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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행 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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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행 8:1~4) 
 
 
본문은 생명의 말씀이 예루살렘을 벗어나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퍼져나가게 된 일을 기록합니다. 이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경륜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반신국적인 세력의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핍박은 경고로 시작해서(4:18), 채찍질(5:40)로 강화되었다가 스데반의 순교(7:60)에서 정점에 이릅니다. 그가 순교하던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일어났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이 기폭제가 되어 그 동안 참아왔던 교회에 대한 적대감이 맹렬하게 폭발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더 이상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는 고상한 생활을 즐길 수 없게 되었습니다(2:47). 무시무시한 핍박 때문에 예루살렘에 머물 수 없게 되었지요. 가족 친지들과 생이별해야 할지라도, 안정된 직장을 버려야 할지라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핍박의 중심에 “사울”이 있었습니다. 사울은 스데반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겼습니다. 핍박을 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울은 “교회를 잔멸”했습니다. 남녀를 불문하고 끌어다가 옥에 넘겼지요(1). ‘잔멸’은 멧돼지가 포도원을 마구 파헤치는 것을 표현할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LXX, 시 80:13). 매우 격렬하면서도 무자비하게 핍박하는 모습을 연상할 수 있지요. 사울의 핍박은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처럼 시기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5:17). 회심한 이후에 스스로 고백했듯이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기 때문에 핍박했습니다(갈 1:14).

사울은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생각이 지나쳐서 예수님께서도 성부와 본질이 동일하신 성자 하나님이시라는 진리를 받아들일 수 없었지요. 그런 주장은 다신론을 인정하는 이단이라 생각되었을 것입니다. 조상의 유전에 대한 열정 때문에 예수님께서 율법과 성전을 성취하셨다는 사실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런 주장을 하는 놈은 죽어 마땅하고, 그런 주장을 하는 공동체는 잔멸해 버려야 한다는 확고한 이론적 근거와 신념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님을 바르게 알지 못하는 동안에는 비록 하나님을 열정적으로 사랑할지라도 교회에 해악을 끼치는 존재가 될 수 있음을 보게 됩니다.

신앙함에 있어서 열정은 참 중요한 요소입니다.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위해 열정을 다해 헌신하는 삶은 없으면서 얄팍한 신학 지식으로 비판하는 주둥이만 가졌다면 죽은 신앙이겠지요. 이 때문에 신학 논쟁만 일삼던 죽은 정통의 시대에 삶을 강조한 경건주의가 태동했습니다. 하지만 사울을 통해 보듯이 무지한 열정은 큰 해악을 끼칩니다. 뜨거운 체험과 삶을 강조했으나 바른 지식을 경시했던 경건주의는 결국 자유주의와 신비주의를 낳고 말았지요. 열정적인 삶은 바른 지식을 기반으로 하고 있을 때만 스데반처럼 하나님께 인정받는 신앙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열정이 넘치는 이 시대에 참으로 바른 신앙 지식이 공급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스데반은 예수님을 쏙 빼닮은 사람이었습니다.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며 성령과 지혜로 변론하는 모습과 성전과 율법에 대한 그의 견해가 닮았습니다. 공회 앞에서 담대하게 진리를 선언하는 자세와 폭도들에 의해 죽임당하면서도 용서의 기도를 드리는 자세, 그리고 죽은 후에 경건한 사람들에 의해 묻힌 것까지 닮았습니다. 그는 바른 지식과 함께 바른 열정을 가진 신앙인이었습니다. 서릿발처럼 날카롭게 진리를 선포하면서도 자기를 향해 죽일 듯 돌을 던지는 원수를 품고 기도하는 성숙한 사랑의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잃었다는 것은 교회의 큰 손실입니다. 또한 당시로서는 유일하게 존재했던 신약 교회가 풍비박산 한 것도 큰 손실로 보입니다.

그런데 4절을 보십시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헬라어 성경에는 ‘그래서’(me.n ou=n)에 해당하는 접속사가 4절 앞에 있습니다. 흩어졌기 때문에 비로소 복음이 두루 퍼지게 되었음을 분명하게 기록했습니다. 흩어진 지역들은 1절에서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이라고 밝혀두었습니다. 겉보기에 교회가 완전히 망해버린 것 같지만 참으로 기묘하게도 예수님께서 명령하셨던 말씀대로 복음이 예루살렘을 넘어 “온 유대와 사마리아”(1:8)로 확산되는 결과가 발생한 것이지요. 큰 손실로 보이는 현실 속에서도 역사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방향, 그분의 말씀이 성취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음을 분명하게 확인 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사울은 100% 자기 의지로 복음 전파를 막기 위해서 가진 열정을 다해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그 이면에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막으려는 반신국적인 사단의 역사가 있었겠지요. 성도들은 핍박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유대와 사마리아로 흩어져야만 했습니다. 그것 역시 100% 자신들의 의지로 결정한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단의 술책과 사울과 성도들의 자유 의지를 전혀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당신님의 말씀이 100% 성취되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섭리를 통해 당신님의 미리 정하신 목적을 이루어 가시는 것을 하나님의 경륜이라 합니다. 스데반의 순교와 교회의 핍박당함도 하나님의 경륜하심 속에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그네들끼리 오순도순 가족적인 분위기로 살아가는 것이 즐겁고 만족스러웠겠지요.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1:8)는 말씀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스데반의 순교와 핍박을 통해 그들을 흩으셨습니다. 비유하자면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을 막대기로 내리치도록 두심으로써 불똥이 사방으로 흩어져 옮아 붙게 하신 셈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만족할 만한 환경을 제공하는 것보다 교회의 존재 목적대로 살아가도록 인도하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만족할 만한 신앙생활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만족하실 수 있는 신앙생활입니다.

한 동안 ‘꿈은 이루어진다’는 구호가 유행했었습니다. ‘비전’이라는 말도 유행처럼 번졌고 ‘생각대로’라는 광고카피도 여전히 우리 사회에 먹혀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냉정하게 우리 삶을 돌아볼 때 이루어지지 않은 꿈, 포기 해야만 하는 꿈이 훨씬 많습니다. 비전은 공허한 구호가 되어버리고 생각대로 되지 않는 현실 앞에 절망할 때가 많지요. 마음이 불편하지만 이것이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은 하나님의 목적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수정되거나 보완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불확실한 미래와 요동하는 현실 속에서도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되는 방향으로 살아가는 것이 지혜입니다.

우리에게는 ‘말씀에 충실함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잘 드러내는 교회’가 되려는 꿈이 있습니다. 이를 위해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핵심 가치로 삼고 있지요. 하지만 때때로 바른 지식의 터전은 아직 놓지 못했는데 열정은 이미 상실해가고 있는 모습 속에서 조급함과 염려가 생깁니다. ‘느리게 가더라도 바르게 가고 성공적이기보다 성경적인 교회’가 되려고 애쓰는 일이 너무 이상적인 일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현실은 느리게 가면 답답해지고, 성공적이지 못하면 낙심하게 되니까요. 이상적인 목표와 그렇지 못한 현실이 우리를 갈등하게 만듭니다.

사실 우리는 불가능한 꿈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능력과 시간에는 제한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꿈은 반드시 성취될 꿈입니다. 성경이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고전 1:8)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은 올곧은 설교 한 번 하고 죽었습니다. 비유하자면 큰 건물을 짓고자 하는데 벽돌 한 장 놓고 세상을 떠난 셈이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한 장의 벽돌을 헛되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 한 장의 벽돌을 기초로 당신님의 뜻을 이루어가셨습니다. 스테반 한 사람만 생각하면 아무것도 성취한 것이 없어 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 많은 것을 이루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하심이라는 큰 그림 속에서 현재를 살필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비록 느리게 갈지라도 바르게 간다면, 비록 성공적인 모습이 아니더라도 성경적이라면, 그것이 최선의 방책임을 믿는 믿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속 터지는 느림 속에서도 세속의 방식을 취하지 않고, 한 장의 벽돌을 겨우 놓을 뿐일지라도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바르게 놓는 일을 중요하게 여길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추구하는 바가 말씀과 일치하는 방향이라면 비록 우리 시대에 많이 성취하지 못하는 비효율적인 방식일지라도 기뻐할 수 있는 자세를 배울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경륜하심을 생각하며 사는 삶이 가장 지혜로운 줄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핍박의 기사들 사이에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는 기록을 봅시다(2). 세속적인 관점에서 보면 스데반이 공회 앞에서 입바른 소리 하는 바람에 큰 핍박이 생겼습니다. 한 사람이 너무 융통성 없이 말하고 행동한 것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고난을 받게 된 셈이지요. 한 사람 때문에 교회가 완전히 붕괴되었습니다. 자신의 행복과 자신의 만족을 위한 신앙생활을 추구해온 사람이라면 스데반이 곱게 보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경건한 사람들은 스데반이 얼마나 귀한 일을 했는가를 알았습니다. 귀하게 여겼기 때문에 크게 슬퍼했지요. 그리고 그들도 스데반처럼 흩어진 상황에서 복음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예루살렘의 성도들이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려는 마음이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순종하려는 마음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런 미지근한 상태가 지속될 때 성도는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기만족적인 신앙생활에 빠져들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에 무지한 만큼 현실에 안주하게 되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뜻의 진행을 위해 깨어지는 아픔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언제라도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기를 힘쓸 수 있기 바랍니다(딤후 2: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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