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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역설의 진리 (막 8:2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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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의 진리 (막 8:27~38)


우리의 삶에는 많은 문제들과 어려움들이 있다. 아무런 문제도 없고 고난도 없는 삶을 사는 사람은 없다. 인생을 살면서 아무런 문제도 없고 어려움도 없는 때는 전혀 없다. 왜 인생에는 고난이 많은가? 세상이 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이 편안하게 인생을 살게 되어 있지 않다. 또한 인간이 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로 다투고 싸우면서 고통을 당한다. 또한 인간은 연약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연약하고 미련하고 부족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시험과 유혹에 쉽게 넘어가고 고난과 역경에 빠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겪게 되는 모든 고난과 역경에는 분명한 의미와 목적이 있다. 그러므로 고난의 이유와 원인을 아는 것보다 고난의 의미와 목적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인생에는 왜 고난이 있는가? 왜 고난과 문제가 끊이지 않는가? 왜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녀들에게 고난을 주시고 또 고난을 당하도록 허락하시는가?  

신앙이란 해석이다. 신앙이란 삶의 목적을 밝혀주고 고난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신앙 안에서 우리는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발견한다. 신앙 안에서 인생에서 당하는 고난과 역경의 의미와 목적이 무엇인지 알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된다. 

고난의 의미와 목적은 무엇인가? 고난과 역경은 심판과 훈련의 두 가지 의미와 목적이 있다. 마지막 날의 심판이 오기 전에 겪는 고난은 중간평가이다. 하나님은 고난과 역경을 통해서 내가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나의 믿음을 보게 하신다. 그리고 또한 고난을 통해서 참 믿음과 거짓 믿음을 구별해 내신다. 마치 농부가 추수 때에 키질을 해서 알곡과 쭉정이를 골라내듯이 하나님은 인생의 고난과 믿음의 핍박을 통해서 참 믿음의 사람과 거짓 믿음의 사람을 골라내신다. 고난 앞에서 다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고난을 통해서 나의 믿음의 현주소를 알게 하시고 나의 믿음의 실력과 수준에 맞는 훈련계획을 세우신다. 국가대표팀이 수시로 평가전을 가지듯이 하나님도 우리를 평가하신다. 그래서 나의 신앙의 수준과 실력에 맞는 훈련과 연단을 하신다.  

그러므로 나의 삶에 고난과 문제가 있는가 없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고난과 문제를 만날 때에 그 고난과 문제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가가 더 중요하다. 그것이 곧 나의 믿음의 수준이고 나의 믿음의 실력이기 때문이다. 고난과 문제 앞에서 나타나는 나의 말과 행동이 나의 인격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고난과 문제 앞에서 나의 믿음의 현실과 나의 인격의 실력을 파악하고 믿음을 세우고 인격을 다듬으라.
 
오늘 말씀은 인생을 살면서, 믿음의 길을 가면서 아무 문제가 없을 때보다 문제를 만났을 때에 그 사람의 믿음이 드러난다는 것을 보여준다. 생각지 않은 어려움을 당할 때에, 예기치 않은 문제를 만났을 때에 믿음의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준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난과 문제 앞에서 어떻게 살기를 원하시는가를 보여준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를 떠나 북쪽 빌립보 가이사랴로 올라가실 때의 일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셨고 제자들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세례 요한, 엘리야 또는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한다”고 대답했다. 이에 예수님은 다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다. 이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십니다”라고 대답했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히브리어의 ‘메시아’를 헬라어로 번역한 것으로 ‘기름 부은 자, 보냄 받은 자’란 뜻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압박과 고통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메시아를 보내실 것이라고 기다리고 있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바로 그 메시아이시라고 바른 신앙고백을 했다.

이것이 믿음이다. 나사렛 출신 예수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이심을 믿는 것이 기독교의 믿음이다. 이천 년 전 팔레스틴 땅에서 태어나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분이 나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그 십자가의 피로 내 죄가 용서받고 멸망에서 구원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믿는 것이 우리의 신앙이다. 

그런데 이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들이 전혀 생각지 못한 놀라운 말씀을 하셨다. “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예수님께서 장차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잡혀서 고난을 당하시고 죽임 당하실 것과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처음으로 제자들에게 말씀해 주신 것이다. 베드로와 제자들이 예수님께 대해 바른 신앙을 가졌다는 것을 확인하셨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때 베드로가 의외의 반응을 보인다. “3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붙들다”는 것은 ‘옆으로 끌었다’는 뜻으로 베드로가 예수님을 한쪽으로 끌고 가서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항변하다”는 것은 ‘경계하다, 책망하다’는 뜻으로 베드로가 예수님께 강력하게 항의하고 말렸다는 뜻이다. 그가 예수님께 무어라고 했는가? 마태복음 16:22(새번역) “이에 베드로가 예수를 따로 붙들고 ‘주님, 안됩니다. 절대로 이런 일이 주님께 일어나서는 안됩니다’하고 말하면서 예수께 대들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고난당하시고 죽임 당하시는 일이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자 예수님은 베드로를 강하게 꾸짖으셨다. “33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예수님은 바른 신앙고백을 한 베드로를 크게 칭찬하시고 축복하셨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그런데 갑자기 그를 ‘사탄’이라고 부르신 것이다.

왜 그러셨을까? 어떻게 사랑하는 제자를 ‘사탄’이라고 부르실 수 있는가? 조금 전에는 그렇게 칭찬하시고 축복하시더니 어떻게 그렇게 금방 달라질 수가 있는가? 마태복음 16:23에 그 이유가 밝혀져 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그가 예수님을 걸려 넘어지게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가 예수님이 가시는 길을 방해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베드로 개인을 미워하시고 저주하신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가셔야 할 길을 가지 못하게 하는 사탄을 책망하신 것이다. 온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사탄이 베드로를 이용해서 예수님의 길을 방해했고 예수님은 베드로가 사탄의 도구가 되어서 예수님을 넘어지게 하는 것을 책망하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고 깨달아야 할 것이 있다. 베드로처럼 훌륭한 예수님의 제자도 사탄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님께 대해 바른 신앙고백을 하고 확실한 믿음을 가진 사람도 예수님을 넘어지게 하는데 이용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방금 바른 신앙고백을 하고도 바로 사탄의 도구로 이용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누구라도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방해하면 사탄이라고 책망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베드로를 책망하신 후에 따르는 사람들과 제자들을 불러 모으시고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면 어떻게 믿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셨다. 우리가 어떻게 고난과 문제 앞에서 바른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따라갈 수 있는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으로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하는가? 이 말씀 중에 우리가 스스로 물어야 할 세 가지 질문이 있다.

무엇을 생각하는가?
“33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베드로가 예수님이 가시는 길을 가로막는 말을 한 것은 그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보다는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그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생각은 없고 오로지 인간적인 일에 대한 생각만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예수님의 제자이면서도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기보다는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생각하고 있는 사람의 일이란 무엇인가? 그의 마음에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예수님을 강력하게 말렸는가? 예수님은 왜 그를 그렇게 책망하셨는가? 그의 마음에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욕심과 욕망이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베드로만 아니라 모든 제자들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책망하셨던 두 가지 사건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9:33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셨고 제자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들이 서로 누가 크냐, 누가 높으냐 하는 문제로 서로 다퉜기 때문이다. 이에 예수님은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고 하셨다.

또 10:35이하에 보면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예수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오르실 때에 자기 아들들을 예수님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게 해달라고 비밀리에 부탁했다. 그리고 다른 제자들이 이 사실을 알고 크게 분노했다. 이에 예수님은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하셨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강력하게 말린 것은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잡히셔서 고난  당하시고 죽임을 당하시면 자기들의 이런 욕망과 바램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었다. 물론 베드로의 이 말에는 인간적인 애정도 포함되어 있었다. 자기가 믿고 따르는 스승이 고통을 당하고 죽임을 당한다는데 말리지 않을 제자가 어디 있는가? 그러나 그보다 더 강력했던 것은 그의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욕망과 욕심이었던 것이다. 

그는 사람의 일은 생각했지만, 자신의 일은 생각했지만 하나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의 일이 하나님의 일을 방해한다는 것도 몰랐다. 그러나 사탄이 베드로의 생각을 통해서 예수님이 하시려는 하나님의 일을 가로막고 방해했던 것이다. 우리 속에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욕심이 강하면 언제라도 사탄의 도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이라면, 주님의 제자라면 항상 사람의 일보다 하나님의 일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의 일보다 사람의 일을 먼저 생각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일을 방해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사람의 일보다는 하나님의 일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생각하고 구해야 한다.  

더 나아가서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해야 한다. 사람의 일보다는 하나님의 일을 더 중요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한다. 믿는다고 하면서 베드로처럼 사람의 일만 생각하면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모두를 그르친다. 그러므로 나의 생각을 포기하고, 인간적인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며 살라. 

무엇을 따라가는가?
“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라면 예수님이 가시는 길이 어디든지 다 따라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라가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길을 가기 위해서라면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면 예수님께서 어디로 가시든지 주저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따라갈 것이라는 뜻이다.  

믿음이란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다. 예수님이 가신 길을 나도 가는 것이다.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든지 나도 예수님을 따라서 어디든지 가는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면서도 예수님을 따라가려 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로마제국의 세력을 몰아내고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시키는 곳에는 따라가려고 했지만,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나라회복의 공로를 세우고 권력의 높은 자리를 얻는 길은 따라가려고 했지만,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곳에는 따라가려 하지 않았다. 그는 진정한 의미의 예수님의 제자라고 할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믿으려고 한다. 영광을 얻고 유익을 얻는 길에는 예수님을 따라가려 하지만 고난을 당하고 손해를 보는 길에는 따라가려 하지 않는다. 예수님을 따라가려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베드로처럼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자리에 서는 것이다. 예수님을 어디든지 따라가겠다는 생각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잘 따라갈 수 있는가? “자기를 부인하고.” 이것은 자신을 버리라는 것이다. 자신의 생각을 버리라는 것이다. 자신의 욕심을 버리라는 것이다.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라는 것이다. 자신의 계획도 포기해야 한다. 자신의 감정도 버려야 한다. 내 감정과 느낌에 관계없이 주님의 마음을 내 마음으로 느끼고 따라가야 한다. 내 욕심도 버리고 내 소원도 버려야 한다. 주님의 소원이 내 소원이 되어야 한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은 아무런 죄도 없으시면서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었고 예수님의 사명이었다. 사람마다 각자 지고 가야 할 십자가가 있다. 주님이 나를 위해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신 것처럼 나도 주님을 위해 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라가야 한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이 사명은 포기하지 않고 놓지 않고 끝까지 충성해야 한다. 십자가의 고난과 억울한 죽음이 닥쳐도 피하지 않고 내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한다.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지기 위해 고난과 모욕과 손해를 당하고 마지막에는 그 십자가 위에서 죽어야 한다. 십자가를 지는 것이 힘들고 고통스럽다고 뿌리치고 내려놓고 피하면 주님께서 그 십자가를 다시 지셔야 한다. 죽기까지 십자가에서 복종해야 한다.

“나를 좇을 것이니라.” 예수님의 제자라면 당연히 예수님을 따라가야 한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듯이 나도 주를 위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기로 했으면 끝까지 따라가야 한다. 십자가 위에서 죄 없이 죽으셨으나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주님을 바라보고 끝까지 주님을 따라가야 한다.

나는 무엇을 따라가는가? 돈인가, 지식인가, 명예인가, 쾌락인가? 나는 누구를 따라가는가? 자신을 따라가는가, 다른 사람을 따라가는가? 예수님을 따라가는가? 예수님만 바라보고 따라가는가? 예수님만 바라보고 예수님만 끝까지 따라가는 믿음이 되라.

무엇을 위하여 사는가?
“3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이제는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고 예수님을 위해서 그리고 복음을 위해서 사는 것이라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위해서 그리고 복음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버릴 수도 있고 잃을 수도 있는 것이 참된 믿음의 삶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아무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어떻게 죽느냐 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을 위해 죽느냐 하는 것이다.

죽음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수명이 다 되어서 죽는 것을 자연사라고 한다. 병 때문에 죽는 것은 병사라고 한다. 불의의 사고를 당해서 죽는 사고사도 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 의해서 죽는 것을 타살이라고 하고, 스스로 죽는 것을 자살이라고 한다. 이중에 가장 부끄럽고 불명예스런 죽음이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는 것이다. 자살하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겠지만 아무리 그럴만한 이유와 명분이 있다고 해도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의 생명이나 자신의 생명을 해칠 수 있는 권리와 자격이 전혀 없다. 

이것은 죽음의 방법과 형식에 의한 분류이고 죽음의 이유와 목적에 따라서 분류할 수도 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던지는 것을 희생의 죽음이라고 한다. 나라를 위해 일하거나 싸우다가 죽는 것을 순국이라고 하고, 자신의 직책과 직분에 충실하다가 죽는 것을 순직이라고 한다. 그리고 믿음을 위해서 또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애쓰다가 죽는 것을 순교라고 한다. 이런 죽음이 가장 숭고한 의로운 죽음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버리셨다. 요한복음 15: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요한복음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 14 나는 선한 목자라 ~~ 15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17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자신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살고 복음을 위해서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목숨을 구원하고 지키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그리고 복음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버릴 수 있는 것이 믿음이다. 즉 주님을 위해서 그리고 복음을 위해서 죽기를 각오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자기가 살기 위해서 살아갈 때에 믿음의 사람은 주님을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살게 하기 위해서 자신이 죽겠다는 자세로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

그렇게 주님과 복음을 위해서 죽기로 하면 오히려 죽지 않고 살게 된다는 것이다. “3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즉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니라 죽는 것이라는 뜻이다. 죽는 것이 죽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이라는 뜻이다. 살려고 하면 오히려 죽게 되고 죽으려고 하면 오히려 살게 되는 것이 믿음의 비밀이요 역설의 진리이다. 이 말씀대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나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

베드로는 주님을 위해 사는 사람 같았지만 사실은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욕심과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나서서 주님을 만류한 것이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무엇에 목숨을 걸고 사는가? 어떤 일에 목숨을 걸고 매달리는가? 무엇에 죽기 살기로 매달리는가? 죽을 것처럼 매달리고 달려들고 뛰어가지만 뒤돌아보면 아무 것도 아닌 일에 목숨을 걸고 애쓴 것을 발견하면 허무해진다.

어차피 한 번 왔다가 가는 제한된 인생이라면 자신만을 위해 살다가 실패하고 절망하지 말고 주님과 복음을 위해 사는 참된 믿음이 되라. 어차피 한 번은 죽을 목숨이라면 자신을 위해서 살려고 애쓰기보다는,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치기보다는 이왕이면 주님을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그리고 사랑을 위해서 죽을 수 있는 믿음이 되라. 

한일 목회자 세미나에서 한 일본강사가 이렇게 고백했다. 일본기독교는 천황제 때문에 숨을 못 쉬고 눌려 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한국교회는 일제시대에 천황제를 반대하면서 수많은 순교자를 냈는데 일본교회는 천황제를 반대하는 순교자를 한 명도 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국교회가 이렇게 부흥하고 성장한 것은 주님을 위해서 그리고 복음을 위해서 목숨을 던진 순교자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분들이 목숨을 던져서 복음과 교회를 지켰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그리고 그분들의 순교의 피 때문에 지금 우리가 편안하게 예수님을 믿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신앙은 역설의 진리이다. 높아지려고 하면 낮아지고 낮아지려고 하면 높아진다. 스스로 높아지려고 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낮추시고, 내가 스스로 낮아지려고 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높이신다. 내가 나를 위해 살려고 하면 오히려 죽게 되고 나를 위해 살지 않고 주님과 복음을 위해 죽으려 하면 하나님께서 오히려 살게 해주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란 역설의 진리를 따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사는 사람이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인가? 제자란 스승의 가르침과 삶을 배우고 그 뒤를 따라가는 사람이다. 교회는 교인, 성도보다 제자가 더 많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많은 청중이 아닌 일군들을 통해서, 그중에서도 제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다.

자기의 목숨을 걸 수 있는 일이 있는 사람, 그런 것을 발견한 사람은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여러분은 어떤 일에 목숨을 걸고 사는가? 어떤 일에 목숨을 걸듯이 달려드는가? 그 일이 사람의 생각에 따른 것인가, 하나님의 생각에 따른 것인가? 세상을 따라가는 것인가, 주님을 따라가는 것인가? 나를 위한 것인가? 하나님을 위한 것인가?  

잘 믿으려고 하면서도 잘못된 생각 때문에, 잘못된 삶의 목표 때문에, 잘못된 삶의 목적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사람의 일보다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며 살자. 세상을 따라가지 말고 주님을 따라가는 삶을 살자. 나를 위해 살지 말고 주님과 복음을 위해서 사는 믿음이 되자. 내 목숨을 던져서라도,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삶을 사는 믿음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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