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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작은 헌신, 큰 결과 (왕상 17: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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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헌신, 큰 결과 (왕상 17:8~16)


시작하는 말 

오늘은 11월 두 번째 주일, 추수감사주일 전인데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더 많이 느끼고 감사하는 시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특별히 주중, 12일에는 대학수학능력 시험이 있는데 우리교회의 열두명 수험생들이 시험을 잘 치르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전날 11월 11일은 무슨 날입니까? 젊은이들에게는‘빼빼로 데이’로 알려졌습니다. 1이라는 숫자는 길쭉하고, 길쭉한 것은 빼빼로 입니다. 

과자 제조회사에서 잽싸게 이 점에 착안하여 이 날을 만들었고 빼빼로는 불티가 나게 팔립니다. 대단한 상술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달력에는‘농업인의 날’이라 되어 있습니다. 왜 농업인의 날이 되었을까요? 농업은 흙이 중요한데 한자로 흙 토(土) 자가 열 십(十)과 한 일(一)로 되어 있으니 土月土日, 즉 흙의 달, 흙의 날이라 11월 11일을 농업인의 날이라 정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날을 위한 좋은 해석이 또 하나 더 있습니다. 11월 11일은 네가지 1%의 기적을 떠올리게 하는 날이라는 것입니다. 1%의 희망, 1%의 성공,1%의 영감, 그리고 1%의 믿음입니다. 무엇이든 1%의 희망만 있어도 나아갈 가치가 있습니다. 아무리 작은 희망이라도 희망 속에는 진정한 힘이 있습니다. 1%의 성공을 위해서는 99%의 실패가 있습니다. 발명왕 에디슨은 말했습니다.“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노력의 산물이다.”1%라는 영감의 작용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그리고 1%의 믿음을 확신하라 입니다.“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리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 17:20). 이 겨자씨만한 믿음이 1%입니다. 이것으로써 산과 같은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조금 남은 1%, 이것은 대단히 소중한 것입니다. 이것을 어디에, 어떻게 쓰느냐가 우리의 인생을 좌우할 수도 있습니다. 남은 1%도 귀한 줄 알고, 귀하게 사용하여, 귀한 열매를 맺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몸 말 

여기 자신의 마지막 1%를 귀하게 사용한 사르밧 여인이 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큰 가뭄을 피하여 사르밧 땅에 왔을 때였습니다. 그곳은 이스라엘 국경 밖에 있는 이방이며 바알신을 숭배하는 시돈에 속한 성읍이었습니다. 그곳인들 어찌 가뭄이 심각하지 않았겠습니까. 인심이 메마르기는 매 한가지, 오히려 더 흉흉했을 것입니다.

엘리야는 성문에 나온 한 과부를 만났습니다. 과부는 나뭇가지 몇 개를 줍고 있었습니다. 목마르고 배고팠던 선지자가 이 과부에게 물 한 모금과 떡 한 조각을 요구합니다. 이 이방 여인은 망설이면서 대답했습니다.“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12절). 엘리야가 이스라엘 사람이며 하나님을 믿는 사람임을 알아본 것입니다. 그리고 진실하게 자기의 처지를 말하였습니다.“저에게는 빵 한 조각도 없습니다. 

다만 뒤주에 밀가루가 한 줌 정도, 그리고 병에 기름이 몇 방울 남아 있을 뿐입니다. 보시다시피 저는 지금 땔감을 줍고 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가서 저와 제 아들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것을 모두 먹으려고 합니다.”피맺힌 사연이었습니다. 그러자 엘리야가 이렇게 말했습니다.“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13절). 극한의 상황에서 어찌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 말을 진정 믿을 수 있었단 말입니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14절). 사르밧 과부는 의심하지 않고 이 말씀에 따라 마지막 1%의 양식을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렸습니다. 죽고 사는 것,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맡겼다는 말입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여러 날 동안, 적어도 가뭄이 물러가는 3년 동안 뒤주 통의 가루가 없어지지 않았고, 병의 기름이 마르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양식이 믿음으로 인하여 기적으로 바뀌었습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다면 산을 옮긴다는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믿음의 양식 1%가 기적이 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오래전 이런 감동적인 사건을 읽었습니다. 여덟 살 테스는 남동생 앤드류가 몹시 아파 걱정이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은 집세도 제대로 낼 수 없는 가난한 처지입니다. 다음 달에는 빈민촌으로 이사해야 합니다. 앤드류의 병을 치료하고 큰 병원에서 대수술을 할 수는 도저히 없습니다. 아빠는 울고 있는 엄마에게 말했습니다.“여보, 이제 우리 앤드류는 기적이 아니면 살 수가 없소.”절망 가득한 목소리였습니다. 이 말을 엿들은 테스는 동생을 위하여 기적이라는 약을 사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테스는 저금통을 깨뜨렸습니다. 동전들을 모아 몇 번이고 세어보니 1달러 11센트 였습니다. 맥셀 씨가 운영하는 약국으로 달려갔습니다. 약사 맥셀 아저씨는 시카고에서 오신 손님과 말씀을 나누고 있어 테스의 이야기를 듣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테스가 동전을 와르르 쏟아놓자 손님과의 대화는 중단되었습니다. “아저씨, 제 동생은 앤드류인데 너무 아파요. 머리 속에 무슨 이상한 것이 자라고 있대요. 그래서 아빠는 기적만이 제 동생을 살릴 수 있대요. 

아저씨, 기적이라는 약을 주세요. 얼마예요?”맥셀 씨는 말했습니다.“아가, 미안하지만 나는 너를 도와줄 수가 없구나.”테스는 다급했습니다.“아저씨, 이것이 제가 가진 돈의 전부예요. 모자라면 더 가지고 올께요. 가격을 말씀해 주세요.”이때 시카고에서 온 손님이 테스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래, 얼마를 가지고 왔니?”“1달러 11센트요. 그러나 더 가지고 오겠어요.”“그것 참 대단한 우연이구나. 

가격이 꼭 맞아. 내가 가지고 있는 기적이 네가 살려고 하는 기적과 같은지 한번 보자꾸나.”이 신사는 테스와 함께 집으로 가서 앤드류와 부모를 만나보았습니다. 그가 바로 세계적인 신경 전문의사 칼톤 암스트롱 박사였습니다. 이 수술은 1달러 11센트에 이루어져 어린 앤드류를 고치는 기적을 낳았습니다. 소녀의 마지막 양식이 기적을 이루는 순간이었습니다.

신약 성경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성전에서 헌금을 하는 사람들 곁에 예수님께서 앉아 계셨습니다. 연보궤는 여인의 뜰이라 불리는 곳에 있었는데 놋쇠로 된 나팔 모양의 헌금함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습니다. 부자들은 당당히 앞으로 나와 많은 헌금을 했습니다. 금화가 쩔렁대는 소리가 요란했지만 주님은 조용히 그 모습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가난한 과부가 조심스럽게 나왔습니다. 얼른 헌금함에 넣고 사라졌지만 액수는 두 렙돈이 분명했습니다. 렙돈은 팔레스틴에 통용되던 화폐 중 가장 작은 단위로서, 로마의 가장 작은 화폐인 고드란트의 1/2에 불과했습니다. 두 렙돈은 한 끼의 식사비도 제대로 되기 어려운 적은 돈이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돈이 가난한 과부가 가진 모든 것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과부는 저녁 끼니를 굶을 작정을 하고, 또 내일 하나님께서 일용할 양식을 주실 것으로 믿고 주머니에 있는 마지막 양식을 드렸습니다. 

전부를 드리는 이 자세를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궤에 넣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어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고 칭찬하셨습니다. 여러분, 오해하지 마십시오. 다음 주일 추수감사주일에 생활비 전부를 내 놓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마가복음 12장에 나오는 두 렙돈을 드린 이 여인의 나중 얘기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 후 그가 어떤 복을 받고 살았는지를 강조하는 말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의 마지막 1%를 드렸다는 것, 다 드린 후의 두려움이나 걱정이 그의 헌신을 막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헌신은 나를 생각하면 못합니다. 헌신은 나 아닌 다른 사람, 내 계산 아닌 하나님의 뜻을 생각할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너무 이기적입니다. 나 외는 전혀 생각지 못하는 정신박약 상태입니다.

장기간 베스트셀러가 된‘배려’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위’는 회사에 입사할 때 수석으로 들어갔고, 입사 후에도 승승장구하여 승진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는 자신이 구조조정을 건의했던 바로 그 부서에 발령을 받았습니다. 가뜩이나 심란한데 헌신적이었던 아내로부터 이혼 서류가 날라옵니다. 아이도 엄마를 따라 집을 떠났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왜 이런 일들이 갑자기 자기에게 일어나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새로운 부서로 옮긴 그는 인도자라 불리는 회사의 고문에게 조언을 듣습니다. 그 고문은 진정한 성공과 행복의 키워드는‘배려’라고 가르쳐 줍니다. 다른 사람을 배척하고 경쟁해서 승리한다고해서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일평생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아 성공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달려온 주인공은 이 말에 수긍하기 힘들었습니다.

주인공은 몇 달의 유예기간에 서로 배려하며 일하는 새로운 팀원들과 지내면서 비로소 배려의 가치를 깨달아 갑니다. 배려야말로 진정한 승리와 행복의 비결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후, 그는 비로소 아내의 입장을 헤아리게 되었습니다. 그가 아내를 이해하게 되었을 때, 떠나갔던 아내는 어느새 제자리로 돌아와 있었습니다. 결국 배려의 결과는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에게 돌아온 것입니다. 

서로 배려하면 가난해도 행복합니다. 서로 배려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예의 바름이 싹틉니다. 배려가 있어 협동이 가능합니다. 반대로 배려가 없다면 아무리 풍족해도 불행합니다. 무례함이 판을 칩니다. 서로 자신만을 내세웁니다. 고슴도치도 서로 배려합니다. 그들에게 배려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날카로운 침을 갖고 있으면서도 함께 지낼 수 있는 것입니다. 

아스퍼거 신드롬(Asperger Syndrome) 이라는 이론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극히 자기중심적이어서 다른 사람의 말을 전혀 듣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증상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기적인 것과는 다른것입니다. 이기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의 입장을 잘 알면서도 자기 욕심 때문에 그것을 무시합니다. 그런데 아스퍼거 신드롬에 빠진 사람은 애초부터 다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자기 세계에만 갖혀있는 것입니다.

이 아스퍼거 증상의 사람이 살아가는 것을 보면 자기나 자기 가족밖에 모릅니다. 집 밖에 나가면 나 아닌 다른 사람, 우리 가족아닌 다른 사람은 모두 다 적으로 간주합니다. 자기 가족들만 배려할 줄 알지 남에게는 무관심합니다. 그래서 이웃들과는 나눌 줄 모릅니다. 자신에게는 한 없이 관대하고 남에게는 엄격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는 아스퍼거 신드롬에 푹 젖은 세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때 우리는 서로 배려하며 헌신했던 사르밧 과부의 얘기를 가슴으로 들어야 할 것입니다.

마무리하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우리는 승리주의에 붙잡혀 살아가고 있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승리만을 추구하며 사는 세상이 된 것입니다. 교육에서도 그렇고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면에서 그렇습니다. 심지어 교회 안과 교회 간에서도 그렇습니다. 공동체 의식은 희미해지고 공교회성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이러한 시대에 성령 충만함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보여 주어야 할 변화되는 삶의 모습이 무엇이겠습니까? 이제 성령강림절 기간이 거의 끝나가고 있습니다. 지금은 성령 충만함을 추구해야 할 때가 아니라 성령 충만함으로 살아가는 변화된 모습을 나타내 보여야 할 때입니다.

상황으로 보면 오늘 우리의 모습과 사르밧 과부는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현대인들도 먹을 양식이나 주머니에 남은 돈만이 아니라 나의 희망과 성공의 가능성이 점점 바닥을 드러낸다는 사실에 얼마나 큰 마음에 고통을 안고 있는지 모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보시는 그 앞에서 손에 쥔 두 렙돈 밖에 없는 여인의 부끄러움과 자괴감도 우리속에 감추어 두고 있는 공통된 감정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구약과 신약의 가난한 과부들은 이 마지막 양식을 대담하게 하나님 앞에 내놓았습니다. 겨자씨 같은 믿음을 가진 부인들입니다. 이것저것 생각하며 낙심하고 있었다면 이런 기적을 이룰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삶의 남은 때를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는, 믿음으로 승부를 거는, 믿음의 승부수가 필요합니다. 톨스토이의 말처럼“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질문을 해볼 때입니다. 

사단이 유혹한 것처럼 빵으로, 명성으로, 천하의 권세로 사는 것입니까?”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명기 8장에서 하나님께서 만나를 주시며 하신 말씀입니다.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사르밧 과부의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작은 헌신에 놀랍고 큰 결과를 주심을 보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올해 이루지 못한 것이 아직 밀가루 한 줌이나 지극히 작은 돈, 겨자씨만큼이라도 남았거든 그것을 믿음으로 헌신하며 남은 날을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의 1%, 또한 희망과 정성과 영감의 1%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남은 것이 비록 작아도 실망하지 마십시오. 그것을 믿음으로 헌신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보장하시는 놀라운 결과를 얻게 될 것입니다. 실망하지 마십시오. 포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약속에 희망은 있습니다. 내게 있는 것, 그것만을 계산하며 고개 숙이지 말고,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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