것입니다. 

부인은 항상 옳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서는 옳은 것은 고객도 아니고 부인도 아닙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옳으십니다. 이것이 노래할 수 있는 이유였습니다. 예배할 수 있는 이유였습니다. 감사할 수 있는 이유였습니다. 

어느 뜨거운 여름날 한 농부가 호두나무 그늘에 앉아 쉬고 있었습니다. 앞쪽에 보니까 호박넝쿨이 눈에 띄었습니다. 호박넝쿨에는 한 개의 큼직한 호박이 매달려 있었습니다. 농부는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하나님도 참... 생각을 좀 해보시면 알텐데... 이렇게 큰 나무에는 조그만 것을 달아놓고, 가느다란 줄기에는 큰 호박을 매달아놓고... 생각을 하면서 창조를 하셔야지... 쯧쯧...." 하고 혀를 차면서 호두나무 밑에서 그만 잠이 들었습니다. 한참을 자고 있는데 누가 머리를 딱 때리는 것입니다. 

누구야! 하고 일어나 보니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옆에 호두 하나가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 순간 호두나무를 쳐다보고, 호박넝쿨을 쳐다보고 난 후, 즉각적으로 그는 무릎을 꿇었습니다. 아이구,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하나님, 저 약한 호박 넝쿨에 큰 호박을 매다신 일은 참 잘 하신 일입니다. 그리고 이 호두나무에 저 작은 열매들을 매다신 일도 참 잘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옳으십니다. 

이것을 하박국이 깨달았을 때 지금 처한 현실이 설사 안 좋아 보여도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한다고 고백했습니다. 그 놀라우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바라본 것이지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확신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확신한 것이지요. 이 말을 하는 하박국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습니다. 기쁨에 넘쳐 있습니다. 삶의 조건은 감사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기뻐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 무엇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참 어려운 시간들을 보냈으나 그 가운데서도 믿음을 지키며, 교회를 세우고, 믿음으로 가정과 자녀들을 세웠습니다. 가난하고 배고프던 시절에도 허리띠를 졸라매며 주님을 섬겼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 달려갔습니다. 저도 춘궁기 마지막 세대인데, 어릴적 시골에서 자라던 때가 기억이 납니다. 봄철이 되면 거의 대부분의 집집마다 식량은 떨어지고 보릿고개가 시작됩니다. 들판에 푸른 보리밭을 보면서 저것이 빨리 자라기를 간절하게 기다리면서 춘궁기를 보냅니다. 

춘궁기에는 점심을 먹었던 때보다는 먹지 못했던 때가 더 많았습니다. 그때 학교 다녀오면 배고프니까 들로 산으로 나갑니다. 소나무껍질도 벗겨먹고, 보리 이삭도 슬쩍 꺾어다가 보리 서리도 해 먹었습니다. 들판에서 내려오면 얼굴은 고양이수염이 그려져서 내려오고는 했지요. 그렇게 해서 6월이 되면 드디어 보리를 베기 시작하고 타작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리 추수하면 제일 먼저 하나님 앞에 들고 나오는 것입니다. 

아침 9시에 조그만 봉지에 보리 가득 채워 들고 가서 예배드리고 내려오면 보리를 가득 넣은 자루를 머리에 이고 교회당에 올라가시던 어머니의 눈에 눈물이 어린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 이번 춘궁기에도 우리 새끼들 굶어 죽지 않게 하시고, 이렇게 지켜주시어서 감사합니다. 하나님 주신 첫 열매입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 그것 다 먹어도 부족하기만 한데, 그것까지 다 먹어도 내년 봄이면 배고픈 사랑하는 아이들을 들로 산으로 내몰게 될 텐데, 그래도 상관하지 않고 눈물의 감사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그렇게 예배를 드렸습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 어려운 사람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에게는 이제 보릿고개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잘 섬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배가 어디에서부터 시작됩니까? 감사가 어디에서부터 시작됩니까? 찬송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고, 헌신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지금까지 지켜주신 하나님을 만남으로부터입니다. 누가 나를 이날까지 살게 하시고, 누가 이날까지 나를 인도해 주셨는가를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김현승 시인은 그렇게 고백합니다. 감사하는 마음 그것은 아는 마음이다. 주인이 누구인지, 내가 누구인지... 가졌기에, 배불렀기에 더 이상 감사하지 않습니다. 가슴 벅찬 예배를 드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선배들은 아무 것도 없는 가운데서도 예배를 드렸고, 감사의 제단을 쌓았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넉넉해지면 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 이생진 시인이 개미를 관찰하다가 쓴 시 가운데 그렇게 노래합니다. 가진 것이 없으면 하늘을 자주 보게 된다. 가진 것이 많은 개미는 하늘을 보지 않는다. 머리를 땅에 박고 땅만 뒤진다. 개미만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조금 넉넉해지면 교만해 집니다. 조금 여유가 있으면, 어려운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땅만 바라보면서 삽니다. 그것이 전부인줄 알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삽니다. 그러나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렇게 고백합니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섬기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하나님은 오늘도 일하고 계십니다. 나의 평안한 때도, 고난의 때도, 모든 형통할 때도, 나의 실패의 때에도 하나님은 정확하게 인도하시고,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을 하박국이 발견하게 되고, 새롭게 고백하게 되었을 때, 그는 인생의 한밤중에도 노래할 수 있었습니다. 절망의 순간에도 그는 하나님 때문에 노래하게 되고, 하나님 때문에 감사하게 된다고 고백합니다. 

평안함 가운데 서 있습니까? 모든 일이 잘되고 있습니까? 그래서 넉넉함에 취하고, 배부름에 취하여 감사하지 못하고 있습니까?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자기가 인생의 주인처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밤중에 서있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회복하십시오. 그때에도 노래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난 여호와 즐거워하며 내 구원의 하나님을 인해 기뻐하리라. 

Move5: 믿음의 전성기를 이루게 하소서 

그렇습니다. 하박국이 드린 감사는 사실 ‘그렇기 때문에''의 감사였습니다. 주님이 선하시기 때문에 감사, 과거에 베풀어주신 은혜 때문에 감사, 주님이 모든 것을 다 주셨기 때문에 감사, 주님의 십자가 때문에 감사, 주님의 약속 때문에 감사, 하나님의 인도하심 때문에 감사, 주님이 구원해 주실 것이기에 감사, 미래의 영광 때문에 감사, 주님이 결국에는 승리케 해 주실 것이기 때문에 드린 감사였습니다.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수많은 은혜들을 깨달았기에 어려움의 한복판에도 승리하는 예배자가 됩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하나님 때문에 감사의 노래를 드리고, 그 하나님을 향해 가슴 벅찬 예배를 올려드리는 예배들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젊은 날에도 노년에도 이 믿음으로 사시는 것입니다. 한낮에도, 한밤중에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예배하면서 이 걸음으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일본에 가난한 목사의 아내로서 4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하라자끼 모모꼬라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가 악성 폐암 선고를 받았을 때 남편은 고생만 한 아내에게 그 사실을 차마 알릴 수가 없었습니다. 숨겨오던 남편은 이제 몇 주밖에 못 산다는 의사의 판정이 떨어졌을 때 무거운 입을 열어 아내에게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녀는 곧 남편에게 노트 두 권을 사다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녀는 그 말을 듣고 그날부터 시작해서 있는 힘을 다해서 생명이 붙어 있는 44일 동안, 죽기 이틀 전까지 글을 썼습니다. 

죽기 하루 전날도 자기 남편에게 구술로 일기를 부탁해서 썼습니다. 이것은 이 여인의 유서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간증이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그녀가 사랑했던 주님 앞에 삶의 마지막 순간을 드린 간증이었습니다. 그녀가 남긴 이 책은 다른 어떤 책보다도 일본인들에게 강한 감동을 불러일으켰고,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로 회개하고 주님 앞에 돌아오게 하는 전도의 문서가 되기도 했다고 하지요. 남편의 입에서 당신이 악성 폐암에 걸렸소. 

의사가 두 주일 남았다고 하오라는 선언을 들은 그 날의 일기가 이렇게 시작됩니다. 내 마음은 주를 경배하며, 내 영혼은 내 구원이 되신 하나님을 기뻐하노라. 오늘이라는 날, 1978년 6월 28일을 나는 분명히 적어 놓아야만 하겠다. 오늘은 내 길지 않은 생애에 있어서 획기적인 날이 되었다. 나의 생애는 오늘부터 시작된다. 이제부터가 진정한 삶이다..... 

7월 30일, 그녀는 교회에 갈 수 있는 모든 기력을 상실했습니다. 그 날은 주일이었습니다. 예배에 나갈 수도 없고 앉아있을 수 있는 기력도 다 상실했기 때문에 예배 시간 혼자 병상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날 그녀는 예배를 마치고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에게 마지막 일기를 이렇게 썼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신앙이란 단순히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는 정도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으로 믿고 그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는 것이란다. 아들아, 엄마는 엄마의 병을 잘 알고 있다. 머지않아 더 심한 육체의 괴로움이 엄습해 올 것이라는 것도 각오하고 있다. 그러나 얼마에게 더 분명하게 알려진 사실은, 이 모든 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아직도 사랑이시며 신실하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사랑은 엄마가 어렵고 힘들 때 더욱 더 깊게 엄마를 감싸주고 계시다는 것이다. 또 무엇보다도 우리 주님께서 엄마와 함께 계셔서 곧 하나님의 나라로 데려다 주시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단다. 

아들아, 제발 고통스러운 이 엄마를 보아라. 엄마의 최후를 꼭 지켜보아 주기를 바란다. 엄마의 육체가 식어져 굳어졌을 때, 거기에 죽어 있는 것이 엄마가 아님을 확인해 다오. 죽는 것은 육체일 뿐이다. 이 엄마의 나그네 길에서 엄마는 육체를 남기고 떠나는 것이란다. 엄마는 여기를 떠나서 어딘가로 갔다는 것을 너도 알게 될 것이다. 어디에 갔을까? 어느 분 앞으로 갔을까? 하나하나 네가 스스로 기도하고 말씀을 읽으면서 해답을 얻어 보아라. 사랑하는 아들아! 그것이 내가 너에게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선물이다." 

극한 고통과 절망 속에서 하늘의 소망과 그 분의 은총만을 바라보며 한 밤중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한밤중에도 노래하고 있다면 밝은 대낮을 지내고 있다면 더욱 노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인생을 접어야 하는 순간에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찬양했다면 지금 하나님이 들어 사용하고 계신다면, 하나님 앞에서 기회와 평안의 복을 허락받았다면 더 잘 섬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의 남은 생애 가운데 한밤중과 같은 시간도 있고, 한낮과 같은 시간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이 다스리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것을 믿는다면 어려움의 한복판에서 우리는 다만 하늘 향해 두 손을 높이 들고 그렇게 고백하며 사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가 구할 것은 그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믿음으로 살게 하옵소서! 기왕 믿음 생활을 할 바에는 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올 한해가, 나의 젊은 날이, 나의 중년의 때가, 나의 노년의 때가 믿음의 전성기가 되게 하소서!  (김운용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추천인 1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