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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 자리는 어디인가? (시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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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자리는 어디인가? (시 1:1~6) 
 
  
❚자리

얼마 전 한국관광공사 사장으로 한국에 귀화한 외국인이 임명되어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화제의 주인공은 ‘이참’이라는 분인데 독일 사람으로 본명은 베른하르트 크반트(Bernhard Quandt)이고 1986년 대한민국에 귀화하면서 이한우라는 이름을 사용하다가 2001년 이참으로 개명했다고 합니다. 본관은 독일 이 씨로 정해서 독일 이 씨의 시조가 되었다는군요. 

그런데 이 분이 본디 통일교 신자였다는 겁니다. 한국에 와서 통일교 신자를 만나 결혼해 자신도 통일교 신자가 되었지만 다행히 지금은 기독교로 개종해서 서울소망교회에 출석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분 이야기를 꺼낸 것은 이 분이 정말 토종 한국사람 못지않게 한국말을 잘하기 때문입니다. 이 분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면 어쩜 그렇게 한국말을 유창하게 잘하는지 한국 사람인 제가 봐도 참 신기합니다. 하긴 요즘 TV를 보면 외국인인데도 한국 사람처럼 정말 한국말 잘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심지어 부산에서 사는 분은 부산 사투리를, 전라도에 사는 분은 전라도 사투리를 구수하게 합니다. 그런데 한국말을 배울 때 외국인들이 제일 힘들어 하는 부분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모든 외국어가 다 배우기 어렵지만 한국말이 특히 어려운 까닭은 형용사가 발달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빨간 색’이라는 말만 해도 빨갛다, 새빨갛다, 붉다, 붉으스레 하다, 시뻘겋다, 붉으죽죽 하다 등 정말 수십 가지 표현이 있어 그것을 다 이해하기란 정말 어렵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더 어려운 것은 한 가지 낱말이 갖는 뉘앙스가 너무 다양하다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미국에 이민 가 살던 한국 아버지가 어느 날 산책을 나가면서 아들에게 “아빠한테 전화 오면 잠깐 바람 쐬러 나갔다고 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전화가 오자 미국에서 태어나서 한국말이 서툰 아들은 아버지가 한 말이 잘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아빠가 분명히 바람... 뭐라고 했는데..” 싶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저희 아빠 잠깐 바람피우러 나가셨는데요.” 한국말이 서툴러서 일어난 일이지만 그러고 보면 한국말 참 어렵습니다. 같은 ‘바람’이라는 낱말인데도 그 뜻이 얼마나 다양합니까? 바람을 쐬기도 하고 바람 맞거나 바람피우기도 합니다.

그 중에 하나가 오늘부터 나누려고 하는 ‘자리’라는 낱말입니다. ‘자리’라는 낱말 하나를 사전에서 찾으면 그 뜻이 얼마나 다양한지 모릅니다. 우선 ①앉거나 서거나 누울 장소 ②무슨 일이 있었던 곳 ③무엇을 두거나 놓은 곳, 이런 일반적인 뜻뿐 아니라 ④“개에게 물린 자리” 할 때처럼 무엇이 있었던 자국을 뜻하는가 하면 ⑤“저 사람 높은 자리에 올랐다”고 할 때처럼 계급이나 지위 등을 뜻하기도 합니다. 또 자리가 잡힌다는 말은 ⑦서투르던 것이 익숙해지다는 뜻도 되고 어수선함이 가라앉아 안정된다는 뜻도 되니 얼마나 복잡합니까?

그런데 여러분, 우리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이 ‘자리’가 정말 중요합니다. 내가 어디 서 있어야 하냐는 말입니다. 아울러 내가 있어서는 절대 안 되는 자리가 어디냐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인 시편 1편에만 해도 성도들이 서지 말아야 할 자리가 있는가 하면 반드시 서야 할 자리가 있습니다. 우선 성도들이 서지 말아야 할 자리는 어디입니까? 

1절에 보면 악인들의 꾀, 죄인들의 길, 특히 오만한 자의 자리에는 앉으면 안 됩니다. 반면 성도들이 반드시 있어야 할 자리는 어디입니까? 3절에 나온 것처럼 시냇가입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열매를 맺는 것처럼 우리도 열매 맺는 성도가 되려면 반드시 은혜의 시냇가에 머물러야 하는 것입니다. 이 자리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복 있는 사람이 되지 못할 뿐 아니라 형통할 수도 없고, 나아가 절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가 될 수 없기 때문에 자리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오늘은 이 자리 중에서 성도들이 반드시 있어야 할 자리, 반드시 서있어야 할 자리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

기독교 정신으로 세워진 학교를 미션 스쿨(Mission School)이라고 부릅니다. 우리처럼 신앙을 가진 사람이야 미션 스쿨에 들어가면 참 좋지만 요즘처럼 평준화가 된 상황에서는 기독교인이 아닌데도 미션 스쿨에 들어가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미션 스쿨에서 반드시 참석해야 하는 채플(chapel), 즉 예배 시간이 가장 곤욕이라고 합니다. 하긴 교회도 안 다니는데 의무적으로 앉아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니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이해가 가는 일입니다. 그러다보니 어떻게든 채플 시간에 빠지려고 갖은 방법을 다 쓰게 되지요. 대출을 하기도 하고 출석카드만 내고 몰래 빠져나가기도 합니다. 

그래서 미션 스쿨마다 어떻게 하면 이 채플에 빠지지(땡땡이) 못하게 할까 골머리를 앓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어느 기독교 대학교 채플 시간에 참석해 보니까 이런 기발한 방법으로 출석을 체크하더군요. 채플실 좌석마다 지정석이 정해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 시간에 뒤에서 아르바이트 학생이 빈자리만 체크해보면 그 자리에 해당되는 학생이 누구인지, 누가 빠졌는지 금세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생각입니까? 

그래서 저는 우리 교회 예배당에도 지정석을 만들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아예 자리마다 이 자리는 누구 자리라고 이름표까지 붙여놓으면 더 좋지 않을까, 이렇게 명패를 붙이고 지정석을 만들어서 체크해 보면 이번 주일에 누가 결석했는지 쉽게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물론 우리교회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비록 이름표는 안 붙였지만, 눈에 보이는 지정석은 없지만 분명히 이 예배당 안에는 내가 앉아야 할 지정석이 있지 않겠습니까? 내가 반드시 앉아 있어야 할 자리, 내가 앉아서 예배해야 할 자리가 누구에게나, 모든 성도에게 다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배 시간에 내가 빠진다면 눈에 보이지 않지만 내가 당연히 앉아야 할 그 지정석, 내 자리가 비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배당에 내 자리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결코 예배시간에 다른 일로 인해 빠질 수 없을 것입니다. 예배당뿐 아니라 내가 교회 안에서 봉사하는 그 부서에도, 남녀선교회에도 내 자리가 있고, 심지어 천국에도 분명 내 자리는 있는데 혹시 내가 그 자리를 지키지 못해 비어있는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오늘 저는 시편 1편을 묵상하면서 우리 성도들에게는, 특히 복 있는 성도들에게는 반드시 지켜야 할 자리 세 가지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첫째는 바로 예배자의 자리입니다(따라 합시다). 우리는 세상 그 어느 자리보다, 특히 교회 안에서도 그 어떤 자리보다 이 예배자의 자리에 앉아야 합니다. 이 자리가 채워지지 않으면, 내가 이 예배자의 자리를 지키지 못하면 우리는 그 어떤 다른 자리를 지킨다 해도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배자의 자리는 어디일까요? 물론 좁게는 앞서 말한 대로 이 예배당에 있는 내 자리입니다. 내가 그 자리를 채우지 않으면 비는 자리 말입니다. 하지만 이 자리는 무엇보다 하나님 앞의 자리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마땅히 서야 할 자리, 마땅히 하나님 앞에 서야 할 시간이 엄연히 있는데 바로 그 시간에 내가 바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느냐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생활의 기본이자 시작은 주일성수입니다. 주님의 날인 주일에 내가 반드시 있어야 할 자리는 예배자의 자리입니다. 그 시간에 다른 장소에 가있느라 그 예배자의 자리를 지키지 못한다면, 그래서 주일성수 개념이 희미하다면 우리는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녀도 결코 신앙이 자라지 않게 됩니다. 

목회하다보면 참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저 분이 교회 다닌 지 제법 오래 되었는데 왜 저리도 신앙이 잘 자라지 않는 것일까? 그런데 가만히 보면 대부분 이 주일성수의 문제가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한 마디로 예배자의 자리를 지키지 못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하니 헤맬 수밖에요. 주일에는 반드시 예배를 드린다는 주일성수의 개념뿐 아니라 다른 교회 예배도 예배지만 언제나 내 교회, 내가 속한 교회에서 예배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자세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우리 교회를 보면 다른 교회에 비해 주일에 출타하는 분이 유난히 많습니다. 분명히 교인 재적은 많은데, 그 가운데서도 주일에 잘 나오는 분도 많은데 문제는 로테이션 식으로 교회에 출석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심지어 항존직분자 중에서도 주일에 가족이나 자녀를 찾아간다든지, 집안일이 있다든지, 개인적인 볼일로 인해 다른 곳에 가는 분들이 많습니다. 물론 그곳에 가서도 예배를 드린다고 합니다만 아무래도 신앙생활은 내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부분이 약해지면 오늘 본문 4절에 나오는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성도들 가운데 매주 이 교회 저 교회 탐방하듯 다니는 분들, 혹은 마음에 안 든다고 이 교회 저 교회 자주 옮기는 분들이 많은데 이렇게 해서는 신앙이 성숙하기가 참 힘듭니다. 하나님은 내가 속한 교회에서 뿌리를 잘 내리고 정착해서 그 교회 중심으로 신앙생활 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야 열매도 맺지 잘못하면 바람에 나는 겨처럼 언제나 예배자가 아닌 방문자의 자세로 신앙생활 하게 됩니다. 

심지어 예배자가 아닌 구경꾼처럼 될 수도 있습니다. 구경꾼이나 방문자가 소속감이나 애정이 있을 리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 여러분은 반드시 주일성수 하시고 내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을 최우선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 예배 때(주일뿐 아니라 수요일, 새벽, 월삭 등 모든 예배)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진지하고 진실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내가 드릴 수 있는 최선의 예배, 최고의 예배를 드림으로 진정한 예배자의 자리를 지켜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 맺는 성도가 되기 축원합니다.

둘째는 성도의 자리입니다(따라 합시다). 우리는 어느 교회 성도입니까? 우리교회지요. 그렇다면 마땅히 이교회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이렇게 교회가 많은데, 포항에도 이 곳에도 이렇게 교회가 많은데 왜 하필 나를 이곳 교회에 보내 신앙생활 하게 하셨을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이 교회를 잘 섬기고 이 교회를 중심으로 뿌리 내리는 신앙생활을 잘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소속감도 분명해야 하고 세상 어떤 교회보다 내 교회, 이 교회를 사랑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저는 가끔 밖에 나가서 자기가 다니는 교회를 탐탁지 않게 이야기 하는 성도들을 봅니다. 분명 그 교회 소속이고 그 교회에서 집사나 권사로 신앙생활 하는데도 언제나 입만 떼면 자기 교회에 대한 불만을 늘어놓곤 합니다. 물론 어느 교회나 다 부족하고 문제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소속감이 있는 성도들은 마치 남의 집 욕하듯 그런 자세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제 얼굴에 침 뱉기와 다르지 않습니다. 

내 집안 식구는 집안에 문제가 있어도 아파하지 함부로 비난하지 않습니다. 정말 비판하려면 내 살을 깎아내는 아픔으로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 아끼는 마음으로 하지 남의 집 이야기 하듯 그렇게 쉽게 말하지 않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의 교회가 아무리 큰들, 아무리 시설이 좋은들, 남의 교회가 아무리 뭐 잘하고 장점이 있은들 그것은 어디까지나 남의 교회일 뿐 내 교회일 수 없습니다. 

비록 좀 부족해도, 비록 교회가 좀 작아도, 교회당은 낡고 시설은 열악해도 내 교회입니다. 성도들 가운데 좀 불편한 일이 있어도 내 교회는 내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세상에서 제일 좋은 교회가 어디냐?”고 물으면 자신 있게,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디긴요. 내 교회지요.” 이렇게 말할 자신이 없다면 그는 행복한 성도일 수 없습니다. 별로 탐탁지 않은데, 너무 마음에 안 드는 게 많은데 억지로 다니는 교회라면 얼마나 불행합니까? 그러니까 교회 와서 불평하지 마세요. 싫은데, 행복하지도 않은데 억지로 다니는 불행한 성도가 되지 않기 바랍니다.

목회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목회자가 바로 내 목회자라는 생각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훌륭하다고 신령하다고 하는 목회자라도 남의 교회 목회자일 뿐입니다. 물론 그분들을 배척하고 멀리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분들의 설교에 은혜 받을 수도 있고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내 교회 중심으로 신앙생활 하는 것처럼 내 목회자의 영적 지도를 최우선으로 따르고, 내 목회자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내 목회자를 잘 도울 수 있어야만 내 신앙도 성장하고 교회도 발전할 수 있는 법입니다. 

내 지도자를 귀히 여기고 잘 돕고 세우려는 마음 없이 신앙생활 하면 참 힘듭니다. 그 지도자의 영적 지도를 받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앙도 잘 성장하지 않는 것입니다. 저를 비롯해 우리 교회 모든 목회자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지도자들은 결코 완전하지 않습니다. 약점도 있고 부족한 점도 있습니다. 하지만 목회자와 성도가 서로 신뢰하고 아끼고 밀어주지 않으면 거기에 어떤 선한 역사도 일어날 수 없습니다. 이상하게도 내 목회자에 대한 자부심이 없고 불만이 많은 분들이 신앙생활도 그리 행복하게 하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이런 분들은 목회자를 위해 기도하거나 잘 위해주는 것조차 거북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는 신앙생활도 교회 나오는 것도 행복하기 어렵습니다. 부모가 싫고 가족이 싫으면 집에 들어가기도 싫어지는 것처럼 교회 가는 것이 즐거울 수 없는 것입니다. 부족하면 기도해 주세요. 못난 점이 보이면 보듬고 도와주세요. 그러면 목회자도 성장하고 나도 성장합니다. 교회도 성장합니다. 그래서 항상 내 교회, 내 목회자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신앙생활을 하시라는 것입니다. 목회자뿐 아니라 내 교회 성도들을 가장 사랑하고 아끼고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교회도 사랑하게 되고 신앙생활도 즐겁게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직분자의 자리입니다(따라합니다). 나는 교회 안에서 어떤 직분을 맡았습니까? 나는 그 직분, 그 자리를 잘 지키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 자리에 조금은 부끄럽게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교회의 직분마다 맡기신 책임이 다릅니다. 목사에게는 목양의 책임을, 장로님들에게는 교회를 치리하고 잘 이끌어가는 책임을, 권사 집사 회장 총무 모두에게 저마다 고유하고도 막중한 책임을 맡기셨고 각자가 그 책임, 그 자리를 잘 채워갈 때에만 교회는 합력하여 잘 돌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직분자에게 가장 위험한 자세는 직무유기입니다. 직무유기라고 하니 너무 거창하게 혹은 기분 나쁘게 들리시나요? 아니요. 내게 맡기신 나에게만 주신 그 고유하고도 막중한 사명을 잘 감당하지 못하면 틀림없이 영적 직무유기입니다. 저는 신학교 동기가 무척 많습니다. 입학할 때 워낙 많이들 뽑아놔서 신학과 입학 동기만 273명입니다. 

앞의 선배들은 불과 60명에서 100명 사이였는데 동기회를 하면 거의 다 참석을 한다고 합니다. 반면 270여 명이나 되는 저희 동기들은 동기회를 하면 30~40명밖에 참석 못 합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이것입니다. 숫자가 적으면 나 없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강한데 숫자가 많아지면 나 없어도 누군가 대신 그 자리를 채우겠지 하는 생각 때문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생각, 바로 “나 없으면 누가 하랴”는 생각과 “나 없어도 누군가...” 하는 생각의 차이가 이같이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이번 주 화요일에 권사회 총회를 합니다. 제가 그 때 이런 말을 할 겁니다. 권사님들이 100명이나 되고 보니 좋긴 한데 빈자리가 너무 많이 보인다고 말입니다. 아무래도 숫자가 많다보니 옛날 숫자가 적을 때보다 “나 없어도...” 하는 생각이 드는 것 같아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수요일 권사찬양대에도, 모든 기도회나 봉사의 자리에도, 또 성도들의 경조사에도 마땅히 우리 권사님들이 있어야 할 자리가 너무 많이 빕니다. 

물론 늘 그 자리를 어김없이 채우는 귀한 분들도 많지만 왠지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요. 제가 봐도 빈자리가 많이 보이고 이렇게 안타까운데 하물며 하나님 보시기엔 어떠실까요? 지금 제가 어디 권사님들 얘기만 하려는 것이겠습니까? 장로님도, 안수집사님들도, 서리집사님이나 모든 성도들이 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고유하고도 막중한 직분과 사명이 있습니다. 심지어 구역원도 청년부원도 직분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 아니라 ‘내게’ 주신 사명입니다. 나만의 사명입니다. 내가 아니면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귀중한 자리입니다. “나 아니라도...”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그 귀한 자리를 비워두시겠습니까? 그것은 내 직분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는 불충(不忠)입니다. “목사님이 제 사정 몰라서 그래요. 누가 감당하기 싫어서 못하나요. 직장, 가정, 자녀 말 못할 사정이 있어서 그러죠” 하는 섭섭해 하는 분도 있겠지요. 제가 잘 압니다. 여러분 힘든 사정을 그래도 담임목사인 제가 가장 잘 압니다. 그런데 충성은 시간 남아서, 안 바쁘거나 여유 있어 하는 분이 하나도 없습니다. 결국 충성은 자세의 문제지 환경의 문제는 아닌 것입니다.

❚내 자리를 채우게 하소서

오늘 우리 성도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자리, 채워야 할 자리 세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첫째가 예배자의 자리요, 그 다음에 성도의 자리, 직분자의 자리였습니다. 이 세 자리만 잘 지켜도 많은 열매가 맺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들으며 나는 과연 이 자리들을 잘 지키고 있는가 점검해 보기 바랍니다. 목회자의 설교를 들으며 나를 책망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요즘 내 신앙생활을 한 번 점검해 보라고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이구나 하고 받아들이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 자리를 잘 지키는 성도가 될 때 우리는 철을 따라 열매를 많이 맺고 형통한 복 있는 성도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세계 최고의 철강왕 카네기가 자신의 뒤를 이어 철강 회사를 운영할 후계자를 지명하게 되자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었습니다. 그 회사의 중역들 중에는 탁월한 사람이 너무도 많았기 때문에 그들 가운데 과연 누가 후계자가 될 것인지 초미의 관심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카네기는 놀랍게도 모든 사람의 예상과 달리 ‘쉬브’라는 무명의 인물을 후계자로 지명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놀란 까닭은 그가 무명의 인물이기도 하지만 겨우 초등학교밖에 졸업하지 않은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쉬브는 본디 정원 청소부로 입사했는데 정원 청소뿐 아니라 시키지도 않은 공장 내부 청소까지 말끔히 해놓곤 해서 그 성실과 근면이 인정받아 정식 직공으로 채용되었습니다. 그러다 사무원으로 승진되었고 마침내는 카네기의 비서로 발탁되었던 것입니다. 카네기의 비서가 된 쉬브는 메모지와 펜을 들고 마치 카네기의 그림자처럼 그의 뒤를 따라다니며 그를 보좌했습니다. 

그의 손에는 항상 메모지가 들려 있었고, 사장인 카네기의 지시를 일일이 받아 적고 체크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카네기가 밤늦도록 사무실에 있다가 집에 가려고 일어나 밖에 나와 보니 쉬브가 그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고 있었습니다. 놀란 카네기는 “왜 아직도 퇴근하지 않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사장님께서 저를 언제 부르실지 모르는데 어떻게 자리를 비울 수 있습니까?”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쉬브는 카네기가 가장 신임하는 사람이 되었고 나중에 후계자가 되어 회사 경영을 물려받게 된 것입니다. 자기 자리를 잘 지켰기 때문입니다. 남들보다 더 성실하고 충성스럽게 지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똑똑하고 잘 난 사람을 찾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성실하고 충성된 사람을 찾으십니다. 자신의 자리가 어디인지 알고 그 자리를 누가 뭐래도 성실하게 지키는 사람을 찾아 쓰십니다. 이런 사람만이 우직하게 하나님 나라를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교회에 이런 우직하게 자리를 지키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많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바로 그 사람이 되십시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 25:2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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