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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태의 소명 (마 9: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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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마태의 소명(A Man Named Mathew)
성경 : 마 9:9-10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하나님은 세상의 많은 사람 가운데서 자기 백성을 부르십니다.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인물들은 모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세상에서 나와 하나님 나라에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오래 전에 온 세상이 가인의 길로 치우쳐 하나님을 떠나 있던 시대에 주님은 패역한 무리 중 한 사람 노아를 불러내시고 그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바벨탑 사건으로 인류가 각기 사방으로 나뉘어져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우상의 길에 빠져 있을 때에 하나님은 갈대아 우르에서 한 사람 아브라함을 불러내시고, 그를 가나안 땅으로 이끄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를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시대마다 자기 종들을 부르시고 위대한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우리 구주 예수님께서도 공생애 초기부터 자신과 생사고락을 같이 할 제자들을 친히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해변에서 함께 고기 잡던 두 형제 베드로와 안드레를 제자로 부르셨고, 또한 아버지와 함께 그물을 깁고 있던 두 형제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을 불러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삼으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마태를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마태복음을 기록한 사도 마태가 자신이 부름 받던 그 순간을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9절).  
  “마태라 이름하는 사람”(named Mathew) 이라는 표현 속에 저자의 겸손이 묻어나고 있습니다. 10절에도 원문에는 ‘마태의 집’이 아니라 그저 ‘그 집’으로 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서가 기록된 것은 예수님 승천 후 30여년이 지난 때였고, 이때 쯤 사도 마태는 초대교회에서 매우 존경받는 어른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소명 장면을 이처럼 조심스럽게 겸손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문맥상으로는, 마태가 소명받기 직전에 ‘중풍병자를 고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마태의 회심과 기적의 연관성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세리 마태는 자신의 죄와 돈 욕심으로 인하여 자기 민족까지도 팔아먹을 정도로 영적으로 마비된 환자였습니다.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가라’ 는 주님의 음성이 필요했던 것처럼 마태에게도 ‘그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따르라’ 는 주님의 명령이 필요했습니다.  

  본문의 말씀을 좀더 깊이 묵상해 봅시다. 마태를 부르신 예수님은 이 자리에 나와 있는 여러분을 부르셨고, 지금도 자기 백성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교회의 예배를 통해서 부르시고 말씀을 통해서 부르십니다. 때로는 우리의 삶 속에서 여러 가지 섭리로 우리에게 소명의 문을 열고 계십니다. 
  말씀을 통하여 마태의 소명에 대해 이모저모를 살펴보고, 우리를 교회 일꾼으로 세우신 주님의 부르심을 더욱 굳게 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 우연같은 부르심 (적용적해석: 부르심의 상황) 

  9절=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예수께서 마태를 부르신 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우연’ 같아보였습니다. 때는 예수님의 제1차 갈릴리 전도 여행 중이었고, 예수님은 지금 ‘본 동네’ 인 가버나움을 ‘떠나 지나가시는’ 중입니다. 
  마태는 아직 구원받지 못한 상태로, 세관에서 열심히 돈을 모으는 탐욕적인 삶에 빠져 있을 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마태와는 관계없는 다른 일에 바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그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마태를 부르신 것은 정말 우연한 사건처럼 보입니다. 참으로 우연하게도 주님이 마태를 보신 것 같습니다.  

  성도 여러분!  부르심의 상황은 우연 같아 보이지만,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이미 그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무화과 나무 아래 있던 나다나엘을 이미 보셨던 예수님은 마태가 앉아 일하던 세관을 지나가시기 전에 이미 마태를 보셨고, 마태의 모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우연이 아닙니다. 예수님께는 우연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지금 이곳에 서현교회의 가족이 되어 예배드리고 있는 우리 모두를 완전히 아십니다. 우리를 세상에서 불러내셔서 교회의 멤버로 삼으신 주님은 우리를 잘 알고 계신 분이십니다. 
  우리 예수님께는 우연한 사건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 각자가 부르심을 받은 상황은 매우 다양하고 때로는 우연처럼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이 모든 것은 전지전능하신 주님의 섭리 하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할렐루야!
  

2. 구하지 않은 부르심 (적용적해석: 부르심의 은혜성)

  9절=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마태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이 자기를 부르신 것은 전혀 의외의 사건이었고, 마태가 원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마태가 누구입니까? 그는 세리였습니다. 그의 직업은 욕된 직업이었고, 유대인들에게는 멸시받는 직업이었습니다. 당시 로마는 이스라엘을 식민통치 하면서 세리들을 앞세워 백성의 고혈을 짜내었습니다. 로마가 법으로 정한 세금 명목에는 인두세는 기본이요 도로세, 물품세, 수도세 등이 있었고, 여기에 백성들은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정한 각종 성전세와 종교적 의무금을 납부해야 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그 탓을 모두 세리들에게 뒤집어씌웠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세리들은 로마의 감독관들이 요구하는 액수보다 훨씬 많은 세금을 가난한 유대인들로부터 착취하여 자신의 배를 채우는 악한 행위를 일삼았습니다. 백성들은 세리들을 로마와 이스라엘 사이에서 돈을 갈취하는 이기적인 인물로 여겨 교제하기를 꺼려했습니다. 
  
세리들은 또한 종교적으로도 배척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방의 돈을 취급하고 이방인들과의 관계를 갖는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유대인의 율법에 명시된 정결 규례들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이런 유대인들의 시각에서 볼 때, 예수님이 공생애 초기부터 세리인 마태를 제자로 부르신 일은 지극히 불경건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마태를 부르신 것은 전혀 뜻하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은혜 아니고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주님의 부르심은 언제나 은혜의 부르심이라는 사실입니다. 마태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은 오직 은혜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은 우리의 신분이나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를 통해 하나님이 거저 주신 선물입니다(엡 2:8). 그러므로 자기 신분을 자랑하거나(엡 2:9) 이웃 성도를 업신여기는 일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은혜를 깔보는 행위입니다.    

마태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그가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했다 하더라도 감히 말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공개적인 초청이 없었더라면 그는 베드로나 요한 같은 다른 제자들에 의해 퇴박을 맞았을 것입니다. 마태가 부름 받은 것은 순전히 주님의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 말씀은 우리 주님의 우주적인 초청입니다. “다 내게로 오라” 라고 하셨습니다. ‘돈 없는 자도 오라. 가난하고 헐벗은 자도 오라. 눌린자, 병든자, 배우지 못한자도 오라.’ 우리 주님의 은혜로운 초청입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 와 있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있는 것은 ‘순전히 주님의 은혜’ 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Sola Gratia!  오직 은혜로!  은혜의 주님께 더욱 감사하는 성도 되시기 바랍니다. 
  

3. 그를 완전히 알고 계시는 주님에 의한 부르심 (적용적해석: 부르신 분)
  
9절=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마태의 소명은 그를 완전히 알고 계시는 예수님에 의해 되어졌습니다. 우리 주님은 마태를 보셨을 때 벌써 마태에 대하여 모든 것을 아셨습니다. 
  마태는 아직 세관에 앉아서 욕된 일을 하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마태 안에서 그의 과거와 현재 뿐 아니라 미래까지 완전히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마태 안에서 구원받은 자 마태를 보셨습니다. 회심자 마태를 보셨습니다. 
  주님은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 안에서 예수님의 사도 마태를 보셨고, 마태복음을 기록할 전기작가 마태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복음을 위하여 피흘려 순교할 순교자 마태를 보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마태를 세관에서 부르신 예수님은 지금도 기쁘신 뜻에 따라 자기 백성을 부르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아십니다. 우리의 과거와 현재를 아시는 것은 물론이고, 우리의 미래의 모든 것까지 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심하고 주님께 의지할 수 있습니다.
  당시는 인자의 모습으로 부르셨습니다. 이제는 성령님을 보내셔서 자기 백성을 인치시며 소명을 주십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맹목적인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끝없는 지혜로 우리 각자에게 적합한 방식으로 우리를 부르셔서 주님의 제자로,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세워 나가십니다. 여러분을 부르신 예수님께 더욱 감사하며 마음껏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4. 너무나 단순한 부르심 (적용적해석: 부르신 내용)
  
9절=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예수님의 부르심은 매우 단순 명료합니다. “나를 따르라!”(Follow me). 짧고 간결합니다. 
  주님의 부르신 내용은 명백합니다. 애매하거나 희미한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고, 누구나 오해 없이 따를 수 있는 말씀입니다. 

  “나를 따르라!”  이것은 개별적 명령입니다. 마태 개인에게 지시하신 것이고, 또한 여러분 개인에게 말씀하시는 명령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소명을 주시되 우리와 타협하지 않으시고 왕권을 가지고 명령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정체성을 아십니까?  우리가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자입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말 속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주님을 내 삶의 경배자와 인도자로 택한다는 결단과 의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둘째, 주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뜻입니다. 
  셋째, 주님을 모방하고 답습한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을 닮으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넷째, 주님과 공동운명체가 된다는 뜻입니다. 주님이 영광 받으시면 자신들도 영광받고(마 21장), 주님이 당하신 고난을 자신들도 당할 것을 각오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참 성도들입니다(요 15:18-20).  
  벧전 2: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주님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라. 세상을 따르지 말고 나를 따르라. 세관에서 돈에만 매여 있지 말고 일어나 나를 따르라.”
  지금 이 시간 성령으로 들려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5. 즉시 효력을 발휘한 부르심 (적용적해석: 부르심의 효력)
  
9절=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예수님의 부르심은 즉시 효력을 발휘했습니다. 마태는 즉시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병행구절인 눅 5:28절에는,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 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동료들과 환송 파티할 시간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전적으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생사고락을 같이 하면서 세심하게 주님의 목소리를 펜으로 기록했습니다. 그가 기록한 산상보훈(마 5,6,7장)을 읽어 보면 마태가 얼마나 세심하게 주님의 가르침을 메모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그 후 계속 예수님을 따랐습        니다. 비록 십자가 고난의 현장에서 잠시 후퇴하는 연약함을 보였지만, 곧 원상 회복하였습니다. 한 번 불러주신 주님의 소명은 마태의 삶에 놀라운 효력을 발휘하여, 그는 초대교회의 초석이 되었고,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6. 다른 사람을 위한 소망의 문이 된 부르심 (적용적해석: 소망의 문)
  
10절=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마태의 소명은 타인들을 위한 소망의 문이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많은 동료 세리들이 예수님께로 나아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세리와 죄인들은 마태가 부르심을 받은 것을 보고 용기를 가지고 주님께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마태의 공개된 집은 그의 친구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마태의 개인적 봉사와 전도는 다른 사람들을 구주 예수님께로 데려오는 매개가 되었습니다. 

  특히 그가 기록한 ‘마태복음서’는 오고 오는 세대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로부터 시작하는 마태복음서는 많은 구약의 기록들을 인용하며 왕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산상보훈의 수려한 내용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주옥같은 비유들, 종말에 일어날 일에 대한 정교한 예언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향해 교회에 주신 지상명령 등등, 마태복음서가 없었더라면 결코 접하지 못할 진리를 누리는 기쁨을 우리는 지금 마음껏 맛보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세관에서 죄악에 젖어 있던 마태를 불러내셔서 이처럼 만인을 위한 소망의 문이 되게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나오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너무나 큰 복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가 골짜기의 마른 뼈들처럼 아무 것도 모르고 나의 세관에 앉아 있을 때, 예수님은 불쑥 찾아오셨고 불러주셨습니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나를 완전히 알고 게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장소에 관하여는 일정치 않습니다. 마태는 세관에서 부름받았고 베드로와 요한은 갈릴리 호수에서 부름받았습니다. 
  나다나엘은 무화과 나무 아래에서, 삭개오는 뽕나무 위에서, 그리고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어거스틴은 정원에서, 마틴 루터는 바티칸 계단에서 주님의 감동적인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장소를 제한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집안에서나 직장에서, 매스 미디아나 인터넷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접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계속적입니다. 최초 세관에서 불려나온 마태는 열두 제자로 부름받았고, 둘씩 파송될 때 새로운 소명을 받았습니다. 부활하신 후 주님은 그를 다시 찾아오셨고, 오순절 성령 강림후 그는 다시 새로운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앉아 있습니까?  마태처럼 세관에 앉아 세상 일에 푹 빠져 있는 것은 아닙니까? 주님의 부르심은 예기치 않게 찾아옵니다. 주의 깊게 들어야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아직 세관에 앉아 있다고 생각된다면, 지금 이 시간 “나를 따르라” 라고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즉시 일어나 따르십시오. 
  만일 여러분이 겟세마네 동산의 제자들처럼 주님의 십자가 고난에서 도망치고 있다면, 이 시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사랑을 고백하십시오.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 자체가 크나큰 은혜입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저와 여러분의 준비된 대답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여, 나로 인해 다른 사람들에게 소망의 문이 열리게 하옵소서!
  주여, 우리 교회로 인해 이 땅에 소망의 문이 활짝 열리게 하옵소서! 
(박순오목사, 대구서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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