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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보기를 원하나이다! (막 10:4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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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를 원하나이다!  (막 10:46~52)

 
오늘 봉독한 본문 말씀은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눈을 뜨고 보게 된 기적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바디매오의 이름은 무슨 뜻일까요?
"바"라는 단어는 "누구의 아들"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이름의 뜻은 그냥 디매오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46절 말씀에 아주 자상하게 설명되어 있지 않습니까?
"...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라고...

그러면 디매오는 또 무슨 뜻을 갖고 있을까요?
"디매오"는 "불결한"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우리는 그 이름을 통해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바디매오의 아버지 디매오도 거지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거지 디매오는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의 운명도 또한 대를 이어 거지로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더구나 그 아들이 맹인이라면 더 이상 그 아들에 대한 희망이 없었을 것입니다. 아마 그래서 디매오는 아들의 이름을 바디매오라고 지었던 것 같습니다.

바디매오는 아름답고 화려한 여리고 성 한복판에 살고 있었지만 결코 남들처럼 풍요로운 삶은 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길가에 앉아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구걸이나 하는 거지로 살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유월절 축제에 참여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순례자들에게 손을 내밀고 있지 않습니까? 누군가 던져 주는 동전 한 잎, 누군가 던져 주는 먹을 것을 기대하며 그렇게 길 가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 있던 그에게 희망의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가운데 그는 나사렛 예수라는 이름을 들었습니다. 나사렛 예수가 여리고 성을 지나가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나사렛 예수가 자기의 삶을 완전히 바꿔 주실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크게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러나 그 외침은 예수님께서 듣지 못하셨던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 외침을 예수님께서 들으실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바디매오에게 조용히 하라고 꾸짖었습니다.
도대체 사람들이 왜 그를 꾸짖었을까요? 상황 파악도 못하고 고함을 지르며 시끄럽게 굴었기 때문에 그랬을까요? 아니면 위대한 분이 행차하시는데 감히 거지 따위가 나섰기 때문에 꾸짖었을까요? 모두 그럴 만한 이유가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예수님을 향해서 다윗의 자손 예수라고 외쳤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의 자손 예수라고 외친 것이 왜 문제가 되었을까요? 그 까닭은 다윗의 자손이란 바로 메시아이심을 드러내는 호칭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호칭이 문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부른 것이 왜 문제가 되었을까요?
다른 이유는 없었습니다. 다만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백성들은 다윗 왕국을 재건할 메시아가 올 것이라고 굳게 믿고 기다렸습니다. 때문에 메시아가 왔다는 것은 당시 권력을 쥔 자들에게는 큰 위협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집권자들이 엄연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왕이 왔다는 것은 그 집권자들에게 심각한 위협이 될 수밖에 없지 않았겠습니까?

바디매오가 나사렛 예수를 다윗의 자손 예수라고 외쳤던 것은 메시아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를 반영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정치적인 상황으로 볼 때에 그는 결코 입 밖에 내지 말았어야 할 불손한 발언을 했습니다. 때문에 사람들이 그에게 조용히 하라고 꾸짖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더욱 소리를 높였습니다. 일단 기회가 왔는데 그는 그 기회를 놓칠 수 없었습니다. 마침내 그가 외치는 소리를 예수님께서 들으셨습니다.

바디매오가 외치는 소리를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부르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맹인 거지를 위해서 뭔가를 해 주시려는 태도를 보이셨습니다. 하여간 사람들이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고 하자 그는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님께 왔습니다. 그가 겉옷을 내버렸다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습니다. 마치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생계 수단인 그물을 버렸던 것과 같습니다. 맹인 거지에게 있어서 겉옷은 유일한 생명 보호 장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그 겉옷을 포기했습니다. 그가 겉옷을 미련없이 포기한 것은 자신의 소유를 버리지 못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못한 부자 청년과 극히 대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길 가에 앉아 있던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듣고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달려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달려온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그러자 그가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아마 그도 평소에는 다른 거지들처럼 길 가에 앉아서 돈이나 구걸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종교적인 이유 때문에 불쌍한 사람을 구제하고 돕는 일에 매우 적극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바디매오가 다른 거지들처럼 돈을 구걸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다만 보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진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자기가 안고 있는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가 알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라고 그는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돈을 구걸하지 않고 보기를 원한다고 예수님께 대답했던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돈이나 구걸하던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눈을 뜨고 보기를 원했습니다. 그 변화가 얼마나 놀라운지 본문 말씀 바로 앞의 이야기와 비교해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서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영광 중에서 주의 좌편과 우편에 앉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원한 것은 지위와 명예와 권세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무엇을 구하는지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눈이 먼 것과 또한 그들의 거지 근성을 함께 나무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원하느냐고 똑같이 물으셨는데 그 대답은 전혀 달랐습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원한 것과는 달리 바디매오는 보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간절히 보기를 원한 바디매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그러자 그는 곧 보게 되었습니다. 맹인이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가 눈을 뜨고 볼 수 있게 된 것은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 하였느니라!"
그렇습니다! 그가 눈을 뜨고 보게 된 것은 오직 그의 믿음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에는 무수히 많은 믿음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누구입니까? 바로 아브라함일 것입니다.
로마서 4장 18절 말씀에 그에 관해서 어떻게 소개하고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전혀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100세에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약속하는데, 또 그 아이를 통해서 하늘의 별처럼, 땅의 모래처럼 후손이 심히 번성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자신을 보면 무력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현실과 희망과는 거리가 너무 멀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믿었습니다.
로마서 4장 20절, 21절 말씀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렇다면 바디매오의 믿음이 도대체 어떤 믿음이었기에 그의 눈을 뜨게 할 수 있었을까요?
그 믿음은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듣고 그 예수님께 희망을 건 믿음이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도 현실과 희망은 너무나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 불가능한 현실을 전능하신 예수님께서 변화시켜 주시리라 그는 확신했습니다. 또한 사람들이 만류함에도 불구하고 간절히 예수님의 도우심을 구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보기를 원한다고 한 그 모든 것이 바로 그의 믿음이었습니다. 그 믿음이 맹인의 눈을 뜨게 했고 또한 나사렛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알고 따르는 제자가 되게 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디매오의 이야기는 바로 오늘 우리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날 우리가 맹인으로 지낼 때 놀랍게도 복음을 들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옛 사람을 벗어 던지고 달려왔습니다. 그리하여 앞을 볼 수 없던 우리가 이제는 눈을 뜨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보고 믿고 따르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의 믿음이 온전한 것인지 다시 한 번 점검해야 하겠습니다.
혹시 여전히 맹인의 상태로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장차 영광 중에 주님의 좌편, 우편에 앉는 것은 우리의 관심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이 죄악 세상에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십자가를 지고 앞서 가신 주님을 끝까지 따라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우리가 마땅히 걸어야 할 길로 알고 성령이 인도하시는 대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끝까지 전진하는 참으로 충성스러운 주님의 제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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