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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표면적 유대인, 이면적 유대인 (롬 2: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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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면적 유대인, 이면적 유대인 (롬 2:17~29)


한 때 유행했던 유머 가운데 교황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교황이 연옥에 간 이유를 여러분은 아십니까? 교황이 늙어서 죽었습니다. 천국에 갔더니 천국 문 입구에 사람들이 얼마나 길게 늘어서 있던지 좀처럼 들어갈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왜 이렇게 사람들이 줄을 서 있는지’ 물어봤더니 한국 사람들이 워낙 천국에 많이 왔는데 한국 사람들이 성형을 많이 해서 얼굴 대조작업을 벌이다보니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하는 것입니다. 명부에 있는 것과 실제 모습이 달라서 확인하느라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합니다. 성격 급한 교황이 그만 못 참고 ‘그럼 지옥이라도 가자.’하고 지옥에 갔더니 지옥 앞에도 사람들이 줄을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여긴 또 왜 이런가’ 해서 봤더니 여기도 한국 사람들이 많이 와 있는데 한국 사람들은 워낙 찜질방에서 연단이 많이 되어서 지옥 불에 넣어봤자 끄떡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도를 높이기 위해서 보수작업을 하느라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격 급한 교황은 결국 천국도 지옥도 못 가고 연옥에 갈 수 밖에 없었다고 하는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여러분! 요즘 참 성형이 보편화되어 있다고 생각되어집니다. 원래 성형은 못생긴 얼굴을 잘 생기게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화재를 입었다거나 교통사고를 당했다거나 해서 얼굴이 흉측해진 모습 등을 원래의 모습대로 회복시키기 위해서 성형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또 어떤 분들은 태어날 때부터 얼굴 모습이 기형이라 남에게 조금 혐오감을 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열등감에 빠져서 사회생활을 정상적으로 할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분들에게는 성형을 권합니다. 성형을 해서 사회생활을 정상적으로 할 수 있다면 축복된 일입니다. 그러나 요즘은 외모를 중시하는 사회 분위기에 편승해서 너도 나도 성형 열풍에 뛰어들고 있습니다. 목적은 잘생긴 얼굴을 더 잘생기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성형의 목적입니다. 저는 성형을 하는 분들을 개인적으로 탓할 생각은 없습니다. 본인의 필요에 의해서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저는 얼마든지 생각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우리 외형, 우리 외모를 고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속사람이 아름다워지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외모가 아름다운 것처럼 여러분의 내면도 아름답게 꾸밀 수 있기를, 아름다운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거룩한 사람으로, 순결한 사람으로, 아름다운 사람으로 준비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는 지난주일 로마서 2장 1절 이하의 말씀을 통해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라는 주제를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판단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내가 남을 판단함으로 오히려 그 판단이 내게 돌아올 수 있습니다. 남을 판단하는 것은 곧 나를 정죄하는 것이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내가 선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우리는 남을 판단할 만큼 완벽한 사람도 없고, 완전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 우리는 로마서 2장 11절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신다”는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시지 않습니다. 그의 외형적인 조건들, 그가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그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의 속사람이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는가를 주님은 보기 원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며 그의 내면, 속사람에 더 관심 가지고 주시하신다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외형을 중시하는 한 민족이 있었습니다. 그 민족이 바로 유대민족입니다. 유대민족은 참 특별한 민족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 속에 2000년 동안 나라를 잃고 방황하던 민족이 다시 모여서 그 땅에 나라를 세운 민족이 또 있을까요? 없습니다. 유대민족이 유일무이합니다. 그들은 주후 70년경 로마의 티토장군에 의해서 예루살렘성이 파괴되고 세계로 흩어진 이후에 2000년 동안 뿔뿔이 디아스포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2000년 후에 1948년 그들은 다시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그것이 ‘시오니즘 운동’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나라를 다시 세웁니다. 여러분! 우리가 36년 동안 일제의 억압을 받았습니다만 36년 동안 우리는 우리말을 쓰지 못하고 창씨계명을 당하고 모든 주권을 빼앗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36년에 불과했습니다. 2000년 동안 나라를 잃고 살다가 다시 나라를 회복한 민족이 유대민족입니다.

특별히 유대인이라는 이름은 상당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유대인이라는 말은 야곱의 12아들 중 네 번째 아들 유다의 이름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유다의 이름을 따서 유대인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유다라는 이름의 뜻은 ‘칭찬’, ‘찬송’ 이란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민족이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민족이라는 뜻입니다. 참 특별한 민족입니다. 더더욱 그들은 율법을 자랑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그 민족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율법이라는 것을 유대인을 통해서 받았지 직접 받은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시내 산에서 모세를 통해 직접 율법을 받은 민족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긍지를 가진 민족입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기 때문에 할례를 행했습니다. 그들은 할례 받은 민족이었습니다. 다윗이 전쟁터에 나갔다가 분노한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할례가 없는 블레셋 사람이 할례 받은 유대인을 비난하기 때문에 그가 견딜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이 어찌 할례 받은 유대인을 공격할 수 있느냐?” 그들은 할례를 자신들의 특권의 상징으로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할례를 아시지요?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그 남자아이의 성기의 표피를 잘라버립니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그 할례의식을 낳은 지 8일 만에 정확하게 행합니다. 요즘은 아마 병원에서도 아이를 낳으면 대게 표피를 잘라주는 포경수술을 합니다. 그것이 그 민족의 하나의 상징적인 특징입니다. 그들은 하루에 몇 번씩이나 화장실에서 가서 자신의 할례의식을 행한 것을 보고 ‘나는 유대인이야, 나는 유대민족이야, 하나님의 백성이야.’하는 긍지와 자부심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선 참 특이합니다. 그런 긍지와 자부심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다시 이스라엘 나라를 세울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대한 폐해도 만만치가 않습니다. 그들은 지나친 특권의식, 지나친 우월감 때문에 남을 멸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유대민족이 아닌 이방인은 사람취급도 안 했습니다. ‘이방인은 지옥의 땔감으로나 필요한 존재들이야.’ 그들은 유대인 이외에 다른 종족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성경 본문 17절, 18절 말씀을 읽어봅니다.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그들은 율법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또 하나님을 자랑하는 민족입니다. 그들은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선한 것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 19절 이하에 보니 그들은 스스로 자신들을 가리켜서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 ‘어리석은 자의 교사’,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말했습니다. 이방인들이 맹인입니다. 맹인은 앞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당연히 빛 된 민족인 유대인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유대민족은 교사가 되어서 어리석인 어리아이와 같은 이방인을 말씀으로 이끌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교사라고 자부했습니다. 이방민족에 비하면 하나님의 율법을 가졌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웠고, 그들은 교사의 자격을 가진 특별한 민족이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좋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모순이 있었습니다.

본문 21절 말씀을 함께 읽습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율법으로 가르친다고 하면서 너 자신은 왜 가르치지 못하느냐? 이것이 바로 유대인이 가진 이중성인 것입니다. 남들에게는 율법을 가진 민족, 남을 가르치는 교사의 민족이라고 자부하면서도 자신들은 그 율법을 진정으로 배우지 아니했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본질, 율법의 정신은 잃어버리고 율법의 껍데기만을 그들은 암송하며 다녔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도둑질하지 말라고 한 너희들이 도둑질하며, 간음하지 말라고 말한 너희들이 간음하며, 우상숭배하지 말라고 한 너희들이 우상숭배하고 있다고 오늘 사도바울은 그들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율법을 자랑하는 너희들이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민족이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대인만의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어찌 보면 어떤 의미에서 먼저 믿은 그리스도인들도 유대인들과 같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우리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고 이웃을 사랑하지 못함으로 오히려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있지는 않느냐고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유대민족의 문제가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물론 강도의 범죄를 저지르기도 했겠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가장 많이 한 범죄가 도둑질입니다. 그들이 이천년 동안 흩어져 살면서 가장 많이 한 일이 바로 고리대금업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돈을 남에게 꾸어주고 많은 이자를 받아 착복했습니다. 특별히 셰익스피어의 유명한 작품 중에 ‘베니스의 상인’이라는 작품이 있는데 여기에 ‘샤일록’이라는 유대인이 나옵니다. 아주 간악한 사채업자입니다. 그는 얼마나 사람들을 괴롭히는지 모릅니다. 뭐 대표적인 이야기겠지요. 이처럼 유대인들은 고리대금업을 통해서 남의 것을 도둑질했다고 그들의 성향을 바울은 비난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들도 아마 간음의 범죄를 범했을 것입니다. 또한 그들도 우상숭배의 죄를 구약성경에서부터 수도 없이 범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오직 한 분이신 창조주 하나님만 섬긴 것이 아니라 그들은 툭하면 바알신, 아세라신, 수많은 우상들도 성전을 매웠습니다. 더더욱 나쁜 것은 그들이 우상을 훔쳐서는 이방인들에게 팔았다는 사실입니다. 성전의 것을 가져다가 그것을 이방인들에게 팔아서 그들에게 우상 숭배하도록 부채질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의 잘못이었습니다. 남은 가르치면서 자신은 지키지 못하는 이율배반적인 삶을 살아갔습니다.

어떤 아버지가 아들을 유심히 보니까 아무리 보아도 공부를 잘 안 합니다. 놀기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한 번은 아들을 앉혀놓고 훈계합니다. “야 이놈아! 너 아브라함 링컨 알지? 아브라함 링컨은 너만한 나이에 혼자 독학으로 대학을 졸업했어. 너는 그 꼴로 뭐 하려고 그러냐?” 그때 아들이 아버지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답니다. “아버지, 나도 알아요. 아브라함 링컨은 아버지 나이에 미국의 대통령을 했는데 아버지는 뭐하고 계세요?” 내가 준비되지 않으면 자식을 훈계해도 효과가 없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가지고 있는 고민일 것입니다.

아주 유명한 랍비, 성자에게 한 어머니가 찾아와서 호소했습니다. “랍비 선생! 우리 아이가 단 것을 너무 많이 먹어서 이가 썩고 큰일 났습니다. 단 것을 먹지 말라고 한 마디만 해주세요. 선생님을 너무 존경하니까 우리 아이에게 한 마디만 해 주시면 들을 겁니다.” 고개를 끄덕이고 승낙을 했습니다. 

일주일 후에 그 어머니가 아이를 데리고 왔습니다. 그랬더니 그 랍비 선생님이 그 아이와 딴 이야기만 하다가 그냥 돌려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주에 또 오라는 것입니다. 답답했습니다. 다음 주에 또 왔더니 또 딴 이야기만 하다가 그냥 돌려보내는 것입니다. 다음 주에 또 오라고 합니다.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셋째 주에 다시 데리고 왔더니 그제야 이 아이를 앉혀놓고 단 것을 먹으면 몸에 해롭고 이가 썩으니 절대로 단 것을 먹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그 후로 아이는 단 것을 끊어버렸습니다. 너무나 훌륭한 선생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 후 어머니가 랍비를 만난서 물었습니다. “아니, 한 마디 하시면 될 것을 가지고 왜 3주씩 시간을 끌었습니까?” 그 랍비가 말했습니다. “사실은 나도 단 것을 너무너무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단 것을 먹으면서 어떻게 아이에게만 단 것을 먹지 말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내가 3주 동안 열심히 단 것을 끊고 그리고 나서야 그 아이에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시사 하는 바가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늘 설교하는 설교자들에게 교훈이 됩니다. 또한 교회학교 교사들에게, 구역장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이들에게,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경고가 되는 말씀입니다. 오늘 유대인들의 모습이 바로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남들은 가르치면서 자신들은 지키지 않는 이율배반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어찌 보면 이것은 유대인들을 향한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들을 향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특별히 유대인들은 알면서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알면서 짓는 죄가 더 크겠습니까? 모르면서 짓는 죄가 더 크겠습니까? 물어보나마나 입니다. 분명히 알면서 짓는 죄가 더 큽니다. 우리는 죄인 줄 알면서 죄를 짓습니다. 그런데 그 죄는 모르고 짓는 죄보다 더 크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유대인의 죄는 더 큰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알고도 율법을 범하기 때문입니다. 이방인들은 율법을 모르기 때문에 율법을 범한다 하더라도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습니다. 알고도 짓는 죄가 더 큰 것입니다.

유대인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죄를 짓고 있다면 우리는 더 큰 벌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유대인들의 잘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의 위선과 형식을 종종 책망하곤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3장에 보니까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서기관들, 바리새인들은 유대인의 지도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천국 문을 닫아버렸습니다. 그리고 자기도 들어가지 못하고 남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있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일까요? 오늘 바로 우리가 그럴 수 있습니다.

특별히 교회의 지도자들이 되신 분들, 나의 잘못된 모습을 통해서 사람들은 나를 따라오다가 결국 나도 들어가지 못하는 천국에 그들도 들어갈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남에게 방해되는 존재가 되면 안 됩니다. 때론 엄마들이 집에서 잔치가 있어 일하다 보면 아이들이 왔다 갔다 합니다. “얘! 거치적거리지 말고 나가 놀아라.” 우리가 혹 남에게 걸림돌이 된다거나 거치적거리는 존재가 된다면 얼마나 비극적입니까? 특별히 저는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이 말씀을 어릴 때 오해했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집에서 밥을 안 먹고 주로 나가서 많이 사먹나보다.’생각했습니다. 

여기서 외식이라는 것은 나가서 밥 사먹는 것이 아니고, 위선을 뜻합니다. 공동번역에 보니 “화있을진저 위선자들이여!”라고 나오고 있습니다. 혹시 우리들에게는 이런 요소가 없습니까? 우리가 신앙인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종교인의 모습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종교인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같은 행위를 반복하는 사람들, 종교적인 일을 반복하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그들은 이런 위선에 빠지기 쉽습니다. 외식에 빠지기 쉽습니다. 형식주의적인 예배를 드리기 쉽습니다.

또한 그들은 특권의식이 있습니다. 나는 남보다 오래 믿었다고, 나는 남보다 헌금 더 많이 했다고, 나는 남보다 봉사의 기간도 더 길다고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어떤 선민의식이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유대인처럼. 그래서 죄를 져도 나는 지옥에 안 가리란 확신이 있습니다. 나는 공로를 많이 쌓았으니까, 교회에 오래 다녔으니까, 나는 직분이 높으니까. 이것이 유대인들이 갖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는 이런 착각에 종종 빠질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으면 나와 아무 상관없다.” 마태복음 7장에 보니까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지키는 자는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지혜로운 사람 같고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짓는 어리석은 사람 같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들의 문제요 사도바울에게 책망 받았던 유대인들의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그것만이 아닙니다. 그들은 율법만을 자랑한 것이 아니라 할례도 자랑했습니다. 본문 25절부터 27절까지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봅니다. “네가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하면 네 할례는 무할례가 되느니라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규례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율법 조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겠느냐” 오늘 그들은 할례를 자랑했는데 할례도 특권의식이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할례 받은 사람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 할례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에 보면 주로 “너가 율법을 범하면”, “너가 율법을 행하면” 이런 말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너가 할례 받은 사람이지만 동시에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할례 받지 않은 사람과 다를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 그러나 오히려 이방인들은 할례 받지 않았습니다. “무할례자일지라도 율법을 지키면 그들이 진정한 할례자가 아니냐?”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쉽게 설명하면 결혼반지와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혼을 할 때 서로가 결혼예물로서 반지를 주고받습니다. 반지를 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이제는 내 아내, 내 남편만을 사랑하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반지를 버젓이 끼고 나가서 다른 여자를 사귀고, 다른 남자를 사귀고 교제한다면 그건 반지를 끼지 않는 것보다 못한 것입니다. 아예 반지를 빼 버리는 것이 낫습니다. 반지를 꼈다는 것은 내가 한 사람만을 사랑하겠다는 사랑의 정표인 것입니다. 바로 유대인들이 그렇습니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표시로 할례를 행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할례만을 자랑하면서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할례가 결코 그들을 구원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할례는 받지 않지만 세례라는 것을 받습니다. 그러나 세례가 우리의 구원을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세례 받은 이후에, 아니 세례받기 전이라도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내 구주로 영접하고 그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서 내 죄를 그의 보혈로 씻었다는 사실을 믿을 때 내가 구원받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 앞에 나올 때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의인으로 생각했습니다. 의인처럼 행동했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유명한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천국에 가는 이유는 수십만의 사람들을 예수께로 인도했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그에게 그리스도의 은혜가 필요했고, 그 은혜를 받음으로 나는 천국에 갈 수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우리는 늘 주님 앞에 죄인의 모습으로 서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나는 주님의 긍휼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필요한 사람으로 서야 합니다. 내가 의인이라고 착각할 때 남을 정죄하고 남을 판단하고 남을 비난하게 됩니다. 여기에 잘못된 유대인의 모습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런 잘못된 착각을 가졌습니다. 자신이 지옥의 문 옆에 서있어도 할례 받은 사람은 아무도 지옥에 떨어지지 않도록 아브라함이 지키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었습니다. 그가 세례 받은 사람일지라도, 직분자일지라도, 수십 년의 신앙의 연륜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지 않는다면 그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 성경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가 진정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인가를 우리에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 28절, 29절 말씀입니다.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여기 두 가지 유대인의 종류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잘 못 듣는 말이 나옵니다. ‘표면적 유대인’, ‘이면적 유대인’. 무슨 말일까요? 여러분! 어떤 사람을 가리켜서 그 사람은 “표리가 부동하다.”라는 말을 합니다. ‘표’라는 것은 바깥을 의미합니다. ‘리’라는 것은 속을 의미합니다. 겉과 속이 다르다. 표리부동입니다. 그래서 겉모습만 유대인인 사람을 표면적 유대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속사람이 유대인답게 살아가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을 이면적 유대인, 혹은 내면적 유대인이라고 합니다. 겉보다는 속이 더 중요합니다.

여러분! 오늘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유대인과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어떤 그리스도인입니까? 겉만 그리스도인 냄새를 피웁니까? 아니면 내 속 사람이 진정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육체의 할례가 진정한 할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참된 할례는 나의 마음에 가죽을 베어내는 것입니다. 내 마음의 정욕을 베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거듭나서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이 바로 내면적 유대인, 이면적 유대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해서 이면적 유대인만이 진정 율법을 존중하고 그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해서 지킬 수 있다고 말합니다. 순종이 없는 율법, 순종이 없는 할례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하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면서 내면적인 변화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간단합니다. 내가 죽어야 합니다. 죽지 않으면 내가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껍데기만 유대인으로, 껍데기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어떻게 죽을 수 있을까요?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여러분 안에 누가 살아 계십니까? 그리스도가 살아계십니까? 내가 살아있습니까? 여러분 안에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살아계시는가? 아니면 그리스도는 없고 내가 살아있는가가 중요합니다. 내가 나를 주관하고 내가 나를 지배한다면 나는 어디까지나 표면적 그리스도인, 껍데기만 그리스도인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내 자아가 죽어야 합니다. 나를 바로 그리스도가 지배하고 다스리고 통치하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예배 마치고 문을 열고 나가는데 누가 내 발을 아프게 밟았습니다. 그러면 당장 두 눈을 째려보면서 “눈을 어디다 달고 다녀!” 이렇게 화를 낸다면 내가 어찌 그리스도인입니까? 표면적 그리스도인입니다. 아직 내 안에 내가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내 발을 아프게 밟아도 “괜찮아요. 어떻게 놀라지 않으셨어요?” 오히려 밟힌 내가 걱정해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면적 유대인입니다. 진짜 그리스도인입니다. 내 안에 주님이 계시고 내 안에 성령님이 임재해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누가 국을 떨어뜨려서 새로 입고 온 양복에 국물이 튀었습니다. 이 때 화를 내면 표면적 그리스도인입니다. “아유, 괜찮아요. 세탁하면 되지. 선생님 덕에 세탁 한 번 더하게 되었네.” 이런 여유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이면적 유대인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일생을 목회하고 은퇴하신 원로목사님이 어떤 자리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기가 40년 동안 목회하면서 수많은 사람을 보았답니다. 교회건축도 여러 번 했고, 교회 건축 할 때 보면 정말 신실한 분들은 자기 집을 팔아서 교회에 헌금을 하고 자기는 전셋집으로 가는 분도 있답니다. 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하고 선교헌금을 드리는데 반지를 빼가지고 재단에 드리는 분들도 많이 보았다고 합니다. 시간을 드리고 물질을 드리고 정성을 드리는 분들을 수도 없이 많이 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을 못 봤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자기 성격을 빼드리는 사람. 못된 성격, 화 잘 내는 성격, 욕 잘하는 성격, 비난하는 성격, 그것을 빼어서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을 아직 못 보았답니다. 그것이 아쉬움이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내 못된 성격, 내 못된 고집을 하나님께 빼어 드릴 때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계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직 내가 살아있고, 내가 소리친다면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유혹에 넘어가는 것입니다. 사탄이 와서 유혹의 노크를 할 때 내가 나가면 백이면 백 집니다. 누가 나가셔야 합니까? 내 안에 계신 주님이 나가셔야 합니다. 그러면 승리하는 것입니다. 누가 나에게 화를 내고 분노를 터뜨릴 때 내가 나가면 같이 싸우게 됩니다. 그러나 내 안에 계신 주님께서 나가신다면 결코 싸우지 않습니다. 

내 안에 누가 살아계시는가? 누가 내 인생의 주도권을 가지고 계시는가가 중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 주도권을 맡기십시오. 그분이 내 인새의 주인이십니다. 그럴 때 우리는 진정한 삶의 변화를 경험할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설 수 있습니다. 이런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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