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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감사하며 삽시다 (합 3: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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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하며 삽시다 (합 3:17~19)


한 여인이 캘리포니아 사막 근처에서 훈련하고 있는 남편을 따라가서 살림을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자기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불평과 한탄을 담은 편지입니다. 
“지금 남편은 캘리포니아의 모제브 사막 근처의 육군 훈련소에 배속되어 있어요. 저도 여기에 있는데 비참하기 짝이 없어요. 선인장 그늘에서도 화씨 125도의 뜨거운 더위가 몰아닥치고 영어로 의사소통이 되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음식물은 물론이고 숨 쉬는 공기도 모래투성이지요. 여기선 도저히 살 수 없어요. 이런 곳에서 사느니 차라리 교도소가 나을 것 같아요.”
딸에게 답장한 아버지의 편지는 단 두 줄이었습니다. 그러나 딸은 그 편지를 평생 잊을 수 없었습니다. 
“얘야, 교도소에서 두 사나이가 창밖을 보았단다. 한 사람은 창살을 보고 또 한 사람은 별을 보았지. 너는 지금 뭘 보고 있느냐?” 

복과 감사는 절대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진정한 감사는 오직 내가 복을 받았음을 깨달았을 때에만 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복을 받은 줄 알면서도 감사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결국 복인지 모르기 때문에 감사하지 못하고, 복으로 느껴지지 않기 때문에 감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감사하지도 못하는 복은 사실 아무리 남들 보기에 좋은 것을 받았다 해도 당사자에게는 복이 되지 않습니다. 이렇듯 복과 감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성도에게는 복 없는 감사도 없고 감사 없는 복도 없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하박국이라는 선지자의 감사 찬양입니다. 하박국은 처음부터 감사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박국의 서두는 원망과 불평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 내가 이처럼 부르짖어도 왜 듣지 않으십니까? 왜 나를 강포로부터 구원하지 않으십니까? 왜 악인을 방치하여 정의가 실종되게 하십니까? 이처럼 처음에는 원망과 불평으로 가득 찼던 하박국이 끝부분에서는 찬양의 기도로 바뀌었습니다. 처음에 두려움과 불안함으로 가득 찼던 하박국이 이제는 기쁨과 확신으로 가득 찬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 

낮은 곳에서 기는 것 같은 부끄러운 모습을 벗어버리고 사슴처럼 높은 곳으로 뛰어다니는 당당함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바로 감사의 마음을 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감사의 힘은 우리로 아름답게 변화시켜 줍니다. 감사의 힘은 우리로 높은 곳을 뛰어다니게끔 끌어 올려줍니다. 감사는 불안함과 두려움이 기쁨으로 바뀌게 만들어줍니다. 여러분이 오늘 하박국처럼 감사신앙을 소유함으로 기쁨과 즐거움이 충만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감사의 힘은 우리로 환난 날에도 두려워하지 않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주전 610년 전후로 가장 많은 활동을 했던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주전 609년에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사건 하나가 발생합니다. 그것은 요시야 왕이 죽고만 것입니다. 요시야 왕은 하나님의 율법을 중심으로 해서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주역이었습니다. 이런 개혁의 분위기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희망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이제 곧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다윗의 영광이 회복되어지나 보다’ 하는 희망입니다. 

그들은 ‘이제야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 민족에게 이루어지는 구나’라고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희망의 불씨를 당겨주었던 요시야 왕이 죽고만 것입니다. 요시야 왕의 죽음과 함께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슴이 피어오르려던 기쁨과 희망은 산산조각 나고 말았습니다. 

요시야 왕이 므깃도 전투에서 전사(戰死)하자 그 아들 여호아하스가 왕으로 등극하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아하스는 왕이 된지 3개월 만에 애굽에 의해서 납치되어 애굽으로 끌려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요시야 왕의 또 다른 아들인 여호야김이 유다의 제 18대 왕으로 등극하게 됩니다. 여호야김은 왕이 되자마자 악정을 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백성들로부터 많은 세금과 노동력을 착취하고 의롭게 살아가려던 백성들을 핍박했습니다. 그리고 대외적으로는 무시무시한 바벨론 군대가 곧 침공해 올 기세입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는 죄악으로 물들어 의인들을 핍박하는 이 정권과 이 나라를 바벨론을 들어 심판하시겠다는 무서운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하박국은 전쟁이 엄습할 상황, 그것도 당시 가장 강한 나라 바벨론이 유대 나라를 침략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는 큰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이제 곧 나라는 전쟁에 휘말려 쑥대밭이 되고 성전도 파괴되어 폐허로 변하고 수많은 백성들이 목숨을 잃게 될 상황이 눈에 보이는 듯 했습니다. “주여, 왜 이처럼 엄청난 환난을 당해야 합니까?” 하고 하나님께 기도를 하며 부르짖어 보지만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 부르짖고 기도하니까 원망과 탄식이 감사기도로 바뀌었습니다. 나무는 가뭄에 뿌리가 깊어지고 겨울의 찬바람에 단단해집니다. 여름의 불볕더위를 잘 견뎌야만 탐스러운 열매를 맺게 됩니다. 어머니는 해산의 고통을 통하여 자녀에 대한 사랑이 더욱 깊어집니다. 부부는 함께 환난과 시련을 겪어야 더 일체감을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하박국은 환난을 통하여 감사의 노래를 배우게 되고, 심지가 견고한 감사의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런 상황에서 하박국 선지자가 오늘 우리가 읽은 너무너무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삶이 힘들게 느껴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자신에게는 고난과 아픔만이 반복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행복해지는 법을 찾아 나섰습니다. 먼 길을 묻고 물어 마침내 행복을 나누어 주는 천사가 살고 있다는 산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산 속 오두막집 앞에서 한 천사가 앉아서 무언가를 산 아래로 던지고 있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행복을 나누어 주는 천사를 찾아 왔습니다. 그런데 던지고 있는 그것이 무엇입니까?”
“이것 말인가? 이건 행복이라는 것이네.”
그 사람은 다가가, 크기가 각기 다른 동그란 그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천사의 말과는 달리 그 동그란 것에는 각각 고난, 아픔, 시련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아니, 이건 행복이 아니라 고난, 아픔, 시련이지 않습니까?”
천사는 웃으면서 ‘고난’이라고 적힌 것을 하나 집어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그것의 껍데기를 벗겨 내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안에는 ‘행복’이라는 두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습니다. 
“어떤가? 겉에는 ‘고난’이라고 적혀 있지만 실제로 이것의 이름은 ‘행복’이라는 것이네. 행복은 양파 같은 것일세. 우리는 인간에게 그냥 통째로 행복을 주는 경우는 없네. 겉보기에는 고난, 아픔, 시련으로 적혀 있지만 그것의 진짜 이름은 행복이지.”

“나는 요즘 심히 걱정되는 일이 있네. 인간들은 내가 던지는 행복을 겉모습만 보고 고난, 아픔, 시련이라고 믿어. 이걸 보지도 않고 그냥 내던져 버린다는 것이네. 신은 왜 내게 행복은 주지 않느냐고, 이런 것만 주냐고 불평만 해대는 것일세. 참 한심한 일 아닌가?”
깨달음을 얻은 그가 산을 내려가려고 하자 천사는 마지막 당부의 말을 한 마디 하였습니다.
“잊지 말게. 고난, 아픔, 시련과 행복은 알고 보면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행복’의 겉에 ‘고난’, ‘아픔’, ‘시련’으로 적어서 주는 이유는 ‘행복’을 가질 자격이 있는지 시험해 보기 위해서임을….”

대내외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정말 어디를 보아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 그런 시대입니다. 하박국이 이런 어려운 시대의 문제를 안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들려오는 하나님의 응답은 아주 단순했습니다. “비록 악인들이 이 세상에서 의로운 자들을 핍박하고 착취한다 하더라도, 아무리 무서운 바벨론 군대가 이 민족을 짓밟는다 하더라도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박국 선지의 마음에 오늘의 노래가 잔잔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불평과 원망으로 가득 찼던 그의 입에서 이런 아름다운 노래가 흘러나왔습니다. 

상황이 바뀐 것은 아니었습니다. 상황은 여전히 그대로입니다. 여전히 여호야김이 왕좌에 앉아 폭정을 행하고 있습니다. 또한 저 멀리에서는 바벨론 군대가 한 걸음 한 걸음 유다를 향하여 진군해 오고 있습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하박국 선지자는 이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희망의 노래는 절망 가운데서도 부를 수 있습니다. 어두움이 짙게 깔릴수록 밤하늘의 별빛이 더욱 찬란한 것처럼, 절망의 늪이 깊어질수록 우리가 부를 수 있는 희망의 노래는 더욱 아름다운 것이 됩니다. 

모든 일이 잘 풀릴 때에는 누구나가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사업이 잘 될 때에는 기쁨의 노래를 부른다는 것이 전혀 낯설지 않습니다. 아무런 문제나 고통이 없는 가정생활 속에서는 누구나가 행복을 노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감사와 찬양의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은 형통할 때만, 행복할 때만, 기쁠 때만 노래하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감사와 찬양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절망과 실패와 좌절 속에서 오히려 감사를 통하여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음 주일을 추수감사주일로 지키려고 합니다. 추수감사주일은 지난 한 해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생각하며 지키는 절기입니다. 그렇다면 지난 일 년 동안 여러분에게는 어떤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습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생각하며 감사하시겠습니까? 

행복하고 기뻤던 일, 가정에 아무런 사고 없이 한 해를 보냈던 일, 사업이 잘 풀렸던 일, 그런 일들에 감사하시겠습니까? 물론 그런 감사도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런 은혜 속에서도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욱 아름다운 감사는 실패 속에서 희망을 보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몸은 아프고 병들기도 했지만 병든 그 자체 속에서 감사를 끄집어 낼 수 있는 믿음으로 드려지는 감사여야 합니다. 사업이 잘 안되고 먹고살기 힘들어도 그 안에서 뭔가 모를 희망이 나에게 엄습해 옴을 느끼며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진정한 감사입니다. 이런 감사와 찬양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감사의 힘은 우리로 궁핍한 때에도 행복하게 살게 만들어 줍니다.
우리의 감사와 찬양은 입술로만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가수들도 자기들의 노래를 부를 때에 혼신을 다하여 부릅니다. 노래에 감정을 몰입하지 않으면 그 노래는 죽은 노래입니다. 아무리 목소리가 좋아도 자신의 노래에 자신의 온 마음을 쏟아 붓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심금을 울릴 수가 없습니다. 
세상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도 그럴진대,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우리들이야 얼마나 우리의 감사와 찬양에 마음과 영을 쏟아 부어야 하겠습니까? 입술로만 드리는 찬양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찬양은 깊은 마음과 영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시편에 보면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여러분, 어떤 노래가 “새 노래”입니까? 새로운 곡조에 새로운 가사를 붙여야만 새 노래입니까? “새 노래”라는 것은 순간순간 삶에서 우러나오는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찬양입니다. 내 마음과 영혼 깊은 곳에서 진실되게 우러나오는 감격의 찬양입니다. 그게 새 노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새 노래를 기뻐 받으십니다. 

17절을 보면 없으며, 없으며, 없으며 라는 말이 다섯 번이나 반복해서 나옵니다. 모든 희망이 사라진 상태입니다. 전쟁의 위험, 의식주의 궁핍, 그리고 정치적, 경제적, 신앙적으로 위기의 연속입니다. 당연히 절망적 분위기속에서 땅바닥에 주저앉아 통곡을 하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싶은 심정일 것입니다. 
포도, 무화과, 감람열매는 이스라엘의 특산물이고, 우양은 이스라엘의 절대적인 삶의 터전인데, 이런 것들이 흉작일지라도, 빼앗겼을지라도 하나님으로 인해 감사하겠다고 하박국은 외치고 있습니다. 섭섭한 마음과 불평, 원망, 의심을 다 털어버리고 감사의 찬양을 드리는 하박국은 궁핍 속에서 오히려 크게 성숙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기쁨만 아니라 슬픔도 감사하겠습니다. 
성공만 아니라 실패도 감사하겠습니다. 
희망만 아니라 절망도 감사하겠습니다.
가진 것만 아니라 없는 것도 감사하겠습니다.
풍족할 때만 아니라 부족할 때도 감사하겠습니다. 
승리할 때만 아니라 패배할 때도 감사하겠습니다. 
건강만 아니라 육신의 아픔도 감사하겠습니다. 
생명만 아니라 죽음도 감사하겠습니다. 

미국 신시내티에 '프록터 갬블 비누회사를 설립한 할레이 프록터 사장은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는 신실한 신앙인으로 회사가 어려울 때에도 두려워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오히려 감사하며 철저히 십일조 생활을 하였습니다. 한번은 직원의 실수로 기계 작동 시간을 잘못 맞추는 바람에 불량품 비누가 생산되어 회사는 막대한 손실을 입게 되었습니다. 부서 책임자는 담당 직원을 심하게 질책했고 그 직원은 회사를 곤경으로 몰아간데 책임을 지고 사표를 제출했습니다. 

그러나 프록터 사장은 큰 손실을 입게 된 상황에서도 흥분하거나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침착하게 문제를 수습하고자 상황을 하나하나 점검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불량품 비누가 너무나 가벼워서 물에 뜨는 특징을 발견했습니다. 그때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비누가 물에 뜨면 목욕할 때 더 편리하지 않을까?' 그래서 프록터 사장은 그 불량비누가 만들어진 과정을 연구하여 신상품을 개발 시장에 출시하였습니다. 그 비누가 아이보리 비누입니다. 물론 아이보리 비누는 대히트를 쳤고, 회사는 세계적인 비누회사로 발전했으며 프록터 사장은 거부가 되었습니다. 

만약 프록터 사장이 곤경에서 실수한 직원에게 크게 화를 내고 하나님을 원망했더라면 아이보리비누는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감사하는 신앙으로 감정을 다스리고 문제를 바라보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예비하신 복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무언가를 잃은 것으로 인하여 섭섭하고 마음이 아픕니까? 눈을 들어 조금만 멀리 보면 잃은 것 때문에 더 좋은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더 좋은 것을 주시려고 덜 좋은 것은 가져가십니다. 그러므로 잃었다고 실망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앞으로 주실 최선의 것에 여러분의 시선을 고정하시고 감사하며 하나님께 찬양 돌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감사는 하나님을 통해 신령한 복을 누리게 이끌어줍니다.
뭘 받아야 감사하고 뭘 누려야 하는 감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받은 것이 없고, 얻은 것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이 우러러보면 자신이 모든 것을 가진 것임을 깨닫게 되고 더욱 기뻐하며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박국의 감사의 이유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었습니다. 하박국은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구원의 하나님이심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해 감사하고 즐거워했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한분만으로 만족하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비록 나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했지만 하나님으로 인해 즐겁고 구원의 하나님으로 한없이 기쁩니다.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믿음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이 다 사라져도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하나님으로 인해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영원한 감사의 제목은 구원의 하나님입니다. 모든 환경을 초월하고 모든 사건을 초월하여 감사드릴 때 하나님은 우리 믿음을 인정하실 것입니다. 

미국의 어느 돈 많은 부자가 잭슨이라는 흑인 아주머니를 가정부로 두고 있었습니다. 이 부자는 돈 문제도 복잡했지만 가정 문제도 심각했습니다. 다툼이 끊이지 않았고, 근심과 걱정 때문에 수면제를 먹어야 잠을 이룰 수 있었고, 술을 마셔야 잠시라도 걱정을 잊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잭슨 아주머니는 언제나 편안하고 명랑했고, 찬송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주인이 아주머니에게 물었습니다. 

“아주머니는 나의 집일을 하면서 사는데도 늘 기쁘니 그 이유가 뭐요?”
아주머니가 대답했습니다. 
“나는 당신처럼 돈이 없으니 잃어버릴 염려가 없고, 집이 없으니 불이 날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명예가 없으니 누가 나에게 욕할까 하는 걱정도 없어요. 또 이미 병들어 죽을 뻔한 몸이니 건강 때문에 걱정할 이유도 없고, 이제 다시 아프면 불편한 몸 벗어버리고 하나님께로 가니 아무 걱정도 없으며 달리 크게 바라는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들은 주인은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여태까지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 열심히 배우고 열심히 벌었다는 것이 근심을 모은 것에 지나지 않았구나.’ 

불평도 습관입니다. 불평하는 사람은 항상 불평합니다. 불평하는 사람은 불평이 인격 그 자체입니다. 불평의 습관에 사로잡히면 본인만 불행한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 모두 불평인생으로 살게 만들고 불행으로 끌고 갑니다.
그러나 감사를 습관화하면 감사가 훌륭한 인격을 만들어주고 행복의 길로 인도합니다. 감사는 우리의 얼굴빛을 밝게 만들어줍니다. 감사를 결심하고 실천하는 사람은 좋은 일이 계속 반복되고 풍성한 삶을 살게 됩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내려다보면서도 감사할 줄 모르고 불평하다가 복을 받아 누리지 못하고 광야에서 메뚜기처럼 비참하게 죽어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노예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위기마다 함께하시며 건져내 주셨건만 감사할 줄 몰랐습니다. 날마다 감사하며 살아도 부족한데 날마다 불평하며 살았습니다. 하나님과 지도자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만나를 받아먹으면서도 불평했고, 길을 가면서 길이 나쁘다고 원망했고, 고기가 없다고 불평했고, 지도자 모세가 잘못 인도했다고 원망했습니다. 불평과 원망만 일삼다가 인생이 불행하게 끝났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늘 읽으며 이처럼 어리석은 삶을 살았던 불행한 민족을 보면서도 그대로 따라하는 한국교회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들은 정신 차리고 지금 당장 불평을 던져버리고 감사하는 습관을 훈련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불평제조업자가 되지 말고 감사제조업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기도의 응답으로 주신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핍박과 착취가 난무하고, 전쟁의 위협과 흉년으로 인한 곤고함 가운데서 의인들에게 삶의 의미와 용기를 주는 것은 다름 아닌 ‘믿음’입니다. 믿음은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은 “오직 하나님으로 인하여 살리라”라는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기에 절망적인 환경 속에서도 희망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기에 나라가 멸망할 것 같은 위기 속에서도 기뻐하며 감사할 수 있습니다. 
희망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버지’라고 고백하는 우리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인생의 승리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오직 만왕의 왕 되신 여호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 하나님을 믿으며, 그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절망에 빠져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감사와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통하여 광명한 내일이 열릴 것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 때문에 절망 가운데서도 희망을 노래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믿음 때문에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기뻐하며 즐거워할 수 있습니까? 지금 내 삶은 힘들고 고통스럽고 어려움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나의 힘이 되신 것을 믿기에 감사하며 거룩한 노래를 부르실 수 있습니까? 하박국 선지자와 같은 절망적인 상황이 우리 앞을 가로막는다 하더라도, 입술과 가슴 깊은 곳에 거룩한 노래가 끊이지 않는 귀한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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