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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엇이 믿음인가? (막 9: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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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믿음인가? (막 9:14~29)


중국 진나라 때의 고전인 “여씨춘추”에 나오는 이야기 한 토막입니다. 
어떤 나무꾼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어쩌다가 그의 도끼를 잃어버렸습니다. 아무래도 옆집에 사는 아이가 의심이 갔습니다. 그 아이가 훔쳤다는 생각이 그에게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아이를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아이의 얼굴표정이나 하는 몸짓을 보아서 자기의 도끼를 훔쳐간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나무꾼은 산에서 나무를 하다가 우연히 그곳에서 자기가 잃어버린 도끼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나무꾼은 자기가 실수로 그곳에 도끼를 떨어뜨려 놓고서는 괜히 옆집에 사는 아이를 의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서 그 아이를 다시 쳐다보았습니다. 그 아이는 완전히 다르게 보였습니다. 너무나도 순진한 모습으로 보였습니다. 그 아이의 얼굴 표정이나 하는 몸짓으로 보아서 다른 사람의 물건에 손을 댈 아이로는 전연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애당초부터 이 아이는 변한 것이 없습니다. 변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 아이를 바라보는 나무꾼의 시각이 달라졌을 뿐입니다. 결론은 무엇입니까? 쓸데없이 다른 사람을 의심하는 것은 자기가 고쳐야 할 고질적인 병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깨우쳐 주는 이야기입니다.

의심한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냥 좋은 관계로 지낼 수 있었지만 또 지극히 좋은 관계를 유지해 왔는데 어떤 작은 변화 하나가 서로를 갈라놓을 수 있습니다. 내가 보고 듣고 경험해서 아는 것 때문에 그렇기도 하고 내가 처해 있는 환경 때문에 그렇기도 합니다. 그것이 내 생각과 맞아 떨어지게 되면 그래 그건 정말 그래 하고 인정을 합니다. 그 결과 누가 좋아 보이기도 하고 오히려 나빠 보이기도 합니다. 상대방이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문제는 나의 생각이 달라졌을 뿐입니다. 

참 이상한 것은 이 사람이 이런 이야기 하고 저 사람이 저런 이야기하는데도 꼭 자기 마음에 드는 이야기만 골라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만 맞다고 합니다. 다른 건 다 아니라네요. 그러면서 T.V에 누가 나와서 말하는데 또는 어느 의사가 말하는데 어느 박사가 말하는데 하면서 자기 주장의 정당성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요? 그럼 거기 대해서 하나님은 뭐라고 하시는지 아세요? 

먼저 생각할 것은 연약함은 누구에게나 다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너는 왜 그러냐?” 또 “나는 왜 그러냐?”고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판단 근거가 객관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 내가 하는 일마다 안 되는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뭐 재수 없는 사람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고 합니다. 

아니 뒤로 넘어지면 뒤통수가 깨져야지 왜 코가 깨집니까? 그런데 꼭 그런 사람이 있다네요. 어쩌다가 버스를 타려고 정류장에 가서 기다리다 보면 그렇게 자주 보이던 버스가 왜 그리 안 오는 겁니까? 아니면 정류장에 막 도착하는데 저 앞에 버스가 떠납니다. 그래 급해서 택시를 타려고 기다렸더니 빈 택시는 반대편에만 나타납니다. 기다리다 못해 건너가면 먼저 있던 쪽에 자주 옵니다. 모처럼 큰 맘 먹고 세차를 했더니 비가 오는 건 또 뭡니까? 그래 그런 말도 합니다. 

나는 운도 지지리도 없다고. 하지만 그건 나의 연약함일 뿐입니다. 그만큼 우리네 생각은 안 좋은 쪽으로만 가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왜 나만이 아닙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들이 한 두 사람만이 공감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은 무얼 말합니까? 우리 모두가 다 똑같은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왜 그렇습니까? 바로 우리의 연약함 때문입니다.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고 해도 그에게도 약점은 있기 마련입니다. 다른 사람은 당신처럼 행복한 사람이 어디 있냐고 하지만 그 사람 나름대로는 나는 이런 점에서는 부족하다고 하는 부분이 다 있습니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우리가 착각하고 있는 것은 나만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누구나 겉으로 보기에는 다 좋아 보여도 속을 들여다보면 누구나에게 부족한 부분이 있고 약점이 있게 마련입니다.  

문제는 그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부분이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귀신 들려 말 못하고 듣지 못하는 아들을 둔 아버지의 경우가 또한 그렇습니다. 말 못하게 귀신들린 아들을 보는 그 아버지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그것도 어릴 때부터 그랬다고 하니 지금 그 아들의 나이가 얼마나 되는지는 몰라도 그동안의 고통이라고 하는 것을 무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때는 한숨을 내쉬며 무자식이 상팔자라더니 정말 자식이 원수라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말이 그렇지 그렇다고 자식을 내다 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귀신이 어디서든지 아이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해지는 그 모습을 볼 때마다 피눈물을 흘리며 어떻게 해서든 그 아이를 고쳐주고 싶은 마음에 이곳저곳을 찾아다녔을 것입니다. 그러던 차에 예수님이 거라사 군대 귀신들린 사람을 고쳐주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 수소문하여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그래서 제자들에게 자기 아이로부터 귀신을 내쫓아 달라고 부탁했지만 제자들이 능히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직접 귀신을 내쫓아 달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아버지의 연약함은 바로 자식 사랑입니다. 자식을 사랑하는데 자식에게 온전히 줄 수가 없습니다. 아니 자기 능력 밖의 일입니다. 차라리 자기 목숨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래서 자식을 고칠 수 있다면 아마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도무지 방법이 없습니다. 있다면 귀신을 내쫓으면 되는데 그럴 힘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이 아버지에게는 이 자식이 제일 큰 약점이요 아픔입니다. 

이처럼 약점이자 아픔이 자기 가족일 경우도 흔합니다. 부모일 수도 있고 자식일 수도 있습니다. 남편일 수도 있고 아내일 수도 있습니다. 일가친척이기도 하고 가까운 이웃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내가 감당해야 할 몫입니다. 약한 건강이 약점일 수도 있고 성격적인 모남이 약점일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모두가 다 좋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나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습니다. 염소에게 있어 튼튼한 뿔은 좋은 무기가 되지만 반대로 그 뿔 때문에 염소 한 마리는 이삭 대신 제물이 되었습니다. 

누구는 마음이 모질어서 문제라면 누구는 또 마음이 너무 좋아서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경우에 따라서는 약점 같은 것이 강점이 될 수도 있고 강점 같은데 약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특히나 우리 믿음 안에서는 오히려 약점이 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것이 왜 감사가 되느냐고요? 내가 약하다는 것을 알면 나를 더 조심할 수가 있고 내가 약하기에 더 주님을 의지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적어도 한 가지씩은 다 약점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약점들을 우리는 애써 부정하거나 스스로 방어합니다. 또는 남의 탓을 해가면서 변명하거나 감추려고 애씁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단점에 대해서 좀 다른 생각을 갖고 계신 것 같습니다.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는 주님은 오히려 약점이 있는 사람들을 선호하셨습니다. 그리고 위대한 지도자로 만들어 사용하셨습니다. 성격이 불같았던 전과자 모세, 왜소 콤플렉스의 기드온, 치명적인 도덕적 결함의 소유자 다윗 등등. 이 모두 하나님의 작품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결함있는 자를 고쳐 쓰는 게 하나님의 주특기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결코 사람의 약점에 의해 제한되지 않습니다. 나의 과거가 어떠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부끄러운 모습만으로 가득했던 나라고 해도 말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쓰시고 안 쓰시고는 나의 약점이 결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하나님 마음이십니다. 하나님은 이가 다 빠진 흔해 빠진 질그릇에도 보배를 담아 놓는 분이심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므로 이제는 주님을 찾으십시오. 주님을 향해 눈을 드십시오. 그리고 그 주님께 나의 모든 약함을 드리십시오. 그래서 이제 주님이 나의 약점을 통해 오히려 크고 놀라운 일을 나타내시는 귀한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믿음입니까? 
여기 아들을 데리고 온 아버지가 예수님께 말합니다. 
“내가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달라 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예수님은 분명히 지적해서 믿음이 없는 세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아이를 데려온 아버지 당신부터 믿음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그에게는 들을 귀가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아이를 예수께로 데려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그가 땅에 엎드러져 구르며 거품을 흘리는 것이 아닙니까? 예수께서 그 아버지에게 물으십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어릴 때부터니이다.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그는 지금까지 가는 곳마다 기대를 안고 갔다가 실망하고 돌아선 경험을 떠올리고 있습니다. 아니 방금 전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자기 아들에게서 귀신을 내쫓아 달라고 했지만 제자들이 능히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또 다시 실망한 참입니다. 그래 선생님인 예수님께로 다시 아이를 데리고 왔지만 그의 마음에는 혹시 이번에도 안 될지 모른다고 하는 마음으로 가득합니다. 그런 그의 마음의 상태를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주님께서 믿음이 없는 세대라고 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믿음으로 반응하지를 못합니다. 여전히 그의 마음은 의심으로만 가득합니다. 

“과연 될까? 말은 그렇게 하지만 역시 안 될지도 몰라.” 
그때 예수님께서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그러자 예수께서 무리가 달려와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이르시되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니 귀신이 소리 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 같이 되었습니다. 그걸 보고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섰습니다.

여기서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과연 믿음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뭘 말하는 거예요? 뭐가 믿는 거예요? 그저 예수님만 믿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무엇을 믿는 것입니까? 단지 우리의 구주가 되심만 믿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믿는다는 것은 곧 예수님의 전인격적인 모든 것을 믿는 것입니다. 주님의 모든 말씀과 더불어 역사하시는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결코 의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생각은 엉뚱한 데로 달려갑니다. 지금까지 내가 보고 듣고 아는 상식에서부터 출발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말씀을 있는 그대로 신뢰하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아니 누구도 누구도 똑같이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말씀은 그렇게 이야기하냐고 합니다. 그러니까 말씀에 신뢰를 두는 것이 아니라 내 상식과 경험에 신뢰를 둡니다. 세상의 과학이 말씀보다 앞섭니다. 

그저 말씀은 어디까지나 말씀일 뿐 삶은 다르지 않냐고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결국 의심한다는 것은 믿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한데 정작 병원에는 한 달씩 두 달씩 다니면서 입으로는 병원 만날 다녀도 낫지도 않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갑니다. 왜요? 아무리 병원 다녀봐야 소용없다고 하면서도 돈 들여 병원 가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막연한 기대에요. 그러다 보면 나을 때도 있겠지.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는 얼마나 신뢰를 두고 있나요? 한 번 기도하고는 낫지 않는다고 역시 안 된다고 포기하지 않나요? 

알렉산더 대왕이 신하들에게 땅을 나눠줄 때였습니다. 공이 많았던 장군들에게 이집트, 시리아, 마케도니아가 분배되기 시작했습니다. 왕이 리시마쿠스 장군도 불렀습니다. 그는 평소에 왕의 총애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아무 것도 얻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왕이 물었습니다. 

“리시마쿠스, 그대는 원하는 것이 없는가?” 
사람들은 그가 사소한 것을 구할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대담한 요구에 사람들이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소아시아를 주십시요.” 
왕이 다시 물었습니다. 
“리시마쿠스, 내가 소아시아를 줄 것이라고 그대는 믿었는가?” 
“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그대에게 소아시아를 주겠노라.” 
그렇게 해서 소아시아의 넓은 땅이 그에게 할당됐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게 있습니다. 대단한 기적을 일으키려면 큰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단순히 믿음이 있기만 하면 큰 기적이 일어납니다. 믿음의 대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진정한 믿음의 유무입니다. 
믿음이 겨자씨 한 알만큼만 있어도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납니다. 물음료 ‘2% 부족할 때’는 물 같지만 물이 아닙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같아도 속이 다릅니다. 

믿음도 그렇습니다. 겉보기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자는 반드시 기적을 끌어당깁니다. 제자들의 관심사는 믿음을 더 키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관심사는 제자들이 단순히 믿음을 갖는 것이었습니다.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뽕나무가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겨진다는 것은 소설도 안 다루는 비현실입니다. 그러나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으면 그런 비현실도 현실이 된다는 것입니다. 과장법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자꾸 믿음을 키워 주시라고 기도하지만 주님은 믿음이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아무리 작아도 믿음이 있기만 하면 큰 기적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우리의 기도가 바뀌어야 합니다. 믿음을 더해 주시라는 기도가 아니라 그냥 단순한 믿음을 갖게 해달라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귀신들려 말 못하는 아들을 둔 아버지의 외마디가 우리의 기도여야 합니다.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믿음의 유무는 2%의 차이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이 되지 말고 어떤 말씀도 믿음으로 화답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겨자씨 한 알의 믿음만 있어도 뽕나무가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겨지는 기적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의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신뢰하십시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신뢰하십시오. 하나님이 약속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그 하나님이 사랑하시며 함께 하시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십시오.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끝까지 믿어 주십시오. 하나님은 다윗을 끝까지 믿어주셨습니다. 내 감각을 믿지 마십시오. 여전히 아픕니까? 하지만 하나님의 역사와 그 약속의 말씀을 더 신뢰하십시오. 나는 내 생각과 내 경험과 내 감각과 상황보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의 능력을 더 믿는다고 고백하십시오. 그래서 뽕나무가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겨지는 기적과 같은 크고 놀라운 일이 우리 모두에게 나타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두려워하거나 염려하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결국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아니라고 나는 하나님은 믿는다고 하겠습니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약속과 말씀의 능력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나로 하여금 의심케 하고 믿지 못하게 하는 악한 마귀보다는 우리 안에 함께 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더 크고 놀라우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귀보다는 하나님을 더 신뢰하는 것입니다. 대저 주의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의 능력을 믿으십시오. 그러니까 뽕나무가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겨지라고 하는 것처럼 믿음으로 나의 약점이 강점으로 바뀌어지라고 선포하십시오. 나의 몸의 모든 약한 부분은 사라지고 오히려 주님의 능력만 드러나라고 외치십시오. 

“나의 몸의 이런 저런 병은 내게서 옮겨지라. 나의 환경의 어두운 부분은 다 사라지라. 오직 주의 은혜만 밝게 빛나라. 나로 하여금 의심케 하는 모든 것들은 사라지라. 내 안에 의심하는 마음과 생각은 사라지라. 나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믿는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믿는다. 오직 주의 말씀과 은혜로 이길지어다. 사랑으로 충만하라. 그 사랑으로 온전히 하나가 되라.” 
이렇게 외치십시오.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고 또한 선포하시고 고백하십시오. 
제자들이 묻습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그래서 기도가 필요합니다. 기도하십시오. 기도하며 주의 이름을 힘입어 주의 이름으로 모든 환경과 의심케 하는 것들과 갈라지게 하는 것들과 염려케 하는 것들과 우리를 힘들게 하는 모든 것들을 꾸짖어 옮겨가라고 명령하십시오. 모든 악한 마귀의 궤계를 예수 이름으로 묶어 버리십시오.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한 번 기억하십시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우리 모두가 이런 믿음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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