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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를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 (삼상 17:4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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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 (삼상 17:41~49)


요1 4:18에서는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요1 4:8에 보면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요1 4:18절을 이렇게 풀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 두려움이 없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온전한 믿음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온전히 거하지 못하느니라”

불신앙은 두려움을 가져다주고 두려움의 결과는 형벌입니다. 삼상 17장에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여 두려워 떠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군대가 엘라 골짜기에서 서로 대치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당시 블레셋은 약 400여 년 전, 여호수아가 약속의 땅에서 쫓아낸 백성들입니다. 그 이후로 블레셋은 끊임없이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며 지냈던 원수지간입니다. 그러나 이번 전쟁은 상황이 특별했습니다. 

엘라 골짜기에서 이스라엘 군대 앞에 나타난 골리앗이라는 거인 때문입니다. 골리앗의 키는 여섯 규빗 한 뼘입니다. 한 규빗은 성인 팔꿈치에서 중지까지 길이로 약 45.6cm입니다. 한 뼘은 23.2cm입니다. 그래서 여섯 규빗 한 뼘을 계산해보면 296cm입니다. 그는 놋 오천 세겔 무게의 갑옷을 걸쳤습니다. 갑옷 무게만 57kg 정도됩니다. 이것은 그의 힘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 7kg이 넘는 칼날을 단 창을 자유롭게 다루며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그러자 사울과 온 이스라엘이 놀라 크게 두려워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므로 골리앗 때문에 두려워했고 그 결과 40일을 고통스럽게 보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을 신뢰하는 다윗이 나타납니다. 다윗은 골리앗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골리앗과 싸우기를 원합니다. 그 소식을 들은 사울 왕이 다윗을 불러서 다윗이 골리앗을 이길 수 없는 이유를 말하고 다윗을 말리려 합니다. 이 때 다윗은 물러서지 않고 사울에게 자신이 지난 날 양을 지킬 때 곰이나 사자가 나타나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것들을 떼려 잡았다고 간증하며 “여호와께서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라고 담대하게 말합니다. 

그리고 시내에 가서 매끄러운 돌 다섯 개를 골라서 주머니에 넣고 손에 물매를 가지고 골리앗 앞에 섭니다. 골리앗이 다윗을 봤을 때 아주 우습게 보였을 것입니다. 다윗은 이제 나이 20정도 되는 어린 나이였으며 거기다가 키도 작고 아주 곱상하게 생겼습니다. 손에는 막대기 하나 들고 골리앗을 쓰러뜨리겠다고 나왔으니 골리앗의 눈에 우습게 보였을 것이 뻔합니다. 골리앗이 다윗을 보자 어이가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믿는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합니다. 

그 말은 들은 다윗은 전쟁이 하나님에게 속하였음을 고백하고 담대하게 달려갑니다. 그리고 손을 주머니에 넣어서 매끄러운 돌을 꺼내고 물매로 던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하시고 다윗이 던진 돌을 잡아 사용하셔서 골리앗을 단 한방에 쓰러지게 하십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작은 능력으로 큰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TV 다큐멘터리에서 딱따구리가 새끼들에게 먹이를 주는 광경을 방영한 적이 있습니다. 딱따구리 어미는 새끼들에게 먹이를 잡아다 먹여 줍니다. 어미가 먹이를 물고 오면 서로 받아먹으려고 어린 새끼들이 노란 부리를 내밀고 경쟁하듯이 고개를 쳐들고 먹이를 받아먹습니다. 이제 어린 새끼들이 자라서 둥지를 떠날 때가 되었는데 새끼들이 도무지 둥지를 나오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어미가 방법을 쓰는데, 먹이를 가지고 와서 늘 새끼들에게 주던 방식으로 주지 않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새끼들을 불러냅니다. 그런데 새끼들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왔던 그 둥지를 떠나는 일이 두려웠던 모양입니다. 어미가 먹이를 물고 와서 아무리 새끼들을 유인해 내려고 해도 새끼들은 밖으로 나올 생각을 않습니다. 어미는 끝까지 인내하면서 새끼들이 나올 때를 기다립니다. 

시간이 흐르니까 새끼들이 배고 고파서 어쩔 수 없이 먹이를 받아먹기 위해 고개를 내밀고 둥지 밖으로 나옵니다. 그렇게 해서 일단 새끼들을 둥지 밖으로 유인해 낸 다음 시간이 흐르고 나니까 어미가 다른 나무 가지 위에 앉아서 새끼들을 부릅니다. 한번 둥지 밖으로 나왔다가 다시 둥지 안으로 들어간 새끼들은 비록 둥지 밖에 나와 보기는 했지만 다른 가지까지 먹이를 받아먹으러 갈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자기들이 지금까지 살아왔던 둥지를 떠나면 큰 일 나는 줄 알고 있습니다. 두렵습니다. 

그래서 그 곳을 떠나지 못하고 눈치만 보면서 갈까 말까 망설이는데 무려 일주일이 걸립니다. 일주일 동안을 어미 새가 끈기 있게 다른 가지에서 먹이를 물고 기다립니다. 일주일쯤 지나고 나니까 배가 고파서 견딜 수 없게 된 새끼들이 할 수 없이 날개 짓을 해서 어미에게 먹이를 받아먹으러 갑니다. 그렇게 해서 끝내 어미는 새끼들을 둥지 밖으로 불러내는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어미의 먹이를 받아먹고 날개 짓을 시작한 새끼들은 드디어 세상을 향해 날아오릅니다. 지금까지 자신들이 태어나서 자라온 그 둥지가 이 세상의 전부인 줄로 알고 있었던 새끼들이었습니다. 그곳을 떠나면 큰 일 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할 수 없어서 배가 고파 견딜 수 없어서 날개 짓을 하면서 한번 날아올라본 새끼들은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끝내는 그 다른 세상을 향해서 힘차게 날개 짓을 하면서 날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영적인 승리를 누리려면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리고 두려움을 이기고 모험을 시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믿고 골리앗 앞에서는 모험을 했던 것처럼, 딱따구리 새끼들이 어미 새를 신뢰하고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갔던 것처럼 우리들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담대하게 나아가면 우리의 능력 이상의 일들을 경험하게 될 것이며 영적 승리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골리앗이 40일간 조석으로 나와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을 조롱할 때 사울과 사울의 군인들에게 골리앗을 대적하여 싸우라는 내면의 소리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 소리는 하나님의 음성일 수도 있고 양심의 소리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소리를 듣지 못했든지 아니면 내면의 소리를 들었으나 무시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만약 그 중에 한 사람이라도 내면에서 들리는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믿음으로 나아갔다면 그 전쟁의 영웅은 다윗이 아닌 그 사람이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들이 세상에 살면서 너무 큰 소리는 듣지 못합니다. 예를 들자면 지구가 돌아가는 소리 같은 것은 듣지 못합니다. 너무 작은 소리도 듣지 못합니다. 우리의 귀가 들을 수 있는 소리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른들은 못 듣는 휴대폰 벨소리가 있다고 합니다. 10대들을 비롯한 젊은 사람들만 들린다고 해서 틴벨(teen bell)이라고도 합니다. 

노인성 난청이 시작되는 20대 후반 이상의 성인들은 주파수 8,000Hz대 이상의 고음을 들을 수 없다는 점에 착안해 만든 17,000Hz 대 고음역을 쓰는 벨소리입니다. 중학교 수업시간에 한 학생의 핸드폰 벨이 울린다면 반 아이들은 다 벨소리를 듣는데 오직 한사람, 선생님만 그 벨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별 신기한 소리가 다 있다 싶지만 40대 후반에 들어선 제 귀에는 들리지 않으니 어떤 소리인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아이들은 듣는데 어른들은 못 듣는 소리가 세상엔 많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막 은혜를 받고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사람은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순수한 믿음일 때는 하나님 한 분 만이면 기쁘고 행복했는데, 신앙의 연륜이 더해질수록 하나님 말고 다른 것에서 기쁨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처음 예수 믿을 때, 처음 성령을 받았을 때, 처음 직분을 받았을 때는 잘 듣던 하나님의 음성이 전혀 들리지 않는 신자들이 많습니다. 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도 왠만하면 무시하고 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싸우라는 하나님의 음성, 양심의 소리를 들었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두려움 때문에 그 음성을 듣지 못했습니다. 또 들었어도 거부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하나님이 주시는 내면의 소리를 듣고 그 음성에 순종했던 다윗을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한 자를 강하게 사용하시는 분입니다. 다윗은 골리앗보다 약했습니다. 33절에 보면 사울이 다윗에게 다윗은 약하고 골리앗은 강한 자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네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울 수 없으리니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니라” 다윗이 가진 무기 역시 골리앗이 가진 무기와는 비교가 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물매와 매끄러운 돌 다섯 개를 가지고 나갔고 골리앗은 갑옷과 투구를 갖췄고 칼과 창과 단창으로 무장되어 있었습니다. 분명 다윗은 약했고 골리앗은 강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약한 다윗을 강하게 사용하시니 인간적으로 보면 반드시 패할 수밖에 없었던 다윗이 승리하게 됩니다. 

여러분! 제 손에 있는 볼펜이 강대상 위에 스스로 서 있는 것은 불가능해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가능합니다. 제가 잡고 있으면 볼펜은 강대상 위에 서 있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이 자기의 능력으로 골리앗을 물리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다윗을 붙잡아주시니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열차는 객차가 있고 기관차가 있습니다. 객차가 스스로 철로 위를 달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기관차와 연결되어 있으면 기관차의 힘에 의해서 객차가 철로 위를 달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기관차가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강력한 힘, 천지를 운행하시는 파워로 우리의 인생을 붙잡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약해도 주님이 나를 통해서 일하시면 가능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충만했습니다. 그의 믿음은 그의 고백과 행동에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했기에 골리앗 앞에 나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했기에 위대한 신앙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 교회학교에 다니는 어린아이가 어두운 거리를 걷고 있는데 눈앞에 귀신이 나타났습니다. 너무 무서워 그 자리에 돌처럼 굳어 있는데 “귀신을 만나면 찬양을 불러 쫓아버리라”는 교회학교 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 아이는 용기를 내어 강하고 담대하게 두 팔을 뻗어 교회학교에서 배운 찬양을 불렀습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 그러자 귀신의 눈에서 눈물이 고여 떨어지더니 귀신도 노래를 하더랍니다. “감사해요, 깨닫지 못했었는데 …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라는 걸” 누가 지어낸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사탄을 소중한 존재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서 “너는 보배롭고 존귀하고 사랑스러운 존재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다윗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을 사지로 심부름을 보냈습니다. 아버지가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아들을 전쟁터로 심부름을 보냅니까?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가 판단을 잘못한 것입니다. 

전쟁터에서 만난 큰 형 엘리압은 다윗에게 전쟁을 구경하러 왔다고 말도 안되는 구박을 합니다. 다윗은 목숨을 걸고 형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찾아왔는데 형은 억울한 소리를 합니다. 사울은 다윗은 소년이고 골리앗은 어려서부터 장수였기 때문에 이길 수 없다고 말합니다. 다윗을 응원하고 다윗에게 용기를 줘도 시원치 않은 상황에서 다윗의 기를 꺾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과 함께 하셔서 다윗을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의지할 사람도 없고, 가진 능력도 부족하고, 성공할 수 있는 환경을 갖고 있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분은 약한 다윗의 편이 되어 주셨던 것처럼 나의 편이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보배롭고 존귀하고 사랑스러운 존재로 보십니다. 

하나님은 멀리 하늘에서 우리의 모습을 구경하고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멀리서 우리를 바라보시다가 우리가 승리하면 박수를 보내시며 “내 아들 잘하고 있다. 잘한다” 하며 기뻐하시고, 우리가 패배하면 멀리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어쩌면 좋아. 이를 어쩌지”하며 속상해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도와주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하나님의 사람들이 가는 곳에 하나님은 성령으로 혹은 천사로 함께 하시며 하나님의 사람들을 도와주셨습니다. 그런데 성경 66권 중에 사도행전은 다른 책과 달리 결론이 없이 끝이 납니다. 그 이유는 사도행전의 역사는 종결된 것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 계속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미국에 야구잡지에 소개된 이야기입니다. 미국에는 많은 프로 야구팀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많이 우승했던 뉴욕 양키즈팀이 있습니다. 뉴욕 양키즈팀의 캣쳐로 ‘요기 베라’씨가 활약하고 있을 때 일입니다. 상대편 ‘가라기 올라’라는 선수가 뱃트를 들고 나오더니 몇 번의 연습 스윙을 합니다. 그러더니 땅에다가 십자가를 그리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많은 미국 선수들이 하듯이 공을 잘 치도록 기원하는 행동입니다. 

요기 베라는 심판에게 타임을 얻어 가라기 올라에게 항의하였습니다. “나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고 자네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데 하나님이 이런 형편에서 누구 편을 들 수 있겠는가?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이 경기를 구경만 하시도록 내버려 두세.” 그랬더니 가라기 올라 선수는 “우리 교회에서 들은 설교에 의하면 하나님은 구경만 하는 것을 제일 싫어하시는 분이라네. 하나님은 저 관람석에 앉아 있기를 싫어하시고 이 경기장 속에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일세.”라고 했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하나님은 천국에서 구경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지금 이 시간 이 곳에 계시며 우리를 도와주시는 임마누엘이십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항상 믿는 자 중심이고, 구원의 역사 중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우리 자신을 드린다면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계시고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1945년 8월에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습니다. 원자탄 하나가 꽝 하는 순간에 50만 명이 사라졌습니다. 쇠붙이는 다 녹아 없어지고 심지어는 돌 위에 앉아있는 사람이 순간적으로 흔적만 남기고 없어졌습니다. 모든 집, 건물이 그대로 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요한 성전에 성당에 있었던 노란 종 하나가 녹지 않고 그대로 있었습니다. 요한 석상이 그대로 있습니다. 

이것을 그대로 떠다가 히로시마 원폭박물관에 갖다 놓고 그 옆에 이렇게 써 놓았습니다. "불가사의한 일이다." 믿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그 종이 원자탄의 불꽃 속에서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었단 말입니까? 어떻게 보면 어이가 없기도 하고 있을 수 없는 사건입니다. 꽝 하는 순간에 50만 명이 날아가 버리는데 그래도 그 불꽃 속에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거기에 있었노라.” 모든 것이 날아갔으나 하나님이 보존하신 것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우리들과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를 보호해 주십니다. 여러분, 어떤 영화를 좋아하십니까? 저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하고 결국은 비전을 성취하는 영화를 좋아합니다. 제가 최근에 본 영화는 [국가대표]라는 영화입니다. 아주 감동적이었습니다. 혹 전쟁영화를 보십니까? 전쟁영화는 다 끔찍합니다. 손에 땀을 쥐게 합니다. 그런데 전쟁 영화에서 중요한 스토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주연은 절대로 안 죽는다'입니다. 이 영화 끝날 때까지 주인공은 안 죽어요. 이게 시나리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엄청난 시나리오 속에 내가 있고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주의 음성을 들어보십시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사야 41장 10절의 말씀입니다.

해피데이를 진행하는 동안 마귀는 순간 순간 제 마음에 ‘할 수 없다’는 생각을 집어넣으려고 시도를 했습니다. 그 때마다 저는 하나님을 바라봤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면 가능하다. 하나님에게는 불가능이 없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하나님을 신뢰하고 열심히 하는 것이다.” 

저는 세상을 살면 살수록 제가 다윗처럼 약한 자라는 것을 발견합니다. 여러분 중에도 그런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자신의 약함을 발견할 때 우리는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면 가능하다. 하나님에게는 불가능이 없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하나님을 신뢰하고 열심히 하는 것이다.” 
다윗은 할 수 없다는 사울 앞에서 담대하게 믿음의 말을 합니다. 32절을 보십시오.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그로 말미암아 사람이 낙담하지 말 것이라 주의 종이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리이다” 34-37절을 보십시오.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35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36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37 또 다윗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얼마나 아릅답고 담대한 신앙고백입니까? 다윗은 자신을 조롱하는 골리앗 앞에서도 믿음의 고백을 합니다. 

45-47절을 보십시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46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47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의 중요한 법칙 중에 하나가 “인생은 말 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자동차의 방향을 핸들로 조종하듯이 인생의 방향은 말로서 조종 되는 것입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습니다. 사람은 말의 열매를 먹고 삽니다. 특히 성도의 말은 예언입니다. 말한 대로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말한 대로 역사해 주십니다. 민 14:28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 속에서도 믿음의 고백을 하십시오. 하나님은 그대로 역사해 주실 것입니다.  

채의숭 장로님이 쓰신 [주께 하듯 하라]는 책에 보면 아프리카 최남단의 원래 이름이 ‘폭풍의 곶’, ‘악마의 곶’이었습니다. 곶이라는 말은 바다나 호수로 가늘게 뻗어 있는 육지의 끝 부분입니다. 우리나라 지도를 놓고 보면 호랑이 꼬리에 해당하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이 포항 호미곶입니다. 그런데 포르투칼의 탐험가 바스코 다 가마가 그곳을 항해한 후에 이름을 달리 붙였습니다. 아름다운 해변과 잔잔한 바다가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그곳을 ‘희망봉’이라고 붙였습니다. 

똑같은 곳을 어떤 사람은 ‘악마, 폭풍’이라고 표현했는데 바스코 다 가마는 ‘희망봉’이라고 했습니다. 그 책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융통성, 나는 이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성경은 ‘예’하고 ‘아니오’ 할 때 ‘예’, ‘아니오’라고 가르친다. 성경은 ‘글쎄요’라는 말을 가르치지 않는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고 사십니까? 아닙니까? ‘글쎄요’ 라는 답은 안 믿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어정쩡한 태도의 사람이 아니라 확실한 믿음의 사람을 통해 일하십니다. 

우리는 어정쩡한 고백을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실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우리가 승리할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아닙니다. 우리는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신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승리한다. 

우리가 믿음의 삶을 살고 하나님의 일을 해 나갈 때 우리 앞에는 푸른 초장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들어가기도 하고 사자나 곰의 공격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을 믿고 담대하게 전진해야 합니다. 

초대교회의 시절에 기독교가 많은 환란을 받았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순교를 당하는 중에 유명한 교부 크리소스톰도 체포되었습니다. 황제 앞에 끌려온 크리소스톰은 황제에게 재판을 받습니다. 황제가 말했습니다. “저들을 어두운 독방에 가두어 두어라” 그러니까 신하가 하는 말이 “황제여 이 사람은 크리스천입니다. 그들이 제일 좋아하는 곳은 독방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들은 그곳에서 조용히 하나님을 생각하고 기도와 찬송을 마음껏 할 수 있으니까 독방을 제일 좋아합니다. 어떻게 좋아하는 형벌을 줄 수가 있습니까?” 한참 생각하던 황제가 “그렇다면 포악한 죄수들과 함께 넣어서 포악한 사람들에게 괴로움을 당하도록 하라” 그러니까 또 신하가 “황제여 이 사람이 제일 원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곳에 가면 그 사람들을 전도해서 다 크리스천을 만들 것입니다.” 그러니까 황제가 “그렇다면 십자가에 처형시키도록 하라” 그러니까 신하가 “그것은 아니 될 말씀입니다. 

이 사람이 가장 바라는 것이 십자가에서 영광스럽게 순교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해 줄 수가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은 어떤 처지에 놓이고, 어떤 환경에 놓인다 할지라도 그곳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편에 서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인하여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을 믿고 믿음의 고백을 해야 합니다. 다윗과 같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은 비록 독방에 있더라도, 포악한 죄수와 있더라도, 십자가에 처형당한다고 하여도, 낙담하거나 절망하거나 뒤로 물러서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담대하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현실 세계에는 우리의 능력으로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이 있습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사업가들은 사업을 하면서, 직장인들은 직장생활을 하면서 뛰어넘을 수 없는 벽들을 만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다윗처럼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음의 고백을 하며 담대하게 앞으로 전진 한다면 하나님은 멀리서 구경만 하지 않으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며 전능하신 능력으로 우리를 도와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우리는 하나님은 은혜로 우리의 앞을 가로 막고 있는 벽을 능히 뛰어넘게 될 것입니다.
함께 고백해 봅시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신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승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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