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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절] 행복하십니까? 아니오, 감사합니다. (시 136:1~3, 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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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십니까? 아니오, 감사합니다. (시 136:1~3, 23~26)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모든 신들 가운데 가장 크신 하나님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모든 주 가운데 가장 크신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우리가 낮아졌을 때에, 우리를 기억하여 주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우리를 우리의 원수들에게서 건져 주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육신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먹거리를 주시는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 으뜸이신 분 

우리 교회는 몇 년 전부터 11월 첫째 주일을 추수감사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보통은 미국교회의 전통을 따라 11월 셋째 주일을 추수감사주일로 지키지만, 추석 전후의 어느 날을 택해 추수감사주일로 지키는 교회도 조금씩 늘고 있습니다. 추석은 조상들의 은혜에 보답하고 그 음덕을 기리기 위해(追遠報本) 가을에 거둔 첫 열매를 바치는(薦新祭) 절기이기에 의미가 있다 하겠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총을 기억하며 감사한다는 점에서 차이는 있겠지만, 절기의 토착화라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11월 첫째 주일을 추수감사주일로 삼은 까닭은 단순합니다. 11월 셋째 주일은 너무 늦고, 추석은 너무 이른 듯 싶어서입니다. 이맘때쯤이라야 가을걷이도 끝나고, 낙엽도 지기 시작하니 마음을 추스르기에 적합한 때인 것 같습니다. 

저는 오늘의 시편을 읽을 때마다 거의 즉각적으로 ‘강강술래’나 ‘쾌지나칭칭나네’를 떠올리게 됩니다. 이 시는 선창자가 두 장단 길이의 앞소리를 메기면 회중들이 뒷소리로 받아주는 전형적인 선후창 양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선창자가 “모든 신들 가운데 가장 크신 하나님께 감사하여라” 하면 회중들은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하고 받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영원한 인자하심은 ‘언약에 바탕을 둔 사랑’입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바뀌는 우리 마음과는 달리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다는 고백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성서 번역자들이 시의 압운(rhyme)을 살려 리듬감을 부여했더라면 더 신명나게 읽을 수 있었을 텐데 미처 거기까지는 신경을 쓰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이 시는 26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만 그 뒤는 우리가 얼마든지 이어갈 수 있습니다. 이 단순한 리듬을 반복하는 동안 사람들은 일상의 속박에서 풀려나 하나님의 은총을 깊이 새기게 되고, 함께 부르는 노래를 통해 깊은 일치를 경험하게 됩니다. 

혹시 맛다니야라는 이름을 들어보셨습니까? ‘하나님의 선물’을 뜻하는 멋진 이름의 이 사람은 아삽의 증손으로 스룹바벨이 세운 제2성전에서 예배를 돕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직책은 “감사와 찬송과 기도를 인도하는 지휘자”(느11:17)였습니다. 회중들이 기도하고 찬송할 때 감사의 말씀을 인도하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일상의 여러 가지 일들에 치여 살고 있는 이들은 자칫하면 원망과 슬픔에 잠겨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성전에 나와 감사를 이끄는 이들의 고백을 통해 그들은 하나님의 은총과 섭리에 대해 새삼스럽게 눈 뜨게 되었을 것입니다. 자칫하면 타성에 빠질 수도 있는 직책이지만, 사람들을 감사의 문을 통해 하나님의 현존 앞에 서게 하는 일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교회에도 이런 이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건강해집니다.

• 창조주

선창자는 먼저 모든 신들 가운데 가장 크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모든 신들이라는 말이 여러분께 낯설게 들릴 수도 있겠습니다. 고대인들은 신이 여럿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라마다 섬기는 신이 달랐습니다. 그 신들은 최고신이 부여한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저마다 주특기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전쟁의 신, 다산의 신, 비바람을 관장하는 신, 지혜의 신…. 이스라엘 사람들은 야훼 하나님이야말로 그런 모든 신들보다 능력이 있으신 분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오늘의 시인은 가장 크신 하나님의 엄위하심과 사랑을 우선 노래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또한 혼돈을 극복하고 세상에 질서를 부여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지혜로 하늘을 만드시고, 물 위에 땅을 펴 놓으시고, 큰 빛들을 지으시고, 낮을 다스릴 해와 밤을 다스릴 달과 별을 지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 시인은 지금 경외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온 세계를 이불처럼 덮고 있는 하늘도, 온갖 생물들이 깃들여 사는 물과 땅도, 온 세상을 환히 비추는 해와 달과 별도 우연히 그렇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있게 하셨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태어난 것도 우리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 삶이 거룩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보냄을 받은 분’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주님은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는 것이 당신의 사명이라고 확신했습니다. 닥쳐오는 죽음조차도 보내신 분에게로 돌아가는 과정으로 이해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이처럼 거대한 생명의 그물망 속에 있습니다. 쌀 한 톨 속에서 우주의 무게를 보는 것은 시인의 과장만은 아닙니다. 그게 생명의 실상입니다. 김완하 시인의 <엄마>라는 시를 들어보십시오. 

첫돌 지난 아들 말문 트일 때
입만 떼면 엄마, 엄마
아빠 보고 엄마, 길 보고도 엄마
산 보고 엄마, 들 보고 엄마

길 옆에 선 소나무 보고 엄마
그 나무 사이 스치는 바람결에도
엄마, 엄마
바위에 올라앉아 엄마
길 옆으로 흐르는 도랑물 보고도 엄마

첫돌 겨우 지난 아들 녀석
지나가는 황소 보고 엄마
흘러가는 도랑물 보고도 엄마, 엄마
구름 보고 엄마, 마을 보고 엄마, 엄마

아이를 키우는 것이 어찌 사람뿐이랴
저 너른 들판, 산 그리고 나무
패랭이풀, 돌, 모두가 아이를 키운다

‘아이를 키우는 것이 어찌 사람뿐’이겠습니까? 저 하늘의 해와 달과 구름, 바다와 들판, 산과 나무, 심지어는 패랭이풀과 돌까지도 아이를 키우는 데 일조합니다. 세상 만물을 ‘엄마’로 호명하는 첫 돌 지난 아이는 너와 내가 나뉘지 않은 성스러운 세계를 우리에게 계시합니다. 이 마음이면 우리가 어찌 이웃을 함부로 대할 수 있을 것이며, 자연세계를 이다지도 황폐하게 만들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너희가 사는 땅, 곧 내가 머물러 있는 이 땅을 더럽히지 말아라”(민35:34a) 하고 명령합니다. 우리가 사는 땅이야말로 하나님이 머무시는 하늘이라는 말씀입니다. 

• 역사의 주관자

시인은 또한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말합니다. 애굽의 맏아들을 치시고, 이스라엘을 그들 가운데서 이끌어내시고, 홍해를 가르시고 그 백성으로 하여금 건너가게 하신 분께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그가 경험하고 또 이해하고 있는 하나님은 사람들의 신음소리를 기도로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각자에게 품부된 저마다의 삶을 온전히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누군가 돈이 없어서, 힘이 없어서, 배우지 못해서, 건강이 여의치 못해서 인간적 대접을 받지 못하는 세상은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세상입니다. 

이현주 목사님은 70년대에 경북 울진의 죽변이라는 마을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초등학교 1학년이던 딸의 가을운동회에 초대 받았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1학년 아이들이 다섯 명씩 달리기를 했는데, 1등부터 3등까지 상을 주었습니다. 무심코 구경을 하는데 유별나게 잘 뛰는 아이가 있더랍니다. 그런데 중간에 뒤따라가던 여자 아이가 그만 발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그 아이는 울었고, 다른 아이들은 내처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맨 앞에 가던 남자아이가 뒤를 돌아 울고 있던 아이를 보며 멈칫했습니다. 그러더니 넘어진 아이한테 달려가서 일으켜 세우더니 같이 절뚝거리며 결승선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둘은 꼴찌를 했습니다. 목사님은 30년도 더 된 그 광경이 지금도 머리에 남아 있다면서, 만일 자신이 그 학교 교장이었다면 그 녀석에게 최고상을 주었을 거라고 했습니다. 어쩌면 아이는 집에 가서 제 밥그릇도 챙기지 못하니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거냐는 핀잔을 들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이야기 끝에 목사님은 “친구가 넘어졌는데 보고도 모른 척하고 달려가서 1등 하는 것보다 뒤돌아가서 같이 꼴찌로 들어가는 게 아름답지 않나?” 물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여러분 스스로 해보십시오.

상황을 운동회가 아니라 우리의 삶의 자리로 바꿔보십시오. 우리는 그동안 누가 넘어지든 말든 앞으로 내처 달려가는 일에 바빴습니다. 넘어진 것은 ‘그’의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가 넘어진 것을 다행으로 여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에서 강도만난 사람을 보고도 모른 체 하고 지나갔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는 그들의 무심함에 화를 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눈을 돌려 우리 현실을 바라보는 순간 상황은 달라집니다. 우리는 어려운 이들 곁에 다가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삶에 연루되는 것이 싫기 때문입니다. 그랬다가 어떤 손해를 입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그렇게 넘어진 사람들,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각별한 관심을 보이십니다. 오죽하면 당신을 ‘히브리인들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하셨겠습니까? 예수님은 지금 가난한 사람들,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지금 슬피 우는 사람들에게 복이 있다 하셨습니다(눅6:20-21). 그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복지와 구원에 관심이 많으십니다. 광야 길을 가는 이스라엘을 인도하시고, 그들을 홀대하는 이들을 치시고, 그들이 터 잡고 살아갈 땅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며칠 전 이명박 대통령은 부산 벡스코에서 개막한 제3차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세계 포럼 축사를 통해 “삶의 질을 측정할 수 있는 지표를 개발해 국민의 행복도를 꼼꼼히 챙겨나갈 것”이라면서 “대한민국은 국민의 행복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삶의 질을 개선하는 실질적인 선진화를 추구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이 빈 말이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국민들이 정말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겸손하게 하나님께 여쭈어야 합니다. 그리고 국민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넘어진 아이를 버려두고 앞만 향해 달려 나가는 사람들이 주인 노릇하는 세상은 결코 행복한 세상일 수 없습니다. 

• 감사에 눈을 뜬 삶

우리는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관자이심을 믿습니다. 이것이 낙심되는 현실 가운데서도 우리가 감사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근거입니다. 시인은 “우리가 낮아졌을 때에, 우리를 기억하여 주신 분께 감사”하자고 노래합니다. 현실의 여건이 사무치도록 어려울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고,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고 탄식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어머니가 어찌 제 젖먹이를 잊겠으며, 제 태에서 낳은 아들을 어찌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비록 어머니가 자식을 잊는다 하여도, 나는 절대로 너를 잊지 않겠다.”(사49:15)

주님은 당신을 백성을 향해 “내가 네 이름을 내 손바닥에 새겼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사랑이 우리를 살게 합니다. 주님은 원수들의 손아귀에서 그 백성들을 건져주시고,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낙심한 이들 속에 생기를 불어넣어주십니다. 그 생기는 절망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게 하는 힘입니다. 

저 먹장구름 너머에 태양이 여전히 빛나고 있는 것처럼 비록 암담하고 절망스런 일들이 많은 세상이지만, 그래도 우리는 다시금 벌떡 일어나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의 경주를 계속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기가 우리 속에 유입되는 순간 우리는 지긋지긋한 자아로부터 해방되어 다른 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께 바쳐야 하는 감사는 바로 이런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산 주식이 오르고, 집값이 오르고, 땅값이 오르는 것이 감사한 것이 아니라, 그런 욕심으로부터 해방되어 하루하루 삶의 신비를 맛보고, 누군가의 설 땅이 되어주기 위해 마음 쓰는 사람으로 바뀐 것에 대해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가나안 농군학교를 세우신 김용기 장로님께 누군가가 물었습니다. “장로님, 행복하십니까?” 논두렁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장로님이 문득 대답했습니다. “아니오, 감사합니다.” 행복을 추구하는 순간 우리는 불행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하지만 인생이 은총이고 선물임을 자각하는 사람은 늘 감사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흐린 날도 있고 맑은 날도 있습니다. 행복한 날도 있고 슬픈 날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롬8:28) 

오늘 시편은 26절에서 끝나지만, 그것은 열려진 끝일뿐입니다. 우리의 고백이 그 시에 덧붙여지면 좋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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