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죄는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창 3:1~7)

  • 잡초 잡초
  • 380
  • 0

첨부 1


죄는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창 3:1~7)


(1)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이제 그 유명한 원죄 부분을 다루게 되었습니다. 최초의 인류인 아담과 하와가 이 선악과만 따먹지 않았더라면 인간에게 죽음과 병, 수고와 고통이 들어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사건이 가져온 결과가 엄청났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또한 원망하곤 합니다. 하나님은 왜 선악과를 만드셔서 우리를 이렇게 괴롭게 하는지 하면서 말입니다.

어떤 교회 장로님이 이 선악과 문제로 목사님을 괴롭혔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왜 이 선악과를 먹어서 인간을 고통스럽게 했느냐는 불만이었습니다. 목사님이 쉬운 예화부터 신학적인 이론을 들어가며 설명을 해도 장로님은 수긍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 할아버지 할머니들 때문에 우리가 괴롭게 되었다”고 문제를 제기하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목사님 댁에서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장로님들을 초대했는데 이 장로님이 제일 먼저 도착했습니다. 목사님은 다른 장로님들을 배웅하러 나간다고 하면서 장로님에게 먼저 식사하라고 권하며 상 가운데 뚜껑을 덮어둔 음식은 절대 먹어서도, 열어봐서도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혼자 남게 된 장로님은 도대체 이 음식이 무엇인지 궁금하였습니다. 결국 참다못해 살짝 뚜껑을 열고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는 새 한 마리가 있었고 뚜껑이 열리자마자 빠져 나와 온 방안을 휘젓고 다녔습니다. 놀란 장로님은 그 새를 잡기 위해 땀을 뻘뻘 흘렸지만 새는 잡히지 않았습니다. 이 순간 목사님들과 다른 장로님들이 방 안으로 들어오면서 이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 이 장로님은 더 이상에 선악과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냥 우스갯소리이지만 혹시 우리들도 창세기 3장의 사건을 보며 원죄만을 한탄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선악과 사건은 짧은 한 순간의 이야기이지만 인간과 우주의 운명을 결정적으로 갈랐고, 창조와 타락과 구속의 도식은 기독교 교리의 핵심 뼈대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놀라운 사실은 성경은 이 선악과 사건에 대해서 침묵하거나 우리의 생각과는 다른 해석을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특히 구약 성서가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이 원죄 사건에 대해서 부여하는 무게만큼 상대적으로 구약 성서는 심각하게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창세기 3장 이곳에만 기록되어 있을 뿐입니다. 오히려 출애굽 사건과 광야에서 범했던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해서는 선지자들이나 시편 기자들이 많은 언급을 하지만 선악과 사건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습니다(유일한 곳 - 호6:7 “저희는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사람처럼? 아담이라는 장소?). 

왜 이럴까? 이에 대한 여러 해석이 있을 수 있지만 그 중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은 선악과 사건을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율법 앞에서 서 있는 인간의 현재의 실존이라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는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단 하나의 율법이 있었고, 이제 이스라엘 백성 앞에는 수많은 율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본질은 같습니다. 아담이나 하와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 앞에는 하나님 말씀이 있고 이 말씀을 지키면 생명이고 지키지 않으면 죽음이라는 점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해석하면서 이것을 죄의 기원을 묻는 과거의 사건으로 해석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선악과 사건은 바로 오늘날 우리 앞에 있는 사건입니다.

신약에서도 원죄에 대해서 언급을 하지만 원죄 자체에 중심이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한 구원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그 은혜에 대한 대조적인 성격으로 원죄가 언급될 뿐입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사에서는 너무 지나치게 원죄를 부각시킨 점이 없지 않습니다. 원죄가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원죄 교리는 때로 인간은 본질적으로 무력할 수밖에 없다는 패배의식을 만들어냅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불행하다는 운명론으로 귀착됩니다. 또 때로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의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결국 선악과를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보다 심각한 것은 인간의 불행의 원인을 인간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원죄로만 돌리려는 경향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인간은 자기 책임을 회피하려 합니다. 성서는 이런 해석을 금지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랬듯이 오늘 우리도 선악과 앞에 서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행했던 죄를 반복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가볍게 취급하고 있다면 그것은 단지 우리만의 모습이 아니라 아담과 하와의 모습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창세기 3장 말씀은 인간의 불운한 운명을 설명하기 위해서 의도된 것이 아닙니다. 바로 오늘날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준엄한 경고입니다. 말씀을 지키는 자는 생명의 길에 서 있지만 말씀을 지키지 않는 자들은 사망의 길에 서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선악과 사건은 과거 한 시점에 있었던 사건만은 아닙니다. 성경은 죄의 기원과 인생의 고통에 대한 기원에 대한 호기심에 답하려는 책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현재 우리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뱀에 대한 해석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1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1) 이 뱀이 누구입니까? 전통적으로는 ‘사단’이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에는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계20:2)고 합니다. 

이 창세기 3장의 타락 장면을 대서사시로서 장엄하게 묘사한 책 중 대표적인 것이 밀턴의 <실락원>입니다. 밀턴의 실낙원의 첫 장면은 하늘에서 반란을 꾀하다 지옥으로 떨어진 사단이 타락한 천사들 앞에서 대 연설을 하면서 시작합니다. 자기의 고통에 대한 호소와 자신의 교만과 반역을 자랑합니다. 그러다 하나님이 특별한 한 세계를 짓고 그 곳에 은총을 입은 한 족속을 두셨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천성적으로 하나님께 반역하기를 좋아하는 이 악의 무리들은 그 인간을 타락시켜 하나님의 계획을 어지럽히려는 결정을 합니다. 사단이 직접 뱀으로 가장하여 하와에게 접근하고 결국 하와를 유혹하는 데 성공합니다. 

그렇지만 이 또한 우리들이 만들어낸 교설일 뿐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는 사단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다만 뱀의 유혹을 언급할 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사단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사단은 우리를 유혹합니다. 이 악의 정체를 의식하지 않으면 우리 싸움은 허공을 치는 것과 같은 공허한 싸움이 될 것입니다. 에베소서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6:12) 오늘날처럼 이성화된 세계에서 무슨 사단이 존재하느냐고 하지만 이것이 바로 사단의 전략입니다.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은폐하고는 뒤에서 악을 조장합니다. 우리는 이 악의 정체를 분명히 알고 대적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 유혹자는 뱀이라고 할 뿐이지 사단이었다고 성경은 밝히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악은 외부의 어떤 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인간의 선택에 의루어진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은 유혹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 유혹 앞에서 선의 길을 갈 것이냐 악의 길을 갈 것이냐 선택하는 것은 인간입니다. 

우리의 책임입니다. 그래서 누구를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우리의 싸움을 도맡아서 싸우시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싸우는 것은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곁에 계시면서 우리를 도우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런 점에서 신앙인들은 허약한 존재들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악과 죄의 유혹 앞에서 담대히 싸워야 할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히브리서는 말씀합니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히12:4)

악과 죄의 유혹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오늘 최초의 인류가 어떻게 실패했는가를 교훈삼아야 할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의 유혹에 넘어가는 과정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스텝 1. “참으로 너희더러”(하나님에 대한 의심)

뱀은 1절에서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는 말로 하와를 자극합니다. 뱀은 직접 선악과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너희에게 모든 것을 다 주셨더냐?” 하며 무언가 부족한 것을 깨닫게 했을 뿐입니다. 하와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허락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선악과였습니다. 인간이 죄의 유혹에 넘어가는 것이 바로 이 지점에서입니다. 무언가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저것만 내게 있으면 100% 완벽할 텐데 하는 지나친 욕심입니다. 이는 곧 감사를 잊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해주신 많은 것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에 감사하지 못합니다. 자기 인생에서 부족한 한 가지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심지어는 신앙을 버리기도 합니다.

부족한 한 가지, 그것은 미모나 건강이나 재산이나 자녀나 높은 자리나 승리나 영광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모자란 하나 때문에 인간은 죽을 지경입니다. 우리들이 불만하고 있는 모습을 한 번 잘 분석해 보십시오. 오히려 감사할 것이 많고 주어진 것이 너무 많지 않습니까? 무엇보다 돼지나 짐승으로 태어나지 않고 인간으로 태어난 것에 감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질적으로 어렵다고 한들 북한에서 억압받고 굶주리고 있는 북녘 형제들에 비해 우리는 넉넉하지 않습니까? 

우리에게는 건강한 몸이 있지 않습니까? 사랑스런 가족이 있지 않습니까? 내가 일할 수 있는 일자리가 있고 나는 열심히 일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들이 힘들어하는 것은 비율로 따지면 불과 5%도 안 될 것입니다. 부족한 인기, 더 큰 성공, 더 많은 물질이 없다는 이유로 우리는 절망하고 심할 경우 자살을 하기도 합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은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뱀의 이런 유혹에 하와는 불만을 가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진흙에서 태어난 존재요, 하나님은 에덴에 모든 풍요로운 것을 주셨고, 창조적인 노동과 사랑하는 사람까지 주셨다. “우리는 이것으로 충분해!” 하면 뱀의 유혹을 이겨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와는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한 가지 때문에 불만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이 욕심쟁이라서 금하셨다는 생각도 들었고 하나님처럼 높아지고 싶은 교만한 마음도 생겼습니다. 뱀은 이 마음을 정확히 간파하고 이 선악과를 먹으면 너희도 하나님처럼 된다고 유혹을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조금 부족하게 만드셨습니다. 부족한 것이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선악과를 주신 것도 은혜입니다. 인간은 신처럼 될 수 없고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며 살 때 가장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족한 것도 은혜라고 고백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몸에는 가시가 있었습니다. 학자들은 이 가시가 아마 간질병과 같은 육체의 병이었을 것이라 추측합니다. 

이런 육체의 병이 있으면 전도 하는데 얼마나 장애가 되겠습니까? 그래서 세 번이나 간구를 하였지만 하나님에게서 내려온 응답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12:9)는 말씀이었습니다. 약할 때 우리는 더 강합니다. 사람들을 향하여서나 하나님을 향하여서 교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선악과가 있고 부족함이 있는 것이 은혜입니다. 하와는 이것을 은혜로 보지 않았기에 거 큰 불행을 자초하고 말았습니다.

스텝 2. “죽을까 하노라”(말씀에 대한 확신이 흔들림)

죄의 유혹은 우리가 말씀을 철저히 붙잡지 않을 때 일어납니다. 뱀의 유혹에 대한 하와의 답변이 2절과 3절에 나와 있습니다.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그렇지만 하나님은 2장 17절에서 분명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와는 두 가지 점에서 말씀을 철저히 붙잡지 못했습니다. 먼저 하와는 ‘먹지 말라’는 말씀에 ‘만지지도 말라’는 한 말씀을 덧붙였습니다. 긍정적으로 해석하면 아예 가까이도 하지 말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와가 ‘만지지도 말라’는 말을 덧붙이는 심리에는 먹고 싶은 유혹에 이미 끌리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예컨대 어린 아이들이 부모가 어떤 물건에 손대지 말라고 하면 사람들에게 “아빠가 손대지 말라고 그랬어.”하며 반복하는 것과 같습니다. 

진심은 손대고 싶다는 뜻입니다. 이미 유혹이 들어가면 돌이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먹지 말랬어!” 하고 단호하게 끊고 잊어야 합니다. 자꾸 덧붙이고 해석하면 넘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그렇습니다. ‘십일조 해라’ ‘주일 성수 해라’ ‘이웃을 사랑해라, 용서해라’ 이 명령에는 해석이 필요 없습니다. 그대로 순종하면 됩니다.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 말씀에 해석을 붙이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해석이라는 것이 결국은 순종하지 않는 핑계거리가 되고 맙니다. 예수님 앞에 나왔던 율법사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단순한 명령에 순종하였다면 영생을 얻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내가 사랑해야 될 이웃이 누구인지를 묻다가 결국 사랑을 행하지 못하였습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받고 순종하면 됩니다. 그런데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일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내게 열정을 주셨는데 이것은 내 잘못이 아니야.’ 등 갖가지 해석과 핑계를 대다가 우리는 결국 죄에 넘어가고 맙니다. 

살인을 하면서도 ‘어쩔 수 없었어, 그 상황에서는 누구도 그랬을 거야’ 아니면 ‘저 사람은 죽어 마땅해’라고 변명을 하고 나름대로 해석하다가 죄를 저지릅니다. 일제시대 신사참배 할 때도 그랬습니다. ‘이것은 우상숭배가 아니라 국가의례일 뿐이야’하면서 말입니다. 말씀을 굳건히 붙잡지 못하면 마귀가 파고듭니다. 

하와는 또한 “죽을까 하노라” 하여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을 약화시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사단의 시험을 물리칠 수 있는 비결이 어디 있었습니까? 단호하게 하나님 말씀을 붙잡았기 때문입니다.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마4:4)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마4:7)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4:10) 말씀을 굳건히 붙잡고 있을 때 우리는 죄의 유혹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스텝 3.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거짓에 넘어감)

이렇게 유혹에 노출되었을 때 뱀은 결정적인 거짓말을 합니다. 4절입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에게는 죽음의 고통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인생에서 죽음이나 이별이 얼마나 슬프고 인간을 절망적으로 만듭니까? 뱀은 5절에서도 거짓말을 합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짐승처럼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만물 사이를 중재하는 특권적 위치에서 만물과 같은 위치로 떨어져버리고 말았습니다.

하와는 사단의 거짓말에 속았을 뿐만 아니라 또 이렇게 유혹에 빠지고 나니 선악과가 정말 탐스럽게 보였습니다. 6절입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먹음직하다는 것은 육적인 만족을 말합니다. 보암직하다는 것은 심미적인 만족을 말합니다.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다는 것은 지적인 만족을 의미합니다. 어린 아이들이 즐겨 읽는 배고픈 돼지 우화에서 배고픈 돼지의 눈에는 모든 것이 먹을 것으로 보이듯이 자기를 죽이는 독과가 하와의 눈에는 이처럼 온갖 천상의 맛이 다 담겨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착각입니다. 먹으면 죽습니다. 

유혹에 넘어가면 죄가 주는 거짓말에 쉽게 속고 맙니다. 마치 신기루처럼 죄 너머에는 달콤함이 기다리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다윗은 밧세바의 아름다움에 넘어갔습니다. 그는 아무도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마 그는 문제가 생겨도 자기 권력과 힘으로 무마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가 우리를 속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에게 그것은 사망의 길이었습니다.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살인 교사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결국 이 때문에 전쟁과 살인이 그 집안에서 떠나지 않게 됩니다.

도덕적으로 훌륭하거나 학식이 뛰어난 사람도 일단 죄의 유혹에 빠지고 나면 어리석어 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그런 사람이 저런 어리석은 선택을 했을까하고 우리는 의아해하지만 죄의 유혹이 바로 그렇습니다. 죄가 우리를 속입니다. 다른 게 보이지 않습니다. 완벽히 속일 수 있고, 그 열매는 매우 달콤할 것이라 속입니다. 아닙니다. 죄의 유혹 앞에는 장사가 없습니다. 일단 죄에 발을 담그면 누구도 빠져 나올 수 없습니다. 요셉이 시위대장 아내의 유혹을 받았을 때 옷을 벗고 달아났듯이 죄의 유혹 앞에는 무조건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과정 4. “그 실과를 따먹고”(죄의 실행과 확대)

결국 하와가 이 선악과를 따먹고 맙니다. 하와가 유혹에 노출된 순간 죄의 실행은 당연한 수순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우리 마음을 지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죄의 소욕이 전혀 일어나지 않아야 우리는 죄를 이길 수 있습니다. 죄의 소욕을 일으키지 않는 좋은 길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밝고 아름답고 건강한 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충분히 우리에게 기쁨을 가져다줍니다. 술 담배보다 하나님 말씀이 좋고 건강한 삶이 더 기쁠 때 우리는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악인의 궁전에 거하는 것보다 하나님 장막의 문지기로 있는 것이 더 기쁠 때 우리는 죄를 이길 수 있습니다. 

죄는 확대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와는 남편인 아담에게도 이 선악과를 주었고 아담은 별 저항 없이 바로 먹고 맙니다. 사단이 하와를 유혹하는 데는 1절에서 6절까지 걸렸지만 아담이 선악과를 먹는 데는 단 한 구절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이는 남자가 더 죄에 넘어지기 쉽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또 한편 한 사람이 넘어지면 다른 사람이 넘어지는 것은 순간이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실락원>에서는 아담이 먹어서는 안 되는 줄 알지만 이미 하와가 먹었기에 하와와 운명을 같이하기 위해서 자신도 먹는 멋있는 사람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순진한 해석입니다. 죄는 이처럼 자라고 확대됩니다. 순식간에 우주 전체에 영향을 미치고 맙니다.

하나님이 가나안을 정복할 때 여리고성 전투에서 외투 한 벌을 숨겼던 아간의 죄를 심각하게 물으셨던 이유도, 초대교회에서 땅을 팔고 난 금전의 일부를 숨겼던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죄를 심각하게 처리하셨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죄가 빠르게 확산되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해서 단호해야 합니다. 첫 시작을 잡지 못하면 죄가 안방을 차지하는 것은 시간 문제입니다. 

중동 격언 중에는 ‘낙타의 코를 조심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 여행자가 낙타를 끌고 사막을 횡단하고 있었습니다. 사막의 밤은 춥습니다. 이 여행자가 텐트를 치고 자고 있는데 조금 자다 이상한 소리가 나서 깨어보니 낙타의 코가 보였습니다. ‘이 놈도 추워서 그런 모양이다.’ 하고 그냥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자다가 보니 이번에는 큰 머리가 텐트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것도 그냥 참았습니다. 그러다 이 여행자가 깜짝 놀라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데 낙타의 온 몸이 들어와 자신을 누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여행자는 낙타에게 밀려나 텐트 밖에서 추위에 떨 수밖에 없었다는 교훈입니다. 처음부터 단호하지 않으면 죄는 순식간에 확대되어 우리 주인이 되고 맙니다.

무화과나무 잎으로 옷을 만들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자 제일 먼저 들어온 의식은 부끄러움이었습니다. 그동안에는 벌거벗고 지냈지만 서로 부끄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오자 상대방이 타인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한 몸 됨이 사라지고 분열이 시작된 것입니다. 죄는 가르고 분열시킵니다. 

죄의식은 부끄러움을 동반합니다. 자신들의 허물을 가리기 위해서 무화과나무로 옷을 해 입었지만 이것이 그들의 부끄러움을 가려주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인간은 자신을 가릴 수 있는 옷이 필요합니다. 자기 허물을 직접적으로 바라보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나중에 이 무화과나무 옷을 가죽옷으로 바꾸어 주심으로 우리 수치를 덮을 수 있도록 합법적으로 허락해 주셨습니다. 

인간이 죄를 지어서는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투명하고 깨끗한 양심을 보며 인간은 살 수 없습니다. 죄가 쏘는 독을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결국 예수님을 팔았다는 양심의 가책 때문에 목매어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인간에게는 무화과나무 잎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수치를 가려야 합니다. 같은 수치를 가지고 있는 동료 인간들 또한 상대방의 수치에 대해 적당히 외면해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인간은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무화과나무 잎으로 우리 수치를 가리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단지 우리 눈에서 보이지 않게 할 뿐이지 그 독소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우리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는 우리의 허물과 수치를 완벽히 가려줍니다. 아예 죄의 흔적조차 사라지게 만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모든 수치와 허물로부터 자유로운 인생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