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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살아계신 하나님 경험하기⑩ : 껍질 벗기 (왕하 5: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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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계신 하나님 경험하기⑩  : 껍질 벗기 (왕하 5:1~14)


I. “그러나”의 존재

대개의 생명체들은 벗어야만 태어날 수 있다. 
인간들은 어머니의 태를 벗어야 태어나고 병아리들은 딱딱한 계란 껍질을 벗어야 태어난다. 매미는 10년 가까이 나무껍질과 땅속에서 생활하다 7일 정도의 삶을 위해 껍질벗기 과정을 거쳐 성충이 된다. 
보리새우는 껍질벗기 과정을 통해 성장해 가는데 어릴 때는 자주 껍질을 벗고 또 쉽게 벗는다. 그러나 늙어가면서 껍질벗기가 쉽지 않다. 어느날 껍질을 벗지 못하면 그 껍질에 갇혀 죽게 된다. 

새 옷을 입기 전에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낡은 옷을 벗는 것이다. 낡은 옷을 벗지 아니하고서는 새 옷을 입을 수가 없다. 낡은 옷을 벗을 줄 알아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롭게 입혀주시는 새 옷들을 입을 수가 있다. 그래서 오늘은 살아계신 하나님 경험하기 10 번째 시간 (나아만 사건) 「껍질벗기」이다.

왕하 5:1-14절의 배경은 이스라엘이 시리아의 압제를 받고 있던 시대다. 2절엔 시라아가 이스라엘을 침략한 사건, 7절에는 이스라엘 왕이 시리아 왕의 편지를 받고 두려워하며 과민반응을 보이는 사건이 묘사되어 있다. 주전 9세기 후반에 이스라엘은 힘을 잃어가고 있었고 시리아는 영향력을 확대하며 주변 국가들을 압박하고 있었다.

본문에는 당시 주변국들을 정복하고 있던 시리아 땅에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사람의 이력서가 소개되고 있다. 성명 - 나아만; 국적 - 아람(시리아); 직업- 군인; 직책 - 왕의 군대 장관; 참모총장 내지 국방장관쯤 되는 사람이다; 특기사항 - 왕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 큰 용사. 그러나 그의 신상명세서 건강란에는 ‘이상 있음’ ‘문제 있음’이라 적혀 있다. 곧 나병환자라.

아무튼 나아만은 부귀영화와 온 국민들의 경의와 존경을 누리고 살았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나아만의 이력에 대한 거창한 소개 다음에 단 한마디를 덧붙이고 있다. “그러나 그는 나병환자더라” 
나아만은 큰 용사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지만 어느 날 심상찮은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몸이 곪고 썩어 들어가기 시작하고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제는 감출 수도 덮을 수도 없게 되었다. “나병환자더라” - 사람들이 흔히 지니고 사는 약점 중의 하나가 아니다. 인생자체를 무너뜨리는 치명적인 약점일 수 있다. 모든 삶의 희망을 꺾어 버릴 수 있는 결함일 수 있다. 이제 그는 지금까지 누리던 모든 부귀영화와 권세를 내려놓고 예편하여 세상 구석진 곳에 숨어살아야 할 처지에 놓여 있다.

이런 상황 가운데 기쁜 소식이 나아만에게 전해진다. 그 집에 포로로 잡혀와 집안 일을 돕고 있는 소녀가 있었는데 우리 주인을 우리 고향 사마리아에 보내시면 거기에서 선지자를 만나게 될 것이고 그 분을 만날 수만 있으면 병을 고칠 수가 있을 것이라는 얘기였다. 나아만은 자기 왕(벤 하닷 II)을 만나 허락을 받고 왕의 친서를 들고 이스라엘 왕을 찾아간다. 어렵사리 엘리사를 만나긴 했지만 종 게하시가 나와서 요단강 물에 들어가서 일곱 번 목욕을 하라고 한다. 여러 가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아무튼 강에 풍덩 풍덩 들어갔다 나왔더니 깨끗하게 나음을 얻었다는 해피엔딩으로 본문은 막을 내린다.

그러나 문둥병자더라! 
인생은 ‘그러나’의 존재이다. 화려한 듯 하지만 썩은 냄새가 그 속에 도사려있다. 지혜로운 듯 하지만 가장 소중한 것을 알지 못하고 허둥대며 살아간다. 온전한 듯 하지만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 이것이 바로 나아만의 문제였고 나의 문제요 너의 문제이다.
“큰 용사였다. 그러나 나병환자더라” 이것은 오늘 우리의 실존이다.

여기에 현대인들의 아픔이 있다. 과학이 발달하고 물질문명이 극에 달하고 있다. 의약이 발달해서 게놈지도가 완성되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치병, 난치병은 그 수를 더해가고 있다.

화려해 보이나 때로 속은 썩어 있다. 행복해 보이나 거짓된 웃음일 수 있다. 절망의 불치병, 좌절의 암덩어리, 간경화보다 더욱 심각한 심령의 경화, 마음 문 꽁꽁 닫아 걸고 아무도 용납해 주지 못하고 누구도 진정으로 만남을 가지지 못하고 홀로 외롭고 고독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 상처를 주고 받으며 앞서 받은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또 다른 상처를 받으며 오늘을 살아가는 이 시대, 바로 그 현대인들 아닌가? 

내 힘과 결단으로 자를 수 없는 무력한 자신에 대한 배신감! 바로 이 ‘그러나’의 존재가 인간이다.


II. 껍질 벗기

“그러나”의 아픔 앞에 - 
어떻게 존재적인 변화가 가능할까? 본문은 한 마디로 말씀하고 있다. 
- 껍질을 벗어라. 하나님 앞에서 껍질을 벗어라.

내가 어릴 때 즐겨 찾던 외가댁 뒷산에는 밤나무 숲이 있었다. 돌을 던져서 알밤을 딴다. 그러면 쭈삣쭈삣 찌르는 가시껍질을 돌멩이나 막대기로 비벼서 겨우 까고 나면 딱딱한 알밤이 나온다. 어금니로 딱딱한 껍질을 벗기면 텁텁한 비늘이 나온다. 그것을 다 벗기고 나면 고소한 알밤이 나온다.

① 껍질을 벗어라! 이것은 나아만이 나병을 고치기까지 극복해야 될 과정이었다. 
② 껍질을 벗어라! 이것은 한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서기까지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③ 껍질을 벗어라! 이것은 우리가 은혜 받기까지 걸어가야 할 길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나고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아름다운 공동체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껍질을 벗어야 하는 것이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관계에 들어갈 수 있고 성도들과의 아름다운 교제, 코이노니아의 관계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


III. 지위의 껍질

어떤 껍질이 있을까? 첫 번째 지위의 껍질이다.


어느 교회에 권위 있기로 소문난 목사님이 계셨다. 예배가 시작되었는데 목사님의 아랫배가 아파 오기 시작했다. 참으려고 애를 썼지만 참을 수가 없었다. 목사님은 성도들에게 5분간만 화장실을 다녀오겠다고 양해를 구했다. 볼 일을 마치고 목사님이 다시 강단에 올라왔을 때 성도들이 마구 웃고 있었다. 이상해서 목사님이 물었다. “아니 여러분! 양해를 구하고 갔다 왔는데 이렇게 웃으면 어떡합니까?” 그러자 집사님 한 분이 말했다. 
“목사님! 다음에 화장실에 가실 때는 핀 마이크를 뽑아 놓고 가세요!” 

목사도 화장실 간다. 서로 피조물인 인간임을 인정하고 살아야 한다. 

나아만은 엘리사 선지자를 만나러 오면서 은 십 달란트, 금 육 천개, 의복 열 벌을 싣고 왕의 친서를 손에 들고 거대한 껍질부대를 거느리고 왔다. 현시가로 계산해 보니 약10억 에 달하는 돈이었다. 자신의 이력과 명함과 직분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것이다.

과연 병 고치러 오는 사람이 이런 거창한 인간적인 껍질이 필요했을까? 우리의 이력서가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가? 내가 이 만큼 오래 믿었는데, 내게 이만한 직분이 있는데, 내게 이만한 사회적 지위가 있는데, 이만큼 배울만큼 배웠는데. 이렇게 예수를 믿고서도 교회 안에서도 전혀 변화되지 못한 인간적인 방법과 자기과시가 활개를 치고 있지는 않는지? 나아만의 얼굴이 바로 오늘 나의 얼굴, 그 나아만의 얼굴은 나만, 나만, 나만을 주장하는 나만의 얼굴은 아닐까?

지금 단호히 선언하고 주님을 만나자. 하나님 앞에 내세울 것 아무것도 없다. 내 이력서 가지고 하나님 만나는 것 아니다. 내 공로 아니다. 내 자격 아니다. 하나님 앞에는 용사가 있을 수 없다. 신앙생활에 계급장이 있을 수 없다. 수레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 아니다. 훈장 달고 가는 것 아니다. 거창한 옷 벗어 던질 때 하나님은 나를 만나 주신다. 단호하게 선언하자. 빈손 들고 벗은 몸으로 나아가야 한다. 나아만이 누구입니까? 바로 내가 나아만은 아닐까? 

♪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 이때 하나님은 나를 만나 주신다. 

옛날에 내가 섬기던 교회에 항상 화려한 옷차림으로 교회에 오시는 한 여성도가 있었다. 손가락에는 언제나 비싼 보석반지가 끼워져 있었고 얼굴에는 아주 우아한 웃음이 있었다. 그런데 그 곁에는 아무도 가까이 가는 사람이 없었다. 늘 외로운 신앙생활을 한다. 어떤 작은 모임에서 진지한 성경공부와 기도 시간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은혜를 받고 자신을 고백하기 시작했다. 한국에 주둔하던 미군과 사는 일명 양색시였다. 당시엔 이런 사람들에 대한 선입견이 있던 때였다. 그가 눈물을 흘리며 자기 자신을 그대로 드러낼 때에 거기에 모였던 모든 사람들이 그분의 손을 붙들고 함께 기도해 주었고 친구로 맞이해 주었다. 

사탄은 우리를 속인다. 허물을 그대로 드러내려 할 때에 사탄은 우리를 속인다. 너의 약점이 드러나면 너는 망한다고 얘기한다. 그러나 공동체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허물을 있는 모습 그대로 드러내면 하나님의 사랑은 그 모든 것을 넉넉히 덮고도 남음이 있다.

사람마다 인생껍질들이 붙어 있다. 
사업은 크게 성공하여 큰 부자가 되었는데 인격이 파탄난 사람들, 친구를 배신한 인간관계가 다 깨어져 박살이 난 사람들, 공부는 많이 하여 지식의 용사가 되었는데 삶의 목표를 알지 못하여 허둥대며 살아가는 사람들, 교회는 크게 성장하였으나 사람을 살리고 사람을 키우는 아무런 준비가 되지 못한 교회들, 오래 예수를 믿고 직분으로는 용사가 되었으나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는 준비를 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자기만의 바벨탑을 쌓는 사람들이 우리주변에 얼마나 많이 있는가? 이제 늦지 않았다. 이제부터라도 껍질 벗기를 시작하자.

우리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는데 걸림돌이 바로 인생껍질들이다. 
용사가 된 자신의 명함과 껍질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일을 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곧 껍질 벗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위선 가지고, 가식 가지고, 껍질을 가지고 만날 수가 없다. 세상에서 쓰고 살던 껍질, 이곳에서만이라도 벗어던지고 예배하자. 껍질 깊은 곳 속에 진실이 있고 은혜가 있고 축복이 있다.

우리 교회에 처음 나오기 시작한 성도가 있는데 예배 첫 시간부터 큰 감동을 받았다. 그런데 그것만 가지고는 왠지 하나님을 가까이에서 만날 수가 없었다. 하나님은 저 먼 곳에 계신 분으로만 느껴졌다. 주변사람들의 권유로 남성 목장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모이는 사람들이 하나 같이 잘나 보였고 똑똑해 보였다. 왠지 내가 올 자리가 아니구나 싶었다. 그러나 한 번 모이고 두 번 모이는 사이에 그렇게 잘나 보이고 똑똑해 보이는 사람들이 처음 온 자신, 세상에서 잘나가지 못하는 자기를 섬겨주지 못해서 안달이었다. 어떻게 하든지 돕겠다고 모든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 아닌가? 서로 사랑하겠다고 앞 다투어 나서는 것 아닌가? 그리고 서로들 낮아지기를 자처하고 있었다. ‘여기가 예수 믿는 진정한 교회구나! 주님이 기뻐하시는 참된 공동체이구나!’ 그들 속에 임재해 계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었다. 그 작은 공동체 속에 사랑으로 역사하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껍질을 벗어 던지면 사람이 보인다. 껍질을 벗어 던지면 내가 변화될 수 있다. 껍질을 벗어 던지면 내가 다른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게 된다.


IV. 내 생각의 껍질

나아만의 두 번째 껍질이 11절에 나온다.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내 생각에는” 내 생각에는... 자기 멋대로 상상하고 계획했던 거창한 프로젝트를 포기해야만 하나님을 만난다. 나의 Kingdom - 나의 왕국이 죽어야 하나님의 왕국이 내 안에 건설될 수가 있다.

나아만은 그 당시 종교적으로 널리 행해졌던 “의식을 통한 치유”를 기대했지만 엘리사는 “말씀에 순종”이라는 새로운 방법을 사용하였다. 

11절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라고 기록하고 있다. “흔들어”로 번역된 용어 “헤니프”는 “올리다”의 뜻이 있으며 “올리는 제사”로 번역 될 수 있다. 나아만이 사용한 언어를 살펴보면 나아만이 기대한 것은 치유를 위한 종교적 의식이었다.

나아만 장군은 수많은 군중이 모여 열병과 분열을 하고 환영식이 있은 후 촛불을 켜고 성수를 떠놓은 제단 앞에서 거룩한 옷을 입고 선지자가 경건하게 찬송을 부르며 몸에 손을 얹고 축복하는 시리아 제국 참모총장의 체면과 체통에 맞는 엄숙한 예식과 대우를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기대가 무너지자 그는 몹시 분노했고 감정이 상했다.

우리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터무니없는 이유 때문에 신앙을 버리고 있는가? 그들은 생각하기를 하나님이 혹은 교회가 자신에게 이러 이러한 방법으로 대해주고 역사해 주기를 기대하고 찾아온다. 때로는 기적으로, 때로는 하늘의 음성으로, 때로는 흠 없는 성직자에 의해서, 때로는 품위와 체통에 맞게끔...

왜 헛된 껍질에 관심을 두는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오는 이유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의 주된 관심사가 무엇인가? 
지금 나아만이 들어야 할 하나님의 참된 말씀, 음성이 무엇이었나? 
“너는 이렇게 이렇게 하면 병이 나을 수 있다” “요단강 물에 몸을 던져 씻으면 네 문둥병이 나을 것이다” 이 소리를 듣고 싶어야 되는 것 아닌가?

“네 죄는 이렇게 하면 사함 받을 수 있느니라” “너의 인생 문제는 하나님을 만나면 해결될 수 있느니라” “네 육체의 질병과 마음의 고통과 인생의 온갖 문제들이 진정으로 주님을 만나면 해결될 수 있느니라” “예수님을 만나야 하느니라” 이 같은 메시지를 듣기 위해서 교회에 오는 것 아닌가? 

“존경하는 폐하 어서 오십시오” 이 아부의 소리를 나아만은 듣고 싶어했다. 도대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11절) 
이 얼마나 잘못된 관심인가?

이 잘못된 나아만의 관심은 여기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엘리사 - 곧 사람에게 깊은 관심을 두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관심 대신 인간 엘리사에게만 관심이 있었다. 

인간 엘리사가 자기를 치료해 주고 자신에게 존경을 표해 줄 것을 기대하고 찾아왔다. 그러나 엘리사가 처방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었다.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할 때에 나아만은 이 말씀을 붙들고 감격하며 울었어야 옳았을 것이다. “요단강에 씻기만 하면 네 병이 낫을 수 있다” 그 말씀을 붙들고 감사하며 감격하며 요단강 물로 달려가 몸을 던지며 하나님 앞에 반응했어야 옳았을 것 아닌가? 나아만의 시선은 오직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집중돼야 옳았을 것이다. 주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 아멘 주 예수여 믿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고 살다가 상처받고 실망하여 오늘도 진리의 길에서 떠나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초라하고 외소한 신앙으로 남아있는 못난 사람들 - 제2 제3의 나아만들이 우리 곁에 얼마나 많이 있는가?

하나님의 축복의 자리에 임하기 위하여 때로 우리는 엘리사의 냉담한 대우를 감수해야만 한다. 우리에게는 뜨거운 환경만 필요한 것이 아니고 찬바람이 필요할 때가 있다. 뜨거운 여름날 무럭무럭 자란 곡식은 가을 찬바람에 알곡으로 영글어진다. 하나님은 뜨거운 여름만 아니고 차가운 겨울도 주신다. 햇빛만 필요한 것이 아니고 눈도 비도 필요하다. 

예수님은 가나안 여인이 찾아와서 귀신들린 딸을 고쳐주길 원했을 때 그 여인을 개 취급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때로 그런 대접까지도 감수하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여인의 고백을 보라. “하나님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좋사오니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만 있고 주님을 만날 수만 있다면 개가 되어도 좋습니다.”

욥은 고백했다. “하나님이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의뢰하리라”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실까? 교회가 무엇이고 신앙이 무엇인가? 내 생각을 확인하는 자리더란 말인가?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거룩한 생각과 뜻을 발견하는 자리 아니었는가? 나의 청사진, 내 고집을 확장하는 자리였는가?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만들어 놓으신 아름다운 계획과 청사진을 확인하는 자리가 아니었는가? 

옳다. 왜? 하나님과 엘리사 선지자는 장군 나아만이 아닌 인간 나아만과 볼일이 있었던 것이다. 겉의 나병보다 더욱 심각한 속의 교만을 치료하기 원하셨던 것이다. 나아만 장군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기 위해서는 곧은 목을 꺾고 위엄이 가득한 복장을 벗어 던지고 승전국의 장군으로서가 아니라, 한 죄인 된 인간의 자세로 나아오기를 기다리셨다. 

별이 번쩍이던 모자도 벗어 던지고 계급장과 훈장도 내려놓고 흙탕물 속에 뛰어 들어 갔다가 착 달라붙은 머리에 초라한 복장에 마치 물에 빠진 새앙쥐 같은 인간 나아만을 만나기를 원하신다. 이것을 위해 여호와께서는 사랑하는 자 나아만을 문둥병으로 괴롭혔다. 지금까지 뒤집어쓰고 살던 껍질을 벗기는 역사를 시작하신 것이다.

인생을 살아가던 어느 날 문득 당신의 환경에 아픔이 찾아왔는가? 막다른 골목에 서서 쩔쩔매며 당황했던 경험이 있는가? 지금도 당신의 삶의 환경이 모진 고통과 아픔 가운데 있는 분이 있는가? 하나님의 손길이 지금 당신을 어루만지고 계심을 믿길 바란다. 나의 덕지덕지 붙어있는 껍질을 벗기는 하나님에 사랑의 손길임을 믿길 바란다. 하나님의 손길을 거절하지 말라. 나를 다듬기를 원하시는 그 사랑의 손길을 외면하지 말라. 아파도 있는 모습 그대로 내어 놓으라. 주님 벗지요. 껍질을 벗으라 그러시면 벗지요. 주님 앞에 내 모습 그대로 달려 나오시기를 바란다. 

왜?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은 계급장으로 꾸며진 나아만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 앞에 선 어린아이 같은 신앙인이기 때문이다. 승리자 군대장관이 아닌 실패자 인간임을 발견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껍질을 벗고 나면 나 자신이 한낱 피조물임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껍질을 벗고 나면 허물 투성이, 모순 투성이, 한낱 약한 인간임을 깨달아 가기 때문이다. 그때 하나님이 나를 붙들어 주신다. 그때 하나님이 나를 도와 주기 시작하신다. 껍질을 벗으라! 장군이 아니라 어린아이가 되라! 

♪ 어린아이 같은 우리 미련하고 약하나 주의 손에 이끌리어 생명길로 가겠네 
한 걸음 한 걸음 주 예수와 함께 날마다 날마다 우리는 걷겠네


V. 요단강에 들어가라

세 번째 나아만이 부딪힌 문제는 12절,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요단강에 들어가라” 이 말은 선입견의 껍질, 경험의 껍질을 벗어던지라고 하는 것이다. 

당시 다메섹의 아바나강은 “황금의 강”으로 불렸다. 강은 레바논 산맥에서 흘러내리는 최고 수질의 물이었다. 자기 조국에 그런 훌륭한 강이 있고, 온천탕도 있고 유황천도 있고 사우나탕도 있는데 왜 하필이면 흙탕물 요단강 물이어야 하느냐는 것이다. 이는 수질의 문내가 아니라 누가 진정한 신, 능력의 신인가 하는 문제이고 순종의 문제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는 하되 전적인 순종이 아닌 부분 순종이 내 이성과 사람들의 이목에 맞게 할 수 있지 않겠냐는 것이다.

‘순종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만큼은 내 생각이 조금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온전히 순종하겠습니다. 그러나 물질 만큼은 내 생각이 조금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순종하겠습니다. 교회생활 봉사생활만큼은 내 생각이 조금 있습니다. 순종하겠습니다. 내 자녀들 교육 문제, 내 자식의 결혼문제, 내 자식의 장래문제만큼은 내 생각이 조금 있습니다.’

알밤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찌르는 가시 껍질도 벗기고 딱딱한 껍질과 텁텁한 비늘 껍질까지 벗겨야 한다. 가시 껍질 딱딱한 껍질 벗어 던지고 폭이 넓어 보이고 가슴이 열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까이 가서 보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맛을 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직도 비늘 껍질이 그 속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온전한 순종이 있기까지 그 순종은 참된 순종이 아니다. 부분적인 순종 - 체통과 품위에 맞는 순종 - 이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는 흉내를 내는 것이지 진정한 순종이 아니다. ‘내가 말씀대로 순종하다가 죽어도 좋습니다.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 바르발강이 아니라 요당강에 내 몸을 던지겠습니다.’ 이렇게 깨끗이 순종할 때에 말씀이 우리의 삶속에 기적처럼 역사를 일으키게 될 것이다. 말씀 앞에 깨끗이 우리 자신을 집어 던질 때에 말씀이 우리 삶을 변화시키기 시작하고 그 말씀이 바로 나의 말씀으로 다가오게 될 것이다. 알량한 순종의 단계를 벗어 던지라! 

요단강에 들어갔던 나아만은 흙탕물에 옷이 꾀죄죄하게 되었다. 흙탕물에 젖은 옷은 진흙탕에 뒹군 훈련병을 방불케 했다. 장군의 체통은 간곳이 없고 하늘을 찌르던 위신은 땅에 떨어졌다.

내 위신이 문내가 아니다. 내 사회적인 지위가 문내가 아니다. 은혜 받을 수 있는 길이 있다고 하면, 하나님 만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하면, 내가 변화되는 길이 있다고 하면 모든 것을 집어 던지겠다. 뽕나무에 올라가겠다. 삭개오의 심정 아니겠는가? 군중의 뒷발에 차이면서도 “나사렛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한 소경 바디메오의 절규가 연상되지 않는가?

주님은 모든 껍질 벗어 던지고 알몸이 된 나아만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때 주님이 찾아오셨다. 내가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내가 너를 만나주리라. 내가 너를 치료하리라. 나아만의 나병이 깨끗하게 될지어다. 앉은뱅이 신앙이 일어날지어다. 달리다굼. 네 인생의 모든 문내가 이 시간에 해결될지어다. 할렐루야! 딱딱한 껍질 속에 갇혀있던 너희는 자유함을 얻을지어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할렐루야!

VI. 일곱 번까지

마지막으로 실천과정에서 오는 회의와 유혹이 있었다.

나아만 장군은 한번 물에 풍덩 뛰어 들어갔다가 병이 나았는지 얼굴을 만져본다. 그러나 얼굴은 쭈굴쭈굴 그대로 있다. 두 번째 물속에 들어갔다 나와서 손등을 닦아 본다. 진물이 그대로 흐른다. 세 번 물속에 들어갔다 나와서 이번에도 강가에 있는 부하들에게 물어본다. “내 얼굴이 어떠한가? 낫는 기미가 보이는가?” “폐하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아직까지는 그대로이다.” 네 번 다섯 번 초라해지기 시작한다. 여섯 번째 풍덩 들어갔다가 뛰쳐나왔다. 병이 나을 것 같으면 지금쯤 껍질이라도 벗겨져야 되지 않는가? 무서운 의심이 몰아쳐 온다. “네 이놈들, 내가 진작 돌아가자고 얘기하지 않더냐?” 실망으로 온통 마음이 흔들리고 의심이 찾아온다. 포기의 마음이 용솟음친다.

“각하 일곱 번 씻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일곱 번은 완전 숫자다. 나을 때까지 뛰어들라고 하는 것이다. 좋다. 이 요단강에서 탈진하여 죽을 때까지 해 보리라. 죽으면 죽으리라. 일곱 번째 물속에 뛰어 들어간다. “주여 믿습니다. 그러나 낫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이제는 주를 찬양하리다.” 생명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니 오늘 생명을 거둔다 할지라도 할렐루야 찬송하며 나는 죽어갈 수 있다. 병을 허락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니 이제는 낫게하지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의 주권을 찬송하겠습니다. 할렐루야!

보라. 
14절의 “잠그다”(타발)라는 용어는 주로 제사의식이나 정결의식에서 피나 물에 담그는 행동을 표현하는 단어이다. “깨끗하다”(타하르)라는 용어도 제사의식이나 정결의식에서 사용되는 단어이다. 

여기 “깨끗하다”라는 것은 단순히 피부의 깨끗함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의 일원으로 들어온다는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 17절에서 나아만이 뭐라고 말하는가? “이제부터는 종이 번제물과 다른 희생제사를 여호와 외 다른 신에게는 드리지 아니하고 다만 여호와께 드리겠나이다”

일곱 번째 뛰어 들어갔다. 얼굴에 묻은 땀방울을 훔치며 엉금엉금 강둑을 기어오른다. 겹겹이 쌓여있던 인생의 껍질들이 남김없이 벗겨지는 순간이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이그러지고 문드러진 나아만 장군의 피부가 어린아이처럼 깨끗하게 되었다. 나아만의 껍질이 벗어졌다. 피부의 껍질이 벗겨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불신앙의 껍질이 벗겨졌습니다.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할렐루야. 

본문에는 살이 깨끗하게 된다는 말이 두 번 나온다. 
10절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14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여기서 14절 말씀 “어린아이”라는 말이 추가로 들어간 것은 나아만의 믿음이 어린아이의 믿음 같았다는 말이다. “어린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다”에서 “회복되다”의 원어는 “슈브”로 “돌아오다”는 뜻을 가진 말이다. 그런데 이 “슈브”라는 단어에는 “영적인 회복, 곧 하나님께 돌아오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실제 그의 육적 회복은 곧 영적 회심으로 이어져서 본문 다음에는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동쪽에 작은 섬 하나가 있다. 일찍이 이 섬은 중형수들을 수감하는 교도소로 이용되었다. 이 섬에서 육지까지의 거리는 육안으로도 빤히 보일 정도로 먼 거리는 아니었다. 그래서 많은 죄수들이 감사의 눈을 피해 교도소를 탈출하고 바다로 뛰어 들어 헤엄쳐 도망치곤 했다. 그러나 도망자마다 섬을 굽이도는 급류 때문에 단 한명도 탈출하지 못했다. 탈출에 성공한 사람은 지금까지 단 한명도 없었다. 교도소 문에 그렇게 씌어져 있고 해변가에 이런 푯말이 세겨져 있다. “당신이 이 섬에서 나갈 수 있는 길은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변화되는 것이다.” 내가 변하면 세상이 변한다. 내가 자유를 누리고 은혜받는 길은 내가 변하는 길 외에 어떤 길도 없다. 이 얼마나 당연한 진리인가? 

영국교회의 거성 트루나이젠은 일찍부터 그런 기도를 했다. 
“하나님 나로 하여금 세상을 바꾸는 존재로 살아가게 하시옵소서.” 그래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바꿔 보려고 노력을 했다. 그러나 그는 세상을 바꿀 수가 없었다. 아무도 바꿀 수가 없었다. 마흔이 넘어서면서 그는 기도의 제목을 바꾸기 시작했다. “하나님 지금까지 내가 하나님께 기도하던 기도의 제목을 포기합니다. 나로 하여금 세상을 바꾸는 인물이 되게 하여주시라는 기도의 제목을 포기합니다. 오늘부터 기도를 바꾸겠습니다. 하나님 나를 바꾸어 주시옵소서.”

이 날부터 나는 세상을 바꾸는 인물로 쓰임받기 시작한다. 내가 변하면 세상이 변한다. 내가 변하면 가정이 변한다. 부모가 변하면 자식이 변한다. 내가 변하면 공동체가 변화된다. 성도들이 변하면 교회가 변화된다. 한국교회가 변하면 이 민족, 이 역사가 변화된다.(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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