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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의 권고하심을 듣고 (룻 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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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권고하심을 듣고 (룻 1:6~7)


벌써 2009년도가, 10개월 하고도 11월 둘째 주일이 되었습니다. '한 달 반 남짓' 남았습니다. 11월의 성찬성례는, 한 해의 마지막을 눈앞에 두고 마음 조급해지는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몸과 피입니다. 무슨 일이든 평소에 잘 하는 것, 참 중요합니다. 作心三日이라는 말, 있습니다. 평소에 잘하지 못할 때가 더 많습니다. 룻기 1, 6 이하 말씀은, 평소에 잘 하지 못한 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성찬성례를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 함께 듣기를 원합니다. 

1. 이 성찬은 하나님의 권고하심(파카드, פקד)이 있는 성찬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 보면, 잘하면 좋은데, 한참 그릇할 때가 많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잘못하면서도, 자신이 잘못하는 줄도 모르면서 엇길로 간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다가 많은 것을 잃어버린 후에, 돌이킵니다. 그릇된 길에서, 돌이키는 때가 언제인 것 같습니까? 여러 경우가 있습니다만, 대단히 중요한 것은, 그릇된 인생길을 걸어가는 사람은, 자기 스스로는 절대로,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돌아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럴 확률은, 영零입니다(zero, 全無). 

사도 바울이 증언하지 않습니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 11-12). 그래서 하나님은 어떤 처방을 내리셨습니까? 로마서 5, 8을 보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우리의 悔改, 懺悔보다 先行하는 하나님의 은총이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그 우리가 어떤 우리입니까? 아직도 죄인 된 우리)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우리는 다 羊 같아서, 그릇 행하여, 各其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예수 그리스도)에게 담당시키셨도다”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도무지 알지 못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우리의 죄를 다 담당시키셨다, 책임지우셨다는 것입니다(사 53, 6). 우리가 돌이키기기 이전에, 先行하는 하나님의 은총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릇된 죄악의 길에서 돌아올 용기를 얻고, 회복의 기회를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모압 땅에 내려간 나오미 인생 보십시오. 10여년 모압에 살면서, 회복할 수 없을 정도의 상실을 경험했습니다. 빈손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진퇴양난입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합니다. 난망입니다. 가정의 기둥인 남편 엘리멜렉은 이민 초기에 그 땅에서 죽었습니다. 雪上加霜 영주대책으로 삼았던 두 아들의 모압 여인과의 결혼도 실패하고 말았습니다(두 아들마저 죽었습니다). 의지가지없는 세 여인만 덩그러니 남았습니다. 나오미에게 희망이 있다면, 무엇이 희망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는 이미 너무 늙어 계대결혼의 가능성도 없습니다. 희망이 있다면, 나오미 자신 안에서는 없고, ‘나오미’ 자기 밖에서 주어져야만 했습니다. 어떤 타율적인 돌파구 없이는 도무지 희망이 없었습니다. 길이 있다면 오직 한 가지, 늘 그러하셨듯이 신실하신 하나님 이외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유일한 희망은, 신실하신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무엇일까요? 하나님 사랑의 다른 말인데, 나는 불의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릇 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뻗갔음에도 불구하고, 나와 맺으신 언약에 대하여 하나님은 신실하시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신실하심은, 하나님 주도적인 권고하심으로 나타납니다. 나오미의 회복은, 하나님의 권고하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6절 말씀 보십시오. “그 여인이(나오미) 모압 지방에서(실패의 자리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권고하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합니다.

여기 권고하셨다는 말은 ‘파카드(פקד)’라는 말인데, ‘목자가 양 떼를 살피기 위해서 찾아가서, 양들을 계수하면서 양이 처해 있는 모든 상황을 주의 깊게 돌아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굶주림과 피폐함을 권고하시고는, 무엇을 주셨다 합니까?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합니다. 

혹시 내 인생은, 더 이상의 희망은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돌이키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다고 생각되십니까? 희망 없음, 너무 늦은 그 시간이, 바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挽回의 시간입니다. 권고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입니다.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던 수제자 베드로, 어찌 그에게 더 이상의 기회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 그였기에, 그 스스로가 생각해도 면목이 없어서, 예수님 따랐던 제자생활 스스로 접고, 옛 어부직업으로 되돌아가버렸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스스로 자기에게 낙망한 요한의 아들 시몬에게, 아무것도 잡지 못한 그 밤, 디베랴 바닷가에 찾아가지 않으셨습니까? 그에게, 세 번씩이나 질문하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 질문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서 물으신 질문이 아닙니다. 네가 면목이 없어서, 다시 고기 잡으러 왔느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너를 향한 나의 사랑을 받아 줄 수 있겠느냐?는 예수님의 권고하심입니다(떡과 숯불에 구운 생선으로 조반을 준비하신 주님이, 함께 드신 후 던지신 고백의 물음입니다). 이 성찬의 떡과 잔은, 조건 없이 우리 모두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신다는, 하나님의 권고하심입니다. 

이 성찬 앞에서, 내 연약함 때문에 낙망하지 마십시오. 내 허물 됨 때문에, 절망하지 마십시오. 상실해 버린 인생 때문에, 후회하지 마십시오. 그 상실의 자리에 그냥 주저앉아 있지 마십시오. 더 이상, 자신의 연약함을 보지 마십시오, 실패를 기억하지 마십시오, 상실을 후회하지 마십시오. 그 자리에서 용기를 가지고 일어나 돌이키십시오.

‘나오미’ 보십시오. 그가 하나님의 권고하심의 소식을 듣고, 어떻게 합니까? 자기 인생의 실패의 자리인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권고하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을 듣고,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으로부터’ 돌아오려 하여, 그 있던 곳(모압)에서 나오고󰡕 합니다.

여기 󰡔돌아오려 하여󰡕라는 말은, (히) “슈브(שוב)”라는 단어인데,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1) 악에서 돌아서서 (2) 선으로 돌아가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섰던 나오미가, 다시 하나님의 언약의 공동체 안으로 복귀하려 하였다는 말입니다. 모압 지방에서 지낸 10여 년의 인생에 대한 뉘우침과 동시에, 이방 족속의 땅(우상 ‘그모스’와 ‘바알브올’을 섬기던 땅)을 떠나, 언약의 땅으로 돌아가기로 결의했다는 말입니다. 

‘나오미’가 어떻게 모압에서 돌이킬 수 있었습니까?(“슈브(שוב)할 수 있었는가?) 하나님께서 권고하심 때문입니다. 그리고 떡집에 떡이 있다는 구체적인 소식을 접하고부터입니다. 떡집에, 다시 떡이 풍성하게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불쌍히 여기셨다, 용서하셨다, 회복시켜 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사랑하고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2. 이 성찬 역시, 굶주린 삶에서 우리를 돌이키게 하시려고 베푸신 하나님의 권고하심입니다. 

나오미가 돌이켜, 그가 살던 실패의 자리, 모압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은, 슈브(שוב)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권고하심 때문입니다. 떡집 베들레헴에 다시 떡이 풍성하게 넘쳐났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 실패가 어디에 있습니까? 따지고 보면,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굶주림에 있습니다. 飢渴에 있습니다. 나는 糧食이 될 줄 알고 銀을 달아주었는데, 엄청난 값을 지불했는데, 남는 것이 없습니다. 배가 부르지 못합니다. 여전히 굶주립니다. 남는 장사가 아닙니다. 헛장사 했습니다. 이문도 남지 않는 곳에, 너무 많이 투자해버린 데 있습니다. 그래서 상실감이 큽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외쳤습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요 물이 없어 渴함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리니,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쓰러지리라”(암 8, 11-13).

그렇습니다. 나오미의 슈브는(베들레헴으로의 돌아옴은), 겉으로 보기에는 양식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양식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옴입니다. 하나님 찾음입니다. 그의 ‘하나님 다시 찾음’에서부터 그의 인생이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무너진 가문도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엘리멜렉이라는 고백(나의 하나님의 왕이시다)도 회복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의 맥을 잇는 중심 가문에 서게 되었습니다. 온 인류 역사의 구원과 복음을 위한 은혜의 물줄기가 흐르는 󰡔祝福의 通路󰡕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성찬이, 우리의 하나님께로 돌아섬(슈브, שוב)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7절 말씀 보십시오. 나오미가 “있던 곳에서 나오고”, 드디어 나오미가 자기 인생의 실패의 자리인 ‘모압으로부터 나왔다’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 한 가지 유념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잃어버린 세월 때문에 절대로 아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과거의 실패 때문에 후회하면 안 됩니다. 

스위스의 내과의사이요, 정신의학자였던 Paul Tournier(1899-1986)가 쓴 󰡔인생의 네 계절󰡕이란 책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계절에도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서는 인생의 네 가지 계절이 다 있지 않고, 잃어버린 계절도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 70, 80을 산다하여 어떤 사람은, 인생의 봄을 상실한 사람도 있습니다. 여름을 상실한 사람도 있습니다. 결실의 계절 가을이 부실한 사람도 있습니다. 겨울이 부실한 사람도 있습니다. 

상실해버린 인생의 계절은,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한 번 잃어버린 인생의 계절은 다시 오지 않습니다. 잃어버린 것은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사계절을 다 갖춘다고 해서, 꼭 위대한 인생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육으로 난 것은(아무리 위대하고 훌륭하다 하여도) 육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질이 더 중요합니다. 혹 상실해버린 인생의 계절이 있다하여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넉넉하게 만회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를 의롭다고 여기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마 21, 31하). 또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하셨습니다(마 20, 16; 마 19, 30).

우리도 하나님의 권고하심을 받고, 하나님을 떠나 󰡔있던 삶의 자리(모압에서) 나오십시다(7절).󰡕 그럴 때, 기대하지도 않았던 놀라운 새로운 희망이 솟아오를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는 축복이 임할 것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그 하나님을 의뢰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권고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떡집 베들레헴에 다시 풍성한 떡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권고하셔서, 베들레헴에 떡을 주셨다는 소식을 듣고 모압에서부터 나와서, 언약의 땅으로 돌아가기 위해 길을 나선 ‘나오미’처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가십시다. 이 성찬을 통하여, 우리를 회복시켜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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