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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룻의 감사 (룻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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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의 감사’ .com 

감사는 신앙의 꽃입니다. 어떤 경로든지, 어떤 사건에 얽혀 있든지 신앙인은 감사라는 꽃을 피웁니다. 손양원 목사는 아들 둘을 잃었다. 두 아들이 공산당 청년들에게 살해된 후 실의에 잠겨야 할 목사님은 오히려 감사하였다. 순교자 집안이 된 것을 감사, 죄 많은 세상에 더 두지 않음에 감사, 구구절절 감사를 한 손 목사님은 원수 같은 살인자를 찾아가 옥 중에서 면회하며 양아들을 삼고 용서하였다.  마음에 천국이 있었기 때문에 손양원 목사님은 감사의 말을 할 수 있었다.  바울도 “항상 기뻐하라 17쉬지 말고 기도하라 18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 고 하여 감사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였고, 자기 자신이 매를 맞고 옥에 갇히는 순간에도 그 감옥에서 감사하고 찬미하는 자가 되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룻도 여러 가지 특징이 있지만 특히 감사의 사람입니다. 사실 그녀가 겪는 환경은 고난이었고 감사할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모압 여인으로서 외국인인 나오미 가정에 시집을 왔을 때 그의 시아버지가 죽었다. 초상을 치른 후 룻은 또 다시 2번 더 초상을 치렀다. 말론이 죽고 그의 남편 기룐이 죽었다. 불행한 결혼이었다. 빈말로라도 행복한 결혼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젊은 과부가 된 룻은 모압에 남지 않고 시어머니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향합니다.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는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르는 룻은 모압 여인으로서의 삶을 버리고, 히브리 민족으로 ‘귀화(歸化)’하는 결단을 한 것입니다.  귀화란 자기 나라, 자기 민족을 버리고 다른 나라의 국적을 가지고 다른 나라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룻이 바라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분명한 것은 룻의 결단은 믿음의 결단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의 집에 시집을 와서 불행만을 겪었지만, 그 속에서 룻은 여호와를 믿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믿음으로 이스라엘 사람이 되기로 작정한 룻에게 당장에 닥친 일은 먹거리를 해결해야 하는 가난이라는 현실입니다.  2절에 보면 룻이 행동하기 시작합니다. 지금까지는 나오미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어 왔는데 이제 룻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이지요.  "모압 여인 룻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나로 밭에 가게 하소서."  성경은 룻을 모압 여인이라고 표현을 한다.‘나로 밭에 가게 하소서’ 물론 이것은 먹고 살기 위한 행동이기도 하지만 지금 룻은 모압 사람이요, 베들레헴 사람이 아닌 이방 여인이다.  

우리가 다른 나라 사람들을 경멸해서 말할 때 일본 사람들을 쪽발이라고 하고, 미국 사람들을 양키, 흰둥이, 또 흑인을 검둥이라고 하듯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낮선 이방 사람을 멸시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이방 여인인 룻도 밖에 나가면 사람들에게 어떤 소리를 들을지 모릅니다. 룻이 나오미와 함께 모압에서 돌아와서 베들레헴에 사는 사람들과 낯을 익힐 시간도 없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에게 이방 여인이라고 멸시를 당하고 따돌림을 당할지도 모르고 쫓겨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룻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룻은 자신과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필요한 양식을 구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일어나야만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이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는 보리 추수가 막 시작될 때였습니다.  이 보리 추수시기를 놓칠 수가 없습니다. 룻은 기회를 잘 잡았습니다.  "나로 밭에 가게 하소서."  부지런하고 지혜로운 말이며,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모습입니다.   모압 여자가 적극적인 것 같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모압 사람의 조상이 누구입니까? 아브라함의 조카 ‘롯’입니다. 롯과 롯의 첫째 딸 사이에서 난 자손이 모압 사람이 되었습니다. 소돔 성을 빠져 나온 뒤 롯의 딸이 후손을 이을 남자가 없자 아버지와 동침해서 아이를 낳겠다고 아버지에게 술을 먹였습니다. 그리고는 끝내 아버지와 동침해서 낳은 아들의 이름이 바로 모압 입니다. 비록 도덕적으로는 매우 문제가 있지만, 또 신앙적인 선택이 아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연약한 여인의 모습이 아니라 매우 적극적이고도 저돌적인 모습으로 모압 족속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룻이 계속 나오미에게 말합니다. "내가 뉘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2;2)  신명기 24:19∼22,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취하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복을 내리시리라 네가 네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그 남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두며 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두라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하노라." (cf, 레위기 19:9∼10)     

추수할 때 곡식을 다 베지 말고 모퉁이를 조금 놓아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고 그냥 두라고 했습니다. 과일을 추수할 때도 마찬가지로 땅에 떨어진 열매를 줍지 말라고 했습니다. 고아, 과부, 타국인 등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에는 어떤 사상이 담겨 있습니까?     가장 먼저는 땅의 주인은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땅의 모든 소산이 다 여호와 하나님께 속한다는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하나님은 땅과 하늘을 지으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다만 그것을 맡아서 관리하는 청지기일 뿐입니다. 그리고 사람도, 특히 가난한 사람도 다 하나님의 지으신 피조물입니다. 그리고 부자를 부자로 살도록 땅과 재물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은 이렇게 명령을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너희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너희가 언제부터 부자였냐. 너희는 본래 종이었다. 그리고 종이었던 너희, 죽을 운명의 너희를 이끌고 나와 이 젓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너희에게 준 것이 나 여호와다 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신명기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하여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너를 들어가게 하시고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11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차지하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차지하게 하사 네게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신6;10,11)    다 그냥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분명히 우리는 힘써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다 공짜입니다. 고등어 한 마리가 3000원이라 한다면, 고등어는 바다에 공짜인데..잡아서 식탁까지 오는 수고비가 3000원인 것입니다.  쌀이 20kg에 50,000원 이라면 쌀이 나는 땅이 공짜고 씨가 공짜입니다. 봄부터 가을까지의 수고비가 우리가 사는 가격입니다. 사실 내 생명도 공짜로 받은 생명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인생에 거저 받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웃을 돌아보고 가난한 사람들을 돌아보라 하시는 자비하신 하나님의 명령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다만 추수할 때는 이삭을 줍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즉 추수가 다 끝나고 난 뒤에는 이삭을 주워도 괜찮지만 추수하는 도중에는 그렇게 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추수에 방해가 될 수도 있고, 정직하지 못한 사람들이 추수해 놓은 곡식단에서 이삭을 슬쩍 빼 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이삭을 줍는 일은 추수가 다 끝나기까지 기다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본문 2절 중반절을 다시 보면 "내가 뉘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고 룻이 말하고 있습니다. 추수하는 사람을 따라다니며 이삭을 줍는 것은 금지되어 있으니... 그래서 은혜(恩惠)가 필요한 것입니다. 룻은 마냥 앉아서 기다릴 수가 없습니다. 산 입에 거미줄을 칠 수도 없고, 불쌍한 시어머니 나오미를 봉양해야 할 책임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가서 추수 도중이라도 이삭을 주울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을 해보겠다는 것입니다.
  
룻이라는 여인을 알 수 있는 구절입니다.  모압 여인 룻은 자기의 환경에 대해 불평을 하거나,  부정적인 생각으로 한숨만 쉬고 있지 않았습니다. 인생을 비관하고 잘못된 결혼, 잘못된 귀화, 잘못된 선택이라고 원망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룻에게서는 원망이나 후회가 없습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룻은 막막한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했다는 것입니다.  룻은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와 타국인과 과부들을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하신 말씀을 알고 있었고 그 말씀을 의지했습니다. 그래서 낯선 곳이지만 과감하게 들로 나갑니다.      

그렇습니다. 밭에 곡식이 많이 있고, 또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법이 있었지만 룻이 일어나 들로 나가지 않았다면, 누군가의 은혜를 입어서라도 이삭을 줍겠다는 마음으로 긍정적이지 않았다면,  밭의 이삭은 룻의 것이 되지 않았을 것이고,  또 보아스를 만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룻의 인생을 바꾸는 그런 기적적인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자세가 필요합니다. 룻처럼 말씀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그쳐서는 안 되고,  룻처럼 은혜를 믿고 나아가는 믿음의 실천이 있어야겠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장이라고도 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은 다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였던 사람들입니다. 행동함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해놓으신 크신 축복을 모두가 받았던 사람들인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게으른 자를 싫어하십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처럼 현상유지만 하려는 사람을 싫어하십니다.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처럼 부지런히 나가서 열심히 주어진 일에 충성을 다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물론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은 마음속에 "내가 혹시 잘못해서 다섯 달란트를 다 날리면 어떻게 할까?" 이런 걱정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열심히 일했는데도  다 잃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주인이 그 종을 나무라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 다시 다섯 달란트를 줄 테니 다시 해봐라"고 위로하고 격려했을 것입니다.  아멘?
  
아멘 맞습니다.  밭에 씨를 뿌리다 보면 씨가 길가에 떨어지기도 하고, 돌짝밭에 떨어지기도 하고, 가시밭에 떨어지기도 합니다.  잘못 뿌려진 씨가 분명히 있습니다. 아니 4중에 3이 잘못 뿌려진 씨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서워서 아예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부지런히 씨를 뿌리면 그 가운데 옥토에 떨어진 씨앗이 자라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게 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일을 하다가 잘못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으면 아무것도 못합니다. 모험적이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신앙을 가지고 나아갈 때에 하나님께서 역사해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부지런히 씨를 뿌리기를 원하십니다. 4중에 3개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길가에, 가시밭에, 돌밭에 떨어졌어도 그것을 꾸짖는 말은 성경에 없습니다. 오히려 당연한 것처럼 3가지의 밭이 있다 라고 말하십니다. 성경은 참 긍정적이고, 적극적입니다. 물론 우리는 다 옥토라고 생각을 하고 열심히 씨를 뿌립니다. 그러나 나중에 보니 3/4이, 75%가 열매 맺지 못하는 땅에 뿌려진 것을 압니다. 그 중에 하나만이 옥토에 뿌려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가 100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니 주인이신 하나님은 우리가 더 많은 씨를 뿌리기를 원하십니다. 아멘.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2:3)  룻이 베는 자를 따라 이삭을 주웠다고 했습니다. 이 경우가 특별한 경우입니다. 밭주인의 허락을 받아야 되는 경우입니다. 룻이 기대한 대로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룻이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의도적으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룻이 그 밭이 누구의 밭인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나 우연인 것 같지만 그 뒤에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 작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신앙으로 행동하는 룻에게,  하나님의 손길이 룻을 보아스의 밭에 이르게 한 것입니다. 

 보아스가 룻에게 제공한 것은 작은 친절이었습니다.  냉수 한 그릇의 친절이었습니다. “①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내 밭에서 일하라. ② ‘내가 그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너를 건드리지 말라 하였느니라’  룻을 건드리지 말라. ③ ‘목이 마르거든 그릇에 가서 소년들이 길어 온 것을 마실지니라’ 목이 마를 때 물을 마시라.”는 것이 친절의 내용입니다.  보아스는 참 사려 깊은 사람, 자비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룻은 그 친절한 배려를 받고 너무도 감사해서 엎드려 절을 하며 이 은혜를 베푸시는 까닭이 무엇인지 되묻습니다. “룻이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그에게 이르되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10절)  보아스가 그녀에게 대답합니다.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알려졌느니라”(11) 룻은 감동을 했습니다.  

성도여러분, 냉수 한 그릇의 친절에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는 것은 비굴함이 아닙니다. 어떻게든지 살아야겠다는 처세술이 아닙니다.  적극적인 룻, 부지런한 룻이지만 여전히 두려워하고 조심스러워하는 한 작은 여인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보아스의 친절이 두려워하는 이 작은 여인을 감동시킨 것입니다.  감동이 있으면 냉수 한 그릇에도 감사의 절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룻이 이르되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나는 당신의 하녀 중의 하나와도 같지 못하오나 당신이 이 하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     

그리고 냉수 한 그릇에 엎드려 절하는 룻의 마음이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합니다.  거처할 집을 준 것도 아니요, 앞으로 살아갈 방도를 마련해 준 것도 아닙니다. 단지 냉수 한 그릇의 친절입니다.    우리는 냉수 한 그릇에 이런 감사를 할 수 있을까? 그런 면에서 룻의 감사가 우리 눈에 또 다른 감동이 됩니다. 순수한 친절에 순수한 감사의 장면입니다. 

1. 감사는 환경과 상관없이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아무 것도 없는 여인에게 제공된 보아스의 작은 친절, 그 냉수 한 그릇이 그녀에게 은혜로 다가온 것은 감사가 대차 대조표에 의해서 계산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지금 내가 처한 환경과 상관없이 감사는 가능한 것입니다. 모압 여인 룻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2. 감사는 이방인이라는 신분과 상관없이 할 수 있습니다.
  낯선 이국 생활, 피부색과 언어가 다르다는 것에 제한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선민이었던 시아버지는 모압으로 갔지만.. 이방 여인 룻은 모압을 버리고, 베들레헴으로 와서 감사의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방 여인의 감사 앞에 선택 받은 사람들의 감사 없음이 부끄럽게 느껴지는 장면입니다. 율법과 성전을 가까이 하며 사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감사를 하지 못하는데 냉수 한 그릇을 은혜라고 고백하는 룻의 마음이 참 대견스럽고 매력적입니다.          

성도여러분,  감사는 언제나 엉뚱한 사람이 합니다. 눅17:16을 보면 문둥병 고침을 받은 10명의 사람들 중 감사하러 예수께 온 자는 1명의 사마리아인뿐이었습니다. 9명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저주 받은 문둥병이 나았어도...감사의 말 한마디 하러 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을 것 같은 이들, 문둥병에 걸리지 않았으면 같이 있지도 않을 사마리아인이 홀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병이나 사고를 만나 다 나은 뒤에 감사하는 것도 옳지만 아예 병에 걸리지 않고 처음부터 사고를 당하지 않은 것이 더 감사하지 않습니까?  찬물 한 그릇에 얼굴을 땅에 대며 진심으로 감사하는 룻이 우리를 생각하게 하고 부끄럽게 합니다.  

전에 어떤 책을 읽었는데...미국에서 항구 가까이에서 배가 좌초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한 수영선수가 수십 명의 사람을 구조해서 당시 신문에 대서특필하며 영웅이 된 사건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일이 있은지 몇 년이 지난 뒤에 어떤 목사님이 설교시간에 이 사건을 예화로 들면서 설교를 했는데.. 마침 그 수영선수가 그 설교의 자리에 있었답니다. 그 주인공을 앞으로 모셔서 수십 명의 목숨을 살린 당시의 느낌이 어땠었냐고 물었는데...그 수영선수의 말이 ‘한 사람에게서도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고 대답을 하더랍니다.  

성도 여러분, 감사는 참 쉬운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아무나 감사하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목숨을 구원 받아도 ‘내 보따리 내놔라’하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학생이 선생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자녀가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부모가 되어봐야 그때야 깨닫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도 부모님의 마음을 몰랐던, 아프게 하고 서운하게 했던 감사가 없었던 그런 자녀였습니다.   그래서 냉수 한 그릇에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감사하는 룻의 모습이 ‘참 보기 드문 감사의 모습이구나’ 하고 다가옵니다. 

3.  감사는 크기에 상관없이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일반적인 생각은 물 한 그릇, 공기의 청량함, 따뜻한 햇볕 따위는 감사의 조건으로 보지 않지요. 그러나 룻에게 작은 물 한 그릇은 충분한 감사의 조건입니다. 밭에서 일하는 사환의 자격도 아니고 사환의 뒤를 따르면서 떨어진 이삭을 줍는 일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룻에게 작은 냉수 한 그릇의 배려는 큰 의미입니다.  사람다운 대접을 받고 있으며, 무시와 외면당함이 아니라 배려의 대상임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크기에 상관없이 그것이 갖는 의미가 중요합니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마음이 담겨진 것이라면 감사가 묻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아스 앞에 룻은 엎드렸고, 절했고, 감사했습니다.  고마웠습니다. 돌아보는 자의 돌봄 속에 담긴 친절한 배려 앞에서 최고의 존경으로 절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이지요.      

이렇게 감사하는 룻의 모습은 초보 신앙인이라기보다는 성숙한 자의 모습입니다. 낯선 이방인이지만,  다른 사람의 배려를 아는 여인이었고,  그 배려에 감사로서 화답할 줄 아는 매력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룻의 감사는 룻 자신의 인격의 향기입니다. 이런 인격의 향기가 우리에게도 있기를 원합니다.  이런 여인이 내 딸이라면,  이런 룻과 같은 여인이 내 며느리라면,  이런 여인이 우리 교회에 가득하다면, 하는 기도가 저절로 나오지 않습니까?
  
감사는 복의 지름길입니다. 룻이 전심으로 감사하여 보아스에게 화답할 때 세 가지 복된 일이 그녀에게 주어집니다.

첫째, 넘치는 축복의 말을 듣습니다. (룻2:12)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보아스는 신앙으로 새롭게 입문한 룻이 감사로 엎드릴 때 그녀에게 축복의 말을 합니다. ‘여호와께서...온전한 상 주기를 원한다’ 감사하는 사람은 축복을 받습니다.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삶입니다. 매일 매일 감사하고 또 감사합시다. 감사한 것만큼 축복은 커집니다.  신앙인들은 감사 생활을 잘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서 감사한다는 말을 듣기는 매우 드물지만, 신앙인들은 항상 감사하려고 합니다.  감사가 메마르면 안 됩니다. 감사가 풍년 들어야 합니다. 추수 감사절에 전심으로 드리는 즐거움의 감사가 넉넉해야 합니다. 그러면 부요 의식이 생깁니다. 축복의 말이 내 가슴에 자리 잡습니다. 인생의 기대감이 생기는 것입니다.
  
둘째, 떡 상에 초대됩니다. (룻2:14)
   
“식사할 때에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이리로 와서 떡을 먹으며 네 떡 조각을 초에 찍으라 하므로 룻이 곡식 베는 자 곁에 앉으니 그가 볶은 곡식을 주매 룻이 배불리 먹고 남았더라.”  모압 여인 룻은, 일꾼인 사환보다도 못하며, 신분상으로 약자며 이방인입니다. 그런데 감사의 말을 한 이후 룻에게 떡과 볶은 곡식이 넉넉히 주어집니다. 배불리 먹고 남을 만큼 주어졌습니다. 추수 밭의 주인인,  신분상으로 모든 권리를 가진 보아스가 룻을 초대하여 식사를 합니다. 주인의 상에 초대되고, 주인의 얼굴을 마주보며 식사를 함께 하는 것은 영광입니다.  신앙생활의 기쁨도 같습니다. 주님과 함께 앉으며. 주님의 얼굴을 보는 것입니다.  천한 내가 귀한 주님을, 죄인 된 내가 거룩한 주님을 대면하는 자리에 앉는다는 것, 그 한가지만이라도 천하를 얻은 것보다 더 큰 기쁨이 아니겠습니까?  감사했더니 ‘대면의 복’이 임했습니다. 감사했더니 마음껏 먹는 ‘배부름의 복’이 임했습니다. 감사에는 더 큰 감사의 조건들이 따라옵니다. 

셋째, 비축할 수 있는 물질의 복을 받았습니다. (룻2:16)
  
2:16을 봅시다. “또 그를 위하여 곡식 다발에서 조금씩 뽑아 버려서 그에게 줍게 하고 꾸짖지 말라 하니라.”  보아스의 은혜가 커 갑니다. 보아스는 추수 밭의 주인으로서 자기 일군들에게 명령하지요.  “곡식 다발에서 조금씩 뽑아 버려라.”  꺾어진 이삭이 아닙니다.  룻을 위하여 의도적으로 곡식 단에서 조금씩 뽑아서 내버리라는 것입니다. 룻이 모르게 하는 말입니다.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한 말씀을 지키는 선행입니다. 그냥 나중에 곡식 한가마니 던져주는 것은 열심히 일하는 룻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보아스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며 수고하고 애쓰는 룻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많이 주워서 가져가도록, 많이 주워서 항아리에 저장하여 식량을 비축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감사로 나아가는 룻에게 던져 준 곡식의 양은 보리 한 에바, 도량형으로 약 ‘다섯 말하고도 반’이나 되었습니다. 

성도여러분, 우리가 세상을 살아보아서 알지만,  나의 수고는 한정된 수입을 가져옵니다. 그러나 넘치는 수입, 넉넉한 수입, 먹고 비축할 수 있는 물질의 복은 위로부터 ‘덤으로 주시는 역사’로 됩니다. 하나님이 하늘 문을 열고 뿌려주셔야 합니다. 그 하늘의 복이 열리고 ‘덤으로 주시는 복’이 임하는 열쇠가 감사입니다.  많이 감사하는 우리들이 되시기를, 덤으로 받아 비축하는 축복을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감사를 잊어버린 사람들, 감사를 아예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뀌어야 합니다. 기적을 가져오는 삶을 위해서라도 감사의 삶의 회복해야 한다.    똑같은 삶,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데 독특하게 잘 되는 비결을 가진 인생이 있는데 그 비결의 암호가 ‘감사’입니다.  모압 여인 룻의 감사가 우리 교회 안에서도 넘치기를 바랍니다.     

감사하는 교인이 가득하여 아침에도 감사, 점심에도 감사, 저녁에도 감사, 만날 때마다 감사가 강처럼 흐르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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