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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삭과 이스마엘 (창 16: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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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과 이스마엘 (창 16:7-16)


우리가 인생길을 걸어가면서 어려움과 문제를 전혀 겪지 않고 살 수는 없다는 것을 여러분도 잘 알 것이다. 또 예수를 믿고 믿음의 길을 걸어가면서 시험과 고난과 문제가 전혀 없이 갈 수는 없다는 것도 잘 알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내 앞에 문제와 시험과 환난이 있는가 없는가가 아니라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시험과 환난을 어떻게 이기고 통과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문제와 시험과 환난 때문에 내가 손해를 보고 믿음이 주저앉는가 아니면 그 문제와 시험과 환난을 통해서 오히려 믿음이 더 자라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고 하나님의 주시는 복과 은혜를 받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편안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강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 일도 당하지 않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을 당해도 능히 이기고 감당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다.

데이빗 씨맨즈 목사님의 이야기가 생각이 난다. 인도 선교사 시절에 어릴 때 발이 기형으로 태어난 아들이 수술시기를 놓쳐서 나중에 큰 수술을 세 번이나 받고 집에서 발이 돌아가지 않도록 해야 했다. 고통스러웠으나 그것 때문에 정상으로 회복되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삶이 편안하기를 원하시지 않고 우리가 강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지 십 년이 지나도 아들을 낳지 못하자 사래는 자기 몸종 하갈을 아브람에게 들여보내서 아이를 가지게 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큰 문제가 생겼다. 아브람의 아이를 가진 하갈이 교만해져서 자기 주인인 사래를 무시한 것이다. 그리고 이 꼴을 그냥 보지 못한 사래가 아브람에게 불평을 했다. “이 모든 일이 당신 때문에 생긴 것이니 당신이 욕을 당해야 하오.” 이렇게 문제가 생기자 아브람은 아내 사래에게 마음대로 하라고 했고, 사라는 하갈을 학대했고 하갈은 사래의 괴롭힘을 참지 못하고 도망치고 말았다. 

이것도 역시 바른 해결방법은 아니었다. 아니 아브람은 아직도 자기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아내 사라와 하갈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하갈이 자기 주인마님을 무시하고 교만하다고 해서 자기의 아이를 가진 하갈을 쫓아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조강지처 사래에게 참으라고 할 수도 없는 곤란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는 아내 사래에게 “당신이 알아서 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사래가 하갈을 괴롭히는 것을 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말리지도 못하고 보고만 있었다.

사래 역시 이 상황에서 잘했다고 할 수는 없다. 사래는 이러한 가정불화의 책임을 남편 아브라함에게 돌렸다. “이 욕은 당신이 받아야 마땅하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말한다. 자신이 아이를 낳지 못하지만 그것도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은 것이고, 자식을 얻어 대를 잇기 위해서 몸종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주어 아이를 가지게 했으니 자신의 할 일은 다 했다는 태도이다. 또한 사래가 여기서 하갈을 학대한 것도 잘했다고 할 수 없다. 그는 윗사람으로서 하갈을 책망한 것이 아니라 여자의 질투심으로 하갈을 괴롭혔다. 그 역시 잘되자고 한 것인데 왜 이런 일이 생기는지,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 이 문제의 진정한 원인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고 있다.

하갈은 여주인 사래의 학대를 견디다 못해 그만 도망치고 말았다. 주인의 아이를 가졌으니 이제는 팔자가 폈다고 생각하고 교만하게 행동하다가 괴로움을 당한 것이지만 그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천박한 노예근성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이 남보다 가진 것이 적거나 힘이 약하면 자기보다 강한 사람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비굴하게 굴다가, 조금만 잘되게 되면 당장 교만해져서 다른 사람들, 즉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을 무시하고 무례하게 군다. 자기를 눌렀던 사람들보다 훨씬 더 악하게 군다. 하갈은 여기서 자신의 본분과 위치를 망각하고 있었다. 애굽에서 굴러 들어온 천한 신분의 여인이 감히 여주인의 배려로 주인의 아이를 가지게 된 것을 감사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는 그 반대로 교만하게 굴다가 스스로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런 고통을 당할 때에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용서를 구하여야 하지만, 하갈 역시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현실에서 도망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피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정면으로 맞닥뜨려야만 제대로 해결된다.

아브라함의 가정에서 일어난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세 식구 모두 잘못된 행동을 하고 잘못된 방향으로 일을 끌어가고 있다. 모두가 자기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핑계를 대고 책임을 전가하고 원망을 하고 있다. 심지어 하나님까지 원망하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무슨 일을 당하든지 먼저 자기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내게 무슨 잘못이 없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과 나 사이가 원만하게 열려 있는지, 내가 지금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있는지 내 믿음을 점검해 보아야 한다.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하나님의 뜻이 있는지, 내가 깨닫지 못하는 나의 부족과 허물과 잘못이 있는지 자신을 돌아보고 철저하게 점검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어떤 경우도 결코 원망하거나 불평해서는 안된다.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거나 사람을 미워해서도 안된다. 그리고 더더구나 하나님을 원망하는 죄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크고 작은 문제가 생길 때마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다. 이것은 그들의 습관처럼 굳어져 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하나님까지 원망을 했고, 결국 그 때문에 불뱀에 물려 죽게 되었다. 이처럼 문제가 생기고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에 다른 사람을 원망하면 내 믿음이 손해를 본다. 그리고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면 은총과 복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다.

사탄은 우리에게 직접 하나님을 대적하고 죄를 지으라고 하지 않는다. 어려운 일이 닥치거나 문제가 생길 때에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가지 못하게 방해한다. 그리고 사람을 미워하고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다른 사람을 원망하고 불평을 하고 마음이 상하게 만든다. 그러다가 결국 나중에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데까지 가도록 우리를 유혹한다. 이렇게 원망과 불평에 빠지게 되면 자신을 보는 눈과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이 어두워진다. 

모든 일과 사건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자. 모든 문제의 원인을 겉으로 나타나는 현상에서만 보지 말고 뒤에 숨겨져 있는 근본원인을 찾아낼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기 자녀들에게 시험과 문제를 허락하시는 이유와 목적이 무엇인지를 찾기를 힘써야 한다. 나를 향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한다. 또 하나님께서는 감당하지 못할 시험은 결코 허락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믿어야 한다. 반드시 피할 길을 열어 주셔서 감당케 하시고 승리하게 하신다. 우리가 예수 안에 있고 믿음 안에만 있으면 얼마든지 이길 것을 믿으라.

지금 아브람과 사래에게 있어서의 문제는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약속이 늦어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그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끝까지 기다리지 못하는 믿음과 인내의 부족이 문제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사람의 방법으로 이루려고 하는 것이 그들의 잘못이었다. 그리고 그 때문에 문제가 생겼을 때에 아무도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아무도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어차피 문제는 있게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그 문제를 해결하고 시험과 고난을 이길 수 있느냐 하는 것이고, 또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그 문제를 해결하고 고난을 이기느냐 하는 것이다. 문제와 시험과 고난 때문에 뒤로 물러가 주저앉는가, 아니면 그 문제와 고난을 통해서 오히려 앞으로 나가는가 하는 것이다.

이렇게 도망을 친 하갈을 하나님께서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만나주셨다. 그리고 그를 집으로 돌려보내신다. 왜인가? 그냥 두면 하갈은 광야에서 죽고 말 것이다. 그러면 그의 태중에 있는 아이마저도 죽게 될 것이다. 아직 태어나지 않았지만 이미 잉태된 한 생명이 세상에 나와보지도 못하고 그냥 죽는 것을 내버려 두시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아무도 죽는 것을 원하시지 않는다. 심지어 죄인이라도 죽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에스겔 18:23에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어찌 악인의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서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고 하셨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고 악을 심판하시지만 그 죄인도 돌이켜서 회개하고 살기를 원하신다. 악인이 그 죄의 길에서 돌이켜 새로운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 

하갈이 도망치자 아브람과 사래는 속수무책이었다. 사래는 설마 하갈이 아이까지 가졌는데 도망치겠는가 하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그렇게 자신이 책임지지 못할 행동을 함으로 문제를 더 어렵게 만들었다. 분풀이는 했을지 모르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런 문제를 하나님이 해결해 주셨다. 하나님께서 직접 나서셔서 해결해 주셨다. 내 생각과 감정대로 해보아야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하나님께 그 문제를 가지고 나가서 하나님께 부탁하라.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라.

하나님의 사자가 도망치는 노예 하갈에게 무어라고 말씀했는가? 8절에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왜 이런 질문을 했는가? “너는 누구냐?”라고 물은 것이다. 너는 누구인데 지금 이곳에 와 있느냐, 네가 있어야 할 곳은 어디인데 그곳을 떠나서 여기에 와 있느냐는 질문이다. 
하갈은 “나는 나의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사래가 자기의 여주인이라고 했다. 자신이 누구라는 것을 솔직히 말한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의 사자는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고 했다. 네가 사래의 종이면 너는 그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래가 네 여주인이면 너는 그에게로 돌아가서 네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으라는 것이다. 그것이 그가 사는 길이라는 뜻이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질문을 하신다. 우리가 하나님께 질문을 하지만 사실은 그보다 먼저 하나님께서 하시는 질문을 들어야 한다. 그리고 대답해야 한다. 그래야만 문제가 해결된다. 그 하나님의 질문과 대답에 문제의 해결책이 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질문은 항상 이렇게 시작한다. “너는 누구냐?” 그리고 이 하나님의 질문에 바르게 대답할 때에 모든 문제의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

인생의 모든 문제는 내가 누구인지를 깨닫지 못할 때에 생기는 경우가 많다. 문제가 생길 때에 그것을 바르게 해결하지 못하는 것은 내가 누구인지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하나님 앞에서 나는 누구인가를 질문하고 대답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지금 내가 어디에 와 있는가, 어떤 자리에 서 있는가를 돌아보아야 한다. 내가 과연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고 내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가를 돌아보아야 한다. 내가 있어야 할 자리를 떠났기 때문에, 그래서 내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나의 본분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닌가를 돌아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사자는 하갈에게 네가 있어야 할 네 자리로 돌아가라고 했다. 문제를 피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내 귀에 들리지 않고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다. 현실도피가 가장 손쉬운 방법이기는 하나 가장 어리석은 방법이기도 하다. 마치 꿩이 총소리를 들으면 머리만 눈에 박는 것과 같다.

사람의 범죄와 타락은 자기 자리를 떠나면서 일어난다. 아담과 하와는 피조물이면서도 하나님처럼 되려는 생각을 가졌다가, 자기가 누구인지를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자리에 오르려고 했다가 범죄하고 에덴동산의 복을 잃어버렸다. 사탄도 마찬가지이다. 유다서 1:6에 사탄이 어떤 존재인지 설명한다.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다”고 했다. 하나님을 섬기는 봉사하는 존재로 지음받은 천사가 자기 자리를 지키지 않고 그 봉사의 자리를 떠나서 하나님을 대적하다가 쫓겨나서 사탄이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심판 날에 하나님께서 사탄의 세력과 그 따르는 무리들을 단단히 결박해서 무저갱에 가두신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잊어버리고 자기 자리를 떠난 사람들은 반드시 범죄하고 망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는 다 사람들이 자기가 누구인지를 잊어버리고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를 떠났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부모의 자리, 자식의 자리를 떠날 때에 가정에 문제가 생긴다. 남편의 자리, 아내의 자리를 떠날 때에 가정이 흔들린다. 교사와 학생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군인도, 공무원도, 정치인들도, 기업인들도 자기 자리를 떠나고 자기가 누구인지를 잊어버리고 엉뚱한 자리에 가 있기에 범죄한다. 

신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내가 누구인가를 분명히 깨닫고 당연히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한다. 내가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성도는 성도의 자리에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정해 주신 자기 자리에 있어야 한다. 목사는 목사의 자리에, 장로는 장로의 자리에, 권사는 권사의 자리에, 집사는 집사의 자리에 있어야 한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바로 알고 자기 자리로 돌아가면 모든 문제는 해결된다. 다른 사람을 원망하고 핑계하기 전에 내가 내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하갈은 역시 자기 주인인 사래를 원망하고 있다. “나는 나의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자기 주인 사래가 자기를 괴롭혔기 때문에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얼른 들으면 그럴듯한 이유이다. 사람마다 핑계가 있고 행동마다 이유가 있다. 사람은 누구나 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하고 자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과 은혜가 회복되려면 다른 사람을 원망해서는 안된다. 다른 사람에게 핑계를 대고 책임을 전가해서는 안된다. 사래의 종인 그가 자기 주인을 떠나서 도망나온 것 자체가 그가 잘못한 것이 아닌가? 일단은 나 자신이 먼저 달라져야 하고 몸을 돌이켜서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다시 말하면 회개해야 한다. 회개는 말로 고백하는 것만이 아니다. 행동과 삶을 고치는 것이 회개이다. 내 자리로 돌아가서 내가 해야 할 일을 계속해야 한다.

그러나 무조건 돌아가라고 한다고 해서 쉽게 돌아갈 수 있는가? 돌아가면 또 다시 사래에게 괴롭힘을 당할 것이 뻔한데 어떻게 다시 돌아갈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무조건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하고 강요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분명히 마음을 새롭게 하고 내가 있어야 할 자리로 자신 있게 다시 돌아갈 수 있도록 해주신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약속을 주셨다. 10절에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자손으로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그가 잉태한 생명은 반드시 태어나서 큰 민족을 이룰 것이라는 약속이다. 그러니 돌아가서 이 아이를 낳으라는 말씀이다. 모든 생명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모든 생명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와 약속이 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에게는 내일이 있고 희망이 있다. 

하갈은 13절에서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고 했다. ‘감찰한다‘는 말은 ’살핀다, 돌본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고통 당하는 하갈 자신을 살피시고 돌보아 주셨다는 것이다. 그가 감히 하나님을 만나 뵈올 수 없었는데 하나님이 만나주셨다는 것이다. 그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찾아오셨다. 
즉 하갈이 기도를 많이 하고 눈물을 많이 흘려서 하나님이 그를 찾아오시고 만나주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그를 찾아오셨다. 아무런 조건도 이유도 없이 만나주셨다. 그러나 정확한 때에, 가장 필요한 때에 그를 찾아오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 그는 은혜를 입었으면서도 배은망덕한 여인이었다. 그리고 어려움을 당했을 때에도 깨닫지 못하고 도망친 속좁은 여인이었다. 그당시 별로 가치 없는 노예여인이었다. 그러나 그런 그를 하나님은 찾아오셔서 만나주시고 그에게 약속을 주셨다.

우리도 내가 기도를 많이 해서, 금식을 많이 해서, 봉사를 많이 해서 하나님이 나를 만나 주시고 내게 복을 주셨다고 생각하는 교만에 빠지면 안된다. 사람이 아무리 애를 쓰고 노력을 해도 하나님을 만날 수는 없다. 루터는 고행을 통해서도 죄의 용서와 구원의 확신과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그를 만나 주셨을 때에 비로소 그는 확신을 얻고 깨닫고 평안과 기쁨을 얻을 수 있었다.  

왜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하갈을 찾아오셨는가? 아무런 이유가 없다. 그를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 고통 중에 만나 주신 사람들은 모두가 다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셔서 만나 주신 것이었다. 그래서 11절에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잉태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고 했다. 즉 하나님께서 그의 고통을 보시고 그를 불쌍히 여기셔서 찾아오시고 만나주시고 내일에 대한 약속을 주셨다는 것이다. 출 2:23을 보자. 그리고 모세를 그들에게 구원자로 보내셨다. 또 3:7을 보라. 이것이 하나님께서 모세를 애굽에 보내시는 이유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다.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부르짖는 신음소리를 외면하지 않으신다. 아니 결코 외면하실 수 없다. 하나님의 귀는 너무나 잘 들리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들이 고통 중에 부르짖는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들으신다. 비록 내 죄와 내 잘못 때문에 당하는 고통이라도 그 신음과 기도를 들으시고 불쌍히 여기신다. 그래서 찾아오시고 만나주시고 약속을 주시고 힘을 주시고 구원해 주신다.
야곱의 경우를 보라. 그도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장자권을 빼앗은 자기 잘못으로 도망가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외로운 밤에 차가운 풀밭에서 딱딱한 돌베개를 베고 홀로 누워 있는 그를 찾아오셔셔 만나 주셨다. 그리고 그에게 약속을 주셨다. “내가 네게 약속한 모든 것을 이룰 때까지 너를 결코 떠나지 아니하리라.” 물론 그의 잘못된 사고방식과 잘못된 삶의 방식 때문에 이십 년 동안 고난을 통해 연단을 받았지만 하나님은 그를 버리지 않으시고 그를 새롭게 하시고 약속대로 복을 주셨다. 이 모두가 야곱이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불쌍히 여기셔서 베푸신 은혜였던 것이다.

그래서 죄인들이 하나님께 구할 기도는 다른 것이 아니라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여야 한다. 소경 바디매오는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기에 예수님의 마음이 움직여져서 그를 고쳐주셨다. 하박국 선지자도 범죄한 나라를 위해 기도하면서 “진노 중에도 긍휼을 잊지 마소서”라고 했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멸망한 예루살렘성과 성전 터에서 눈물로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없어지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소망을 가진다고 했다. 예레미야애가 3:19-23, 32-33을 보자. 

‘감찰하시는 하나님’, 또 하나의 하나님의 이름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우리를 돌보시고 살피시고 도우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언제나 나를 주목하시고 살피시고 계신다. 지금까지 한 번도 내게서 눈을 떼신 적이 없다. 앞으로도 그러실 것이다. 그리고 나를 돌보시는 하나님이시다. 고통 당하는 것을 그냥 두시지 않고 반드시 붙드시고 도우시고 일으켜 세우시고 갈 길을 인도 하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

하갈은 그가 하나님을 만났던 샘 이름을 ‘브헬라해로이’라고 했다. ‘생존하시는 하나님의 우물’이란 뜻이다. 즉 하나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라는 뜻이다. 내가 고통을 당할 때는 하나님이 나를 외면하시는 것 같고 하나님을 살아 계시지 않는 것만 같았는데 그게 아니더라는 것이다. 지금도 살아 계신 하나님이심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 살아 계신 하나님이 이 우물에서 나를 만나주셨고 내가 그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는가? 그가 나의 하나님이 되심을 믿는가? 그가 오늘도 나의 고통의 부르짖음과 기도를 들으심을 믿는가? 그가 나를 돌보시는 감찰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깨달으라. 긍휼과 자비가 풍성하셔서 나를 찾아오시는 분이심을 믿으라. 사 40:27-31을 보자.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자.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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