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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이 가르치시는 교훈 (욘 4: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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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가르치시는 교훈 (욘 4:6~11)


맹모삼천지교라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맹자의 어머니께서 자녀를 기를 때에 그 교육을 위해서 세 번이나 세 번이나 이사를 했다는 그런 내용이지요. 처음에는 장의사 집 옆으로 이사를 갔더니 맹자가 와서 계속 장례 놀이만 하고 그렇게 지냅니다. 그래서 이제 시장 옆으로 이사를 갔더니 늘 흥정하는 것, ‘물건 사세요? 이거 파세요’ 하며 깎는 것 그거 연습합니다. 그래서 학교 옆으로 이사를 했더니 이 아이가 공부를 하게 되었다. 훌륭한 스승이 되게 되었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의문을 품지요. 인류 역사에 있어서 몇 안 되는 지혜로운 어머니가 이 맹자의 어머니인데 이 자녀를 양육할 때 이렇게 시행 착오를 할 수 있겠느냐? 그러면 이 어머니가 이 맹자에게 무엇인가 교훈을 주시기 위해서 이렇게 하지 않았을까? 그러면 이 맹자의 어머니가 제일먼저 장의사 옆으로 이사했던 게 뭘까? 이 어린 맹자의 마음속에 깊은 밑바닥 속에 인생은 반드시 죽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살아라 하는 그 교훈을 주시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알고 사는 사람하고 죽는데도 불구하고 영원히 살 것처럼 그렇게 사는 사람의 삶의 자세는 다릅니다. 또한 그 다음에 시장으로 이사를 하게 되니까, 이 시장은 인생이 어떻게 사는 것인가 하는 치열한 전쟁을 볼 수 가 있습니다. 시장이야 말로 인생이 어떤 것인가를 볼 수 있는,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볼 수 있는 인간의 치열한 삶의 전쟁을 보여주는 그런 곳입니다. 거기에서 맹자에게 이 어머니는 산다는 게 어떤 것인가 그것을 가르쳐 주고 싶은 교훈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학교 옆으로 이사했을 때는 이미 자기가 죽을 존재라는 것과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그 사람에게는 인생에 있어서 진정 배워야 될 것이 무엇인가 그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어머니의 교훈을 통해서 오늘날 위대한 맹자 선생님이 나오게 되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오늘 우리의 삶이 우리의 삶으로 끝나지 않지요. 오늘 나의 삶이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사회 속에 어떤 교훈을 사람들에게 줄 것인가? 좋은 교훈에 표본도 될 수 있겠고 안 좋은 교훈에 표본도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만났을 때, 이 때는 어떤 마음의 결단을 가지고, 마음의 원리를 가지고 살아가는가 하는 것을 아는 사람은 참 지혜롭고 복된 인생일 것입니다. 우리를 복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 또 그 복 주시기를 원하시는 그 하나님은 성경에 우리가 복 받는 사람 되기 위한 교훈으로 이 성경으로 가득 채워놓으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디모데후서 3장 16절 17절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 말씀은 교훈을 통해서 부패한 우리 인간이 인간의 본성과 죄의 본성을 살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그런데 그것이 패망으로 가는 길인 줄을 모르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빛 가운데 그 진리를 보게 만들고 정말 복되고 아름답게 사는 길이 무엇인가, 이 성경에 하나님께서 가득 담아 두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온전케 한다 할 때는 구멍이 난 그물을 기워서 쓰듯이 부러진 다리를 다시 접착시켜서 사용하듯이 때론 절름발이 된 우리 인생을 바로 잡아서 행복한 인생을 살게 만든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오늘 요나서를 보면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교훈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것이 참 많습니다. 본문을 보면 하나님이 예비하사, 하나님이 예비하사 하는 표현을 곳곳에 보는 것은 하나님께서 요나를 통해서 정말 이 요나가 받기를 원하는 교훈 그것을 이 요나서 전체에 가득 심어두셨다는 것입니다.

 요나 뿐만 아니라 이 세대를 살아온 역사 속에 살았던 사람들, 오늘 이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진정 복 주시기를 원하셔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이 정말 축복하기를 원하시는 그런 인생을 살도록 우리에게 그 교훈을 요나를 통해서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배를 준비해 두셨지요, 또 깊은 잠에서 깨우는 선장도 준비해 주셨죠, 큰 물고기도 예비해 두셨지요 그리고 니느웨 성도 니느웨의 사람들도 준비해 두셨지요, 박 넝쿨도 준비해 두셨지요 그리고 박 넝쿨을 갉아먹는 벌레도 준비해 두셨고, 뜨거운 동풍도 준비하시면서 이 요나에게 교훈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이 이 속에 담겨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저는 여러분의 삶을 잘 모릅니다. 여러분 개개인 삶 잘 모르지만 아마 다양한 삶의 모습이 여러분 중에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를 포기치 않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주님께서 이 일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교훈이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꼭 기억하시고 인간적인 교훈만 얻는 것이 아니라 내 인생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의 교훈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하나님이 복 주시는 그런 인생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그러면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가르치기를 원하셨던 교훈이 뭘까요? 

첫 번째 교훈은 이 세상의 모든 삶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 하에 있다는 것을 요나가 깨닫기를 원하셨습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인생은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내 계획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주권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살라는 것을 주님은 말씀합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요나가 상상하지 못했던 이 박 넝쿨을 준비하십니다. 요나가 기뻐했다고 그랬는데 요나가 기뻐했다는 표현이 여기밖에 없어요. 물고기 뱃속에서 토해서 나왔을 때 우리 같으면 기뻐하고 노래하세 할거 같은데 그 표현이 없는 거 보니까 별로 기뻐하진 않았든 것 같아요. 그런데 진짜 이것은 기뻐했다고 그랬어요. 

그런데 그 박 넝쿨을 갉아먹는 벌레를 주어서 다시 뜨거운 바람과 햇볕이 들어오도록 하니까 괴로웠습니다. 너를 위해서 기쁨을 준비하기도 하고 너를 위해서 고통스러운 것을 준비하게 한 것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라는 거예요. 너에게 너의 인생이 달려있지 않다는 거예요. 우리는 인생을 살아갈 때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인생은 노력여하에 달려있다” ---자기가 얼마나 노력하느냐 여하에 따라서 인생이 결판 난다고, 인생은 심은 대로 거둔다는 말이 있지 않느냐? 그래서 최선을 다해 노력하면서 살아야 그 인생은 승부가 거기서 갈라진다고 믿고 사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것마저도 하나님의 절대 주권 하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분들은 이런 분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노력해봐야 소용없어, 수고하고 애써도 결국 먹는 것은 딴 사람이 먹더라니까! 인생은 수고하고 노력하는 대로 되는 게 아니라 인생은 재수가 좋아야 돼! 부모를 잘 만나야 되고 환경과 여건과 때를 잘 만나야 돼! 이건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인생이 자기 노력에 달려있다고 생각하는 분은 자기가 노력해서 안 되면 자기를 자책하고 자기가 자기를 정죄해요. 그리고 환경에 의해서 안됐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환경은 원망하고 사람을 원망하고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높이시기도 하시고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고 세우기도 하시고 가난하게도 하시고 아프게도 하시고 모든 주권이 하나님께 있는 것을 요나로 하여금 깨닫고 살기를 원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이 자신에게 달려있다고 생각하지만 요나를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생사화복이 하나님께 있지 우리에게 있지 않다고, 그래서 시편 기자는 33편 16절에서 17절에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용사가 힘이 세어도 스스로 구원하지 못하는 도다. 구원하는데 군마는 엇되고 군대가 많다 하여도 능히 구하지 못하는 도다” 이게 다윗의 시라고 그렇게 생각되는데 다윗이 인생을 살면서 전쟁과 전쟁을 치르면서 그의 삶을 가만히 보니까 용사라도 꼭 승리하는 것만은 아니더라는 겁니다. 

옛날 전쟁에 군마가 승리의 절대 요인데도 불구하고 군마가 많아도 그것이 승리하는 요소가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그의 삶 속에 군사를 의지하지 않고 군마를 의지하지 않고 활과 창을 의지하지 않고 모든 것에 주권자 되시는 근원되시는 그 하나님 의지하면서 일평생 살아온 삶을 그가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요, 지금 나의 살고 죽는 것이 군사의 많고 적음과 전술의 우수하고 뛰어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건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라는 거에요. 그러니까 그는 겸손하게 자기의 미래를 구합니다. 자기의 삶을 구합니다. 패배해도 좌절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 뜻에 바로 살지 못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저에게 교훈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를 고쳐가며 일평생 그 인생을 복 되게 살아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출애굽기 33장 19절에 보면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이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그렇게 말씀합니다. 이 절대 주권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로마서 9장 20절과 21절에 이렇게 정리합니다.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우리 인생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가장 첫 단추는 인생은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내 예상대로 되는 것이 없구나! 그것을 깨닫고 인정하는 데서부터 인생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열어주신 세계를 걸어갈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행복을 꿈꾸며 살았던 한나 그가 아이를 갖지 못할 여인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고 자기 대신 딴 여자를 이 남편이 얻어서 거기서 아이가 태어나면서 이 남편이 이렇게 돌아설 줄 몰랐던 이 한나는 ‘인생이란 참 이해하지 못 할 일이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그가 기도로 하나님 앞에 매달리며 아이를 얻고 난 다음에 그이 기도 속에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사무엘상 2장 6절부터 7절까지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기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 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며 높이기도 하시는 도다” 

여러분 미국에 제가 시카고 대학병원에 있을 때 한 자매가 입원을 했어요. 아주 초롱초롱하고 똑똑하게 생긴 자매입니다. 한국에서 조선일보 기자를 했는데 눈 방울만 봐도 ‘야, 이사람 총명하게 생겼다’ 그런데 이 분 표현이 자기는 지금까지 시험이란 시험을 쳐서 실패해 본적이 없다는 거예요. All things a possible 예, 자기는 모든 것이 가능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자기가 결혼하고 보니까 남편을 마음대로 못하겠다는 거예요. 모든 것, 별 짓 다해도 남편은 절대 자기 마음대로 안되더라는 거예요. 또 하나는 자궁에 혹이 생기면서 자기도 원치 아니하게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분이 불교신자인데 그것을 자기가 받아드리고 나서 자기가 믿고 있던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복음을 받아드리기 시작한 거예요. 맞습니다, 인생은 내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운명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뭔가 다른 힘과 원리가 있다는 것을 제가 압니다. 총명하니까 금방 깨닫더라고요. 인생은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뒤 하나님께서 이 가정에 자녀를 주셔서 지금 미국에서 어딘가에 있겠는데 연락이 끊어진 지가 꽤 됐어요.  “내 인생이 내 것이 아니구나!” 그렇게 고백할 수 있을 때 우리 인생은 새로운 눈으로 보여지기 시작합니다. 우리 젊은이들이 결혼할 때 제가 주례를 하며 주례사에 반드시 넣는 것이 있습니다. 행복한 가정 이루기를 원하고 복 된 인생 살기를 원하면 그 가정에 가장 중요하게 있어야 될 것이 믿음이라는 거예요, 믿음! 

그 믿음이 뭐냐? 첫 번째 믿음이 하나님께서 나를 이 땅에 우연히 던져버린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목적과 뜻과 의미를 가지고 이 땅에 보냈다는 것을 믿어야 된단 말이에요. 여러분 이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보내셨고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 주권이 있으시다고 믿는 이 사람은 쉽게 좌절하지 않습니다. 낙담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는데 때로는 힘들고 어려운 여건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있을 거야! 딛고 일어섭니다

그리고 또 하나 가져야 될 믿음은 뭐냐하면 지금 나에게 주신 내 아내가 정말 하나님께서 주신 최고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믿어야 된다고요. 하나님께서 그토록 사랑하시는 자녀 자기 독생자까지 죽여서 살린 이 자매가 행복한 가정을 위해서 배우자를 만났는데 우연히 주겠냐, 이거에요. 나에게 가장 소중한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그 믿음을 가져야 된다는 거예요. 내가 결정하고 내가 선택했다, 내가 보기에 좋아서 했다, 그런 사람은 어떻게 할까요? 쉽게 내가 싫을 때 버려버리는 거에요. 인생을 그렇게 삽니다. 여러분 그렇게 사는 사람의 인생치고 저는 행복하게 사는 사람 거의 못 봤습니다. 이 사고와 생각이 바뀌기 전까지는 행복한 인생이 없습니다. 항상 불만에 차있습니다. 항상 자기가 자기 자신을 자책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를 이 땅에 보내셨다는 사람은 절대 낙담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나에게 보내신 가장 귀한 선물이라고 그럴 때는 자기를 살피면서 자기 자신에게 부족한 것이 뭔가를 찾으면서 관계를 만들어갈 때 누가 성장하느냐? 자기가 성장해요. 자기가 아름답게 만들어지더라고요. 그러면서 인생의 연륜과 더불어 그 삶이 풍성해지고 넓어지고 깊어지면서 아름다운 가정을 결국을 이루어내는 것을 많이 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이 내 마음대로 되는 것 같지만 내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을 정말 먹을 것 간섭하셨죠, 세상에 치사한 것 중에 먹을 것 간섭하는 것처럼 치사한 게 없습니다. 음식 끝에 마음 상한다고 우리나라 사람들 옛 말이 있잖아요. 거주이전의 자유를 제한했습니다. 가고 싶은데 못 가게하고 가고 싶지 않은데 가게하고, 이게 뭐냐하면 철저하게 인간의 주권을 꺾어버린 거예요. 인간의 고집을 꺾어버린 거예요. 인생이 네 마음대로가 아니라는 거예요. 네가 갈 수 있다고 가는 것 아니고 네가 할 수 있다고 하는 것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는 거예요. 이거 훈련시키는데 40년간 걸렸어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인생은 네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 주권인 하나님이 말씀으로 사는 것임을 너로 하여금 훈련시켰다. 그 다음에 하나님의 축복하시는 가나안 복지에 이 백성들을 인도하신 것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어린아이 꼬맹이 고집 피울 때 고집 꺾기 위해서, 그 아이 괴롭히기 위해서 그러는 부모 없잖아요. 그러나 끝까지 항복 받아내는 이유가 뭘까요. “인생이라는 게 네 고집 만으로 되는 게 아니다” 부모들이 그거 알려주기 위해서 하는 거잖아요. 

오늘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의 미래를 아시고 이 삶을 아신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가 “우리 삶의 주인이다, 내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이 것 내려놓지 않으면 우리 인생은 좌충우돌이에요. 자주 낙심하고 절망하고 인생에 있어서 정말 행복으로 나가는 길과는 정 반대의 길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요나에게 하나님 주신 교훈이 뭐냐? 인생 너에게 달려있지 않고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있다는 것, 그것을 깨우치고 알려주는 교훈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일이 또 여러분의 삶이 어떻게 저렇게 되고 이렇게 되는 것이 나에게 달려있지 않습니다. 환경에 있지도 않습니다. 누구에게 있지요?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간구하고 누구에게 부르짖어야 됩니까? 하나님께 나가야 됩니다. 사람에게는 이 일을 바꿀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바로 그 일에 주관 자 되시는 하나님께 나갈 때, 하나님께 자주 여쭤볼 때 다윗의 인생처럼 칠흑 같은 어둠이, 정글 같은 그런 빽빽한 숲이 그 앞에 전개되어도 그 앞에 하나님은 그 길을 인도하셔서 아침에 돋은 밝은 빛처럼 그 인생을 보게 됩니다. 

오늘 우리 주님의 교훈이 무엇인가?  여러분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다는 것, 그거 인정하시고 주님 앞에 나를 내려놓기를 바랍니다.  10대 20대는 복종을 통해서 나갑니다. 30대 40대는 결단입니다. 50대 이상은 내려놓아야 됩니다.  가장 어려운 부분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수 주일하는 거 주일 날 예배 드리는 거 하나님 주권 인정하는 것입니다. 

십일조, 온전한 십일조 하나님 주권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모든 것이 나에게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 고백하는 눈에 보이는 표시가 십일조입니다.  눈에 보이는 표시가 그 시간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에 대한 눈에 보이는 고백이 예배시간을 정확하게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의 교훈이 여러분 마음 판에 새겨 져서 정말 절대 주권을 가지신 그 하나님, 그런데 그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고 포기치 아니하신 그 하나님 이시라는 사실을 믿으면서 여러분 삶 앞에 하나님의 교훈을 따라 사는 축복의 삶이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아멘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가르치시기를 원했던 교훈이 뭔가? 그것은 하나님께 사람을 어떻게 보호해야 되는가 하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본문 보면 식물보다는 동물을 동물보다는 사람을 더 소중히 여기시는 것으로 이렇게 내용상 전개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나가 여기에서 분노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죄인이며 잔악하고 멸망 받아야 될 저 니느웨 백성을 구원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저들의 행위와 성품과 저들의 죄 성을 보면 멸망 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멸망시키지 않고 다시 회복시키시고 구원하시니까 요나가 마음이 굉장히 불편해진 것입니다. 분명히 자기 기준에 의하면 저 인간은 죽어 마땅한 인간인데 하나님께서 그거 처치하지 않거든요. 다시 회복시키는 그게 요나에게는 불만의 요소가 되어 있습니다. 요나의 분노가 틀렸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지요. 여러분 오늘 신문에 자주 나타나는 연쇄 살인범 볼 때 여러분 어떠세요. ‘아 안됐다, 누가 또 죽었구나!” 그런데 그 당사자 한번 돼보세요. 가족들이 돼보세요. 

연쇄 성 복행한 사람들 그 당사자 돼보세요, 가족들 돼보세요. “아 저 집 딸은 안됐다” 이거로 끝나지 않아요. 현장 검증할 대 그냥 돌멩이를 들어서 저거 죽어야 된다고, 저 인간은 인간 쓰레기라고 죽여야 된다고 돌멩이를 던져서 죽이고 싶은 마음 일거예요. 오늘 요나의 심정이 이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교훈으로 주신 것이 있습니다. 

“그래 요나야 그거 맞다. 나도 인정한다. 나도 앗수르가 그래서 멸망시키려고 하지 않았니? 그러나 네가 사람을 보는 눈은 이렇게 해야 된다.” 

그것이 뭐냐하면 11절 말씀에 이렇게 나옵니다.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12만 여명”이라고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좌우를 분변치 못한다고 그럴 때 어린아이라고 얘기를 하지만 그러나 다시 해석하면 흑암 중에 어두움 중에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해서 죄 가운데 살아가는 그 인생이 12만 명이다. 하나님도 알고 계신다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 12만 명이라 할 때, 사람에 대한 호칭을 쓸 때 “아담” 사람 아담이라는 그런 단어가 나옵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께서 창세기 1장 26절에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 하실 때 그 때 쓴 사람 “아담” 그 단어하고 동일합니다. 그럼 하나님은 저 죽일 니느웨 백성을 볼 때 어떻게 보셨냐,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그렇게 보았던,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여겼던 그런 인간으로 보았다는 거예요. 그런 사람들로 봤기 때문에 하나님께선 그들을 진멸 시킬 수 없었고 그들에게 또 용서와 회개의 기회를 주셔서 그들을 다시 살렸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요나에게 주신 교훈이 뭘까요? 네가 볼 때 저 인간들이 정말 죽어야 될 인간인줄 알고 또 내가 심판할 정도로 저들이 정말 하는 행위가 악하지만 네가 그 사람을 볼 때는 오늘 내가 보는 것처럼 그렇게 좀 보라는 거예요. 뭐예요, 저도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거예요. 걸작품이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보셨기에 오늘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 독생자를 우리를 위해서 보내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을 보면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라고 그랬어요. 

그런데 그 죄만 보면 우리를 능히 사형에 해당된다고 로마서에 그렇게 돼있어요. 그렇지만 우리를 그렇게 보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이 창조하셨던 보기에 좋았더라 는 그 하나님 창조하셨던 하나님 작품으로 이 니느웨 백성도 보면서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해 내신 것을 봅니다. 

이 모습을 사도바울은 로마서 5장8절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가 아직 회개할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돌이킬 마음을 갖겠다 이것도 아니고 죄의 상태 그대로 있을 때에, 뭐 개전에 여지도 안보이고 하여튼 죄인으로서 가지고 있는 그 모든 죄 가와 죄질과 죄책감과 죄의 모든 것들을 다 가지고 있을 때에 그때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만들면서 우리를 얼마큼 사랑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었다는 거예요. 그 사랑이 있었기에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살아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가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5000명 먹이는 그 사건이 나오지요. 여기 보면 사람의 관이 두 개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전도 여행 갔다 오고 너무 피곤하고 힘드니까 “너희들 가서 쉬어라” 그래서 제자들이 정말 쉬겠다고 간 곳에 갈구하는 사람들이 먼저 그 군중들이 와서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생각은 저 불쌍한 저 백성들, 목자 없는 양 같이 불쌍히 보시고 자신도 피곤하고 힘들지만 그 백성들을 앉혀놓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그리고 그들을 위로하고 천국의 소망을 전하는 일을 하게 하실 뿐 아니라 그들에게 먹을 것까지 주게 되는 그런 역사를 행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본 이 사람들은 뭘까요? 저것들 때문에 우리가 쉬지도 못하는 구나! 그 사람들을 귀찮게 봤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해서 이 제자들에게 주신 교훈이 뭘까요? 너희들이 사람들을 그렇게 보지 말고 내가 보는 것처럼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보는 거기서부터 생명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거예요. 

여러분 오늘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 남편들 이런 생각이 있지요. 세상에 수많은 여자 중에 왜 이 여자를 만나서 이 여자 때문에 내가 참 내 인생 버렸다. 참 나도 가능성이 있고 행복할 수 있는 인생인데 어디서 저런 여자를 만나가지고 내 인생이 참 이렇게 엉망이냐?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 거예요. 우리 아내 입자에선 세상에 많은 남자 중에 왜 이런 남자 만나서 내 인생이 이렇게 어려울까? 참 나는 꿈도 많고 가능성도 많고 괜찮았는데 이 남자가 내 인생 망쳤어, 이 남자만 아니었으면 내가 그런대로 괜찮게 살 수 있었는데 이 남자 때문에 내 인생 망쳤어 ---

우리 자녀들 중에는 참 세상에 많은 부모 중에 왜 내가 이런 부모 만났냐? 술 알코올 중독 돼있고 바람나고 가족들 돌보지 않고 자기 성질대로 다 풀어내고 이런 부모 때문에 가슴에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이 부모 때문에 그 부모는 세상을 떠났지만 내 마음 속에 그 상처는 아직도 남아서 나를 괴롭히고 힘들게 만드는데 정말 나는 만나지 말아야 될 부모를 만나서 내 인생은 불행해! 우리 부모들은 세상에 많은 자식 중에 왜 이 자식이 내 자식이 됐나? 저 박집사 이집사 저 아이들 봐, 이 아이 때문에 내 인생이 참 피곤하고 힘들구나! 

여러분 그런 생각들 때가 있잖아요. 저것들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것 못하고 있어, 저 사람 때문에, 저 사람 때문에--- 정말 이 사람만 없으면 여기가 천국 될 것 같은데 ----여러분 그 사람 빠지면 더한 사람 나타납니다. 예! 군대 가면 요 고참만 나가면 우리가 해방이다 그러는데 꼭 그 짓 하는 인간이 다시 나타나더라고요. 아마 군대 갔다 온 분들은 여기서 축구 얘기하면 우리 자매들은 다 뒤로 자빠지겠지요. 예, 자 그럴 수밖에 없어요. 거기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거기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소생케 되는 역사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보이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이렇게 보신 것처럼 요나에게도 사람을 볼 때 하나님의 걸작품으로 보라는 거예요. 여러분 그런 마음이 수긍이 안 되면 이렇게 라도 생각하면 돼요. “저 인간도 하나님 만드셨지!”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주님께서 우리를 목자 없는 양같이 여기셨기 때문에 십자가도 지셨고 우리를 오늘 죄와 허물을 따라 처치하지 않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받을 그 축복을 주신다는 것 기억하면서 오늘 하나님 앞에서 내게 주어진 사람을 하나님의 걸작품으로 볼 때 그 사람이 안 바뀝니다. 

그 사람을 보는 내 태도가 바뀌어지면서 내 자신의 삶이 달라지는 거예요. 풍성해 지면서 내 속에 갈고 닦고 없어져야 될 모든 것들이 새롭게 만들어지면서 인생을 보는 폭이나 인생을 보는 깊이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에게 ‘정말 저 사람 때문에 내 인생 불행하다 이 사람만 없으면’ 하나님께서는 그런 마음보다는 정말 네가 복 받는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는 그 사람을 향해서 정말 하나님의 걸작품이라고 그렇게 하나님께서 여겨 주기를 우리에게 부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3장 9절부터 10절까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 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도다.” 이거 뭡니까? 

여러분, 여러분 자녀들이 맞고 들어오면 여러분이 어떻게 합니까? “그래 내가 안 때려도 누가 너 때릴 줄 알았다, 잘 맞고 왔다.” 이런 부모 없잖아요. 쫓아가서 뭐라고 그럽니까? “야, 이 아이를 때린 것은 나를 때린 것과 마찬가지야!” 그런 말씀 하시지요? 점잖게 앉아 계셔도 자식 문제 일어나면 지금 표정 변할 분 참 많습니다. 왜요? 내 자녀기 때문에 그렇다면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만드셨는데 부모는 자기 자식 못난 거 알거든요. 

그런데 그 자식을 귀하게 여겨줄 때 그 부모는 그 자식을 대하는 것이 달라집니다. 하나님께서 ‘얘야 너 미안하다, 너에게 너무 어려운 사람 맡긴 것 같아, 네 남편 참 힘들지, 그런데 네가 말이야 나를 생각해서 그 남편을 대해주는 것을 볼 때 내가 너무 고맙구나!” 복의 근원되시는 하나님께서 그 인생 축복하지 않으시겠어요. 하나님이 반드시 축복합니다. 하나님이 귀하게 여깁니다. 

그 하나님의 사람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여길 때, 감당해야 될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능히 감당할 능력도 주시고 그 삶을 통해서 하나님이 격려하는 백성, 하나님이 이름을 아는 사람, 하나님이 이름을 높이는 사람, 그 인생을 장수하며 하나님께서 높여 주신다고 주님은 말씀 속에서 종종 약속하셨습니다. 저 인간만 아니라면 그런 눈으로 보지 마시고, 우리 가족들이 좌우에 있다면 그래 당신 하나님의 작품이에요. 좌우로 보시면서 그렇게 좀 보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좌우로 보시면서 “오! 하나님의 작품!” 

여러분 이거 돈 안 내고 보는 거예요 지금! 예, 우리 박물관 가면 돈 비싸게 내야 됩니다. 하나님 작품! 저는 하나님 작품 많이 보니까 얼마나 --- 관람료 내려면 제가 참 많이 내야 돼요. 그럴 때 우리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도 복되고 아름다워 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10절 말씀에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묻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낫다가 하룻밤에 말라버린 이 박 넝쿨을 아꼈거든---“ 이 말씀 뭡니까? 그러니까 그 사람 미워하지 말고 멸시하지 말라, 그 사람이 지금이 있기까지 네가 뭐 보태 준 게 있냐? 이 뜻이에요. 그렇지요? 여러분 저 욕하지 마세요. 저 지금이 있기까지 저 보태준 거 있습니까? 없잖아요. 제가 신세 졌다면 제가 무학교회 신세 많이 졌어요. 

예 마찬가지에요. “하나님께서 하셨구나! 예, 하나님 맞습니다.  주님께서 하셨습니다. 맞습니다. 주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주님의 작품이기 때문에 제가 귀하게 여기겠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섬길 때 그 속에서 기적과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사람을 정말 귀하고 존귀하게 여기라는 바로 그런 교훈을 여러분이 잘 받고 여러분 삶 속에 새로운 눈을 가지고 인생 살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가르쳐주시기를 원하셨던 것이 뭘까? 그것은 정의보다는 사랑이 우선순위라는 것을 가르쳐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4절 말씀 보니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 그랬어요. 요나는 자기 분노에 대해서 정당하게 생각합니다. 요나의 이러한 의식이 뭡니까? 정말 이 앗수르라는 나라는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정말 잔인한 민족입니다. 정말 이 땅에 없어져야 될 민족입니다. 그래서 이 민족은 누군가가 심판해서 사라져야 될 민족인데 하나님께서 멸망시키는데 요나가 가서 회개시켜서 다시 살렸다는 것은 정말 자기로서는 견딜 수 없는 일이에요. 

실제적으로 150년 뒤에 앗수르가 이스라엘을 점령하면서 이스라엘이 망했거든요. 그런데 그것은 앗수르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죄악을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통해서 치신 것에 불과하지, 그러나 결과적으로 역사적으로 보면 어쨌든 앗수를가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 분노가 있고, 하나님 이것은 이 뜻대로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뜻대로 되어야 합니다, 죄인은 멸망해야 됩니다. 이 땅에 정의는 실현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저 니느웨의 백성 다 죽여야 됩니다. 그것이 요나의 논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박 넝쿨을 주셔서 기쁘게도 하셨다가 벌레를 준비해서 다 갉아먹게 만들고 뜨거운 동풍이 불어서 정말 뜨겁게 만들면서 요나에게 “ 요나야, 네가 기뻐하는 기쁨하고 내가 기뻐하는 기쁨하고 네가 귀하게 여기는 것 하고 내가 귀하게 여기는 것은 다르다” 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는 것이 뭐냐? 네가 정이와 바로 세우고 바로 잡는 것 좋아하지만, 그러나 그거 이전에 해야 될 일은 사랑이 우선순위라는 것을 요나에게, 오늘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0절과 11절 말씀을 이동원 목사님은 이렇게 설명했어요. 내 생각도 중요하다, 내 판단도 중요하다, 너의 의식도 중요하다, 너의 신념도 중요하다 그러나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너는 생각해봤니?  네가 싫어하는 그 사람을 나 하나님이 나 여호와가 나 창조자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한번이라도 생각해봤니? 내가 그를 아낀다, 내가 그를 소중히 여긴다, 물론 그들은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못하고 정의와 불의를 분별하지 못하고 영적인 어둠과 빛을 분별하지 못하고 사단과 하나님을 분별하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다. 그들은 어둠 속에 헤매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들을 아낀다. 그들이 내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들도 내 앞에 나와 회개하고 예수그리스도를 믿어 거듭나게 되면 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게 될 놀라운 가능성을 가진 자들이다. 그러므로 나는 저희를 아끼노라! 

저희 사촌동생이 검사시보를 할 때 사형 집행하는 현장을 이렇게 입회를 해야 된답니다. 자기가 그 다섯 명인가 사형을 당하는데 그 중 한 명의 마지막 이야기가 굉장히 마음에 와 다았다고 그래요. 신문에 이름이 났기 때문에 유명한 사람인데 얘기를 하더라고요. 나는 일찍 아버지 돌아가시고 부모님 돌아가시고 깡패 세계에 들어와서 이 세계가 나에게는 전부인줄 알았다는 거예요. 이 세계가 나는 내 인생의 전부이고 인생이 다 이렇게 사는 줄 알았는데 감옥에 들어와서 새로운 세상이 있다는 걸 발견하게 됐다고, 정말 내가 이 밝은 세상을 알지 못하고 마음대로 살았던 지난 날을 돌아보면서 회개합니다. 나 같은 사람이 나오지 않도록 밝은 세상이 있다는 것을 이 땅에 다른 사람들에게 좀 알려줬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자기 신앙고백을 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는 거예요. 

그 말이 많이 마음에 와 다았다는 거예요. 우리가 욕하고 비난하고 죽일 놈이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들은 어둠 가운데 분 변치 못하는 사람들, 그들에게 의의 잣대를 갖다 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의 마음을 먼저 여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다 의의 기준을 갖고 있어요. 그런데 얘기를 하나 해볼게요. 어떤 엄마가 딸하고 아들을 결혼시켰어요. 그래서 묻습니다. 아이고, 선생님 뭐 무슨 여사님, 딸 결혼을 그렇게 잘 시켰다면서요? 예, 사위를 너무 잘 봤어요. 이 사위가 얼마나 좋은지 우리 딸이 피곤하다고 아침 일찍 일어나지 말고 그냥 늦잠 자라고 둔대요. 그러면 사위 혼자 그냥 씨리얼에 우유 말아서 먹고 가고 그렇게 한다 네요. 참 이 딸을 그렇게 사랑해요. 그 다음에 부엌에 와서 부엌 일하고 집안 일하면 너무 힘들다고 요즘은 가사도 분담해야 된다고 이 사위가 들어와서 부엌 설거지도 하고 청소도 하고 애 옷도 빨고, 그렇게 집안을 돌보고 아내를 귀하게 여긴대요. 그리고 같은 음식만 계속 먹으면 상한다고 일 주일에 한 두 번씩 꼭 외식하면서 맛있는 집 이 집 저 집 보여주면서 먹여주면서 그렇게 이 딸을 아낀대요. 

참 우리 사위 잘 봤어요. 아드님은요?  예, 며느리요? 이게 게을러 빠져서 아침에 신랑 가는데도 퍼지러 자고 신랑이 밥을 먹고 가는지 씨리얼을 먹고 가는지 신경도 안 쓰고 그냥 잠만 잔대요. 우리 아이가 보니까 살림한다고 부엌에 들어가서 하는 것 보니까 더 엉망진창 바퀴벌레가 왔다갔다해서 답답해서 차라리 내가 하는 게 편하겠다고 생각해서 살림 자기가 다하고 밥해서 차라리 갖다 먹인대요. 게다가 이 며늘아이는 돈도 못 벌어오면서 여기 맛있는 집이 있다, 저기 맛이 있는 집이 있다, 계속 외식하자고 주장만 해가지고 돈도 못 모은대요. 이거 같은 얘기에요. 그런데 이 차이가 뭘까요? 사랑입니다 사랑! 사랑의 눈으로 보면서 달라지는 겁니다. 

여러분 사탄은 우리들의 관계를 이간질 하는 게 주 특징이기 때문에 사람의 눈에 살짝 다른 것을 부어버리면 그때부터 그 사이는 점점 갈라지게 돼있어요. 그 사람이 나에게 마음에 안 든다, 이렇게 마음이 상한다 생각하면 다 안 보이게 돼있어요. 

여러분이 참 괜찮게 생각하는 사람이 고개를 이렇게 푹 숙이고 가면 ‘저 사람은 인생을 참 진지하게 사는 구나!’ 이렇게 생각한다고요. 그 사람이 밝게 ‘안녕하세요?’ 그러면 ‘저 사람은 밝아서 좋아’ 그렇게 받아드리거든요. 여러분이 좀 삐딱하게 보는 사람이 고개를 푹 숙이고 가면 “저 인간 허구한날 대가리 땅에 박고 사는데 인생이 풀릴 리가 있냐?” 이렇게 받아드려요. “아, 안녕하세요?” 그러면 촐랑대기는 인간이 무게가 있어야지! 하하하 하하하 같은 모습인데 왜 해석이 달라요? 어둠의 영들이 우리에게 잘못된 관점을 부어놓으면 어려워지는 거예요. 

그런데 이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게 뭘까요? 사랑입니다. 여러분 바로 세우려고 한번 해보세요. 여러분 저 한국교회 바로 세우려고 굉장히 애썼어요. 우리교회 와서도 마찬가지에요.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지나간 얘기하면 좀 이상하지만 아무튼 우리교회 사역자가 다른 교회 3/2나 반 가까이 밖에 안 되면서도 생각하는 건 뭐냐하면 재정문제 정말 아끼면서 투명하게 하겠다. 

여러분 5,000원짜리 2,000원짜리 봉투 들고 여기 앞에 앉아서 기도할 때 가슴이 메입니다. 쓰는 돈 천 만원, 이천 만원, 삼천 만원, 일억 퍽퍽 날려보세요. 속이 탑니다 타! 목사님들 부 목사님들 아프다고 그러면 제가 죄책감이 와요. 그렇게 하나하나 아껴 가면서 교회가 물질로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되어진다는 것을 우리교인들과 함께 더불어 세워나가자, “돈 없어서 교회 못나가겠다” 이 얘기 절대 안 듣겠다. “돈이 없어서 나는 교회 나가서 당당해졌다.” 이렇게 되는 교회를 만들겠다. 교회를 통해서 자기 직업에 자기 사회성에 대한 기쁨을 나타내고 뭔가 해소해보겠다는 그것이 아니라 교회는 하나님의 법이 바로 서야 되잖아요. 하나님의 사랑이 넘쳐야지 좀 힘이 있는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하는 그런 교회는 아니다. 바로 세워보자. 

성가할 때 뭐 30만원 50만원 돈이 왔다갔다하고 기가 막힙니다 기가 막혀! 제가 여러분 말씀 드리잖아요. 전쟁 겁낸다고요. 이북 때문에 겁내는 것 아니에요. 내부로 들어가면 어디부터 손대야 될지 몰라요. 기가 막혀요. 바로 세워보려고 했는데 여러분 안됩디다 이거! 참! 여러분, 여러분 자식 바로 세워보려고, 저 인간 바로 세워보려고 했는데 그 인간이 바로 잡아집디까?  예, 사이만 나빠지고 얼마나 관계가 흐트러집니까? 우리가 할 일이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중요한 것은 사랑하는 게 먼저고 사랑하는 것을 통해서 잡으라는 거예요. 제가 그 동티모르 선교에 대해서, 동티모르 선교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선교의 역사를 죽 보고 선교의 현장을 보면서 선교사 한 사람 파송 해가지고 거기서 그 사람 뒷돈 대고 하는 것은 선교가 아니라 선교라고 하는 것은 한 사람 만이 아니라 세 사람 내지 네 사람, 의사 한 사람 선교사 한 사람 그 다음에 무슨 법이나 경제학자 그 다음에 social worker 이런 사람들을 같이 파송 해서 한 마을에 구조를 바꿔주는 거다 하는 생각을 저는 늘 갖고 있었어요. 

그런데 마침 교수님을 통해서 동티모르 이병훈 선교사님하고 연결이 된 거예요. 그래서 교수님들 보내서 우리가 고기 잡아 주지 말고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주자, 그러면 무슨 유혹을 이겨야 되는가 하면 우선 막 주고 싶은 유혹을 이겨야 돼요. 그렇게 했기 때문에 동티모르는 네덜란드나 미국 선교 본부가 다 철수 한 거예요. 하다가 지치는 거에요. 이거 달라 저거 달라 하니까?  그렇게 하지 말고 우리가 단기선교에 가서 이빨 하나 뽑아주고 주사 놓고 그것이 아니라 상수도 하수도까지 근본적으로 바꿔주는 일을 하자, 그럼 이 일에 동의 하는 사람을 위해서 우리 이대훈 선교사님 하고 같이 했는데 이게 아니라는 것을 얘기 듣는데 제 눈의 핏줄이 탁 터지는 거예요. 야, 실망과 낙심이 제 마음속에 밀려오는 거예요. 

아, 이거 동티모를 참 어렵구나! 내가 원래 계획했던 대로 지금 대학원 학생 좀 길러서 보내면서 서서히 구조를 만들어가는 작업을 해야 되는데 그냥 속에 받는다고 그냥 딱 덜컥했다가 이거 괜히 비전 공유가 안되면서 일했다가 이거 돈만 나가고 ---- 

어떤 교회는 100억을 손해 봤어요 100억, 선교한다고 100억 손해 봤어요. 다 엉뚱한 사람들 손에 다 들어간 거예요. 교인들이 아까운 헌금을 이렇게 할 순 없다. 실망하고 절망하면서 아, 더 이상 선교 정책에 대한 근본을 내가 바꿔놓고, 사람도 바꾸고 다시 시작해야 되겠다 생각했는데 제 마음속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계획이 밀려오는 거예요. “김형준 너 동티모르 사랑해봤니?”  저는 사랑해 본적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솔직하게! 그 나라가 도움이 필요하니까 우리도 선교사의 도움 받아서 우리나라가 이만큼 되었고 기독교 복음이 들어가야 된다 그렇게 생각했지 “동티모르를 사랑한다”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이대훈 선교사님 사랑해 봤니? 그 분은 그 분이 하나님께 소명 받아서 그곳에 가서 사역하는 거고 우리교회는 우리교회가 사명을 받아서 그 선교사님 도와서 사역을 감당하는 거니까, 그건 서로가 자기 사역에 맞게 환경에 맞게 도와주고 하는 거지, 이병훈 선교사님을 사랑한다, 안 해봤어요. 사랑하지 못한 것 같아요. “사랑이 먼저야! 사랑이 먼저야! 바로 세우려고 하지 말고 사랑이 먼저야!”  그 마음이 제 마음속에 밀려 오는데요, 못 견디겠는 거예요. 하나님 그래도 바로 잡아야지, 지금 한국교회가 재정적인 낭비나 인력의 낭비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렇게 잃어버린 선교정책의 잘못 때문에 얼마나 교회가 지금 방황하고 있습니까? 바로 잡아야 됩니다 하나님! 그러나 사랑이 먼저야 사랑이 먼저!이게 납득이 잘 이해가 잘 안되 더라고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제 마음속에 회개를 시키시더라고요. “하나님 동티모르 사랑하게 해주세요. 사랑하지 못한 것 같아요, 이대훈 선교사님 사랑하게 해주세요.” 자 그렇게 회개하고 있는데, 우리 이대훈 선교사님 사모님이 오늘 오셨는지 모르겠는데 사모님이 중이염으로 치료 차 나오신 거에요. 그 마음이 있으니까 옛날 같으면 치료 받으신 모양이다 생각할 텐데, 그냥 도와주고 싶은 거예요. 

우리교회는 재정적으로 많이 아끼면서 절약하는 입장이니까 어떻게 치료비를 받아낼 때가 없어요. 어쨌든 치료비를 마련하고 사모님 드리면서, ‘사모님 더 필요하면 말씀하세요. 제가 어떻게 도와드리면 좋을까요?’ 그렇게 하고 이제 더 사랑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는데 몇 일 전에 우리 사모님한테 편지가 왔는데 제가 해주고 싶은 말이 편지 안에 사모님 손으로 다 적혀있는 거예요. 편지 받고 제가 가만히 생각했어요. ‘아, 하나님 방법이 맞습니다, 제가 그랬어요. 사람은 사람을 바로 세울 수가 없어요. 우리는 각자의 기준이 다 달라요. 내 자식 하나 바로 못 세우는데 내가 남 세우고 사회를 세우고 교회를 세우고 민족을 세워요, 아니오, 사랑하는 게 먼저입니다. 

여러분 자녀들도 세우려고 하지 말고 먼저 사랑해 보세요. 교회에 요구하기 전에 교회를 먼저 사랑해 보세요. 이웃에게 요구하기 전에 이웃을 먼저 사랑해 보세요. 여러분 우리 장로님들 욕하기  전에 장로님들 사랑해 보셨나요. 진짜 사랑해 보셨나요? 하나님께서 오늘 묻으시는 것이 그것입니다.  마음에 속상함이 있을 수 있지요. 저에게도 그런 마음이 있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고 우선순위이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만들어가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가 너무 구체적으로 얘기해 가지고 여러분 중에 혹시 또 선교사님 가정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제 솔직한 고백입니다. 사랑하겠다, 사랑이 우선순위 구나! 우리교회도 내가 바로 세워나가는 게 문제가 아니라 교회를 먼저 사랑해야 되겠다, 한국교회를 먼저 사랑해야 되겠다. 그게 하나님의 교훈이라면 그 교훈대로 따르는 것이 맞다, 하나님께서 그걸 가르쳐주셨어요.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요나에게 준 교훈이 요나에게 준 교훈만은 아닙니다. 오늘 나에게 준 교훈입니다. 우리 인간의 육신의 생각과 판단은 죄라는 것 자체가 근원적으로 내가 스스로 하나님께서 내가 내 마음대로 판단하고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그 죄의 속성이 있는데 주님은 “그것 따라가면 넌 죽어! 먼저 절대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걸 너 있지마!” 사람이 암만 미워도 하나님의 걸작품인 것을 믿고 하나님을 봐서 그 걸작품을 걸작품으로 대할 수 있겠니?  그리고 세우는 게 우선순위가 아니야, 사랑부터 먼저 세우는 것이 인생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축복을 얻는 길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교훈으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이 크고 작은 일 만나고 계실 거예요. 여러분의 방법대로 푸시지 말고 하나님이 요나에게 주시고 오늘 우리에게 주신 이 교훈을 따라서 여러분의 삶의 문제를 찬찬히 생각해 보시면서 하나님이 예비한 축복의 길로 우리의 삶이 새롭게 결단되고 선택되어지는 주님의 그 사랑 안에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동풍도 예비하시고 태풍도 예비하신 주님 그러나 큰 물고기도 준비하셔서 우리에게 새로운 기회도 주시는 주님, 죽고 사는 것이 주께 있고 높여지고 낮아지는 것이 주께 있고, 있고 없는 것이 주께 있음을 다시 한번 주 앞에 고백하며 우리 주님의 도우심과 주님의 인도하심을 간구합니다. 주님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이 결코 만만치는 않은데 우리에게 참 힘들게 하는 사람들을 바라볼 때 하나님의 걸작품으로 볼 수 있도록 우리의 눈을 바꾸어 주셔서 우리 자신이 인생을 더 깊게 더 높게 더 폭 넓게 세상을 바라보며 우리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우리 가슴에 담을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우리가 세운 삶의 우선순위를 바꾸게 하셔서 먼저 의를 세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사랑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게 하셔서 하나님 우리가 정죄하기를 기뻐하는 그 사람을 진정 사랑의 보호임을 하나님 다시 한번 돌아보며 사랑하는 우리의 인생이 되게 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주님 지금의 우리의 어려움이 불행이 되지 않고 우리의 축복이 교만이 되어서 징계로 이어지지 않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주님의 교훈을 따라 사는 주의 백성에게 약속하신 주의 축복이 넘치는 인생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김형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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