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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사야의 삼중 이상 (사 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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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이사야의 삼중 이상 (A Vision in Three Dimensions)
성경 : 사 6:1-8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그리스도인의 삶을 성공적인 삶으로 이끄는 두 가지 불가결한 요소는 이상(Vision)과 열정(Passion)입니다. 성공적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일할 때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비난과 비판의 화살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심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이상(理想)을 부여잡고 열정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죠지 디킨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과업(Task)이 없는 이상은 공상가를 만들고 이상이 없는 과업은 다람쥐 체바퀴 도는 인생을 만들지만, 과업이 있는 이상(Vision with Task)은 사명자(Missionary)를 만든다.”  

그렇습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선지자 이사야는 이상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그의 삶을 송두리째 변화시킨 비전 체험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체험입니다. 
  
그는 성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목도했고, 스랍 천사가 단에서 취한 숯불로 입술을 지지는 상징적인 행위를 통하여 죄사함 받는 비전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자원함으로써 하나님의 메신저(Messenger)로서 세움을 받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이사야 선지자가 보았던 삼중 이상을 살펴보며, 우리 각자에게 주시는 주님의 비전을 사모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 위로 향한 비전 (적용적해석: 높은 이상, Upward vision)
  
1절=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이사야는 이상을 세 가지 면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먼저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계신’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사야의 눈에 보인 주님은 지금 천상에 있는 여호와의 궁전 보좌에 앉으셨습니다.
  
여기 ‘주’에 해당하는 ‘아도나이’는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호칭입니다. ‘아도나이’ 께서는 인간 세상 뿐 아니라 온 우주를 권능으로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요 12:41절에 따르면 이분은 성육신 하기 전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은 그때에도 임마누엘로서, 자기 백성 가운데 좌정하시고 일꾼을 부르시고 백성에게 자신의 뜻을 보이신 분이십니다.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하였다’ 라는 것은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위엄과 권능이 온 세상을 덮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선지자에게 주신 비전은 ‘위로 향한 비전’ 이요 또한 ‘높은 이상’ 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선지자의 이상은 높은 이상이었습니다. 그는 여호와께서 높이 들려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때는 남유다 10대 왕이었던 웃시야 왕이 죽던 해인 B.C. 739년입니다. 웃시야가 누구입니까? 위대한 왕이었고, 백성들에게는 그분 외에는 왕이 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정도의 절대적인 이름이었습니다. '웃시야‘라는 이름은 ‘여호와의 능력’ 이란 신앙적인 이름입니다. 그는 15세에 유다의 왕위에 올라 무려 52년간이나 통치한 왕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굳게 신뢰하고 선지자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블레셋과 암몬을 정복하고 애굽의 변방에까지 명성을 떨쳐 당시 왕국의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교만에 빠져 제사장 외에는 들어가지 못할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려 했고, 그것이 죄라고 말리는 선지자 아사랴의 손을 뿌리치면서 분향하기를 고집하는 순간, 하나님께서 그를 치사 문둥병을 발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는 왕궁이 아닌 별궁으로 내려앉게 되었고, 67세에 쓸쓸히 세상을 뜨게 된 것입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 에 이사야 선지자는 하늘 보좌의 위대한 영광을 보았습니다. 당시는 위대한 왕이 죽어 온 나라가 슬픔에 잠기게 되었고 앞날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할 때입니다. 이 때 선지자의 신령한 눈에 하나님의 영원하고 항구적인 통치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세상의 훌륭한 왕은 죽었으나 또 다른 왕, 전능하신 왕이 영원히 살아계셔서 온 세상을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선지자는 확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선지자의 이상은 계속됩니다.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2절). 하나님의 영광이 얼마나 눈부신지, 비록 천사라 할지라도 자기의 얼굴을 가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천사들은 두 날개로 얼굴을 가림으로써 자신들의 연약함과 무가치함을 보였고, 두 날개로 발을 가림으로써 겸손을 나타내었습니다.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3절). 천사들의 찬송은 첫마디가 3중적인 거룩의 송영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과 확연히 구별되신 분으로서, 누구든지 이 거룩함이 없이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음을 암묵적으로 나타냅니다. 

사실 ‘하나님의 거룩’은 이사야의 신학 주제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The Holy One of Israel) 라는 말이 다른 성경에 총 6회 나오는 데 비해 이사야서에는 26회나 언급되어 있습니다. 
선지자의 눈에 비친 천상의 모습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라고 천사들이 끊임없이 찬송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4절=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천사들의 서로 화답하는 노래로 인하여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권능 있게 임하실 때에 수반되는 현상입니다. 

여러분, 이 놀라운 광경을 접한 선지자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선지자가 눈을 들어 위를 보았을 때, 그는 여호와께서 모든 거룩함 가운데 계심을 보았고 성전에 충만한 여호와의 영광에 압도되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위로 향한 비전’이 필요합니다. ‘높은 이상’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은혜의 세계를 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거룩하심 앞에 천상의 천사들과 모든 피조물이 종일토록 찬송하는 모습을 느껴야 합니다. 
   
서현의 성도 여러분에게 이사야처럼 ‘높은 이상’을 소유하는 은혜가 있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안으로 향한 비전 (적용적해석: 깊은 이상, Inward vision)
  
5절=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본문의 체험을 하기 전 이사야는 많은 사람에 대하여 많은 화를 발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제 자신을 보고 외칩니다. 
  “화로다 나여!” 
  “나입니다, 나입니다. 오 주여, 입술이 부정한 자는 바로 나입니다!  기도가 가장 부족한 자는 바로 나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뵙게 된 선지자는 이제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게 되었습니다. 자기 속의 더럽고 추한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거룩하시고 영광스러우신 하나님을 감히 찬양할 자격이 없는 자임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슬피 부르짖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성도 여러분!  이사야가 보았던 이상은 안으로 향한 이상이요, 깊은 이상이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바로 이 깊은 이상입니다.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마음을 철저하게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내 마음 속에 더러운 사진이 걸려 있는 방은 없는가? 
  내 마음의 벽장 속에 감춰둔 우상은 없는가?
  내 속에 숨겨둔 샘물은 없으며, 내 영혼의 왕좌에 앉아서 일을 그르치는 마음의 은밀한 동기나 누룩덩이는 없는가?
  나는 과연 성령님을 모시고 내 마음의 복도를 걸어나가도 부끄러울 것이 없는가? 

우리는 자주 자신의 눈으로부터 자신을 숨겨서, 자신의 추한 모습으로 인해 기분을 상하지 않으려 합니다. 하나님의 살피시는 눈동자를 모셔와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 부패하고 흠집투성이며 냄새나는 자신을 정리해 달라고 요청해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감당하지 못하고 외쳤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이때 탄식하는 선지자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의 모습을 보십시오. 
 
 6절=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7절=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이것은 모세의 율법에 있는 대로(레 16:12) 대속죄일에 제단 숯불을 가져다가 지성소에서 분향하여 향연으로 속죄소를 가리우게 하는 의식에서 온 것입니다. 7절은 입술이 부정하다고 외치는 선지자를 하나님께서 정결케 하시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천사가 하늘 제단의 숯을 이사야의 입에 댄 것은 그의 입술의 더러움을 태워버리는 정화의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린양의 희생으로 죄용서함 받는 것’을 상징합니다. 

  성도 여러분!  선지자의 이상은 안으로 향한 깊은 이상이었습니다.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이사야를 제단 숯불로 깨끗하게 해 주시는 장면은 오늘 우리에게 회개하는 자를 성령의 불로 정결케 하시는 하나님을 알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제거하는 조건은 단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죄인을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여 자신의 죄인 됨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여 자신의 추함과 더러움을 솔직히 인정합시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오직 주님의 은혜로만 죄사함 받게됨을 고백합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함 받는 은혜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3. 밖으로 향한 비전 (적용적해석: 넓은 이상, Outward vision)
  
8절=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이사야 선지자는 사죄의 확신을 갖게 되면서 그의 내면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귀가 열리고 마음이 열립니다. 영의 눈이 열립니다. 
선지자는 이제 일꾼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8절).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여전히 돌아보고 계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님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메시지를 전달할 메신저(Messenger)를 찾고 계셨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주신 이상은 밖으로 향한, 넓은 이상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선지자 이사야가 받은 이상은 유다 백성들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전할 헌신된 종을 찾으시는 주님의 모습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당신의 메시지를 세상에 전할 사자를 당신의 백성들 가운데서 찾고 계십니다. 천상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천사들이 있지만, 주님의 뜻은 자기 백성 가운데서 일꾼을 찾으시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큰 은혜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을 목도한 높은 이상과 자신의 내면의 죄악을 회개하여 죄사함을 맛본 깊은 이상의 소유자라면, 우리의 귀에도 일꾼을 찾으시는 주님의 음성이 들려올 것입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 우리도 이사야 선지자처럼 주저하지 않고 즉시 응답하여야 할 것입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8절).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디로 보내실지, 그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묻지 않았습니다. 어떤 고난의 잔을 마셔야 할지, 어떤 피뿌림의 세례를 받아야 할지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그 일이 무엇이든 간에 선지자가 본 넓은 이상은 그를 준비된 자로 만들었습니다. 사실 이사야에게 주어진 임무는 매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그는 유다가 곧 멸망당할 것과 바벨론에 포로되어 잡혀갈 것을 선포해야 했고, 그중 소수의 남은 자만이 다시 고토로 돌아올 것을 예언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그럼에도 선지자는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것은 사람의 생명을 참으로 사랑하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응답입니다. 후일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충성스럽게 전하다가 악독한 므낫세 왕에 의해 혹독한 방법으로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그가 선지자로 자원한 것은 단순한 영웅심에서가 아니라 분명한 소명의식과 사명감 속에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그처럼 가슴 울리는 계시를 위탁하실 수가 있을까요? 여러분은 선지자처럼 고난의 학교와 기도의 수련과정을 수료했습니까? 그리하여 여러분의 심령이 그처럼 넓은 이상을 견뎌낼 수 있을 만큼 굳세어졌습니까? 주께서 그러한 이상을 보내어주시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온 세상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지 못한 채 멸망의 길로 줄달음치고 있습니다. 주님의 안타까운 심정을 통계를 통해 짐작해 봅시다. 
  
중국은 14억의 인민 중 13억 이상이 복음을 듣지 못한 채 멸망하고 있습니다. 인도는 10억 이상의 사람들이 어두움과 사망의 그늘 아래 죽는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일본은 1억3천의 인구 중 기독교인은 100만이 채 되지 않습니다. 터키는 7천만 인구중 기독교인은 100명 정도이고, 사우디아라비아에는 공식적인 그리스도인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상의 부담에 좀 더 보탠다면, 지구촌에는 13억의 회교도와 6억의 힌두교도, 4억의 불교도, 1,700만 유대인들이 있으며, 성경적 복음이 희미한 로마카톨릭이 14억에 달합니다. 이 모든 이들을 위하여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는데, 그들 대부분이 아직 축복과 해방의 복음을 받지 못한 채 한 주간에 수백만명 이상이 예수님 없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 사실이 여러분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까?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러시아나 중국에 대해서보다 미국이나 유럽, 특히 한국에 대해 더욱 분노하시는 듯합니다. 10억이 넘는 중국인, 수천만의 러시아인들은 성경책도 없고 설교 한 번 들어보지 못하고 기독교 방송을 접한 적도 없습니다. 허용되기만 한다면 그들은 교회에 나갈 것입니다. 
  
구세군 창설자인 윌리암 부스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구세군 사관들을 위한 마지막 훈련 과정으로 지옥 위에 24시간 매달아서 그 영원한 고통을 보고 느끼도록 하고 싶다.”

  찰리 피스는 하나님의 법과 사람의 법을 무시한 흉악범이었습니다. 그는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영국 리즈시 아멜리 교도소에서 그는 사형 집행일의 아침을 맞았습니다. 교도소 목사님이 조금 졸리는 가운데 성경 구절을 낭독하면서 그의 앞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찰리는 목사님을 불러서 지금 읽으시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대답은 “종교의 위안”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사형수 찰리는 그 목사님이 지옥에 대해 읽고 있는 태도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한 인간이 지금 형틀의 어두운 그림자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는데, 어찌 그렇게도 말짱한 눈으로 영원한 불못에 대하여 초연하게 줄줄 읽어 내려갈 수 있단 말입니까?  “그대는 영원한 사망에 이를 것이며, 사망은 구원의 모든 소망을 상실한 상태를 의미하오.”
  이 모든 말이 찰리에게는 너무나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목사님!” 하면서 전도자를 불렀습니다. 사형수 찰리의 지옥 전야 설교를 들어봅십시오.
  “만약 제가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것과 교회의 가르침을 확실히 믿는 사람이라면, 동해에서 서해까지 영국이 온통 깨어진 유리로 덮여 있을지라도, 한 영혼을 그처럼 지옥에서 건져내기 위해서 필요한 일이라면 맨발로 걸으며 나아가겠습니다. 아니 영혼을 살리기 위해서 꼭 필요하다면 손바닥과 무릎으로 기어서라도 가겠습니다!”

[나오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거룩하고 위엄이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을 본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바로 서 있을 수 있습니다. 
  거룩하신 주님을 매일 바라볼 때 우리는 주님의 편재하심(Omnipresence)에 고개를 숙이게 되고, 주님의 전능하심(Omnipotence)에 놀라게 되며, 주님의 전지하심(Omniscience)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게 되고, 주님의 거룩하심에 엄숙해질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비전을 갖고 있습니까? 이상 없는 백성, 이상 없는 교회는 망합니다. 
  선지자처럼 우리도 위를 봅시다. 거기 높은 보좌 위, 그리스도의 영광이 가득한 모습이 보일 것입니다.
  그분 앞에 선 나 자신의 초라한 내면을 보는 눈이 필요합니다. 내게는 그리스도의 보혈이 필요하고 주님의 부활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마침내 용서받은 자로서 성령의 능력을 받아 세상을 향해 시선을 넓히는 예수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선지자가 가졌던 높고 깊고 넓은 3중 이상입니다. 높은 이상으로 교회를 향해 침투해 들어오는 세속주의를 이길 수 있습니다. 깊은 이상으로 사업위주, 행사위주의 관행을 털어낼 수 있습니다. 넓은 이상으로 개교회주의와 무사안일주의를 몰아내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이상이 우리 각자의 이상이 될 뿐 아니라, 우리 교회와 한국교회 전체의 이상으로 자리잡아야 하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은 참으로 종말의 때입니다. 주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주님은 마지막 시대를 위해 계시록 11장에 예언하신 대로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하는 두 증인의 반열에 들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이마에 인 맞을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온 교회가 이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가슴 설레이는 감동의 대답이 저와 여러분의 입에서 터져나오게 되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박순오목사, 대구서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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