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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나라와 성령 안에 있는 것들 (출 40:7~9, 롬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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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나라와 성령 안에 있는 것들 (출 40:7~9, 롬 14:17)


‘지상낙원’이란 말이 있습니다. 흔히 아름다운 남태평얀 섬나라 팔라우를 지상낙원이라고 합니다. 호주의 로드 하우 섬도 지상낙원이라고 합니다. 최근 어느 자료를 보니 송도신도시를 지상낙원이라고 하고, ‘동식물 지상낙원 DMZ’라는 말도 합니다. 파나마의 산 블라스 군도도 지상낙원이라고 불립니다. 북한은 한 때는 자기 나라를 지상낙원이라고 했습니다. 요즘도 지상낙원이라고 한답니다. 지난주에 한 사람이 전방 철책을 뚫고 낙원으로 갔습니다. 

이런 곳들이 진짜 낙원일까요? 진짜 하나님의 나라일까요? 하나님의 나라는 몸으로 체험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체험할 수 있는 나라입니다. 성령 밖에서 체험하는 육신적 최상의 상태, 황홀경, 인간의 행복, 육체적 평안은 하나님의 나라는 아닙니다. 

‘왕의 남자’에는 장생과 공길의 대사가 있습니다. 시각장애인 놀이를 하던 두 사람이 “나 여기 있고 자네 거기 있나?” “나 여기 있고 자네가 거기 있지.” “나는 여기 있고 자네가 거기 있잖나”라는 대화를 합니다. 엔딩 크레딧 장면에는 “나 여깄고 너 거기 있지” “아니다 내가 여기 있고 너 거깄다”, “나도 너도 여기 없다”, “아니다 우리 다 여기 있다”라는 대사를 합니다. 나를 넘어서는 너와의 융합의 경지에 이릅니다. 초월의 아름다움을 나눕니다. 서로가 서로의 안에 있는 일체의 경지를 이야기합니다. 
  
요한복음 14:20에는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고 합니다. 15:5에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일체의 관계를 예수님은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그리스도와 나의 일체의 경지, 이곳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성령 안에서 비로소 알 수 있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왜 칼국수에는 칼이 안 들어 있는지 아십니까? 왜 붕어빵에는 붕어가 들어있지 않은지 아십니까? 왜 가래떡에는 가래가 안 들어 있는지 아십니까? 왜 주먹밥에는 주먹이 없는지 아십니까? 정답을 아세요? 만약에 그런 것들이 들어 있으면 못 먹는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반드시 있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속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주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이신 성령님이 계십니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발견하기를 바랍니다. 성령 안에서 발견하는 참 하나님의 나라를 보세요. 

첫째, 하나님의 나라는 현실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라고 합니다. 15-16절을 보면 먹는 것에 대한 시시비비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가르’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왜냐하면’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닌 이유를 설명합니다. 역사 가운데 진행되고 있는 현재적인 하나님의 나라에서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속성은 어떤 음식을 먹고 안 먹는데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흔히 혐오식품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싫어하는 음식을 말합니다. 보신탕은 대표적인 혐오식품이라고 합니다. 달팽이나 원숭이 골이 혐오식품입니다. 에스키모들은 구더기를 먹습니다. 중국요리에는 지네나 전갈도 있습니다. 이런 것을 먹었다고 시비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음식이란 어떤 특정한 민족의 문화이기 때문에 먹는 것을 가지고 시비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무엇을 먹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먹는 것을 즐기셨습니다. 마시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게 하시는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예수님은 혼인잔치에 참석하셔서 포도주를 만드신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누가복음 7:34에는 예수님을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불한당과 함께 마시고 노는 사람이라고 오해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진실은 먹는 것의 의미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병이어 기적의 참 의미도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는 생명의 떡이며 생명의 물이라는 것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되신 것은 소외계층을 사랑하시고 구원하러 오신 분이신 것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목적은 현실적 치유가 아닙니다. 다시 살아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육신의 배가 부르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현실적 죄인을 죄인이라고 하신 것이 전혀 아닙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대신 예수님께서 주신 해답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세상에 살면서 염려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염려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염려를 하면 세상을 위한 염려를 다 해결해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자주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먹고 살까요? 안 먹고 살까요?”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먹고 삽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왜 먹을까요? 이 생에서의 먹는 것은 생존수단입니다. 먹지 않으면 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 먹는 것은 즐거움을 위하여 먹습니다. 생존 때문에 먹는 것이 아니므로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요즘에는 ‘삶의 질’을 많이 얘기하고 관심을 많이 가집니다. 유엔개발계획(UNDP)에서는 국민소득과 교육수준, 평균수명, 유아 사망률 등을 종합 평가하여 발표하는 인구개발지수가 있습니다. 최근에 보면 한국은 182개국 가운데 4년째 26위입니다. 노르웨이, 호주, 아이슬란드, 캐나다, 아일랜드, 네덜란드, 스웨덴, 프랑스. 스위스, 일본 등의 순으로 삶의 질이 높다고 합니다. 미국은 13위입니다. 개인소득으로는 스위스 곁의 작은 나라 리히덴슈타인이 8만5천 달러로 가장 높습니다. 그런데 국내총생산이 가장 많은 나라, 개인소득이 가장 많은 나라가 가장 행복한 나라는 아닙니다. 이것이 세상 나라의 한계입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난 이야기입니다. 어느 부부가 직장에서 일찍 은퇴하였습니다. 부부는 플로리다 어느 도시에 살면서 좋은 요트를 사서 바다를 즐깁니다. 선탠을 하고 비치볼 놀이를 하고 소프트볼을 하고 조개껍질을 모으며 삽니다. 그런데 이 부부의 삶의 최후의 업적은 선탠과 조개껍질 줍기입니다. 그들이 훗날 마지막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보세요, 주님, 저 피부 좋죠? 조개껍질 예쁘죠?”라고 하겠습니까? 현실적 행복이 하나님의 나라의 복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알면서 집착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현실적 행복이나 만족에 급급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현실적 하나님의 나라를 갈망하며 삽니다. 잘 기억하세요!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예수님의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 부자가 음부에 갔답니다. 
  
사라 윈체스터라는 여인은 엄청난 유산을 받았습니다. 그녀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미국에서 유명한 윈체스터라는 총을 만드는 회사 설립자의 미망인입니다. 하루에 수천 달러씩 재산이 불어나는 호화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동부에서 산호제로 이주하여 200만평 대지 위에 7,200평 주택을 지었습니다. 부엌이 6개이었고 욕실이 13개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밤마다 잠을 못자고 뒤척였습니다. 그 큰 집을 밤새 헤매고 다니다 마지막에는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고린도후서 4:18에는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 합니다. 궁궐 같은 집, 궁중진미를 몇 년이나 누릴 것 같습니까? 기껏해야 30년입니다. 운이 좋아 부모로부터 물려받아 아기 때부터 그렇게 살았다고 하더라도 100년도 채 못 삽니다. 이 땅에서 아무리 장구하게 산다고 해도 영원이란 시간에 비해 보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문자 그대로 섬광같은 시간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쌓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 있습니다.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얻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얻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이고, 의미 있는 일이고, 축복입니다. “성령 안에서”라는 말은 “성령 밖에서”도 있다는 말입니다. 성령 밖에서도 의와 평강과 희락이 있습니다. 성령 밖에서의 의는 자기 의입니다. 힘이 정의라고 할 것입니다. 성령 밖에서의 평강은 전쟁평화라고 합니다. 성령 밖에서의 희락은 인간적 방법으로 얻는 기쁨입니다. 마약을 하는 사람들은 마약 때문에 기쁩니다. 세속적 쾌락으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세속적인 것들은 하나님의 나라와는 거리가 멉니다. 
  
‘의’라는 말은 ‘디카이오쉬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 부름 받은 올바른 행동, 즉 ‘도덕적 의’를 가리킵니다. ‘평강’이란 ‘에이레네’인데 하나님 아버지와 화목하게 됨으로써 얻게 되는 평화로운 마음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희락’은 ‘카라’라고 하는데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 관계를 누리는 성도의 영혼의 기쁨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다른 성도와의 기쁨도 포함된 성도의 진정한 기쁨입니다. ‘오직’이란 ‘알라’라는 말인데 다른 데는 없다는 뜻입니다. 오로지 성령 안에서만 가능한 것을 말합니다. 진정한 의, 평강, 희락은 성령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유명한 신학자 워필드는 칼뱅을 성령의 신학자라고 하였습니다. 칼뱅은 ‘기독교 강요’에서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연합시키기 위한 촉매제(bond)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 일은 성령 안에서 비로소 가능합니다. 성령 안에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사는 사람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합니다. 
  
그리스도는 성령에 따라 사셨습니다. 심지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도 성령에게 이끌리어 가셨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을 성령의 사람이라 부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성령에게 이끌리어 살아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9에는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라고 합니다. 성령의 불이 활활 타게 하라는 말입니다. 성령의 불을 끄지 말라고 하십니다. 성령의 불이 꺼지면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성령의 불이 꺼지면 그 때부터는 흑암을 다스리는 마귀의 지배를 받게 되고 어두움에 살게 됩니다. 
  
옛날 우리 조상들은 가신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집안을 다스리는 신들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성조신이 있었습니다. 이 신은 가장을 보호하는 신입니다. 터주신이란 신이 있었습니다. 이 신은 집터를 다스리는 신입니다. 조왕신이란 신도 있었습니다. 이 신은 부엌신이었는데 불을 다루는 신입니다. 삼신이라는 신도 있었습니다. 흔히 삼신할머니라고 했는데 출산, 육아, 산모의 건강을 다스리는 신입니다. 이런 가신신앙으로 많은 풍습들이 생겨났습니다. 옛날 이사풍습에는 이사 가는 집에 꼭 불씨를 가져갔습니다. 

아니면 성냥을 가지고 갔습니다. 이사 갈 때 불씨를 꺼트리면 집안이 망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잠시 동안은 의롭게 살 수 있습니다. 잠시 동안은 평강할 수 있습니다. 잠깐 동안은 기쁨으로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외에는 꺼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불은 절대로 꺼지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의 불이 꺼지면 하나님의 나라가 아닙니다. 레위기 6장에는 제단의 불은 꺼지지 않게 하라고 합니다. 제사장은 아침마다 제단에 불을 피워 꺼지지 말게 하라고 합니다. 
  
성전은 불이 꺼지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이 항상 임재해야 합니다. 성령이 임재하지 않는 나라는 끝이 납니다. 하나님 없이 잘 된 나라는 문자 그대로 외화내빈입니다. 화려하지만 금방 망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나라가 역사 속에서 이런 모습이었습니다. 
  
성령을 떠난 의, 성령을 떠난 화평, 성령을 떠난 희락은 있을 수 없습니다. 성령을 떠난 의, 성령을 떠난 화평, 성령을 떠난 희락은 오히려 더 큰 문제를 야기합니다. 북한이 왜 핵에 집착할까요? 핵보유국이 되어 다른 핵보유국으로부터 자유하려고 합니다. 서로가 핵을 가지고 있으면 .서로가 조심하므로 평화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런 평화는 참 평화가 아닙니다. 
  
성령을 떠난 어떤 것도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을 갖출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에서 더 먼 모습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성령이 임재한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찬송가에도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고 합니다.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주님 안에 있으니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주님을 모시니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세상의 나라의 조건은 큰 아파트 평수입니다. 좋은 부모와 효자녀입니다. 아름다운 초원과 그림 같은 집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나라는 아닙니다. 

결론 

아우구스티누스는 “오 주님, 당신께서 우리를 지으셨으므로 우리가 당신 안에서 쉴 때까지는 우리의 영혼에는 쉼이 없나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영원한 안식이 있고, 기쁨이 있고, 만족이 있고, 평화가 있습니다. 
  
부모와 형제는 다릅니다. 부모와 자녀는 사랑의 관계입니다. 그러나 형제는 경쟁의 관계입니다. 가인과 아벨이 경쟁관계였습니다. 에서와 야곱이 경쟁관계였습니다. 요셉이 형들과 경쟁관계였습니다. 기드온의 아들 요담이 형 아비멜렉과 경쟁관계였습니다. 
  
노아의 아들들을 보세요. 셈과 함과 야벳이 아들들입니다. 홍수 후에 둘째 아들 함이 아버지가 포도주에 취해 하체를 드러낸 것을 보고 와서 두 형제에게 알렸습니다. 이 두 형제가 뒷걸음질을 하여 아버지의 하체를 가렸습니다. 아버지 노아는 술이 깨어 둘째 아들을 저주하였습니다. 누가 아버지에게 이 일을 고자질했을까요? 제가 보니 두 아들입니다. 술에 취한 노아가 알았겠어요? 두 아들이 얘기해 주니까 알았겠지요. 형제들은 그래요. 방주 안에는 여덟 사람과 짐승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성경에는 방주 안에 있을 때에 형제들이 다투었다는 기록이 있습니까? 방주 안에서 짐승들이 서로 잡아먹고 싸웠다고 했습니까? 방주 밖에는 요란했습니다. 홍수가 났습니다. 그러나 방주 안은 고요했습니다. 평온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입니다. 방주는 교회의 상징입니다. 방주 안은 성령안의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니다. 성령 안에서 즐기는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방주 안의 모습처럼 의롭고, 평강하고, 희락이 넘치는 이런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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