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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왕이신 나의 하나님 (시 145: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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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신 나의 하나님 (시 145:1~13)


세계역사에서 중세유럽시대를 대표하는 아주 중요한 2가지 사건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카노사의 굴
욕’이고, 다른 하나는 ‘아비뇽 유수’입니다.  카노사의 굴욕은 1077년에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은 한마디
로 독일황제인 하인리히 4세가 로마 교황으로부터 파문을 당하자 눈 내리는 겨울에 카노사라는 성으로
교황을 찾아와 용서를 빈 사건입니다.  

황제가 무려 사흘 낮밤을 눈밭에서 맨발로 무릎을 꿇고 빌었다고 해서 화제가 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교황이 군주보다 우위를 수립하게 되었다고 해서 매우 의미가 있었습니다.  아비뇽 유수는 그와 반대로서 1377년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프랑스의 필립 4세는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와 대립하였습니다.  

왕은 귀족들과 국민의 지지를 받아 교황에게 도전합니다.  
결국 왕이 승리하였습니다.  후에 교황은 프랑스인이 계승하였고, 교황청을 프랑스 남부 아비뇽에 두게 
되었습니다.  그 기간이 약 70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그래서 바벨론 포로를 연상한다고 해서 아비뇽 
유수라고 불렀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로마와 아비뇽에 2명의 교황이 분립하는 가톨릭의 분열로 이어지면서 교황권은 약화되었습니다.  상대적으로 황제의 권력이 막강해져 드디어 절대군주의 시대를 열게 되었습니다.  이런 황제의 힘은 루이 14세 때에 절정에 달합니다.  그는 ‘짐이 곧 국가’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그는 막강한 권세를 보이기 위해 베르사이유 궁전을 지었습니다.  궁전의 벽은 각양 금과 보석으로 만들었습니다.  정원에는 1만 4천 개의 분수대가 있었고, 2만 5천 그루의 나무가 있는 공원에 1.2km 길이의 운하가 있었습니다.  주방에 딸린 방만 1000개 되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웅장했는지를 지금도 잘 보여줍니다.  그는 1661년부터 1715년까지 54년간 황제로 군림했습니다.  역사 속의 어느 황제도 그렇게 오래 왕위를 유지하지 못했습니다.  주위의 왕들이 대사를 보내어 그가 어떻게 통치하고, 어떻게 생활하는지를 알아내어 그의 위엄 있는 태도를 모방했을 만큼, 한 시대를 완벽하게 풍미한 위인이 되었습니다.

세상나라의 왕도 이런 절대적인 힘과 권력이 있었는데,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보다 비교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왕위의 왕이요, 만왕의 왕이십니다.  우리는 왕이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모든 세
대 신실한 신앙인들은 이런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특히 다윗은 본문에서 ‘왕이신 나의 하나님‘을 부르
고, 기도하며 노래합니다.  오늘 우리도 왕이신 하나님을 고백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왕이신 하
나님을 통해 주시는 교훈이 무엇일까요?

첫째는 소속감입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부르면 자연히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게 됩니다.  세상의 나라가 있습니다.  역사상 많은 나라가 있었고, 지금도 많은 나라가 있습니다.  그 중에 우리나라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세상의 나라가 있듯이 하나님의 나라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나라에 왕이고, 믿는 우리는 그 나라의 백성입니다.  다윗은 본문을 통해 왕이신 하나님을 노래하면서 이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11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주의 나라의 영광을 말하며 주의 업적을 일러서 주의 업적과
주의 나라의 위엄 있는 영광을 인생들에게 알게 하리이다 주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니...”  여기 ‘나라’
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나라는 세상 나라가 아니라 주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가 바로 
이 나라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독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다니엘은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이 
여러 왕들의 시대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망시키고 영원히 설 
것이라” (단2:44)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세우셨고, 영원한 나라요, 또한 영적인 나라입니다.  그 나
라의 특징을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  이런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을 통해 점점 이루어져 갑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막1:15)  이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가능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주님을 영접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축복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3:5)  여기 ‘물과 성령’은 곧 ‘믿음과 은혜’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그것을 받아드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갑니다.  바로 우리가 그렇게 주님을 믿고 들어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세상나라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그런데 세상 나라에서도 소속감이 중요합니다.  내가 어느 나라의 백성인가가 매우 중요합니다.  해외로 
나가보면 나라와 국력이 얼마나 절실하고 힘이 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
나님의 나라에도 소속감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소속감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
에 속한 자요, 하나님나라의 백성입니다.  우리의 소속은 하나님의 나라요,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결국 소속감이 그의 현재를 알려주고, 그의 인생과 삶을 대변합니다.  

무엇보다도 소속감이 나에게 힘을 주고, 쓰러진 나를 일으켜 세우고, 잘못된 나를 바로 잡아줍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벧전2:9-10)

이제 오늘 다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소속감을 확실히 하십시오.  이 소속감을 가지고 힘을 얻으
십시오. 큰 위로를 받으십시오.  무엇보다 잘못된 나를 고치십시오.   분명한 소속감으로 날마다 승리하
며 살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다스림입니다. 

계속되는 말씀을 보면, 왕이신 하나님의 다스림과 통치를 말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주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니 주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이다”  여기에서 주의 통치를 말하는데, 통치는 다스림을 의
미합니다.  주님이 다스리는 주님의 나라, 하나님이 통치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나
라는 하나님이 다스립니다.  영원히 하나님이 다스려야만 합니다.  그래야 안정되고, 바르고, 든든하고, 
실수가 없고, 완전한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는 다 불안하고 확실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통치는 모든 세대, 모든 사람을 망라합니다.  심지어 그의 통치는 자연과 우주와 만물까지도 
포함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다스림은 영원에서 영원까지 이릅니다.  그런 하나님의 통치가 가장 잘 
스며들고, 이루어져야 하는 곳은 바로 ‘나’입니다.  가만히 보면 나를 누군가가 다스립니다.  

나를 내가 다스릴 수 있습니다.  나는 내 것이니까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나를 내가 다
스립니다.  그럴 때 어떻게 됩니까?  내가 나를 다스리면 넘어지고, 쓰러집니다.  자만하고 방심하고 특
히 교만해 집니다.  베드로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그는 자기를 누구보다도 믿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죽으시는 현장에서 다른 사람은 다 주를 버릴지라도 자기는 결코 배반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했습니다.  

주님이 배신할 것이라고 말해도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를 믿었고, 결국 자기를 자기가 다
스렸던 것입니다.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그는 뼈저린 실패를 경험합니다.  가장 처절하고 비참한 자리
까지 내려갑니다.  그렇게 이중적이고, 위선적이고, 야비하고, 못될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내가 나를 
다스릴 때의 모습입니다.

또한 나를 사단이 다스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도 믿지만 사단도 믿습니다.  사단은 
우리를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 않을 때는 잘 건드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대충 
믿어도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내가 바르고 참되게 살려면 반드시 나를 건드리며 접근합니다.  

날 유혹하고, 쓰러트리려 하고, 점점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합니다.  그래서 나를 세상의 유혹에 빠지게 하고, 욕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합니다.  가룟유다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유다는 처음부터 나쁜 사람이거나 주님을 배반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가 잘못된 것은 사단의 유혹을 받을 때부터입니다.  성경에 보면, 사단이 그의 마음속에 들어갔다고 말합니다. (눅22:3-6)  사단이 그를 다스리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이제 이성도 잃습니다.  그의 의지가 아주 약해집니다.  결국 주님을 팔아넘깁니다.  그리고 여전히 사단에게서 벗어나지 못한 채 스스로 목숨을 끊고 비참하게 인생을 끝냅니다.  이것이 사단이 우리를 다스릴 때의 모습입니다.  

이처럼 내가 나를 다스릴 때 우리는 실패하고, 낙망하고, 사단이 다스릴 때 유혹에 넘어가고, 쓰러집니
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이 다스려야 합니다.  그래야 가장 확실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8
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를 다스립니다.  날마다 필요한 은혜를 주시고, 한없는 긍휼로 대하십
니다.  내가 잘못해도, 하나님을 몹시 실망시켜도,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언제나 인자함으로 다가오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 이제 하나님께 나를 맡기십시오.  온전히 드리십시오.  내가 나를 다스리지 말고, 사단에게 나
의 주도권을 넘기지도 말고, 언제나 하나님이 나를 다스리도록 기도하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기를 바랍니다.

셋째는 경외심입니다. 

다윗은 본문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내가 날마다 주를 송축하며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위대하심을 측량하지 못하리로다 대대로 주께서 행하시는 일을 크게 찬양하며 주의 
능한 일을 선포하리로다 주의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위엄과 주의 기이한 일들을 나는 작은 소리로 읊조
리리이다 사람들은 주의 두려운 일의 권능을 말할 것이요 나도 주의 위대하심을 선포하리이다”(1-6)  

여기에서 반복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주를 높이고, 송축하고, 찬양하고, 선포한다는 말입니다.  이게 무엇을 의미합니까?  바로 왕이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을 존경하고, 깍듯이 예의를 갖추고, 두렵고 떨림으로 나아가고, 힘과 정성을 다하여 감사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왕이신 하나님 앞에 우리가 가질 자세요, 마음이요, 행동입니다.

앞서서 루이 14세에 대해 언급을 했습니다.  그의 권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역사는 전합니다.  그의 
기침소리에 수백 명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입니다.  그가 일어나면 그를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나아갑
니다.  그를 알현하는 것이 평생 꿈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가능한 왕과 같이 있으
려고 노력합니다.  

그와 떨어진다는 것은 햇빛을 못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생각되었고, 베르사유 궁전에서 멀리 떠난다는 것은 태양 빛에서 쫓겨나 어둠 속에 처박혀지는 것과 다름없이 느껴졌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그를 두려워하고, 존경하고, 경외함이 하늘에 닿았다고 말합니다.

본문을 기록한 다윗도 당대 왕입니다.  모두가 인정하고, 존경하는 뛰어난 왕입니다.  그도 루이 14세 
못지않게 많은 사람들의 존중히 여김을 받았습니다.  모두가 그 앞에 때론 두렵고 떨림으로 부복했고,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었습니다.  힘을 다해 ‘다윗왕 만세’를 외쳤고, 그를 만나기 위해 전국각지에서 많
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그의 말 한마디에 모두가 재빠르게 움직였습니다.  그를 위해 목숨을 내건 
사람이 많았습니다.  평생 그의 손을 잡아보는 것이었던 사람도 많았습니다.  다윗은 평생 그렇게 살았
습니다.

한 시대, 한 나라의 왕도 이렇게 사람들이 존경하고, 두려워하고, 경외하는데 하물며 만왕의 왕이신 하
나님을 어떻게 대해야 하겠습니까?   다윗은 왕으로서 이런 대접을 받았기에, 왕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
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런 심정으로 왕이신 하나님을 높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누구보다도 경외한 것
입니다.  그의 노래, 기도, 제사, 삶, 믿음의 모든 영역에서 이처럼 왕이신 하나님을 경외하였고, 평생 그
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왕으로 믿는다면 우리에게도 이런 태도와 자세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왕이신 하나님
을 어떻게 대합니까?  왕이신 하나님 앞에 어떻게 나아갑니까?   깊은 경외심, 두려움, 바른 존경함이 
있습니까?

만약 대통령이 여러분을 청와대로 초대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대통령이 보자는데 마다할 사람이 없
을 것입니다.  어떤 약속도 미루고, 취소하고, 만나는 날을 기다릴 것입니다.  드디어 만나는 날, 우리는 
그냥 가지 않을 것입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멋지고 아름답게 단장할 것입니다.  옷장에서 가장 멋지
고 좋은 옷으로 준비할 것입니다.  

그리고 대통령을 만났을 때에도 우리는 최대한 예의를 갖출 것입니다.  말도 함부로 하지 않고, 자세도 흐트러지지 않을 것이고, 대통령과의 시선을 놓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존경과 경외함으로 만날 것입니다.  그를 만나고 돌아오면 그날을 집안 가보에 새겨 가문의 영
광으로 기억할 것입니다.  대통령과 사진이라도 찍었다면 크게 확대해서 잘 보이는 곳에 걸어 놓을 것
입니다.  그리고 대통령 만난 것을 늘 자랑스럽게 여기고, 만나는 사람마다 자랑하고 싶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때에도 그런 심정이 필요합니다.  왕이신 하나님께 우리는 경외함으로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만나자고 초대하는데 거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 삶의 우선순위를 하
나님 만나러 가는 것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러 나올 때에도 그냥 나오지 말아야 합니
다.  잘 준비하고, 몸도 마음도 단장하고 나와야 합니다.  옷이나 맵시가 아니더라도 태도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 나아와 예배를 드릴 때에도 예의를 갖추어야 합니다.  때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때론 감
사와 영광으로 나가야 합니다.  딴생각 하지 말고, 우리의 시선을 거룩한 긴장감으로 하나님께 고정시켜
야 합니다.  비뚤어진 자세, 거드름 피우는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과 몸과 정성을 다해 왕
이신 하나님을 높이고, 경배하고, 최고의 가치로 높여야 합니다.  

믿음은 바로 왕이신 하나님께 대한 존경심, 경외심에서 달라집니다.  믿음의 성숙은 곧 얼마나 하나님을 경외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다고 해도, 하나님께 나아가면서 경외하는 마음이나 태도가 없으면 아직 성숙한 믿음이 아닙니다.  정말 좋은 믿음의 사람은 자세가 다릅니다.  하나님을 대하는 마음, 예배에 임하는 자세,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가 다릅니다.  어린소자라도 소홀히 대하거나 무시하지 않았던 예수님을 보십시오.  결국 믿음은 경외심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우리는 왕이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세상나라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면서 소
속감, 다스림, 경외심을 기억하십시오.  이제 하나님나라의 백성임을 분명히 하십시오.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을 받으십시오.  그리고 그를 존경하고, 경외함으로 높이고 섬기십시오.  그렇게 왕이신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날마다 승리하며 살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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