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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절] 여호와를 위하여 초막절을 지키라 (레 23:3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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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를 위하여 초막절을 지키라 (레 23:33~44)


얼마 전에 '자기야'라는 제목의 텔레비전 오락프로를 하나 보았는데, 도중에 어떤 일본 여자와 결혼을 한 어느 가수가 자기 아내의 생각을 맞추는 게임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문제 중에 하나가 "아내가 남편이 꼭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날이 무엇인가?"하는 것이었는데, 대답은 "아내의 생일"과 "결혼기념일"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문제를 보는 순간 '꽤 까다로운 선택'이라고 생각이 들면서 '남편이 아내의 생일이야 으레 기억할 테니까 결혼기념일을 기억해 주는 것이 서로 결혼한 부부가 된 사이에서는 더욱 의미 깊은 일이 아닐까?'라고 제 나름대로 결론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가수 남편은 별로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아주 간단하게 "아내의 생일"이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제 짐작과는 달리 그것은 정답이었습니다.
  
더욱 의외의 사실은 비단 그 남편뿐 아니라 동석해 있던 다른 모든 남편과 아내들이 그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완전히 만장일치로 "아내의 생일"을 꼽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저는 저 혼자만 '이방인'이 된 것 같은 느낌에 약간 충격을 받았습니다만, 다시 생각해 보니 '아내가 자기 남편이 꼭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날'이니까 아무래도 '아내 자신에 대한 것'이 강조될 수밖에 없는 까닭에 '서로의 날'인 결혼기념일보다는 '자기의 날'인 생일이 당연할 수밖에 없겠다고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남편들 중에 그 가수처럼 상당히 신세대에 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내 생일'을 기억하고 축하해 주는 것조차 까먹는 남편들이 얼마나 많기에 아직도 아내들이 남편에게 '자기 생일을 꼭 기억해 주기를' 그렇게 이구동성으로 간절히 바라고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꼭 '기억하고 지켜 주기를' 명하시는 한 절기를 말씀하고 있는데 그것이 곧 '초막절'이었습니다.
  
이것은 본문 곳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지킬 것이라', '이는 여호와의 절기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지키라'는 말씀들이 계속 반복적으로 강조되고 있는 것을 보아서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 초막절이 그처럼 하나님을 위하여 지켜져야 할 절기인 까닭에 그것이 어떻게 지켜져야 할 것인지에 대하여서도 당연히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할 것임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주어진 말씀을 통하여 오늘날의 '초막절'에 해당되는 '추수감사절'을 과연 어떻게 지켜야 할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추수감사절은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대대로' 지켜야 할 절기입니다.

본문 33절부터 36절까지에 기록하기를 "33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34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칠월 십오일은 초막절이니 여호와를 위하여 칠일 동안 지킬 것이라 35첫날에는 성회가 있을지니 너희는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며 36칠일 동안에 너희는 화제를 여호와께 드릴 것이요 제 팔일에도 너희에게 성회가 될것이며 화제를 여호와께 드릴지니 이는 거룩한 대회라 너희는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니라"고 했습니다.

유월절과 오순절과 더불어서 이스라엘의 3대 절기 중의 하나였던 초막절은 "칠월 십오일"부터 시작되어 "칠일 동안" 지켜졌으며 "제 팔일"에 "거룩한 대회"라는 특별성회를 모임으로써 마감되었는데, 여기서 언급되는 날짜들은 이스라엘의 '종교력'에 따른 것으로서 오늘날의 태양력으로 계산할 때에는 9월 말부터 10월 초까지에 해당됩니다.
  
이 시기는 나중에 본문 39절에서 "너희가 토지 소산 거두기를 마치거든"이라고 한 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해의 모든 곡식과 과일을 다 추수한 직후였으므로 우리나라로 치자면 바로 '추석'에 해당되는 명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초막절'을 '거둘 수(收)'와 '감출 장(藏)' 자를 써서 '수장절(收藏節)'이라고도 부르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 초막절의 한 주간을 어떤 스케줄을 따라서 지켜야 할지도 역시 상세하게 지시되어 있는데, 먼저 "첫날에는 성회가 있을지니 너희는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며"라고 했습니다.
즉 초막절이 시작되는 날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과 똑같은 마음과 자세로 예배드리면서 지켜야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칠일 동안"에도 내내 "화제를 여호와께 드리면서" 지켜야 했으며, 마지막 날 "제 팔일"에는 초막절뿐 아니라 나팔절과 속죄일 등 7월의 모든 특별절기들과 그 해의 모든 종교적 행사들을 끝내는 의미의 '거룩한 대회'를 모임으로써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어 있었습니다.

신명기 16장 16절 상반절에 보면 "16a너희 중 모든 남자는 일년 삼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이 초막절을 지키는 것이 이스라엘의 모든 성인 남자들에게 필수적인 의무라고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것입니다.
  
본문 34절에서도 역시 모든 "이스라엘 자손"은 이 초막절을 "여호와를 위하여 칠일 동안 지켜야" 한다고 명백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여호와를 위하여'라는 말씀은 '여호와께 예배를 드리면서'라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주변의 이방 민족들, 아니 사람들이 농경사회를 이룩한 이후 대부분의 민족들이 다 추수에 대한 고유의 축제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냥 '사람들끼리만' 즐거워하고 축하하는 명절일 뿐이며, 더구나 대부분의 경우에 다 우상숭배나 미신행위와 밀접하게 연결되기 마련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의 '초막절'은 그런 불신자들의 세속적인 추수 명절과는 달리 '하나님의 선민이 하나님께' 추수감사의 제사로 감사드리면서 지켜야만 할 '거룩한 절기'였던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교인들 가운데는 "요즘 현대인들 중에는 자기가 직접 농사를 짓고 추수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데 추수감사절이라는 절기를 지킨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느냐?"라고 반박하는 사람이 가끔 있습니다.
아니, 현대인들은 '밥'을 안 먹고도 살 수 있습니까?
소위 '2차 산업'이나 '3차 산업'에 종사하고 있는 현대인들은 '1차 산업'을 통하여 생산되는 작물이 없어도 얼마든지 먹고 살 수 있다는 소리입니까?
  
아무리 다른 '생산업이나 서비스업'이 많이 발전된다 하더라도 인간의 생존에 가장 기본적이고도 필수적인 것은 역시 '일용할 양식'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영농기술이 과학적으로 발전한다 해도 그 논밭의 작물이 자라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무한대로 공급해 주시는 햇볕과 비가 없으면 '단 한 톨'도 어림 없는 일입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이 추수감사절을 '대대로' 지켜야만 합니다.
풍작이든지 흉작이든지 간에 관계없이 매년 지켜야 할 절기입니다.
호경기 때뿐 아니라 불경기라고 해도 반드시 지켜야 할 절기입니다.
개인적으로 좋은 일이 특별히 많은 해에만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온갖 환난이 특별히 많았던 해라도 상관없이 필수적으로 지켜야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추수감사절은 '내 인생을 축하하고 내 삶을 즐기는 명절'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그런 나 자신의 생존을 영위해 주신 '여호와를 위하여' 지켜야 할 절기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택하신 선민'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할 이 특별한 절기, 사람들끼리 즐거워하는 명절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감사드리면서 지켜야 할 이 '하나님의 절기'를 매년, 대대로 거룩하게 지키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추수감사절은 '특별한 감사예물을 바치면서' 지켜야 할 절기입니다.

37절과 38절에 "37이것들은 여호와의 절기라 너희는 공포하여 성회를 삼고 번제와 소제와 희생과 전제를 각각 그 날에 여호와께 화제로 드릴지니 38이는 여호와의 안식일 외에, 너희의 헌물 외에, 너희의 모든 서원 예물 외에, 너희의 모든 낙헌 예물 외에 너희가 여호와께 드리는 것이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 37절에서 "이것들"이라는 복수대명사가 나오는 것은 이 두 절들에서 언급되는 제사들이 단지 '초막절'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본문 앞에 나오는 7월의 다른 두 절기들 즉 '나팔절'과 '속죄일'에도 공히 적용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이것들은 여호와의 절기라"고 했는데 이 말씀은 '여호와께서 정하신 절기'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여호와께서 정하신 절기'인만큼 그 "성회" 기간 중에 당연히 바쳐야 할 특별한 제물들 역시 하나님께서 정해 주셨는데, 그것들은 곧 "번제와 소제와 희생과 전제" 그리고 "화제"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번제'와 '소제'는 구약의 5대 제사의 '종류'들 중에 포함되는 것들이며, '희생'이란 하나님께 동물로써 드려지는 제사들을 위하여 바쳐진 각종 짐승의 제물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반면에 '전제'와 '화제'라는 것은 그런 제물들을 제사드리는 '방법'을 가리키는 것인데, 전자는 포도주나 기름 혹은 짐승의 피를 '부어서' 바치는 것이며 후자는 제물을 '태워서' 바치는 제사 방법입니다.
액체로 된 제물을 땅에 붓는 것이나 짐승의 희생물을 완전히 태우는 것이나 둘 다 다시 원래의 상태로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즉 '전제'나 '화제'는 그 제물이 하나님께 '완전히 바쳐지는' 제물들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초막절 기간에는 이처럼 번제와 소제를 비롯한 각종 감사제물과 희생들을 전제와 화제를 통하여 첫날부터 시작하여 7일 동안, 그리고 마지막 제8일의 성회에 이를 때까지 계속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그리고 신명기 16장 16절에 보면 "무교절"과 "칠칠절(오순절)" 때와 마찬가지로 "초막절"에도 역시 "모든 남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라고, 이와 같은 감사제물들을 반드시 가지고 나와야 한다고 엄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본문 38절에서는 또 하나 의미심장한 명령이 추가되고 있는데 곧 "이는 여호와의 안식일 외에, 너희의 헌물 외에, 너희의 모든 서원 예물 외에, 너희의 모든 낙헌 예물 외에 너희가 여호와께 드리는 것이니라"라는 말씀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은 평상시에도 안식일마다 정해진 번제와 소제를 바쳤는데, 그 안식일이 초막절을 비롯한 다른 절기와 겹치게 될 경우에는 자연히 제물 역시 같은 것이 중복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경우에도 절대로 한 쪽을 '생략'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비록 똑같은 제물이 중복되더라도 이 모든 '초막절의 예물'은 원래 '안식일의 예물 외에' 평소에 드리는 '서원 예물이나 낙헌 예물 외에' 따로 드려야 마땅하다고 아주 구체적으로 지시하신 것이었습니다. 

불신자들은 그네들의 '추수 잔치'에 해당되는 추석을 지킬 때에 '조상 앞에' 제물을 차려 놓습니다.
즉 '죽은 조상' 덕에 자기네 농사가 잘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왜 그 제사상 앞에서 절만 한 번 꾸벅하고서 정작 그 제물은 자기네들이 먹습니까?
그것은, 속된 표현을 빌리자면, 조상의 은덕에 감사하기는커녕 사실상 '죽은 조상을 약 올리는 행위'가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 기독신자는 감사제물을 형식적으로 단 위에 한 번 올려놓은 후에 나중에는 자기네들이 챙겨 먹는 그런 위선적인 제사를 드리지 않습니다.
'전제'와 '화제로', 남김없이 '붓고' 완전히 '태워서' 다 하나님께 바칠 따름입니다.
즉 우리의 진정한 감사예물은 단 한 푼도 남김없이 다 하나님께 바쳐져서 오직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위하여 쓰여야 마땅할 뿐인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추수감사절에 특별감사헌금을 바친다고 해서 매주일 늘 바치던 십일조나 주일헌금이나 그 외 각종 서원헌금들을 생략해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추수감사헌금'은 문자 그대로 추수감사절에 드리는 '특별헌금'이며 그 외의 각종 헌금들과는 분명히 구별되어야 할 헌금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추수감사헌금을 이렇게 많이 바치니까 평소에 하던 주일헌금들은 좀 생략해도 되겠지.'라고 '쩨쩨한 잔머리를 굴리는' 교인이 혹시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그처럼 감히 만홀히 여기지 말라고 '이는 너희의 모든 평소 헌물과 서원 예물 외에' 바쳐야 하는 것이라고 이처럼 미리 못을 박고 계시는 줄을 깨달아야 합니다.
'여호와의 절기'를 위하여 '여호와께서 친히 정하시고 명하시는 대로' 정성된 특별감사예물과 아울러 평소에 드리던 각종 주일헌금까지 온전히 바침으로써 자신의 넘치는 감사를 하나님께 진심으로 표현해 드릴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추수감사절은 '하나님 앞에서 크게 즐거워하면서' 지켜야 할 절기입니다.

39절 이하 44절의 말씀에 "39너희가 토지 소산 거두기를 마치거든 칠월 십오일부터 칠일 동안 여호와의 절기를 지키되 첫날에도 안식하고 제 팔일에도 안식할 것이요 40첫날에는 너희가 아름다운 나무 실과와 종려 가지와 무성한 가지와 시내 버들을 취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칠일 동안 즐거워할 것이라 41너희는 매년에 칠일 동안 여호와께 이 절기를 지킬지니 너희 대대로의 영원한 규례라 너희는 칠월에 이를 지킬지니라 42너희는 칠일 동안 초막에 거하되 이스라엘에서 난 자는 다 초막에 거할지니 43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44모세가 여호와의 절기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공포하였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초막절(草幕節)'이라는 명칭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절기를 그 일주일 기간 내내 '초막'이라는 일종의 '야영 텐트'에 거하면서 지켜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본문 40절에 보면 그 초막절 "첫날"에 "종려 가지와 무성한 가지와 시내 버들을 취하라"고 되어 있는데, 바로 이런 재료들을 이용하여 임시 거처인 '초막'을 만들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자신의 안락한 집을 떠나서 그런 야영 거처에서 그것도 한 주일씩이나 생활한다는 것은 분명히 매우 귀찮고 불편한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께서는 한 해의 수확을 거두어들이고 하나님 앞에서 감사드리는 그 '즐거운 절기'를 적어도 "이스라엘에서 난 자"라면 한 명도 예외 없이 다 그런 "초막에 거하면서" 지키도록 아예 "대대로의 영원한 규례"로 세우신 것이었습니까?

그 이유가 바로 43절 이하에 설명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하게 한 줄을" 이스라엘의 후손들 역시 "대대로 알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할 때에 그들은 무려 40년 동안 일정한 거주지 없이 '장막'에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정착생활'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그 자체만 보아도 엄청난 축복이요 결코 잊을 수 없는 감사제목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은 '옛날 고생했던 시절'을 쉬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출애굽 직후에 태어난 세대는 직접 경험해 보았으니까 그래도 좀 더 오래 기억을 할 수 있겠지만 그들조차 가나안 땅에서의 안락한 생활에 익숙해지면 질수록 과거의 고생은 점점 더 잊게 될 것이며, 특히 태어날 때부터 '주택'에서 살아온 이스라엘의 가나안 세대는 그런 '장막 생활'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커녕 무엇인지도 알 리가 만무했습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일부러 그 '추수 감사의 절기'에 모든 이스라엘 사람으로 하여금 '초막'에 거하게 하심으로써 그들이 과거에 광야에서 장막에 거하면서 지냈던 어려운 시절을 꼭 상기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초막절'은 '장막절(帳幕節)'이라고도 불리게 된 것이었고, 바로 그런 마음으로 지킬 때에 그 초막절은 더욱 '하나님 앞에서 칠일 동안 즐거워하는' 축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사람은 과거에 힘들었던 시절, 못 살았던 때를 돌이켜 보면 볼수록 지금 현재 누리고 있는 것들이 더욱 고마워지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해방 직후의 세대를 경험해 보신 어른들은 다 잘 알고 계시는 사실이지만, 정말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가 북한이나 동남아시아의 신흥국들보다 더 못살았지 않았습니까?
그때를 상기해 보면 지금 우리가 매일 누리고 있는 '의식주'만 생각해도 정말 '눈물겨운 감사'가 나오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시절을 전혀 모르는 신세대 청년들과 학생들은 이런 감사절 때만이라도 각자 개인적인 '영적 초막'을 치고서 지금 여러분들이 누리고 있는 '가나안 정착 생활'이 얼마나 부요한 것인지를 깨닫고 여러분의 부모들과 영적으로 똑같이 공감되는 '진심의 감사'를 하나님께 드릴 줄 알아야 합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우리 교회가 옛날 '셋방 예배당'을 전전하던 시절을 회상하면서 지금 이 멋진 '강서성전'에서 주일마다 모이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몇 년 동안 불안하기 짝이 없는 세계적인 금융위기와 IMF 때보다도 더 어려웠다는 국내의 불경기를 통과해 오면서도 우리가 망하지 않고, 굶어 죽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그 감사는 더욱 뜨거워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니 내 평생토록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고 진심으로 고백된다면, 우리는 비단 추수감사절뿐 아니라 매주일이 다 '지난주일보다 더 많은 감사의 제목들이 쌓이는 새로운 감사절'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과거의 어려운 시절'을 회상할 줄 아는 것만큼 '감사절의 즐거움'은 더욱 커지게 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옛날에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국가적으로, 그리고 교회적으로 '광야생활'하면서 고생했던 시절을 상기함으로써 오늘의 추수감사절을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더욱 즐거운 마음으로 지키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불신자들의 '추석'은 그야말로 오직 '사람을 위한' 명절일 뿐입니다.
사람 저희들끼리 추수를 축하하고 사람들끼리만 모여서 먹고 즐기는 절기인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의 '추수감사절'은 '여호와를 위하여 지켜야 하는' 절기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절기를 지키게 된 모든 원인과 이유가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만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결코 추석이 추수감사절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절기'는 '세상의 명절'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며 당연히 따로 성별해서 지켜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런 차이는 또한 그 절기를 지킨 후에도 각각 판이하게 다른 결과들로 나타나게 됩니다.
가을의 수확을 두고 사람이 자기 노력으로 이룬 것이라고 자화자찬하고 자만하는 가운데 유흥에 빠지는 '추석'은 그렇게 흥청망청하던 분위기가 싹 식으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왜냐하면 내년에는 어떻게 될지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음 해에도 올해와 똑같이 풍년이 되어서 또 추석잔치를 할 수 있을지 아니면 흉년이 되어서 아무 '즐거워할 이유'가 없게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하지만 추수감사절을 '여호와를 위하여, 여호와의 절기로, 여호와 앞에서 지키는' 성도들은 전혀 다릅니다.
한 해 동안 거두어들인 모든 '토지 소산'을 두고 오직 하나님께서 내리신 은혜인 줄을 알고 그 '수장(收藏)'을 인하여 각종 예물로 감사드리는 성도에게는 내년에도 똑같은 '일용할 양식'의 복이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과거의 어려웠던 '초막(草幕)' 시절을 회상하면서 지금 베풀어 주신 놀라운 축복을 진정으로 감사드리는 성도는 그 남은 평생 역시 하나님의 한량없으신 인자와 주권적인 섭리로 인하여 더더욱 풍성하게 영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좀 더 부하게 살든지 좀 더 가난하게 살든지 간에 결국 이 세상에서의 삶은 오로지 잠시 거처하는 '장막(帳幕)'에 불과한 줄을 알고 그저 범사에 감사드릴 줄 아는 성도에게는 '하나님께서 직접 경영하시고 집을 지으실 터가 있는 성'(히 11:10) 즉 저 하늘나라의 집에 영원히 정착하고 안주할 축복이 약속되어 있지 않습니까? 
  
이처럼 추수감사절을 통하여 각자의 인생을 '여호와 앞에서' 돌이켜 보는 가운데 '여호와께서 정하신' 예물을 바치고 그 '여호와께 즐거이 예배를 드리며' 지킴으로써, 금년 말에도 물질적으로 유종지미의 축복을 받고 남은 생애를 통하여 계속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가운데 보호와 인도를 받으며 끝내 저 천국의 영광스러운 도성에서 영원히 감사찬양만을 부르게 되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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