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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 가지 그늘에 살리라 (겔 17: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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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가지 그늘에 살리라 (겔 17:22~24)


<산상수훈 앞에 선 무기력한 우리>

요즈음 우리는 다니엘 세이레 새벽 기도회를 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부터 7장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산상수훈을 강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독교 윤리의 요약판인 까닭에 제가 꼭 해보고 싶었던 강해설교입니다. 정말 보배같이 귀하고 아름다운 말씀들이지요. 하지만 그 절대적이고 완전한 윤리 강령 앞에서 저는 매일 얼마나 괴로운지 모릅니다. 참으로 부끄럽고 떨리는 말씀들입니다. 

주님은 꼭 주먹으로 사람을 쳐 죽인 것만이 살인이 아니고 마음속에 누군가를 죽이도록 미워했으면 그것도 살인이라고 하셨습니다. 꼭 육체적으로 간음한 것만이 간음이 아니라 마음속에 음욕을 품은 자도 이미 간음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산상수훈은 이런 말씀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설교하기는 쉬워도 실천하기는 너무도 어려운 말씀들입니다. 

놀라운 것은 주님께서 산상수훈을 가르치신 다음에 반드시 우리의 실천을 요구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산상수훈의 모든 말씀을 마치신 뒤 주님은 그 유명한 '집짓는 자의 비유'로 말씀을 마무리하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마 7: 24).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듣고서 행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반석 위에 집을 짓듯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마 5: 26). 주님의 말씀을 듣기는 들었는데 실천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짓듯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이와 같이 주님이 산상수훈을 말씀하신 것은 그냥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냥 이런 윤리적 교훈이 있으니 알고 있어라", 이런 의도가 아닙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그대로 행하라는 것이 결론입니다. 그런데 우리처럼 부족하고 죄 많은 사람들이 그 완전하고 절대적인 윤리를 어떻게 실천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오른 뺨을 치는 자에게 "내 왼 뺨까지 치십시오" 하고서는 왼쪽 뺨을 돌려댈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도 저는 설교자이기 때문에 주님이 성경에서 가르쳐 주신 그대로 설교를 안 할 수가 없기에 주님의 말씀 그대로 설교는 했지만, 제 자신부터 실천은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렇게 부끄럽고 두려울 수가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어떤 날은 도저히 설교를 할 수가 없을 것만 같은 날도 있었습니다. 정말 약하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간신히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경험했습니다. 제가 충분히 말씀을 연구도 못하고 또 이 말씀대로 살지도 못한다고 체념하며 괴로워하는 마음으로 강단에 섰던 날, 오히려 더 힘 있는 말씀이 나오고 교인들이 더 많은 은혜를 받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 날 오늘 새벽 설교에 큰 은혜를 받았다고 문자 메시지를 보내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제 자신이 준비도 많이 하고 엄청난 은혜를 받아서 그 이튿날 새벽에 이 말씀을 전할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설렐 때가 있습니다. 정말 놀라운 진리를 깨달았고 참 신선한 통찰력도 얻었다고 생각해서 자신감을 가지고 열변을 토하지만 오히려 교인들의 반응은 밋밋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왜 이런 차이가 있을까요? 아마도 하나님께 겸손한 마음으로 의지하는 정도의 차이 때문인 것 같습니다. 내 실력으로 준비한 설교는 성령이 개입할 틈새가 없지만 나의 부족을 통감하고 하나님께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장하신다는 말이지요. 산상수훈도 그런 것 같습니다. 그 엄청난 말씀들을 감히 어떻게 실천할 수 있습니까? 거듭나지 않은 자연인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우리가 우리의 부족함을 절감하고 깊이 체념하고 절망할 때 산상수훈은 더욱 더 우리 마음 속 깊숙이 박혀 들어옵니다. 그래서 저는 산상수훈을 여는 8복 중에 제 1복, 즉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이 산상수훈 전체의 이해는 물론이고 실천을 위해서도 결정적으로 중요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거지가 자신의 부족과 결핍을 솔직히 인정하고 모든 체면과 자존심을 내려놓고 "한 푼 줍쇼!" 구걸하듯이 우리 역시 우리의 부족과 결핍을 겸손히 인정하고 "하나님 제 힘으로 할 수 없으니 저 좀 도와주십시오!" 하면 됩니다. 

<작고 연한 가지가 꺾이고 심겨지니>

영어에서 쓰는 수사법 중에 'Oxymoron'이라는 게 있습니다. 우리말로는 '모순형용법'이라고 부릅니다. 정반대되는 말을 나란히 병치시켜서 어떤 상황을 강조하거나 독자의 관심을 끄는 비유법이지요. 예컨대 "더럽게 예쁘다"는 말이나 "병아리 눈곱만큼 많이도 주네", '지독한 친절,' '작은 거인', '다 아는 비밀', '우둔한 천재' 등등 수없이 많은 예를 들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가 약할 때 강하다는 말씀을 합니다. 복음성가에도 "약할 때 강함 주시네 나의 보배가 되신 주" 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모두 다 모순어법이지요. 

우리 기독교 신앙이야말로 모순어법으로 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약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강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어리석을 때 하나님의 지혜가 우리 안에 들어옵니다. 우리가 비어질 때 하나님이 채우십니다. 우리가 허물 때 하나님은 세워주십니다. 

오늘 말씀도 같은 맥락의 말씀입니다. 백향목 꼭대기에서 가장 작고 연약한 가지 하나를 꺾어다가 이스라엘의 높은 산 위에 심었더니 큰 백향목 나무가 되었습니다. 그 작고 연약한 가지에서 또 다른 큰 가지가 뻗어 나오고 열매를 맺는 백향목이 된다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온갖 새들이 그 거목에 깃들이고 온갖 날짐승들이 그 가지 끝에 보금자리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을 때 장차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것이라는 희망의 예언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말하는 백향목은 궁궐이나 성전을 지을 때에만 사용하던 최고급의 목재였습니다. 특히 레바논 지역에서 나는 백향목은 재질이 곧고 튼튼할 뿐 아니라 특유의 향내 때문에 벌레가 끼지 않고 썩지 않는 목재로서 유명했습니다. 백향목은 흔히 이스라엘 민족을 상징하는 비유이지요. 그러므로 여기에서의 백향목 역시 이스라엘 민족의 운명을 상징합니다. 

주님은 어떤 백향목 나무의 맨 꼭대기에 돋은 어린 가지들 가운데서 연한 가지 하나를 꺾어다가 세계산(世界山, world-mountain)인 예루살렘 성전산에 심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여기 작고 연한 백향목 가지는 크고 강한 백향목인 강대국 바벨론과 애굽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은 약소국 이스라엘의 운명을 말합니다. 하지만 그 작고 연한 백향목 가지가 온 세계의 중심인 예루살렘의 성전산에 심겨지는 날 커다란 세계수(世界樹)로 자라나 온갖 새들을 품는 은신처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온 천하민족에게 도피처를 제공할 정도로 위대한 나라가 된다는 예언이지요. 

이처럼 오늘의 비유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백향목 나무의 맨 꼭대기에 돋은 어리고 순한 가지 하나가 세계의 중심에 심겨져 또 하나의 거목인 백향목으로 자라나 온 세상에 은신처를 제공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다는 예언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에서 "연한 가지를 꺾어 높고 우뚝 솟은 산에 심는다"는 말씀이 가장 제 마음에 와 닿습니다. 이 작고 연한 가지가 장차 거대한 세계수 백향목으로 자라나 온 세상에 은신처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꺾이고 심겨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크고 강한 가지는 잘 꺾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크고 강한 가지는 높은 산에 심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작고 약하고 순한 가지가 되어서 하나님의 손에 꺾일 때 여기 성전에 심겨질 수가 있습니다. 크고 강하다는 자부심이 있을 때에는 잘 꺾이지 않습니다. 설령 꺾였다고 할지라도 무거워서 높고 우뚝 솟은 산 위에 까지 운반하기가 어렵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작고 연약해 보이는 가지가 꺾이고 심겨져서 큰 나무가 되고 열매를 많이 맺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이나 애굽, 앗수르 제국과 같은 강대국들 사이에 끼여 죽은 목숨이 되었습니다. 작아질 대로 작아졌고 약해질 대로 약해졌습니다. 이제 희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절망의 때에 하나님은 희망의 약속을 하십니다. 강대국 바벨론과 애굽이라는 백향목 맨 꼭대기에 돋은 어리고 순하고 연한 가지 같은 약소국 이스라엘을 꺾어다가 온 세상의 중심인 예루살렘 성전산 꼭대기에 다시 심겠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렇게 연한 순이 크게 자라나 세계수 백향목이 되어 천하의 새들과 같은 모든 민족 국가들에게 보호처를 제공하는 날이 올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이 작고 연약한 가지가 되어서 꺾이고 심겨지기 쉬울 때 주님은 이렇게 높이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왜냐하면 본문 24절 말씀처럼 주님이야말로 높은 나무를 낮추시고 낮은 나무를 높이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푸른 나무를 말리고 마른 나무를 무성케 하시는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요셉도 모두 꺾이고 심기기 쉬운 연약한 순과 같을 때 귀하게 쓰셨습니다. 보잘 것 없는 가지 같았을 때 꺾어서 심고 거목이 되어 숱한 열매를 맺게 하셨습니다. 모세도 80 노인이 되어 아무 힘도 야망도 없는 야인이 되었을 때 꺾어서 심고 출애굽의 영도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신약에 와서는 바울 역시 가장 약하여 두려워 떨 때 가장 뛰어난 사도가 되게 하셔서 그 나무 밑에 모든 이들이 몰려드는 세계수가 되게 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예수님이 그랬지요. 작고 연한 순과 같이 쉽게 꺾였고 심겨졌기에 온 천하의 생명들에게 구원의 처소를 제공하는 세계수가 되셨습니다. 이사야 53장 2절은 말씀합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예수님은 금방이라도 꺾일 것 같이 연약한 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꺾이고 심겨지니 온 세상이 그 예수님께로 와서 구원과 영생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라는 세계수 그늘에 들어오는 자마다 사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모순어법으로 가득찬 생활입니다. 꺾이기 쉬운 연한 가지가 될 때 많은 열매를 맺는 거목이 됩니다. 약할 때 강해집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통감하고 슬퍼할 때 주님의 위로를 받습니다. 도저히 실천할 수 없는 산상수훈의 말씀 앞에 납작 엎드려 절망할 때 하나님이 도우십니다. 꺾이지 않는 가지는 옮겨심기 어렵습니다. 우리의 자아가 꺾여야 합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겸손히 인정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내 안에 들어옵니다. 그리하여 산상수훈의 말씀들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의해 꺾인 내 안에 들어온 그리스도의 능력, 즉 성령의 능력이 하시는 일이 됩니다. 

이제 이번 주간은 새벽기도회의 마지막 주간입니다. 말씀 한 구절 한 구절이 울려 퍼질 때마다 작고 연약한 가지처럼 여러분의 자아를 꺾고 주님께 엎드리십시오. 주님께서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복된 주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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