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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적 진단을 받으라 (롬 3: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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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진단을 받으라 (롬 3:9~18)


제가 아는 어떤 권사님은 늘 소화에 문제가 생겨서 고통을 당했습니다. 서울 시내에 내로라하는 병원들을 돌아가면서 진단을 받아보았지만 뭐 이렇다 할 병이 없다는 것입니다. 의사들의 처방을 받고 약을 쓰고 또 그 지시대로 하지만 차도가 없었습니다. 밤이면 가족들이 다 잠든 사이에 자신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고통을 당하는 일이 수두룩했습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니까 이제 가족들은 ‘저 사람은 의례 그러려니, 뭔지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려니.’ 하고 인정을 하고 말았습니다. 어떤 때는 너무 고통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어서 큰 병원에 가서 정밀진단을 받았습니다. 이런 저런 검사를 해도 병명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 의사가 의구심을 가지고 지금까지 안 해본 검사를 좀 해 보자고 이야기를 해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 검사를 했더니 췌장암이 발견되었습니다. 소화가 안 되니 위 검사, 간 검사 안 해본 것이 없었지만 설마 췌장암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것입니다. 그 의사의 말은 절망적이었습니다. 너무 병을 많이 키웠기 때문에 수술을 해도 가능성이 없다고 했습니다. 몇 주후 그래도 조금의 희망만 있으면 수술을 하자고 해서 의사의 허락을 받고 수술을 하였지만 수술 후 그 어려운 고통을 이겨내질 못했습니다. 먹지를 못하고 하니까 결국 수술이 끝나고 두 달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세상 떠나기 한 3일 전에 제가 가서 뵈었더니 얼마나 수척한 지 뼈만 남았습니다. 앙상한 뼈만 남았습니다. 너무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 여러분! 왜 이렇게 비참한 결과가 오게 되었습니까? 잘못된 진단 때문입니다. 오진 때문입니다. 의사들은 이러니저러니 이야기를 했지만 시간만 흐를 뿐 병만 키워왔던 것입니다. 병을 치료하는 첫 번째 길은 정확한 진단을 받는 것입니다. 병에 대한 철저한 진단, 그리고 거기에 대한 처방이 따라올 때 병을 고칠 수 있는 것입니다. 종종 이런 이야기를 듣습니다. 배 아프다고 병원에 갔더니 맹장이라고 해서 맹장수술부터 했는데 알고 보니 맹장이 문제가 아니어서 엉뚱한 맹장을 잘라내서 고통을 당하는 경우도 가끔씩 있다고 합니다. 정확한 진단은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육체적 질병의 진단보다 더 중요한 진단이 있습니다. 영적인 질병의 진단입니다. 정확한 진단만이 올바른 처방을 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은 마치 하나님께서 청진기를 대시고 사람의 구석구석을 살피시는 모습을 우리가 상상해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인간의 모습을 살피신 후에 마지막 결론을 말씀하십니다. “인간은 죄의 아래에 있다. 인간은 죄인이다.” 

본문 9절과 10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봅니다.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죄의 보편성에 대해서 성경은 선언하고 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류는 다 죄의 영향력 안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죄에 포로가 되어 있습니다. 전적으로 타락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인간에게 죄가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 죄의 결과가 인간에게 타락을 가져왔습니다. 인간은 이제 죄의 유전성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죄의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로마서 5장 12절에 보니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음으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죄의 유전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선하다는 성선설의 입장보다는, 태어나면서부터 악의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성악설의 입장을 택합니다.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닙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죄인으로 이 땅에 출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시편 51편에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그 오래된 구약시대에 다윗은 이미 자신이 죄인으로 출생하였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 속에는 끊임없는 죄의 추함과 본성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이 죄인이라는 말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은 먼저는 유대인들을 향해서 가리켜서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율법을 자신들의 전유물처럼 여기면서 교만과 특권의식, 우월감에 사로잡혀 사는 유대인들을 향해서 “너희도 예외가 아니다. 너희에게도 심판이 있다. 저희도 죄인이다.”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오늘의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문제는 정말 내 자신이 나를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생각입니까? ‘정말 내가 죄인인가?’ 어떤 분들은 죄인이라고 하면 입으로는 그렇다고 하지만 ‘내가 뭐 남의 것을 도둑질 했나?, 사람을 죽였나? 내가 왜 죄인이야.’ 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와서 제일 듣기 싫은 말이 죄라는 말,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왜 목사님은 만날 죄, 죄인이라고 하느냐고 말합니다. 그래서 어떤 교회성장학자는 이런 말을 합니다. “교회가 성장하려면 죄에 대해서 말하지 마십시오. 죄인이라는 말을 교인들에게 쓰지 마십시오. 교인들이 싫어합니다.” 여러분!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죄인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또 어떤 분은 죄인은 죄인이지만 나는 그래도 이 사람보다는 좀 나은 죄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옆에 있는 집사님은 나보다 훨씬 죄를 많이 지었다고. 나는 이 사람에 비하면 되게 착하다고. 나는 어렸을 적 문방구에 가서 고무지우개 하나 훔친 적 없다고.’ 이렇게 자위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죄인입니다. 파스칼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의인이나 위인이나 성자가 존재한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이 땅에는 오직 한 가지 종류의 사람들만이 존재한다. 그들은 죄인일 뿐이다.” 누구든지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예외가 없습니다. 

어거스틴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죄인이 있는데 하나는 내가 죄인이라고 인정하는 죄인이 있고, 다른 하나는 내가 의인이라고 하는 죄인이 있다.” 죄인은 죄인이지만 자신을 의인처럼 여긴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말을 입에서 습관처럼 하지만 사실은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니까 그렇긴 하지만 ‘나는 이 사람보다는 낫다.’하고 자신을 위로합니다.

재판정에 한 피고인이 붙들려 왔습니다. 판사가 그의 기록을 보고 이제 그에게 어떤 형량을 선고하려고 준비했습니다. 피고인이 판사에게 선처를 바랍니다. “판사님!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제가 이번에 초범이니까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제가 딸린 자식들도 있고, 두 살짜리 어린 아이도 있고, 제가 먹여 살릴 가족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번 한 번만 선처해 주시면 제가 다음부터는 절대 안 그러겠습니다.” 하고 죽을죄를 지었다고 읍소했습니다. 그랬더니 판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당신 죄는 죽을죄는 아닙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교도소에 가서 한 6개월만 반성하고 오십시오.” 그랬더니 이 사람이 안색이 싹 바뀌었습니다. 불평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6개월이나 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죄인이라는 말을 하지만 ‘진짜 내가 죄인인가?’, 여기에는 동의하지 않는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할 때 보면 ‘나 같은 죄인, 말할 수 없는 죄인, 벌레만도 못한 죄인’이라고 고백하지만, 또 그렇게 기도하지만 누군가 자신의 허물과 흠을 지적하면 안색이 바뀝니다. 왜 그럴까요?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는 죄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자! 여러분! 죄에는 특성이 있습니다. 오늘 성경은 사도바울이 죄인들이 갖는, 타락한 인간이 갖는 죄의 특성에 관해서 말씀을 해 주고 있습니다.

먼저는 전적인 무능입니다. 인간은 범죄의 결과로 무능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본문 11절, 12절 말씀을 읽어봅니다.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전적인 무능, 무지입니다. 깨닫는 자가 없다, 진리를 깨닫는 자가 없습니다. 우둔하고 무지하기 때문에, 죄가 그를 무지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진리를 바로 깨닫지 못합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계속 말씀하시고 경고하시지만 그들은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그들의 무지함 때문입니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것 같지만 사실은 우상을 찾고 있습니다. 진정한 창조주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 심판의 하나님이 아니라 복 주시는 하나님만 찾고 있습니다. 내가 불의함에도 불구하고 나를 징계하지 않고 무조건 나를 받아주시는 그런 복 주시는 하나님만 찾고 있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보지 못하고 하나님 손에 들려 있는 사탕만 보고 있습니다. 진정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있느냐?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라고 했습니다. 타락한 인간들은 무익한 존재들이 되었습니다. 이 무익이라는 말은 기차가 레일 위를 지나가다 탈선해서 엉뚱한 길로 가는 것이 바로 무익입니다. 의미 없고 허망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마치 냉장고에 우유를 보관했는데 그 우유가 쉬어서 먹을 수 없게 된 쉬어버린 우유와 같은 무익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무능합니다. 또한 “선을 행하는 자도 없다.”라고 했습니다. TV나 신문을 보면 불우이웃돕기도 하고 좋은 일을 하는 사람도 많이 있지만 정말 그 중심의 동기가 순수하냐를 살펴보면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과시하기 위해서, 인정받기 위해서 그렇게 할 뿐이지 진실로 그 마음속에 긍휼의 마음이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을 바로 찾지도 못하는 전적으로 무능하고 무지한 존재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죄를 지은 인간의 특성은 전적인 부패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부패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본문 13절부터 15절까지의 말씀을 읽어봅니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목구멍은 다 열려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그 속에서 더러운 악을 끊임없이 쏟아놓는다는 것입니다. 쉬지 않는 악입니다. 인간들은 깨어있을 때마다 악을 만들어내는 악의 제조 공장입니다. 고대 근동이나 중동에서는 우리처럼 사람이 죽으면 그 시신을 땅에 파고 매장하는 것이 아니라 비어있는 동굴 속에 시신을 넣고 돌문을 막습니다. 그것이 무덤인 것입니다. 그래서 회칠한 무덤이라는 것은 그 무덤 앞에 막은 돌에다가 회를 칠해서 구별해 놓은 것을 말합니다. 속에는 시신이 썩고 있지만 밖에는 그럴싸하게 회를 칠해놓은 모습을 주님께서는 바리새인을 가리키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을 장사지내고 돌문을 닫아놓았는데 가끔 탈주범, 도굴범들에 의해서 또 지진에 의해서 바위가 굴러지는 법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 동굴 입구가 열려집니다. 그러면 시신 썩는 냄새가 코를 찌릅니다. 마치 그것이 인간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부패하기 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합니다. 어느 정도입니까? 

오늘 성경에서는 “혀로는 속임이요”라고 말합니다.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입을 열면 늘 거짓말을 상습적으로 말합니다. 오죽했으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한 번은 거짓말대회가 열렸는데 누가 일등을 했을까요? 자기는 태어나면서부터 한 번도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고 말한 사람이 일등을 했다고 합니다. 인간들은 이런 저런 이유로 거짓말을 많이 합니다. 그 속에 악의 본성이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혀로는 속이는 것입니다. 또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습니다. 유순한 말이나 온유한 말, 격려의 말보다는 독사처럼 공격합니다. 그래서 상처를 주고 고통을 주고 찌르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참 부드러운 말을 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어떤 엄마가 아이를 데리고 교회에 가려고 출발했습니다. 시간이 늦었는데 아이가 자꾸 딴 짓을 합니다. 다른 것을 보고 위험한 행동을 하고 자꾸 장난치고 하니 엄마가 화가 나서 자신도 모르게 아이에게 하는 말이 “야 이놈아! 지랄 좀 그만해.” 참 좋은 말이 아닙니다. 그리고는 아이를 겨우 달래서 겨우 교회 시간에 맞게 왔습니다. 마침 목사님이 교회 앞에서 교인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이가 오니 쓰다듬어 주면서 아이에게 말합니다. “얘야! 집에서 교회까지 오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렸니?” 이 아이가 뭐라고 대답했을까요? “지랄하고 오면 20분 걸리고요, 지랄 안 하고 오면 10분 걸려요.” 엄마가 한 말을 금방 배우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참 우리 입에서 선한 말, 부드러운 말 보다는 이런 안 좋은 말을 쓸 때가 많이 있습니다.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습니다. 찌르는 가시가 있습니다. 칭찬은 하고 격려는 하지만 그 마음속에 독이 있습니다.

여러분! 누가 잘 되면 진짜 기뻐서 잘 되었다고 기뻐합니까? 속은 부글부글 끓지만 겉으로는 “아이고, 너무 좋다. 너무 잘 되었다. 아들이 잘 되어서 얼마나 좋아?” 속은 질투가 나서 죽을 지경입니다. 꼭 떨어졌으면 좋겠는데, 망했으면 좋겠는데, 잘 된 것이 속상한데 겉으로는 그럴 수 없고. 이런 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오죽했으면 사촌이 땅을 사면 왜 내 배가 아픈지 모르겠습니다. 좋아해야 하는데.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또 성경에 보니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있다”고 말합니다. 입을 열면 남을 향한 저주가 끊이지 않습니다. 중상모략과 험담과 비난의 말이 이어집니다. 앞에서는 비위를 맞춰주고 돌아서면 헐뜯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악된 본성입니다. 또한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라고 했습니다. 선한 일보다는 악한 일에 그 발이 빠릅니다. 좋은 일에는 안 갑니다. 그러나 악한 일에는 열심히 갑니다. 인간들의 본성 자체가 악한 것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전적인 부패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 마음이 부패해 있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인간들은 죄로 인해 전적인 절망에 빠져있습니다. 소망이 없습니다. 본문 16절, 17절 말씀을 읽어봅니다.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태어날 때부터 죄의 선고를 받고 태어나는 인간들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습니다. 땀 흘리고 노력하지만 그 앞에는 파멸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앞에는 고생길이 훤합니다. 늘 고생하지만 그 고생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더구나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죄가 주는 죄의 결과인 것입니다. 죄는 결국 인간을 파멸로 인도합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요 그 이후에는 심판이 온다.”고 했습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는다.”고 했습니다. 죄인 된 인간들은 결국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길은 파멸의 길이요 심판의 길인 것입니다. 땀을 흘리지만 거기에는 열매가 없습니다. 늘 고생하지만 평강이 없습니다. 전적인 절망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에게는 소망이 없습니까? 이 절망에 빠진 인간들,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들에게 한 가지 희망의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인간의 모습을 벌거벗겨놓고 보니 그 몸이 성한 곳이 없습니다. 죄로 얼룩져있고 만신창이가 되어 있습니다. 이제 인간은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새로운 희망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우리 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요?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와서 우리 죄를 자백할 때, 그리고 우리 죄를 낱낱이 주님의 십자가 앞에 고백할 때 우리는 주님의 보혈로 씻음 받을 수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만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실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본문 9절을 읽었지만 인간은 다 죄 아래 있다고 말합니다. 그 죄라는 말을 복수로 죄들이라고 쓴다면 21가지 죄의 목록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 죄를 단수로 쓸 때는 그 죄의 실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인간 속에 그 죄를 계속 충동질하는 일으키는 것이 사탄마귀, 악령의 세력입니다. 사탄마귀, 악령의 세력은 계속해서 인간에게 죄를 짓도록 충동질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죄를 이기려면 죄의 실체를 이길 수 있는 전능하신 그 분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인간의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피 흘리셨지만 죽은 자 가운데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승리를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래서 위대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죄가 얼마나 무겁고 큰 것입니다. 이 죄 값을 치르려면 한 사람이 고통 받는 것 정도로는 안 됩니다. 한 사람이 죽어야 합니다. 그가 피를 흘려야 합니다. 그런 것으로 볼 때 우리 죄가 얼마나 큰 지 상상이 되지 않습니까? 우리는 행동으로 짓는, 결과를 가져오는 죄가 있고, 행동으로 옮기지 않고 마음으로만 짓는 죄도 있습니다. 마음으로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어도 이미 간음했다고 했습니다. 형제를 보고 라가라 하는 이미 살인한 자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죄가 너무나 크고 엄청나기 때문에 그 죄의 값을 치르기 위해서 주님은 십자가에 생명을 내어놓고 피를 흘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제 우리가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내가 죄인임을 고백하고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마치 사람들 앞에서 내 옷을 벗듯이 나아가는 것입니다. 의사 앞에 가서 옷 벗으라고 하면 부끄럽지 않습니까? 속옷만 입고 있으라고 해도 참 부끄럽습니다. 아람의 나아만이라는 장군이 있었는데 어느 날 문둥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온 몸에 진물이 흐르고 헌데가 덕지덕지 있고 아주 보기 흉학합니다. 그는 자기의 더러운 몸을 숨기기 위해서 더 아름다운 외투로 자신을 장식했습니다. 그러나 자신과 가족은 알고 있었습니다. 유대에서 온 한 계집종이 말하기를 “우리나라에 가면 엘리사라는 위대한 선지자가 있는데 그 앞에 가면 우리 주인의 병도 고칠 수 있습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부하들을 데리고 많은 선물을 가지고 엘리사를 찾아갔습니다. 

엘리사는 나아만이 왔을 때 밖에 나아보지도 않습니다.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라고 명령했습니다. 나아만은 분노했습니다. “아니, 적어도 한 나라의 장군이 오면 나와서 영접할 것이지 상처도 보지 않고 요단강에 가서 씻으라니 말이 되는가.”하고 분노하고 그냥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부관들이 “더한 일도 하겠는데 이 정도쯤이야 뭐 어렵습니까? 밑져야 본전인데 한 번 해 보시죠? 여기까지 왔는데.” 그래서 부하들의 말을 듣고 그의 화려한 외투를 벗습니다. 계급장을 떼었습니다.

그의 알몸의 모습은 처절한 문둥병자의 모습이었습니다. 마치 우리의 죄의 모습이 이 처절한 문둥병자의 모습과 같습니다. 끔찍해서 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다 근사하게 자신을 치장하고 있지만 우리는 바로 그런 죄인의 모습입니다. 그 모습으로 십자가 앞에 나오십시오. 주님 앞에 고백하십시오. “제가 죄인입니다. 제가 절망에 빠진 죄인입니다.” 이것을 고백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정한 절망감에 빠질 때 구원의 길이 있는 것입니다. 내 안에 선한 것이 없고 내 능력으로 내 죄를 해결할 길이 없기 때문에 전능하신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주님만이 이 절망에서 나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만이 나를 이 죄에서 건지실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 22절에 보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장 29절에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 그 분 앞에 나오셔야 합니다. 우리 죄의 문제를 해결 받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 죄를 고백할 때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될 줄로 믿습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너희 죄를 멀리 던져버리신다고 주님은 약속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전적으로 무능하고 전적으로 부패하고 전적으로 절망에 빠진 존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오십시오. 주님의 보혈의 강에 나를 던지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만이 우리 죄를 끊을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죄인은 죄인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죽은 자는 죽은 자에게 생명을 불어넣을 수 없습니다. 오직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참 생명을 주실 수 있고 우리의 죄를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내 마음에 영접하고 그분의 은혜의 강 앞에 내 자신을 맡김으로써 오늘 내 모든 죄가 용서받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 받는 축복의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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