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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의 부탁 (몬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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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부탁 (몬 1:8~22) 
 
 
빌레몬서는 사도 바울이 빌레몬에게 보내는 사적인 편지입니다. 바울이 빌레몬에게 편지를 보내게 된 사연이 좀 특별합니다.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 사연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3차전도 여행 때 3년이나 되는 긴 시간을 에베소에 머물면서 선교했습니다. 이 때 에베소 근처 골로새에 살고 있던 빌레몬이라는 사람이 에베소에 다니러 왔다가 바울의 전도를 받게 됐습니다. 그 이후 저가 예수를 믿었을 뿐 아니라 예수를 위해 헌신하게 됐습니다.

빌레몬은 골로새로 돌아와 복음을 전했고 예수 믿는 사람들과 함께 자기 집에서 예배를 드리게 됐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것이 골로새 교회입니다. 이 골로새 교회는 점점 부흥했습니다. 그래서 별도의 예배 처소를 마련했고, 바울이 파송한 에바브라를 목회자로 모시게 됐습니다. 그 후 골로새 교회는 더욱 부흥하게 됐습니다. 빌레몬은 바로 이 골로새 교회의 기둥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몬 1:1에서 빌레몬을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던 중 빌레몬의 종 오네시모라는 사람이 주인의 돈을 훔쳐 멀리 로마까지 도망치게 됐습니다. 이곳에서 지내다 돈이 다 떨어지고 생활이 어려워지게 됐습니다. 마침 오네시모는 골로새에 있을 때 귀 너머로 들어서 알고 있던 바울이 로마에 와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오네시모는 바울을 찾아갔습니다. 바울에게서 복음을 듣게 됐고, 예수를 영접하게 됐습니다. 이 때 오네시모가 자기의 과거를 털어놓고 회개하며 죄를 자백하게 됐습니다. 그 후 오네시모는 바울을 주인 섬기듯 헌신적으로 바울의 옥중 생활을 뒷바라지 했습니다. 바울에게는 이제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오네시모를 그대로 데리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오네시모가 엄연히 법적으로 빌레몬의 소유였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재산 상 손해를 끼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빌레몬의 용서를 받게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빌레몬의 허락을 받아 다시 자기 곁에서 자기를 돕게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네시모를 멀리 골로새에 있는 빌레몬에게 돌려보내기로 한 것입니다. 이 때 빌레몬의 선처를 기대하면서 오네시모에게 들려 보낸 편지가 바로 빌로몬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빌레몬서는 ‘사면 추천서’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짧은 편지 안에서 바울이 영적 제자요 아들인 빌레몬에게 보내는 사랑의 부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빌레몬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이 담긴 사랑의 부탁입니다. 빌레몬의 사랑의 선처를 기대하는 사랑의 부탁입니다.

우리는 이 바울이 빌레몬에게 전하는 사랑의 부탁 안에서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전하는 사랑의 부탁을 들을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의 뜨거운 사랑의 마음이 담긴 사랑의 부탁입니다. 그리고 사랑의 실천을 기대하는 사랑의 부탁입니다.

1. 용서의 부탁

본문을 보면 오네시모는 빌레몬에게 큰 죄를 범했습니다. 15절을 보면 “아마 그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본문에서 바울은 잠시 떠났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도망친 것을 말합니다. 오네시모가 지금 예수 믿고 새사람이 됐기 때문에 과격한 표현을 피한 것뿐입니다. 어쨌든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종 곧 노예로서 주인을 피해 도망친 것입니다.

더 심각한 것은 18절에 기록되어있습니다. “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 오네시모가 도망칠 때 빌레몬에게 불의를 행했다는 것입니다. 보다 자세히 말하면 재산상의 피해를 입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과격한 표현을 피해서 빚진 것이라고 했을 뿐입니다. 아마도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돈을 도둑질한 것 같습니다.

결국 오네시모는 종 곧 노예로서 주인의 돈을 가지고 도망친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의 사회법으로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입니다. 노예가 도망칠 경우 당시 사회의 질서와 기강을 바로 세운다는 차원에서 죽일 수 있게 했습니다. 게다가 오네시모처럼 돈을 가지고 도망칠 경우 그 죄질이 나쁘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죽이게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지금 죽여 마땅한 오네시모를 용서하라는 부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 부탁은 세상 사람들이 볼 때 무리한 부탁입니다. 어떻게 죽여야 할 사람을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하지 않고 또 아무런 보상도 받지 않은 채 용서하라고 할 수 있습니까? 불가능한 일을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왜 이렇게 무리한 부탁을 했을까요? 바울이 볼 때 빌레몬에게는 능히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엡 4:32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한 사람들은 용서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용서하려 할 때 하나님께서 자신을 용서하신 것처럼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용서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용서를 받아본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대신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 용서를 기억할 때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용서라는 말은 한자로 ‘그릇에 담을’ 용(容)자에 ‘헤아려 동정할’ 서(恕)자를 씁니다. 그러니까 용서는 먼저 마음으로 받아들여주고 그 처지와 입장을 헤아려서 동정해 주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용서라는 말은 영어로는 forgive입니다. ‘위한다’는 ‘for’와 ‘주다’라는 ‘give’의 합성어입니다. 그러니까 용서는 그 사람을 위해서 그냥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렇게 하셨습니다. 먼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 마음으로 용납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그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온전히 용서를 받은 것입니다. 이제 주님께서 우리에게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라고 부탁하고 계신 것입니다.

월간지 <좋은 생각> 1993년 5월호에 실린 이야기입니다. 1989년 8월, 서초구 반포동에서 조그만 보석상을 경영하던 박상철 씨는 한 순간에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3명의 강도가 보석상에 침입하여 3억여 원 상당의 금은보석을 챙겨 달아났습니다. 그는 급히 뒤쫓다가 범인의 자동차에 매달린 채 50미터를 끌려가다 길 가에 튕겨져 뇌를 크게 다쳤습니다. 식물인간 상태로 한 달 가까이 사경을 헤매다 가까스로 의식을 되찾은 뒤에도 7개월 동안 병원신세를 져야 했고 반신불수와 언어장애를 겪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퇴직금으로 마련한 금은방이 다 털렸고, 병원비로 먹고 살기도 막막한 상황이었습니다. 

10개월 뒤 범인이 검거됐습니다. 이분이 경찰에 출두해서 범인과 처음 마주쳤을 때,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가슴 저 깊은 곳에서 끓어올랐습니다. 결국 범인은 살인미수죄까지 추가돼 사형이 구형됐습니다. 이분이 범인에 대한 신상에 관해 알게 됐습니다. 가난으로 16살에 집을 나와 범죄의 늪에 빠지게 됐던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분 마음속에 내재된 신앙이 꿈틀거리기 시작합니다. 범인에 대한 분노가 녹아내립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강하게 일어납니다. 범인을 찾아가 면회했습니다. 그리고 범인을 감형해 줄 것을 요청하는 탄원서를 법원에 냈습니다.

법원에서 범인에게 무기형을 선고했습니다. 이분은 계속 교도소를 찾았습니다. 범인도 이분의 용서에 감화를 받아서 신앙을 가지게 됐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회개하는 마음으로 성실하게 교도소에서 복역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용서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진정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한 믿음의 사람들은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의 부탁을 하고 계십니다. “용서하라!” 내가 너희를 용서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용서하라.

2. 세움의 부탁

본문에서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의 죄와 잘못을 용서하라는 부탁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16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그러니까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주 안에서 형제로 대해 주라고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용서할 뿐 아니라 그를 사랑하여 형제로 친구로 세워주는 일은 더욱 힘 드는 일입니다. 사람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구약 인물들 중 예수님을 가장 닮은 사람을 꼽으라면 요셉을 들게 됩니다. 그의 성품 속에 예수님의 성품이 그대로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성품이 나타나는 말씀들 가운데 하나가 창 45:5 이하의 말씀입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요셉은 미워하고 시기하던 형들 때문에 어린 시절 애굽에 종으로 팔려왔습니다. 그리고 정말 험한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긴 세월이 흘러 형들을 다시 만나게 됐습니다. 자기는 애굽의 총리가 됐고, 형들은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도움을 청하러 요셉 앞에 왔습니다. 요셉은 복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은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이 때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했습니다. 비록 형들이 자기를 미워해서 애굽에 종이 되어오게 했지만 그 뒤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자기가 애굽에서 총리가 되어 자기 가문과 민족을 구원하시려는 섭리가 있었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자기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음도 깨달았습니다. 비록 형들이 밉지만 저들을 용서할 뿐 아니라 계속 형으로 세워주고 사랑하며 관계를 세워가라는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용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세움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형제로 동역자로 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일은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는 사람들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깊이 깨달을 수 있는 사람들만 할 수 있습니다.

[용서를 넘어선 사랑]이라는 연극이 공연된 일이 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일대기 중 애양원 전도사로 부임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가, 일제시대와 6.25를 통해 순교하기까지의 실화를 다룬 작품입니다.

특히 그 중의 압권은 1948년 여순반란 사건으로 손양원 목사님의 두 아들이 죽은 뒤에 펼쳐지는 이야기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졸지에 공산당에게 두 아들을 잃게 됩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손 목사님은 두 아들을 묻으면서도 눈물을 흘리는 대신 애절한 절규로 감사기도를 드립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 앞에서 두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용서하고 그들을 아들로 받아들이기로 작정합니다. 이 때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딸 손동희를 달래고 설득하는 힘든 시간을 보냅니다. 그리고 교도소로 두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만나러 갑니다. 이 때 마치 친아들 면회 가는 것처럼 기뻐합니다. 그리고 창살너머 양아들의 두 손을 꼭 부여잡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부터 너는 내 아들이다. 너는 하나님이 내게 보낸 새로운 자식이야. 부디 과거의 실수는 잊어버리고 지금부터 새롭게 살자구나.” 

죄수복을 입은 양아들은 고개를 들지 못합니다. 그리고 주르륵 눈물을 흘립니다. 감옥을 나온 뒤 이 양아들은 묵묵히 아버지의 뒤를 따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용서를 넘어서라고 부탁하십니다. 단지 죄만 용서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친구로 형제로 세우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성품을 닮은 사람들은 이렇게 해야 합니다. 아니 할 수 있습니다. 

3. 파송의 부탁

13절 이하를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를 내게 머물러 있게 하여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지금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보냅니다. 그러면서 사랑의 부탁을 합니다. 우선 오네시모의 모든 죄와 잘못을 용서하라는 부탁입니다. 다음으로 저를 사랑받는 형제로 세우라는 부탁입니다. 이제 본문을 보면 한 걸음 더 나아가 빌레몬을 대신하여 정식으로 자기에게 파송하여 보내라는 것입니다. 정성스럽게 뒷바라지 하여 오네시모를 바울에게로 사명을 주어 파송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 부탁은 무리한 부탁입니다. 또한 염치없는 부탁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네시모는 특별한 사명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남다른 은사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 사명에 맞게 그리고 그 은사에 맞게 하나님을 위해 일하도록 이끌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간청하며 부탁하고 있습니다. 

김제시 금산리에 ‘ㄱ자 교회’로 알려진 금산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에 전해지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구한말 레위스 테이드 선교사님이 이곳에 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 때 그 고장에서 가장 큰 부자인 조덕삼이라는 사람의 집에 머물게 됐습니다. 이분이 예수를 믿기로 하고 사랑채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했습니다. 당시 이 집에는 마부 이자익이라는 청년이 일하고 있었습니다. 이분도 주인을 따라 예수를 믿게 됐습니다.

교회가 부흥되어 장로를 세워야 했습니다. 공교롭게도 주인인 조덕삼과 마부인 이자익이 경쟁을 하게 됐습니다. 놀랍게도 주인은 떨어지고 마부인 청년 이자익이 장로로 피택 됐습니다. 이 때 주인 조덕삼은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여서 교회에서 자기 집 마부를 장로로 깍듯이 받들었습니다. 물론 집에 오면 이자익은 마부로 성실하게 일했습니다.

조덕삼은 주일에 선교사님이 오지 못할 때 이자익 청년으로 하여금 설교하게 했고, 자기는 마루에 꿇어앉아 설교를 들었습니다. 많은 은혜를 받고 조덕삼은 이자익을 평양신학교로 보내서 공부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2대 장로가 되어 교회를 섬겼습니다. 이자익 청년이 신학공부가 끝나자 다시 교회로 청빙하여 목사로 목회하게 했습니다. 

조덕삼 장로는 최선을 다해 이자익 목사를 뒷바라지 했습니다. 마침내 이자익 목사님은 조선 기독교를 이끄는 총회장이 됐고, 그것도 세 번이나 다시 총회장으로 세움 받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자익 목사님은 조덕삼 장로님이 없었다면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조덕삼 장로님의 사랑의 뒷바라지가 있었기에 총회장이 되어 큰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사람을 키워야 합니다. 사랑의 뒷바라지로 주의 일꾼을 파송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사랑의 부탁을 하고 계십니다. 우선 용서의 부탁입니다.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 우리에게 죄를 진 사람 그들을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저들을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 저들을 친구로 형제로 사랑하는 사람으로 세우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성품을 닮아서 저들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들의 은사와 사명을 살펴서 주를 위해 일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뒷바라지 하여 주의 일을 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의 부탁을 듣고 실천해 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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