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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살전 3: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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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살전 3:7~13)

 
내 용 전통적으로 11월은 교회에서 감사의 달로 지키고 있습니다. 특별히 물질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추수 감사절을 언제나 11절에 갖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쌀농사가 없기 때문에 보리 수확기에 추수 감사절을 지켰는데 맥추절이라고 합니다. 금년에도 하나님은 우리나라 땅에 넘치는 풍년을 주셨습니다. 대한민국 어디를 가보아도 논밭에 황금물결의 곡식이 넘치고 지금은 거의 추수가 끝나는 무렵입니다. 신문에서 정부가 고민을 하고 있다고 발표했습니다. 많은 곡식의 보관이 문제라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성경에 하나님이 네 창고가 넘치도록 부어 주리라 하신 말씀이 지금 우리 민족에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렇게 주시는데도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면 영혼이 막힌 사람입니다. “얼마나 더 해야 네가 하나님의 축복 손길을 알게 되겠느냐?” 이렇게 반문할 수가 있습니다. 먼저 오늘 말씀 배경을 설명하면 데살로니가라는 말은 알렉산더 대왕이 한참 세력을 확장할 때 그의 신복과 카산드로스 장군을 시켜서 이 도시를 점령하였습니다. 

카산드로스 장군은 알렉산더 대왕 누이동생과 결혼을 했는데 도시를 점령한 후에 알렉산더 대왕의 누이이자 자신의 아내가 된 살로니카의 이름을 도시 명으로 지었기 때문에 ‘데살로니가’ 이렇게 된 겁니다. 이런 도시와 도로 이름을 유명인으로 짓는 문화는 세계 공통입니다. 미국에도 수도가 워싱턴입니다. 한국에도 충무로, 을지로, 퇴계로…. 이런 것이 있지 않습니까? 사도행전 17장을 보면 바울이 2차 전도 여행 때 이 도시를 찾아와서 모진 박해를 받으면서 열심히 전도를 하여 데살로니가 교회를 만들었습니다. 

바울이 그곳을 떠난 이유는 너무 심한 박해 때문에 견딜 수가 없어 베뢰아 지방으로 쫓겨난 것을 성경에서 보게 됩니다. 시간이 얼마 지난 후 바울은 궁금해 졌습니다. 그래서 디모데를 거기에 파송해 형편을 알아오라고 했는데 디모데가 뜻밖의 소식을 가져왔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환난과 궁핍에도 굴하지 않고 아주 튼튼한 믿음으로 교회를 잘 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성경 말씀에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라는 말은 “나는 이제 살만하게 되었다.” 그 살만하게 되었다는 내용이 뭐냐? “데살로니가 교우들의 핍박 중에서 지키는 믿음 때문에 나는 살만 합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고난이 두 가지 표현으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는 환난이요 하나는 궁핍입니다. 환난 부분은 박해 부분입니다. 우리가 경험했지만 큰 권력이나 대다수 민중의 물리적 힘으로 어떤 특정한 사람들을 계속 괴롭히면 견딜 수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때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집중 핍박하는 문화였기 때문에 죽을 각오가 아니면 예수 믿기도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잘 견디고 “죽이려면 죽여라.”하고서 교회를 지키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사회에서 활동도 제약을 많이 받아서 생활이 궁핍해 졌습니다. 인간은 초기 역사에서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는 삶의 철학이 있습니다. 먹고 사는 물질 문제의 자유함을 추구해 왔습니다. 옛날 임금들은 자신의 재임기간 중에 국토를 확장시켜야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땅을 넓혀 농사를 지어 식량을 많이 생산함으로 자국민의 생활을 조금이라도 안정되게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훌륭하지 않다.” 그래서 임금이 되는 사람마다 이 문제로 고민했고 끝없는 영토 확장의 전쟁을 그렇게 많이 했던 것입니다. 또 이 궁핍이라는 말은 인간 고난 중에 견디기 힘든 부분을 말합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교우들에게 이 두 가지 고난이 함께 있었습니다. 이런 고난이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지금 바울은 뭐라고 말하느냐? “하나님 앞에서 너희를 인하여 너무 큰 기쁨이 내게 있으므로 어떠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내가 보답할꼬?” 너무 좋아서 “살맛난다.” 그러고 있는 것입니다. 

“핍박을 받으면서 생활이 말로 다할 수 없이 궁핍한 가운데 있는 사람이 뭐가 그렇게 기뻐서 어떤 말로 하나님께 감사해야 될지 모르겠다.”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바울의 목표는 “설사 굶어 죽는다고 하자. 영적으로 충만한 것이 인간 삶의 기본이니 핍박 중에서 믿음을 지키는 여러분을 바라보니 나는 살만합니다. 너무 기뻐서 어떻게 보답할지 모르는 감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바울의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풍성한 가을철에 우리 믿음도 그렇게 풍성하고 넉넉한 마음으로 살아야 되겠는데 왜 그런 것이 어려운가? 오늘 이 문제를 취급하고자 합니다. 

인간이 불행해지는 원인 가운데서 제일 큰 몫을 차지하는 게 하나 있습니다. 병리적 욕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 돌이킬 수 없는 운명적인 것인데 그 자체를 원망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항상 불행한 마음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여기 지금 남자 교인과 여자 교인이 거의 절반씩 되십니다. 만약에 여자 신도들이 생각할 때 ‘왜 나는 여자인가? 남자로 태어났으면 얼마나 좋을까?’

바로 이것이 병리적 욕망이라는 것입니다. ‘왜 나는 이렇게 생겼을까? 왜 한국인이며 나는 왜 이씨, 박씨 가문이 되었는가?’ 내 의사가 전혀 개입되지 않고 주어진 조건들을 불평하는 것을 병리적 욕망이라고 합니다. 이 문제를 아주 훌륭하게 해결한 사람이 있죠? 마틴 루터 킹 목사입니다. “피부 색깔이 까만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자. 얼마나 감사한 일이냐?” 그래서 “Black is beautiful. 이 문제는 평생 불평해도 아무 효과가 없다. 

그렇다면 이것을 감사로 바꾸자.” 병리적 불행에 빠져들면 정신적 결함이 생깁니다. 심각해지면 우울증이 됩니다. 해결이 안 됩니다. 이것을 우리 믿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해결을 해야지 거기 빠져들면 평생 행복하지 않고 감사한 것이 없습니다. 저는 스칸디나비아에 처음 갔을 때 이런 감정을 잠시 가져본 기억이 있습니다. 스웨덴을 가니까 키 작은 사람이 한명도 없습니다. 그 나라에 가보니까 나보다 작은 사람이 한명도 없습니다. 보통 남자들은 90퍼센트 정도 사람들의 키가 190cm 이상입니다. 

그러면 보는 사람마다 다 우러러 봐야 하고 위축감이 느껴지는 겁니다. 그때 저는 잠시 ‘하나님이 나는 만들다 마셨나?’라는 생각을 했는데 그런 키다리 친구 스웨덴 사람 한명이 한국 여자와 결혼하기 때문에 주례를 했습니다. 그래서 아주 친해졌습니다. 이 친구가 어느 날 나에게 지독한 농담을 해서 안 잊혀집니다. 뭐라고 하느냐 하면 웃으면서 “너희 한국 사람들은 그렇게 작은데 사는 게 재미가 있느냐?” 만약 우리가 이런 병리적 욕망에 불행감에 사로잡히면 그 사람은 평생 불행하게 살아야 합니다. 바울은 지금 다른 사람들이 불행의 조건으로 생각하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는 겁니다. 

아니, 궁핍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핍박받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나는 이제 살만하다. 기쁘다.” 그러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위대한 겁니다. 그 다음에는 자신의 불행 요인의 책임을 남에게 돌릴 때 나는 더 불행해 집니다. ‘내가 못살고 가난한 것은 다른 사람들이 돈을 다 벌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증오감정이 생깁니다. 돈 많은 사람들이 다 나쁜 사람처럼 생각됩니다. ‘누구에게나 기회는 오는데 아직 내게는 기회가 오지 않았을 뿐이다. 지금은 저 사람의 기회이지만 나에게 기회가 올 것이다.’ 이런 희망을 가지고 사는 것이 행복입니다. 

어느 지역 개척 교회 목사님 10명이 저를 만나자고 해서 만났습니다. “목사님! 우리들 밥도 좀 사주시고 우리들 개척교회, 상가교회 하느라 힘듭니다.” “그래요? 만납시다.” 이야기를 하는 중에 하나같이 똑같은 원망이 하나 있더라고요. 그게 뭐냐 하면 “우리 교회가 부흥이 안 된 첫째 이유가 우리 지역에 큰 교회가 하나 있는데 그 교회는 온갖 좋은 문화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이 지역 사람들을 다 버스로 몰아다가 그 교회는 헌금도 많고 교인도 많고…. 그래서 우리 교회는 안 옵니다. 

그 교회 때문에 우리 교회는 다 고생하고 교회 부흥이 안 됩니다. 우리는 그렇게 할 수도 없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제가 농담으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러면 목회를 그만 두세요. 다른 사람 때문에 내가 불행하다고 판단한다면 이 세상에 그런 사람들이 언제나 주변에 있기 마련입니다. 그 교회도 나와 같은 과정을 통해서 저렇게 되었다고 생각해야지 당신들이 이곳에 교회 개척하러 오는 것을 기다리고 그 교회가 열심히 하지 말아야 합니까? 이것은 논리가 안서는 겁니다. 

누구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나 때문이라고 생각하세요. 이런 사람이 발전합니다. 이웃을 원망의 대상으로 보기 시작하면 제일 큰 피해자는 내가 됩니다. 증오와 미움은 자기 발전에 절대 도움을 안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인간 관계성의 진리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여러분! 세상이 발전하는 것은 나보다 앞서가는 사람이 있어주기 때문에 발전하는 겁니다. 물론 나도 발전합니다. 마라톤도 혼자 뛰면 일등입니다. 그러나 기록은 안 나옵니다. 나보다 앞서가는 사람이 있어줌으로 나도 따라서 발전하는 것이요 우리보다 앞서가는 나라 때문에 우리나라도 발전하는 것입니다. LA 야외 음악당에 세계 3대 테너가 왔을 때 저는 정말 그것만은 표 사가지고 현장에서 듣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다 매진되어서 표를 살 길이 없었습니다. 그 날 저녁은 대통령도 표 사가지고 들어와서 특별석이 아닌 일반석에서 관람했습니다. 

다행히 TV로 보여주어서 관람했습니다.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 루치아노 파바로티 세계에서 노래 제일 잘하는 사람들 세 사람이 와서 서로 경쟁적으로 노래하는데 그 사람들은 세계에서 1, 2인자를 다투면서 친구들이지만 라이벌 관계입니다. 그날 공연이 그렇게 성황을 이루었던 것은 그 전에 어떤 사건 때문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병들어서 누웠습니다. 재기 불능! 그러면 라이벌 관계인 다른 사람은 좋잖아요? 나보다 잘난 놈이 쓰러지니까요. 

내가 제일 잘난 거잖아요? 아닙니다. 문병 가서 “네가 쓰러지면 어떻게 되는 거야? 나도 소멸되고 없어져. 내가 이만큼 발전한 것은 네가 항상 나를 이기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나도 지지 않으려고 노력해서 너도 나도 이만큼 발전한 거야. 세계무대에 설 수 있었던 거야. 그런데 네가 일어나지 못하면 난 어떡하란 말이야? 빨리 일어나서 나를 이기려고 해! 나는 지지 않겠어. 우리 관계는 이런 관계야. 빨리 일어나.” 그래서 다시 일어났습니다. 

그 후의 공연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사람들이 그 소식을 듣고 몰려 온 겁니다. 네가 있으므로 내가 있고 내가 있으므로 네가 있는 관계! 경쟁자가 있어야 나도 발전합니다. 대한민국 주변은 언제나 강대국입니다. 지금도 세계 4강이라고 하면 러시아, 중국, 일본이 들어가잖아요? 우리는 그 가운데 끼었잖아요? 그래서 어떻게 되었어요? 우리는 살아남기 위한 노력을 필사적으로 하여 지금은 비슷해졌습니다. 앞으로 러시아와 중국, 일본, 한국은 누가 앞서갈지 판도를 알 수 없게 되었잖아요? 사람은 신선한 충격을 받을 때 자신이 지니고 있는 능력을 발휘하도록 되어있습니다. 

지구촌 행사 중에 제일 관심이 많고 규모가 큰 것이 올림픽입니다. 이것은 기록 경쟁입니다. 올림픽 갈 때 마다 관계자들이 제일 기대하는 것은 신기록입니다. 올림픽 출전 선수들의 꿈은 하나입니다. 남이 세운 기록을 내가 깨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록 향상이 됨으로 재미있는 것입니다. 이웃은 나를 위해 존재하는 신선한 경쟁자들입니다. 그들이 있어줌으로 내가 있고 내가 있으므로 그들도 함께 있는 관계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나의 인생관을 어떻게 갖느냐에 따라서 삶이 행복해지고 불행해집니다. 저는 FTA 절대 찬성자입니다. 그렇게 해보세요. 

온 세계가 품질경쟁을 해서 얼마나 좋은 세상이 될는지 이것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해야 합니다. 관계하지 않고 이것만 가지고 이대로 살자는 것은 세계관이 좁은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우리의 경쟁자 누구든지 좋아. 겁낼 거 아무것도 없어. 우리 대한민국 사람 머리가 얼마나 좋은데요. 겁낼 거 없습니다.” 중남미 가서 과일가게 아저씨들 보면 항상 아줌마들 계산을 손가락으로 하더라고요. 간단한 것도 선교팀이 가서 과일을 사려고 하면 일마다 손가락으로 계산하고 있어요. 우리 대한민국 사람들은 얼마나 머리가 좋은데요. FTA 해도 괜찮아요. 충분히 이길 수 있습니다. 자신감 가지고 할 수 있습니다. 경쟁이 있으므로 발전합니다. 오늘 제가 국회의원 출마한 사람 같습니다. 

바울은 지금 뭐가 기쁜 것인가? 핍박받고 환난 받지만 기쁜 겁니다. 인생의 목표가 이것을 통해서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므로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라고 말합니다. 자연 환경, 생활 조건 너무 좋은 곳은 발전이 안 됩니다. 필요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악조건인 사람들은 그 악조건을 이기기 위해서 경쟁합니다. 미국의 본토인은 아메리칸 인디언들입니다. 그 사람들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종 가운데 신체적으로 가장 우월한 종족입니다. 우리가 영화를 통해서 봤잖아요? 

그 강인한 체력으로 웃통을 벗어던지고 지칠 줄 모르고 산촌을 넘나드는데 미국 정부의 인디언 보호 정책이라는 것이 나오면서부터 멸종됩니다. 돈을 벌지 않고 살기 때문입니다. 알코올 중독자, 마약 중독자, 이제는 다 소멸되어 버렸습니다. 조건이 너무 좋은 것 그렇게 찬성할 게 못됩니다. 기독교는 핍박의 역사 속에 살아왔지만 그곳에 하나님의 뜻이 계셨습니다. 그래서 굳건히 누구도 쓰러뜨릴 수 없는 영적 세력으로 이 세상을 정복했습니다. 바울은 지금 그것을 내다보며 기뻐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는 사람들 가운데 이상한 사람이 있는데 상대적 불행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평생 감사, 행복이 없습니다. 습관적으로 남의 것만 부러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이 지니고 있는 내용이 훨씬 좋은데도 그것을 보지 못하고 남을 항상 부러워합니다. 우리 목사들은 통계가 있습니다. 교인들을 봅니다. 내가 출석하는 교회가 아주 좋은 교회입니다. 

그런데도 다른 교회만 늘 부러워하는 말을 늘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그 교회에 가도 또 마찬가지입니다. 쉽게 말해 심하게 말하면 다른 사람의 남편이나 부인을 부러워한들 내게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그런데도 늘 부러워합니다. 다른 나라 부러워해봤자 내 행복에 도움이 되겠습니까? 다른 사람의 내용, 집이나 자동차 아무리 좋다한들 내 것만 하겠습니까? 

공연히 상대적 불행을 만들고 불편해 합니다. 이런 사람은 평생 감사도 못하고 행복하지도 않습니다. 우리 목회자들은 교인 통계가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헌금 생활 더 잘 합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가난한 교인들은 십일조 내나 안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봤자 부자 되냐? 하나님께 할 거 하고 살지. 이래도 저래도 똑같아.’ 그런데 부자는 무슨 계획이 항상 그렇게 많더라고요. 그 계획달성 때문에 헌금도 못하고 삽니다. 바울은 “나는 어떤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풍부에 처할 줄도 알고 비천에 처할 줄도 안다. 

부자로 살아도 교만하지 않고 가난해도 비굴하지 않고 있는 대로 기뻐하며 살아가고” 그랬잖아요? 신라 시대 자비왕 시절에 백결 선생 유명하지요? 너무 가난해서 옷을 100군데 기어입어서 백결입니다. 음악인입니다. 거문고를 좋아합니다. 명절 때가 되었는데 집집마다 떡방아 찧는 소리가 쿵더쿵 쿵더쿵 들리는데 가난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부인이 화가 나서 “우리 집은 뭘 가지고 명절을 지내란 말이오?” “내가 떡방아 찧을 테니 거기 앉아요.” 그리고는 낡은 거문고로 떡방아를 찧는 겁니다. “쿵쿵 쿵더쿵 쿵더쿵!” 그 음악을 후대에 대악, 방아타령이 된 겁니다. 

백결 선생과 같이 가난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가진 것으로 위로를 찾는 것이 행복입니다. 저는 지금 세상을 다닌 경험 때문에 확실히 평가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세상에서 살기 제일 좋습니다. 조건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다녀보십시오. 교회는 갈보리교회가 제일 좋습니다. 내가 다녀보니까 온 세상 다 다녀보아도 인천공항만큼 좋은 공항이 없습니다. 음식 제일 맛있고 사람들 제일 예쁘고 천당 아래 분당 살고…. 가진 것으로 만족하세요. 그리고 가진 것으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영적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 과거를 그리워하면 현재는 불행해 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보세요. 출애굽 할 때 “모세를 죽이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우리가 애굽에서는 편안한 잠을 잤고 자극성 있는 음식도 먹어봤고 가끔 고기도 먹었지 않느냐? 이 사막에서 날마다 만나만 먹고 우리를 묻을 곳이 없어서 데리고 나와서 죽이려 했느냐? 모세를 죽여 버리고 바로에게 돌아가서 사는 게 낫겠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죠? 그 사람들을 다 죽여 버리셨습니다. “하나님의 역사 진행 앞에서 무슨 그런 불평이 많으냐?” 한 사람도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갔습니다. 

바울 사도 보세요. “나는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하여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쫓아가노라.” 기독교는 미래 지향적입니다. 천국을 향해서 나아갑니다. 창세기 소돔과 고모라성 심판 때 롯의 처는 어떻게 되었다고 했습니까? 뒤를 그리워하여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뒤 돌아보지 말라고 했는데도 돌아보다가 그렇게 되었습니다. 미국에 이민 와서 최고 성공한 민족이 아일랜드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은 자기들이 타고 온 배를 내리자마자 불 질러 버렸습니다. 

“돌아갈 생각하지 마. 과거는 잊어버려.” 그래서 그 민족 가운데 대통령이 제일 많이 나왔고 재벌이 제일 많이 나왔습니다. 최고로 성공했습니다. 지금 위치에서 좋은 것을 발견하지 못하면 어떤 형편이 와도 소용이 없다는 인식부터 할 때 행복과 감사는 시작됩니다. 우리는 이 달에 또 추수감사절을 지키게 되는데 최초의 추수감사절 예배는 감사할 조건이 없는 사람들이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겁니다. 그들의 조건은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핍박 없는 예배!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 이것 하나 만을 실천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농사지어서 빈약한 식물이지만 겨울을 날 수 있는 옥수수와 감자가 주어진 것에 대해서 감사하면서 물질 감사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겁니다. 감사 생활은 믿음에 달려 있는 것이지 소유의 많고 적음에 절대 달려있지 않습니다. 분명한 게 있습니다. 감사 생활을 훌륭하게 실천해 나가면 감사 조건이 점점 더 많아집니다. GNP 1만 달러 될 때까지 유럽의 그 많은 교회들이 하나님 열심히 믿었습니다. 세계 선교 많이 했고 교회 건축 아름답게 했습니다. 

2만 달러 되니까 교회 성장이 멈추었고 2만 달러 넘어가니까 교인이 줄기 시작해서 3만 달러가 되니까 오늘날과 같이 저렇게 교회가 텅텅 비었습니다. 영국에 갔을 때 그 나라 목사가 저한테 한 말을 영원히 잊지 못합니다. “유럽의 교회는 지금 세일 중이다. 대한민국 교회는 어떡해서 그렇게 부흥하느냐? 이 런던만 해도 지난 1년 동안에 세일 시장에 나와 있는 교회가 700개나 된다. 다 망했다. 당신이 한국 목사이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일부러 찾아와서 말한다.”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으면 마귀에게 감사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에 바울이 신나서 하는 말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살만하다.” 무엇이 그렇게 살만한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핍박에 무릎 꿇지 아니하고 영적 힘이 강해졌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살만 하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지금 큰 성공을 자랑한다 하여도 영적 상태가 불안하면 그 사람의 성공은 불안한 겁니다. 반대로 지금 비천한 상태이어도 영적 상태가 훌륭하면 그는 기대가 됩니다. 

LA에서 목회할 때 권사님 한 분이 늘 제 심방을 따라다니셨습니다. 그 권사님은 부자이십니다. 잘 사셨습니다. 아들은 더 부자입니다. 기업체 사장입니다. 그런데 이 권사님은 LA에 살고 아들은 텍사스에 삽니다. 너무 잘 사시는데도 아들이 돈 잘 버니까 한 달에 수천달러씩 송금해주고 풍족하게 사셨습니다. 그런데 저한테 기도 부탁하셨습니다. “목사님, 큰일 났습니다.” “돈 많은데 뭐가 큰일인가요?” “우리 아들이 주일학교 잘 다녔고 고등부에서도 회장했고 신앙생활을 참 잘했는데 사장 돼서 돈 많이 벌면서 교회 안 나갑니다. 한 달에 한번 교회 나갈까 말까 이 모양으로 사니 엄마의 마음에 이것이 늘 걱정이 되니까 우리 아들을 위해서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그래서 저는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어느 날 전화가 와서 “목사님! 오늘 심방 안 나가십니까?” “오늘은 없습니다.” “오늘은 우리 집 좀 심방 와주세요.” “무슨 일 있나요?” “급한 일이 있습니다.” “그래요?” 항상 같이 심방 다니는 권사님이시니까 갔습니다. 예배드릴 새도 없이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 웃으시며 편지 한 장을 내 앞에 내놓으시며 “읽어보세요.” “이게 뭐예요?” “아, 읽어보세요.” 내용은 이겁니다. 아들이 어머니에게 편지 보낸 건데 “전화로 말씀드리기가 좀 민망해서 편지로 씁니다. 

어머니! 앞으로 1~2년 동안 어머니에게 보내드렸던 생활비를 제가 못 보내드리겠습니다. 이유는 제가 나가는 이 이민 교회가 건축을 한다고 목사님이 발표를 하셨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헌금을 좀 할 만한 사람이 교회에 저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목사님과 약속했습니다. 건축비 50퍼센트를 제가 담당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제 생활비도 좀 줄였고 사업도 좀 줄이고 어머니 생활비도 1년 후에는 제가 더 많이 보내드릴 테니 당분간 못 보내드리고 총력을 이 교회 건축에 제가 힘을 기울이도록 했으니 용서해주십시오.” 이런 편지였습니다. 

어머니가 이 편지를 받고 “그러면 그렇지, 우리 아들이!” 자랑하시면서 보여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당장 전화하셨다는 겁니다. “앞으로 내 생활비 일절 보내지 마라. 나는 네가 안 보내도 넉넉히 먹고 살 수 있다. 하나님께 다 드려라.” “어머니, 감사합니다.” “우리 아들 영적으로 충만해 졌습니다.” 성경에 보세요.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 영적으로 풍성해진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한 소식을 듣고 바울이 너무나 기뻐서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살만하다.”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이 풍성한 가을철에 우리 믿음도 하나님을 향해서 그렇게 풍성하여 지시기를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은 금년에도 대한민국 땅에 식량을 쌓을 곳이 없을 정도로 부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수 있는 국민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크게 부어주시는데도 보지 못하는 영혼을 열어주시고 볼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하나님께도 풍성하게 감사생활 할 수 있는 믿음을 주시옵소서. 우리 먹고 사는 것 모두다 하나님 손에 달린 것을 깨달아 알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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