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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 이름 (행 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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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이름 (행 3:1~10)


사도행전 2장부터 4장까지의 내용을 가만히 살펴보면 특이한 것 하나를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도들과 바리새인들 사이에 아주 날카롭게 대립되어 긴장 상태가 형성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대립의 이유가 바로 예수 이름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말 끝 마다 예수 이름을 들먹였습니다. 2-5장의 내용 중에서 예수 이름에 관한 언급이 13회나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보게됩니니다. (2:21 2:38 3:6 3:16(2회) 4:7 4:10 4:17 4:18 4:30 5:28 5:40 5:41)
그런데 제사장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 이름이 대중에게 소개되는 것을 막고자 했습니다. 왜냐면 자기들이 못 박아 죽인 예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미 예수의 무덤을 지키면서 부활을 목격했던 군병들을 돈으로 매수하여 예수가 부활한 것이 아니라 그의 제자들이 예수의 시체를 훔쳐다가 감추어 놓고 예수가 부활한 것처럼 거짓말을 꾸며 전파한다고 소문을 퍼뜨리게 한 장본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마28:11-15) 

사도들은 예수가 부활했다고 증거 했습니다. 그리고 그 증거로서 그들은 예수 이름으로 능력을 행했습니다. 사도들에게 있어서는 예수 이름은 자랑스러운 이름이었고, 증거해야 할 이름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예수 이름을 의지하여 담대히 외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못박아 죽인 유대인들로서는 예수 이름은 저주의 이름이었고 부인하고 싶은 부담스러운 이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제자들을 설득하기도 하고 위협하기도 했습니다. 너희가 무엇을 전하든지 무슨 능력을 행하든지 예수 이름으로는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행4:18, 5:28) 

사탄은 때로 우리에게 이같은 방법으로 유혹을 던집니다. “네가 봉사 하는 것도, 전도 많이 하는 것도 다 좋다 그러나 예수 이름으로는 하지 말라” 
많은 사람들이 때로 사도들이 받은 이러한 사탄의 유혹에 쉽게 넘어갑니다. 그래서 열심히 봉사하고 충성하고서도 교만에 빠지게 되고, 하나님 일 한다고 해놓고서도 자기 영광을 취하게 됩니다. 신자는 범사에 예수 이름으로 살아야합니다. 

사도들은 제사장들이 뭐라건 간에 예수 이름을 전했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하면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세례를 베푼다는 것은 예수의 제자가 되게 한다는 의미가 잇습니다. 하루에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주의 제자가 되는 사람들이 3천명이나 되었습니다. (행2:38-41)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사도들이 예수 이름으로 아무 것도 말하게 말자고 결의하고 베드로와 요한을 잡아서 공회 앞에 세웠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행4:18)고 위협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오히려 더욱 담대히 예수 이름을 전했습니다. 예수의 이름은 사도들을 통해 죄 사함을 선포하고 온갖 병자를 고치며 사탄의 세력을 내쫓고 각종 은사를 행하게 하였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말씀도 성전으로 기도하러 올라가던 베드로와 요한이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되어 날마다 성전 문 밖에서 구걸하던 한 사람에게 예수 이름을 전하고 그가 예수 이름으로 온전케 되어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는 장면입니다. 
“예수 이름, 그 이름” 과연 어떤 이름이기에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본문에 예수의 이름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① 구원의 이름입니다. 

성전 미문 앞 장애인이 들은 예수의 이름은 구원의 이름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날 때부터 걷지 못하는 장애인 이었습니다. 불행한 운명의 사나이입니다. 장애인이 되는 이유는 선천적인 것과 후천적인 요인이 있다고 합니다. 날 때부터 장애를 입고 태어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후천적으로 사고나 어떤 질병에 의해서 장애를 입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 나라는 예로부터 장애자를 경시하는 풍조가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누구나 장애자가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잇습니다. 엄청나게 높은 사고의 위험율 속에 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장애인을 장애인으로 보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사람은 날 때부터 장애자입니다. 

걸음을 걸을 수 없는 사람일 뿐 아니라 걸어 본 적도 없는 사람입니다. 다리에 힘이 없어 일어설 수가 없습니다. 태어나서 한 번도 걸어 본 적이 없다면 얼마다 불행한 사람입니까? 그는 스스로 자신의 운명은 날 때 이미 불행에 고정되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불행하게 태어난 운명에 순응하며 살았습니다. 그의 가족 중에서 누군가가 밥벌이라도 하라고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성전 문 앞에 매일 그를 업어다가 놓으면 그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구걸하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이름은 이 사람의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명령하는 음성을 듣는 순간 그의 운명은 더 이상 불행에 고정되어 있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 이름을 듣는 순간 운명이 바뀐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숙명론을 믿습니다. 사람의 운명은 바뀌지 않는 다는 것이 숙명론입니다. 그러나 예수 이름은 믿는 사람들의 운명은 바뀔 수 있습니다. 예수 이름에는 운명을 바꾸는 능력이 있습니다. 

어느 주일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절친한 친구가 ‘뉴져지주 칼드웰’ 거리를 걷고 있었습니다. 마침 교회당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한 친구는 교회로 가서 예배에 참석하고 예수를 믿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친구는 술집에 가서 이 휴일을 즐기자고 주장했습니다. 

결국 서로의 주장을 굽히지 않아 각각 교회와 술집으로 헤어졌습니다. 교회를 택하여 예수를 믿은 청년은 후에 대통령이 된 클리브랜드 (Grover Cleveland)입니다. 그는 두 번이나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22대와 24대) "깨끗한 대통령"으로 인기가 있었습니다. 다른 한 청년도 머리가 좋아 변호사가 되었지만 뇌물과 범죄에 관련되어 형무소에 오래 살았습니다. 클리브랜드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받아 주실 때 딴 생각 말고 하나님 품에 안겨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운명은 절대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서 얼마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예수 이름은 우리를 변화시키고 새롭게 하는 권세 있는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② 두 번째로 꿈과 희망을 주는 이름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불행한 한 사람에게 참된 꿈과 희망을 안겨주었습니다. 이 사람이 성전 미문에 앉아 있는 것 만으로는 희망이 없었습니다. 이 사람에게 희망과 소망이 있었다면 그저 누군가 자신에게 하루 먹을 양식만큼 베풀어주었으면 하는 것 정도일 것입니다. 
3절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는 것을 보고 구걸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구걸하는 소망밖에는 없습니다. 여러분 헛된 소망은 소망이 아닙니다. 잘못된 꿈도 꿈이 아닙니다. 도적놈이 어떻게 하면 더 많은 것을 훔칠까 하고 갖는 소망은 소망이 아닙니다. 욥8:13절에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 곧 사곡한 자의 소망은 없어진다”고 하였습니다. 

헛된 소망에 집착하여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 재물에 소망을 두는 것은 헛된 소망입니다. 딤전6:17절에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정함이 없는 재물은 우리의 참된 소망이 아닙니다. 
이 소경은 언제나 성전 문 앞에 있었으나 한 번도 성전 안에 들어가 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왜 입니까. 참된 소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소망이 없었습니다. 우리의 참된 소망은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닙니다. 먹고 마시는 것은 적당한 선에서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지족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스스로 망하는 길로 가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소망을 둔 사람은 세상 것에 아둥 바둥 하지 않습니다. 
“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 나의 어릴 때부터 의지시라” 라고 고백하는 믿음을 갖습니다. (시71:5) 

날 때 부터 앉은 뱅이 된 이 사람에게 정말 장애는 무엇입니까? 날 때부터 앉은 뱅이었다는 육신 적인 장애도 문제겠지만 정말 문제는 그가 가지고 있는 영적 장애입니다. 성전은 그의 삶의 수단이었습니다. 언제나 은혜의 자리에 있었으나 은혜는 한번도 받아보지 못한 사람이기에 영적 불구입니다. 그러나 예수 이름은 그에게 참 된 소망을 안겨 주었습니다. 
예수의 이름은 그에게 일어나야 겠다는 소망을 준 것입니다. 
전에 그가 가지고 있던 소망은 하루 하루의 식량이었지만 이제 주님이 주신 소망은 그의 발로 일어서서 하루의 식량을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주는 것이었고 그의 발로 성전에 들어갈 수 있다는 소망이었습니다. 

③ 힘을 주시는 이름 입니다.

7절에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오른 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힘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예수 이름은 힘을 주는 이름입니다. 참으로 예수 이름을 의지할 때에 우리가 힘을 얻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찬양하나이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④ 찬양 받으실 이름입니다. 

8절에 보면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에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모든 백성이 하나님을 찬미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 예수 이름을 의지하면 찬양하게 되어 있습니다. 나도 찬양하고 남도 찬양하게 만듭니다.예수 이름은 찬양받으실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우리 교회 집사님 한 분이 교통사고를 당하였습니다. 그는 사고를 당하였으나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만한 것을 감사했습니다. 그가 걱정한 것은 다만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까봐 그것이 걱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집사님 아파트 옆 집에 할머니 한분이 사셨습니다. 평소에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많이 핍박하던 사람입니다, 그 할머니가 병원에 문병을 왔습니다. 집사님은 그 할머니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할머니는 “예수님이 있긴 있나 보네. 죽지 않고 살려 주신 것을 보니...”라고 하더랍니다. 
우리 주님은 찬양 받으실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찬양하는 살아야 합이다.

그렇습니다. 
예수 이름은 사람의 운명을 바꾸어 놓는 이름입니다. 
참된 소망을 주는 이름입니다. 
우리에게 진정한 힘을 주시는 이름입니다. 
찬양 받으실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이름만 의지합시다. 예수 이름으로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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