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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근거 (눅 9: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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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근거 (눅 9:18~26)
 

2천 년 전에, 예수님께서 겨우 12명의 제자를 데리시고 시작하신 하나님 나라는 이제 전 세계의 거의 모든 지역으로 확장되었습니다. 2009년 세계선교 통계에 의하면, 전 세계 인구 68억 가운데 약 33%인 약 22억 명이 기독교인으로 집계되었습니다. 물론, 이 통계는 신‧구교와 정교회를 다 포함한 것입니다. 기독교 인구가 22억이나 되었다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 가운데는 진실한 믿음을 가진 신자들도 있지만 명목상으로만 기독교인인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또는 무속적 기복신앙을 갖고 단지 복을 받기 위해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이는 한국 교회의 실상을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려면 우리 믿음의 내용이 성경적으로 올발라야 하며,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근거’에 대하여 올바른 답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첫 번째로, 구원 받는 믿음이란, 예수님을 인류의 유일하신 구세주로 믿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중심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적으로 올바른 믿음이란, 예수님을 인류의 유일한 구세주로 믿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 유행하는 종교다원주의는 구원의 길이 여러 개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세주는 단 한 분밖에 없다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성경의 가르침과 종교다원주의의 주장은 완전히 다릅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인류의 조상 아담의 타락과 더불어 구세주를 보내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최초의 언약이 나옵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자기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에덴동산에 두어 살게 하셨습니다. 때에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명하시기를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간교한 뱀이 하와에게 다가와서 말을 건넸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기를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그러자 뱀이 여자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이에 여자가 그 나무를 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로 보였습니다. 그만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었더니 그도 먹었습니다. 그러고 나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습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나자 뱀의 말과 같이 하나님처럼 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벌거벗은 것을 보고 수치심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피하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때에 하나님께서 아담을 부르시며 “네가 어디 있느냐?”고 하시니, 아담이 대답하기를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고 했습니다.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그러자 아담이 범죄의 책임을 하와에게 전가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이에 하나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기를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하시니, 여자가 대답하기를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고 했습니다. 아담과 하와 둘 다 자기들의 죄를 시인하고 회개하지 않고 남에게 전가하기에 바빴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하와를 꾄 장본인인 뱀과 선악과를 먼저 따먹은 하와와 아내가 준 선악과를 먹은 아담에게 심판을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뱀에게 이르시기를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여자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담에게 이르시기를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다보면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생깁니다. 그것은 뱀이 어떻게 사람과 대화를 할 수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뱀을 사단의 화신이라고 말씀합니다. 요한계시록 12장 9절에 보니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창세기 3장의 사건은 사단이 뱀을 도구로 이용하여 하와를 꾄 것을 의미합니다. 

아담의 범죄가 가져온 치명적인 결과는 첫째로, 인간 세상에 죄가 들어온 것입니다. 둘째로, 죄로 인해 죽음이 들어온 것입니다. 먼저, 범죄로 인해 사람은 영적으로 죽었습니다. 영적인 죽음이란, 하나님과 단절된 것을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영이 죽은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거듭남은 영적인 신생을 의미합니다. 예수 믿고 거듭난 사람이라야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 수 있습니다. 

그 다음, 범죄로 인해 육신의 죽음이 왔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한번 죽게 되어 있는데, 이것은 범죄의 결과로 주어진 형벌입니다. 그 다음, 영원한 죽음이 있습니다. 이는 최후의 심판 이후에 영원한 불못에 던짐 받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볼 때,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죄란, 지음 받은 존재인 인간이 감히 창조주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교만한 마음을 품은 것을 말합니다. 자기들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의 대적인 마귀의 편에 선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과의 사이에 맺은 언약을 파기한 것이 죄입니다. 그러므로 범죄에는 죽음의 형벌이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게 심판을 선포하시는 중에도 자비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을 타락시킨 뱀에게는 오로지 심판만 선포하셨지만, 아담과 하와에게는 구원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이 구원의 약속은 하나님께서 뱀에게 심판을 선포하신 말씀 가운데 나타나 있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신 창세기 3장 15절이 바로 그 약속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여자의 후손을 보내셔서 뱀 곧 마귀를 멸하시고 인간들을 구원하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여기, 나오는 ‘여자의 후손’은 곧 구세주를 의미합니다. 구세주께서 아담의 후손이 아닌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아담의 후손입니다. 

저와 성도님들도 아담의 후손입니다. 자식들은 아버지의 씨에서 나온 것입니다. 타락한 아담의 죄성이 그 후손들에게 유전되어서 사람은 누구나 악한 본성을 갖고 태어납니다.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이 죄성을 가리켜 원죄라고 합니다. 그러나 구세주는 죄성이 없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씨와 상관없는 여자의 후손을 구세주로 보내실 것을 작정하셨던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이사야 선지자는 이 같이 예언했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

마태복음 1장 18절에 보면, 동정녀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아들을 잉태했다고 증거합니다. 그리고 19절 이하에 보면, 요셉이 마리아가 잉태한 사실을 알고 가만히 둘의 관계를 청산하려고 마음먹었을 때,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말하기를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했습니다. 이에 요셉이 마리아를 자기 집으로 데려와서 보호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23절에 보면, 방금 인용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 아기 예수의 탄생을 통해 성취되었다고 증언합니다. 이로써 창세기 3장 15절에 언급하신 구세주에 대한 약속이 예수님의 탄생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인류 역사를 살펴보면, 구세주를 자칭하는 사람들이 많이 출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중에는 정치적인 영웅들도 있고, 종교적인 선각자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신이라고 내세우거나 신의 대리인이라고 자처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여자의 후손으로 온 자들이 아니었으므로 죽음에게 삼키우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죽은 지 사흘 만에 사망을 철폐하시고 부활하심으로 자기가 구세주이심을 입증하셨습니다. 더구나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죄 때문에 죽으신 것이 아니라 인생들의 죄 값을 대신 담당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종교다원주의의 주장을 지지합니다. 그들은 예수님 한 분만이 인류의 구세주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듣기 싫어합니다. 기독교는 배타적이고 독선적이라고 비방합니다. 그러나 이는 누가 지어낸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계시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올바른 믿음을 가지려면 예수님이 구세주이신 근거를 확실하게 알아야 합니다.

앞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분이심을 살펴보았습니다. 구약성경에 예언된 대로, 성령으로 잉태되셔서 탄생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성경의 내용을 의심 없이 믿어도 되는 것일까요? 마리아와 요셉에게 주의 사자가 나타나서 하나님의 뜻을 전해 주었을 때 그 자리에 또 다른 증인이 있었던가요? 이렇게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예수님께 대한 성경의 증거들을 신용할 수 있는 것인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는 영혼의 구원을 얻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이는 예수님이 인류의 구세주라는 사실을 전제로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구세주라면 그를 믿어 구원 받는다는 복음의 내용이 진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예수님이 구세주가 아니라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우리의 믿음은 허사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위한 우리의 신앙행위는 헛수고에 불과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무조건 예수를 믿을 것이 아니라 과연, 믿어도 되는지, 그렇다면 그 근거가 무엇인지 좀 더 확인해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먼저, 예수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유일한 구세주라는 사실은 구약성경의 증거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구약성경의 증언을 믿는 것은 구약성경에 기록된 모든 내용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어떤 저명한 성경학자가 증명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구약성경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입증합니다. 

누구든지 겸손한 마음으로 성경을 읽어보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모든 내용이 너무나 진실한데 놀라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과연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 틀림없다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을 밝혀 주셔서 성경 말씀을 깨달아 알게 해 주십니다. 

그 다음,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1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구약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성령의 감동을 받아 기록한 구약성경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세주라고 증거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대로 믿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을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는 예수님 자신이십니다.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사 복음서를 읽어보십시오.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과 그 분의 행동과 행하신 일을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당시의 광경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십시오. 처음에는 잘 되지 않지만 계속하면 익숙해지고, 예수님을 더 많이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복음서의 증언을 통해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예수님의 진실하심입니다. 그 하신 말씀 하나 하나가 다 진실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진실하다는 것은 그 분의 본질이 진실하다는 것입니다. 그 분의 인격이 진실하기 때문에 모든 언행이 진실하셨습니다. 인류 역사상 자기를 가리켜 진리라고 말한 사람은 예수님 한분밖에 없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만약에 다른 누군가가 “나는 진리”라고 말한다면, 곧장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으로서 감히 그같이 말할 자가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나는 진리라”고 하실 자격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2천년 교회사를 살펴보면,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위해서 자기의 목숨을 버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람은 누구나 거짓을 위해 목숨을 버리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위해서는 목숨을 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목숨을 버린다는 것은 예수님을 인류의 구세주로 믿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러시아가 낳은 위대한 작가인 도스토예프스키는 예수님에 대하여 이같이 말했습니다.

“그리스도보다도 아름답고 깊고 동정심이 있고, 이성적이고 씩씩하고 완전한 것은 없습니다. 없을 뿐 아니라 있을 수도 없다고 믿습니다. 그뿐 아니라, 만일 누구든지 나를 향하여 그리스도는 진리의 밖에 있다, 진실로 진리는 그리스도의 밖에 있다고 증명하는 자가 있다 해도 나는 오히려 진리보다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을 바랄 것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리와 상관이 없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이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보다 예수 그리스도는 더 진실하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내세우는 진리보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진리 그 자체시라는 뜻입니다. 도스코예프스키가 그처럼 인간의 내면을 깊이 성찰하는 위대한 작품들을 쓸 수 있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가 구세주를 깊이 이해하고 믿었다는 사실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는 예수님을 피상적으로 아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믿지만, 동시에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에 대해서도 깊이 이해해야 합니다. 빌립보서 2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얼마나 깊이 알고 있었는가를 말해 주는 구절이 나옵니다. 

“5)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면서도, 자기를 비워 우리와 같은 죄인의 모양으로 이 땅에 오셨고, 우리 인생들을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의 죽음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같은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 우리는 예수님의 한없는 동정심과 자기희생을 인하여 마음에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님께서는 미리부터 당신의 죽음을 예견하셨습니다. 마지막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열 두 제자에게 이르시기를 “18)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19)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하리니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마 20:)고 하셨습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으셨다면 얼마든지 죽음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더라도 체포됨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설령 대적들이 들이닥쳤더라도 예수님께서 원하시면 얼마든지 능력을 행하셔서 저들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진해서 죽는 데로 나아가셨습니다. 그 이유는,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고난을 앞두시고 밤중에 겟세마네 동산에 가셔서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를 올리셨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하신 기도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먼저, 예수님은 십자가 고난을 면케 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죽음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인 것을 아셨으므로 곧 이어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두 번째 기도 역시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으신 예수님의 모습은 구세주의 진면목을 가감 없이 보여줍니다. 

체포되신 예수님께서는 산헤드린 공회 앞에 서서 밤새워 심문을 받으셨습니다. 대제사장을 비롯한 공회원들은 거짓 증들인을 내세워서 예수님께 죄를 뒤집어 씌웠으나 침묵으로 일관하셨습니다. 얼마든지 자기의 무죄를 변론할 권리가 있었지만 묵묵히 정죄를 당하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이사야 선지자는 예언하기를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3:7)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죄를 짓고서도 법정에서 변호사를 고용해서 자신의 무죄를 강변하고, 형벌이 선고되면 지은 죄에 비해 벌이 무겁다고 항소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정죄를 당할만한 아무런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그 자리에서도 입을 열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로마 총독 빌라도 앞에서도 자기를 변호하지 않으시고 침묵하셨으나. 빌라도 자신이 대제사장들과 무리 앞에서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강요에 못이겨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허락했습니다. 

세상에 이처럼 억울한 죽음이 또 어디 있을까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없이 온갖 모욕과 채찍질을 당하시고, 드디어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같은 예수님을 보고 실패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런 자들은 구세주의 희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실 고난에 대하여 이같이 예언했습니다.

“4)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6)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야말로 그가 인류의 구세주이심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죽어 무덤에 장사되신 지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 능력으로 자기가 구세주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그가 인류의 구세주이심을 입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그들은 대답하기를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라, 더러는 옛 선지자 중의 하나가 살아났다 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다시 물으시기를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하셨습니다. 때에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도 예수님을 보고 세례 요한이나 엘리야나 옛 선지자 중의 하나와 같이 위인 가운데 한 분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가리켜 석가나 소크라테스나 공자와 나란히 인류의 사대 성인 가운데 한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종교다원주의가 주장하는 내용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으로는 영혼의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구원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그리스도 곧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세주로 믿어야 받습니다. 이 같은 믿음을 갖기 위해 우리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근거를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우리의 목숨도 아끼지 않는 제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오늘 이 말씀을 경청하신 성도님들께서는 누가 무어라 하든 상관없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해서, 그리고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서, 그가 세상의 구세주이심을 확실히 믿고 따르는 주님의 신실한 제자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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