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모압으로 떠난 사람들 (룻 1:1~5)

  • 잡초 잡초
  • 553
  • 0

첨부 1


모압으로 떠난 사람들 (룻 1:1~5)


제가 우리교회 와서 놀란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서울답지 않고, 약간 시골스럽다 할까요? 意外로 우리 교우들 중에, 정릉에서, 그것도 지금 사시는 집에서 40년, 50년 살아오신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그런 교우들을 만날 때마다, 종종 듣는 말씀이 있습니다. “바보 같아서, 재주가 없어서, 평생 이렇게 살았습니다.” 스스로 사회변동에 느리게 살았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하란에 거주하고 있던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하셨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셨던 하나님은, 그의 아들 이삭에게는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 명령하셨습니다. 언제는 ‘떠나라’ 하시던 하나님이, 언제는 ‘떠나지 말고 그 땅에 거주하라’ 명하십니다(cf. 창 12, 10; 26, 1-4). 

이런 말씀들을 보면, 사람이 일생을 살면서 거주지를 옮기는 것 자체가 좋다,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주거의 자유, 이동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하나님의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가 머물든지, 떠나든지, 머뭄과 떠남의 이유가 무엇이냐에 있습니다. 

공직임명을 앞둔 인사들의 인사청문회가 열릴 때, 심심찮케 불거져 나오는 문제가 위장전입문제입니다(위장전입은 거주지를 실제로 옮기지는 않고, 주민등록법상 주소만 옮기는 것). 인사 청문을 받는 사람들은, 소위 우리사회에서 힘 있는 사람들입니다. 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도, 자기 삶의 이익을 위해서, 위장전입이라는 편법을 쓰면서 자기이익을 추구하며, 살아왔다는 이야깁니다. 주로 (1) 자녀교육 문제(孟母三遷之敎)로, (2) 부동산 관련 문제로 위장전입 한 것을 봅니다(도덕적인 문제, 위법성의 문제). 

주민등록법을 어겨도, 지탄을 받습니다. 하나님도, 주거의 문제, 이주의 문제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관심도 가만 보면, 정착하여 살면, 정착의 이유가 무엇이냐? 이주하면, 이유가 무엇이냐에 대단한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거기에 生死의 문제가 달려 있기도 하고, 興亡盛衰가 결정되기도 합니다. 지금 내 인생의 삶의 자리는 어디인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겉으로 드러난 명분보다, 명분 뒤에 숨어 있는 내면, 의도, 목적을 보십니다.

사사들이 치리하던 시대, 있었던 일입니다[사사시대? 여호수아가 죽은 뒤, 첫 士師 ‘옷니엘’ 등장(B.C. 1367년) ~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이 즉위할 때까지(B.C. 1025년), 약 342년의 기간]. 士師란(샤파트), 주로 백성들의 소송을 ‘재판하는 일’을 했습니다(判官記). 또 전쟁이 일어나면, 전장에 나가서 군대를 지휘하던 지휘관 역할도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자인 셈이지요. 

판관들이 다스리던 그 시대(기드온 시대 추정),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고대근동지방 사람들이 제일 무서워했던 것이, 흉년입니다. 우리도 흉년을 무서워합니다. 작년 9월, 미국 4대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가 도산하면서 불어 닥친 글로벌 금융위기에 전 세계가 떨지 않습니까? 전후문맥을 보면, 가나안 땅에 찾아온 흉년이 10여 년 동안 지속된 것으로 보입니다. 극심한 혼란기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지 않으시면 회복이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룻 1, 6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

흉년이 들자,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 ‘엘리멜렉’이라는 사람이, 자기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다’합니다. 요즘으로 말씀하면 이민 갔다는 이야깁니다. 흉년 때문에,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을 버리고 양식을 구하기가 쉬운 이웃나라 ‘모압 지방’으로 영구이민을 작정하고, 아주 이주해버렸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한 가정의 이주사실에 대하여 왜 이토록 깊은 관심을 가지는 것일까요? 뭐 그리 대단한 사건이라고 말입니다. 먹을 것 없으면, 먹을 것 있는 나라로, 또 대도시로 이주하는 것, 인지상정 아닙니까? 도시화, 離村向都는 세계적인 추세 아닙니까? 시골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평생 시골에서만 살라는 법도 없지 않습니까? 고향 지키며 사는 사람 많지 않습니다. 

1960년대 우리나라는, 눈물 나게 가난했습니다. 제가 ’60년대 사람이라서, 당시의 가난을 기억합니다. 아침에 일어나 동네 골목을 뛰어다니다 보면, 뒷짐 지고 길 가시는 어른들, 길에서 서로 만나면 주고받는 아침인사가, 하나같이 “아침 잡솼니껴?” 하십디다(제가 보면, 안 드신 것 같은데, 예_). 철들면서 그 인사가 나온 유례를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 한국은 국민소득 80달러로, 유엔에 등록된 120여 국가 중에서 ‘인도’ 다음으로 못사는 나라였습니다. 

1950년대 미국 원조가 끝난 데다, 가뭄과 흉년이 이어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草根木皮로 끼니를 연명하던 때입니다. 한국의 젊은이들이 배고픈 것 해결하고 공부하고 싶어서, 西獨의 광부로, 간호사로 나섰습니다. 500명 모집에 4만 6000명이 몰려 90 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고 합니다. 새벽4시에 일어나서 지하 500~1,000m 35~40℃ 되는 막장에서, 파독 광부들은 하루 종일 일했습니다. 가서 죽은 사람도, 65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박정희 대통령 내외가 광산현장에 방문하셨는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보전하세󰡕 애국가를 부르면서 대통령 내외분과 광부들이 눈물바다가 되었다고 합니다(한 됫박의 눈물…). 대통령께서, 그들에게 당부하셨답니다. “이곳은 외국인들이 많이 모인 곳이니, 그 속에서 우리 한국의 위신을 손상치 말고, 한국인의 긍지를 살려 모범된 일꾼이 되십시오. 

독일의 근면한 국민성과 그 정신을 배워 오십시오. 우리나라의 가난을 한탄하지 마십시오. 우리도 잘 살 수 있고, 또한 부흥의 소재를 많이 마련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게 무슨 꼴입니까? 나라가 못사니까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지하 수천m에서 생명을 담보로 일할 것이라 생각하니, 내 가슴에서 피눈물이 납니다. 여러분 아직까지 우리나라는 이렇게 못살지만 후손들에게는 잘사는 나라를 물려줍시다. 열심히 일합시다. 나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가난, 흉년, 가뭄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그러면 엘리멜렉의 가정이, 모압으로 이주한 것을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문제 삼으셨습니까? 흉년 든 땅을 떠나 먹을거리 찾아서, 이웃나라 ‘모압 지방’으로 이주한 것이 그렇게 큰 문제가 된다는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그 점을 선하게 보지 않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룻기 저자는, 이런 표현을 합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2). 여기 보면, ‘이름은’, ‘이름은’, ‘이름은’ 계속 세 번 반복하고 있는데, 이 말은 그저 단순하게 아무개 이름이 무엇이다는 말이 아닙니다. 여기, ‘이름은’이라는 말의 히브리어는 󰡔쉠, שם󰡕인데 ‘기념비적인 사건’(memorial event)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어떤 한 사람의 ‘정체성’을 말하고자 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家長인 ‘엘리멜렉’이라는 이름은 󰡔나의 하나님은 왕이시다󰡕, 하나님을 주권자로 믿고 사는 사람이라는 뜻이지요. 그의 아내 ‘나오미’는 󰡔나의 기쁨, 나의 즐거움󰡕이란 뜻인데 [하나님의 기쁨, 하나님의 즐거움이 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엘리멜렉이나 나오미라는 이름은, 하나님만을 주인으로 믿고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의 상징적인 관계를 가리키는 이름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은 어떤 삶의 방식을 취했습니까? 어떤 행동을 하고 있습니까? ‘엘리멜렉’과 ‘나오미’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면, 의당 하나님께서 복 주시기로 언약하신 땅, 가나안에 머물면서 사는 것이 마땅한 일 아닙니까?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저자는, 그들의 불신앙과 배반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들의 ‘이름’󰡔쉠, שם󰡕이 ‘엘리멜렉’이요 ‘나오미’라는 것을 밝혀 주는 것입니다. 그럴 수 없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엘리멜렉의 가족들이 ‘약속의 땅’을 버리고 ‘모압 지방’으로 移民간 것이 왜, 그렇게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지 못하였습니까? 이유는, 그들은 ‘모압 지방’으로 이민가기 전에, 먼저 약속의 땅에 왜 흉년이 찾아왔는지, 그 이유를 묻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흉년 든 이유는 묻지 않고, 흉년 든 현상만을 크게 보고, 그저 먹고 살기 위해서, 너무 쉽게 가나안 땅을 버리고, 모압 지방으로 移民을 가버렸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말씀을 보면, 약속의 땅에 흉년이 들 때는, 흉년드는 이유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라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신 8, 19). “그런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대로 너희는 삼가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命令하신 모든 道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복이 너희에게 있을 것이며, 너희가 차지한 땅에서 너희의 날이 길리라”(신 5, 32-33). 신명기 말씀의 맥락에서 보면, 약속의 땅 가나안에 흉년이 든 것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긴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입니다. 

엘리멜렉의 가족들의 잘못은, 그들이 가나안 땅에 찾아온 흉년의 이유를 묻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흉년 든, 현상만 보고 삶을 결정했다는 겁니다. 위가 아프다고, 약국에 가서 소화제나 자꾸 사 먹는 격입니다. 머리가 아프다고, 진통제 타이레놀만 사 먹는 꼴입니다. 위가 왜 아픈지? 머리가 왜 자주 아픈지? 그 이유를 먼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문제가 있으면, 상대방만 탓하면 안 됩니다. 남편 탓만 하지 마십시오. 남편이 왜 그러는지, 생각해보아야지요. 아내 탓만 하지 마십시오. 이유를 알아봐야지요. 자식이 왜 그러는지,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룻기 저자가, 엘리멜렉의 가정이 모압으로 이주한 것을 문제 삼는 이유가 또 한 가지 있습니다. 구약학자 Albright에 의하면 고대근동사람들은, 자기가 살던 지방을 떠나는데, 대단히 신중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다른 지역으로 이주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자기가 믿고 있던 신을 완전히 배반하고, 이주하여 간 지역의 ≺神≻을 섬기겠다는 開宗意思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지역 神, local god). 

엘리멜렉의 가족들이, 약속의 땅을 버리고 모압 지방으로 이주하였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배반하고, 그 대신 모압 지방의 신(그모스)을 섬기겠다는 開宗意思를 가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모압 지방에 가서 거주하였다”는 말은, 위장전입하였다가 여차하면 주소지를 옮기겠다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는 거지요. 永住하기 위해 갔습니다(구르, גור; went to live, went to sojourn). 영주할 목적으로 이민 갔다는 말입니다. 당연히 모압 지방에서 그 땅의 ‘神’ 그모스를 섬기며 살았다 겁니다. 일제시대 때, 한국교회가 신사참배를 하기로 결정한 것은, 일본의 천황을 신으로 섬기겠다는 결정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의도를 가지고 간 모압 지방 삶이 잘 될 리가 있겠습니까? 패망의 늪으로 스스로 뛰어든 것이나 다름없지요. 형통할리, 만무하지요. 스스로 패망의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엘리멜렉 가정은, 10년 만에, 완전히 패가망신합니다. 이주하자마자, 家長인 ‘엘리멜렉’(나의 하나님은 왕이시다)이 그만 죽고 맙니다.

뜻하지 않던 일이 일어났습니다. 살기 위해서 이민 간 그 땅에서, 家長이 가장 먼저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이주프로젝트 자체가 잘못됐다는 하나님의 싸인인 셈이지요. 그러면 빨리 깨달았어야지요. 그러나 영적으로 아둔한 여인, ‘나오미’는 거기서 깨닫지 못하고 또 다른 방책을 냅니다. 혼인프로젝트를 감행합니다. 두 아들, 말론과 기룐에게 모압 여인들을 아내로 맞이하게 합니다. 큰 며느리가 ‘룻’(רות)이고, 둘째 며느리가 ‘오르바’(ערפה)입니다/ 우리가 常識的으로 아는 일입니다. 이민 간 나라에서 영주하려고 할 때, 가장 빠른 방법이 결혼입니다. 그 나라 시민권을 가진 사람과 결혼하면, 영주문제가 가장 쉽게 해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오미는, 두 아들들에게 이방여인 ‘모압 여인’과의 혼인을 아무런 문제의식도 없이 감행시킵니다. 목적은, 모압 지방에서 영주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을 더 이상, 자신들의 보호자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또 다른 증거입니다. 도리어, 이방여인들을 자기 가족들의 보호자로 삼았다는 이야깁니다.

문화인류학자 C. Levi-Strauss는 결혼이란, 상호교환과 호혜성의 원리에 기초한 거래라고 보았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한다는 말이 있지만, 그 말이 인류사회에 쓰이게 된 것은 불과 150년도 안 된다고 합니다. 결혼은, 철저한 교환가치에 따른 거래라는 겁니다. 근친결혼을 반대한 이유도, 유전법칙을 알기 전에는, 유전적인 이유로 근친결혼을 반대한 적이 없습니다. 교환가치가 없기 때문에, 근친결혼 하지 않은 것 뿐입니다(신분상승의 기회도 없고, 재산증식의 가치도 없기 때문이지요; 고대로부터 결혼지참금이라는 제도가 있었던 것, 알지 않습니까?).

나오미는, 두 아들이 모압 여인들과 결혼해서, 그 땅의 영주권을 확보하고자 했습니다. 지혜로운 방법입니다. 현실적인 방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실 때 그 방법 역시, 또 다른 어리석음에 불과했습니다. 남편을 잃은 나오미에게, 설상가상으로 이번에는 결혼한 두 아들들마저 죽고 맙니다. 그렇게 모압 지방에서 10년을 살았지만, 남은 것은 세 여자뿐이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룻 1, 5하).

고대근동지방에서, 한 가정의 남편과 아들들이 죽었다는 것은, 단순한 죽음을 너머서, 한 가정의 참담한 미래와 종말을 의미합니다. 絶望的인 狀況, 절망의 頂點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오미의 가정이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는, 비록 나오미 같이 되었다 할지라도, 그것이 결코 끝이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하시기를 바랍니다. 

나오미의 가정은 더 이상의 희망은 없을까요? 하나님께서 그 가정을 어떻게 다루시는 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그 以前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혹 삶의 위기에 처한다 하여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 같은 세속적인 방법으로 살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시편기자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고난 중에 있는 분 계십니까? 고난의 이유를 물으십시오. 그 고난 속에 있는 감춰져 있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참 복을 발견하게 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그 신실하심을 의뢰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