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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절] 냉수 한 그릇의 감사 (룻 2: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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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수 한 그릇의 감사 (룻 2:8~16)


성경에 나오는 영적 거인들은 감사할 줄 아는 이들이다. 바울만 하더라도 감사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였고 자기 자신이 매를 맞고 옥에 갇히는 캄캄함의 날에도 찬미하는 자가 되었으니 감사의 마음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신앙인의 감사는 신앙의 꽃이다. 어떤 경로로, 어떤 사건에 얽혀 있든지 신앙인은 감사라는 꽃을 피운다. 손양원 목사는 아들 둘을 잃었다. 그 아들들이 공산당 청년들에게 살해된 후 실의에 잠겨야 할 목사님은 오히려 감사하였다. 순교자 집안이 되었음에 감사, 죄 많은 세상에 더 두지 않음에 감사, 구구절절 감사를 한 손 목사님은 원수 같은 살인자를 찾아가 옥 중에서 면회하며 양아들을 삼고 용서하였다. 그의 마음에 천국이 있기에 손 목사님은 감사의 말을 할 수 있었다.

여기 본문에 나오는 룻도 감사의 사람이었다. 그가 겪는 환경은 고난의 날들이었다. 모압 여인으로서 나오미 가정에 시집을 왔을 때 그의 시아버지가 죽었다. 초상을 치른 후 룻은 또 다시 초상을 치렀다. 말론이 죽고 그의 남편 기룐이 죽었다. 룻은 젊은 과부가 되어 모압에 남지 않고 시어머니를 따라간다. 베들레헴으로 귀향한다. 이때 룻은 모압 여인으로서 히브리 민족으로 귀화하는 결단을 한 것이다.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룻은 당장에 먹거리를 해결해야 한다는 절박감으로 밭에 나갔다. 가난의 문제, 생계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부지런히 밭에서 낱알을 주웠다. 보아스 소유의 밭에서 낯선 외국 여자가 낱알 떨어진 것을 줍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당당하게 나가서 일했다. 더 놀라운 것은 인생을 비관하고 잘못된 결혼, 잘못된 귀화, 잘못된 인생이라고 원망할 수 있는 상황뿐이지만 룻은 감사로 가득해 있다. 

룻2:10을 보라.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

처음 밭에 나아간 룻에게 보아스가 제공한 것은 친절이었다. “①내 밭에서 일하라. ②룻을 건드리지 말라. ③목이 마를 때 물을 마시라.”는 내용이었다. 룻은 그 친절한 배려를 두고 너무도 감사해서 엎드려 절을 하며 이 은혜를 베푸시는 까닭이 무엇인지 되물었다. 룻의 감사는 실로 하나님을 믿기로 작정하고 베들레헴ㅇ로 온 초보자 여인 같지 않다. 냉수 한 그릇의 은혜를 베푸심으로 고백하는 룻의 감사는 너무나 감동적이다. 냉수 한 그릇에 엎드려 절하는 룻의 마음은 특별하고 순전하다. 

1. 그의 감사는 환경과 상관없는 감사다.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아무 것도 없는 여인에게 제공된 보아스의 친절, 그 냉수 한 그릇이 그에게 은혜로 다가온 것은 감사가 대차 대조표에 의해서 계산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환경과 벌어진 사건의 크기와 상관없이 감사는 가능하다. 룻이 그것을 보여준다.

2. 그의 감사는 이방인이라는 혈통과 상관없는 감사다.

히브리 민족이 사는 베들레헴, 그 밭에서 곡식의 낱알을 주울 때 감사란 혈통과 낯선 이국 생활, 피부색과 언어가 다르므로 제한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오히려 하나님의 선민들이었던 시아버지는 모압으로 갔지만 이방 여인 룻은 베들레헴으로 와서 감사의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방 여인의 감사 앞에 선택 받은 사람들의 감사 없음이 부끄럽게 느껴진다. 율법과 성전을 가까이 하며 사는 사람들은 감사를 하지 못하는데 냉수 한 그릇을 은혜라고 고백하는 룻의 마음이 대견스럽고 매력적이다. 

감사는 언제나 엉뚱한 사람이 한다. 눅17:16을 보면 문둥병 고침을 받은 10명의 사람들 중 감사하러 예수게 온 자는 1명의 사마리아인 뿐이었다. 하나님을 믿지 않을 것 같은 이들이 감사하는 것이다.

3. 그의 감사는 작은 것이라는 생각과 상관없는 감사다.

사람의 일반적인 생각은 물 한 그릇, 공기의 청량함, 따뜻한 햇볕 따위는 감사의 조건으로 보지 않는다. 그러나 룻에게 작은 물 한 그릇은 감사의 조건이었다. 밭에서 일하는 사환의 자격도 아니고 사환의 뒤를 따르면서 떨어진 이삭을 줍는 일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룻에게 작은 냉수 한 그릇의 의미는 그 이상의 의미인 것이다. 그 냉수 한 그릇의 친절은 사람다운 대접을 받고 있으며 무시와 외면 당함이 아니라 배려의 대상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그것이 갖는 의미는 중요하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마음이 담겨진 것이라면 감사가 묻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보아스 앞에 룻은 엎드렸다. 절했다. 감사했다. 고마웠다. 돌아보는 자의 돌봄 속에 담긴 친절한 배려 앞에서 최고의 존경으로 절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룻은 초보자 신앙인이라기 보다는 성숙한 자의 모습이었다. 낯선 이방인이기에 사고 방식이 다른 외계인이라기 보다는 배려를 알고 감사를 표하며 화답할 줄 아는 매력있는 여인이었다. 룻의 감사는 작은 것이 은혜로 다가오는 룻 자신의 인격의 향기였다. 

이런 여인이 교회에 가득하다면, 이런 성도들이 한국 교회의 성도들이라면, 이런 친구가 내 친구라면, 이런 며느리가 내 며느리라면, 이런 룻과 같은 사람이었으면 하는 기도가 나온다. 그렇게 되려면 “네가 감사하라. 네가 냉수 한 그릇을 놓고 감사하라. 네가 감사의 사람이 되라. 너의 교회를 감사하는 교회로 만들라.”는 음성이 들린다. 그래서 3주 연속 감사 주일을 선포한다. 감사는 복의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룻이 전심으로 감사하여 보아스에게 화답할 때 세 가지 복된 일이 주어진다.

  
첫째, 넘치는 축복의 말을 듣는다. (룻2:12)

룻2:12을 보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하였다. 이방 여인 룻은 하나님의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하나님의 품으로 온 것이다. 보아스는 신앙으로 새롭게 입문한 룻이 감사로 엎드릴 때 축복의 말을 하였다. 온전한 상 주기를 원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온전한 상, 어찌 미흡함이 있고 모자람이 있겠는가?

감사하는 자는 축복의 말을 듣는다. 나는 학창 시절에 “공부하면 외국에 간다. 비행기 타고 간다.”는 축복의 말에 가슴 설레며 살았다. ‘너 같은 것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부정적인 말을 들었다면 무익한 인생이 되었을 것이다. 장래 소망이 담긴 축복의 말을 들어서인지 나는 넘어져도 당당하고 일이 막혀도 당당하다. 어차피 시간만 늦을 뿐이지 상을 받도록 되어 있음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주어진 삶, 매일 매일 감사하고 또 감사하라. 감사한 것만큼 축복은 커진다. 우리교회 교인들의 신앙 생활의 관리를 위해 컴퓨터를 보니까 감사 생활을 너무나도 잘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잘 할 것 같은 직분자들의 감사가 없다는 것이다. 감사가 메마르면 안된다. 감사가 풍년 들어야 한다. 추수 감사절에 전심으로 드리는 즐거움의 감사가 넉넉해야 한다. 그러면 부요 의식이 생긴다. 축복의 말이 내 가슴에 자리잡는다. 인생의 기대감이 생긴다.
  

둘째, 떡상에 초대된다. (룻2:14)

룻2:14을 보면 “식사할 때에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이리로 와서 떡을 먹으며 네 떡 조각을 초에 찍으라 하므로 룻이 곡식 베는 자 곁에 앉으니 그가 볶은 곡식을 주매 룻이 배불리 먹고 남았더라.”

룻은 사환의 일군보다도 못하다. 신분상으로 약자다. 이방인이다. 그런데 감사의 말을 한 이후 룻에게 떡과 볶은 곡식이 넉넉히 주어졌다. 배불리 먹고 남을 만큼 주어졌다. 추수 밭의 주인되신 신분상으로는 모든 권리를 가지신 보아스가 룻을 마주 대하려 한다. 주인의 상에 초대된다는 것은 영광이며 주인의 얼굴을 마주보는 것이다. 신앙 생활의 환희는 주님의 얼굴을 구하고 그 얼굴을 보는 것이다. 천한 내가 귀한 주님을, 죄인된 내가 거룩한 주님을 대면하는 자리에 앉는다는 것, 그 한가지만이라도 천하를 얻은 것보다 더 큰 환희가 아니겠는가? 감사했더니 대면의 복이 임했다. 일터에서 일한 이후 마음껏 먹는 배불림의 복이 임했다. 감사하면 분명 더 큰 감사의 조건들이 따라온다. 일터에서 신분의 배려와 대우를 받게 되고 사람 대접을 받게 된다.
  

셋째, 비축할 수 있는 물질의 복을 받는다. (룻2:16)

룻2:16을 보라. “또 그를 위하여 곡식 다발에서 조금씩 뽑아 버려서 그에게 줍게 하고 꾸짖지 말라 하니라.”

보아스의 은혜는 날로 커 간다. 베푸는 관심과 친절이 사랑으로 커 간다. 보아스는 추수 밭의 주인으로서 자기 일군들에게 명령한다. “곡식 다발에서 조금씩 뽑아 버려라.” 꺾어진 이삭이 아니다. 의도적으로 곡식단에서 뽑아서 내버리라는 것이다. 바로 룻을 위하여 뽑아 버리라는 것이다. 많이 주워서 가져가도록, 많이 주워서 항아리에 저장하여 식량을 비축할 수 있도록 명령한 것이다. 일하는 룻이 곡식을 거둬들이는 양이 달라졌다. 감사로 나아가는 룻에게 던져 준 곡식의 양은 보리 한 에바, 도량형으로 약 다섯 말하고도 반이나 되었다. 

나의 수고가 한정된 수입을 가져온다. 그러나 넘치는 수입, 넉넉한 수입, 먹고 비축할 수 있는 물질의 복을 위로부터 덤으로 주시는 역사로 된다. 하나님이 하늘 문을 열고 뿌려주셔야 한다. 그 하늘의 복이 열리고 임하는 열쇠가 감사다. 

감사를 잊어버린 사람들, 감사를 아예 모르고 사는 사람들, 금번 11월에 바뀌어야 한다. 기적을 가져오는 삶을 위해서라도 감사의 삶의 회복해야 한다. 냉수 한 그릇을 놓고도 은혜로 아는 감사는 아름다운 사람으로 하나님께 기억되고 끊임없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사랑의 암호다. 다 똑같은 삶,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데 독특하게 잘 되는 그 암호는 감사하는 인생이다. 교회 안에 감사하는 교인이 가득하여 아침에도 감사, 점심에도 감사, 저녁에도 감사, 만날 때마다 감사가 강처럼 흐르기를 소망한다. 

난 아직도 김새롬 청년이 잘 될 것 같다. 그가 초등학생 시절에 심방을 갔는데 과일을 깎아서 놓은 걸 포크로 집었다. 그리고는 내게로 가져왔다. 그것이 너무나 가슴 깊이 예쁘게 남아있다. 삶 속에 수많은 일을 만나건만 그 작은 모습이 깊게 남아있다. 그래서 새롬 청년을 위해 기도한다. 넌 잘 되어야 한다. 내년 1월에 미국 뉴욕 주립 대학에 교환 학생으로 선발되어 간다. 그는 더욱 더 축복의 사람으로 성장하고 있다. 하물며 하나님께 감사로 예배를 드리는 자, 사과를 포크에 찍어 가져온 것이 아니라 감사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복을 부어주실 것이다. 내 평생 동안 기억해 주시고 삶을 풍성하게 해 주실 것이다. 더 놀라운 감사의 조건을 주실 것이다. 햇볕이 있음에 감사하면 달빛도 주시고 달빛을 놓고 감사하면 호롱불도 주시고 호롱불을 놓고 감사하면 전기불도 주시고 전기불을 놓고 감사하면 전기불도, 호롱불도, 달빛도, 햇빛도 뛰어넘는 천국을 주신다. 감사하라. 더 큰 행복의 기적을 위해 감사하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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