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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교개혁] 믿음으로 사는 것이 개혁입니다 (히 1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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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사는 것이 개혁입니다 (히 11:7~12)


카톨릭 수도사로 한창 종교개혁을 하고 있던[마르틴 루터]가 수녀 출신[카타리나 본보라]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은 당시로써는 파격적인 스캔들로 교회사에 남이 있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결혼 자체는 지극히 정상적이고 합법적인 결혼입니다만 당시 수녀원에서 한평생을 살다 죽어갈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카톨릭 수녀와 수도원에 있던 수도사가 서로 뛰쳐나와 결혼을 했다는 사실이 교회에서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이 사건을 카톨릭적 개념으로 보면 엄연히 수도사와 수녀간의 간음사건입니다. 그러니까 정상적인 결혼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간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타락한 성직자라는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는 큰 사건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종교개혁을 같이 하고 있던 동료들로부터도 비난을 받았습니다. [에라스무스]같은 사람은“장엄한 비극으로 등장한 종교개혁이 코미디로 막을 내렸다.”고 비웃기도 했습니다. 그때 [마르틴 루터]는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만 따른다면 사람이 뭐라고 하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며 믿음으로 살고 믿음으로 행하면 된다고 하는 자기만의 확고한 생각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하느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정하느냐, 어떻게 의롭게 여기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 당당하고 떳떳하게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루터]만큼이나[카타리나]역시 역사적으로 유명하고 아주 현명한 부인이었습니다. 결혼 후에 훌륭하게[루터]를 내조해서 종교개혁을 성공하게 합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할 때에 사방에서 그를 죽이려고 하는 일들을 당하게 됩니다. 이 죽음의 공포 속에서 우울증까지 시달리면서 낙심하고 있던 어느 날 밖에서 돌아오니까 부인[카타리나]가 상복을 입고 울고 있더랍니다. 

[루터]가 깜짝 놀라서“누가 죽었느냐? 왜 울고 있느냐?”고 했더니 그 부인이 하는 말이“하나님이 돌아가셔서 상복을 입었습니다.”그럽니다. [루터]가 펄쩍 뛰면서“하나님이 돌아가시다니 무슨 불경한 말이냐!”화는 내었더니 부인이 조용히 하는 말이“하나님이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어째서 당신이 낙심하는 겁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면서 왜 힘들어 하는 겁니까?”라고 하는 말속에 용기를 얻어서 종교개혁을 완성했다고 합니다. 

[루터]는 구약성경 하박국 2장 4절에 나오는“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을 개혁의 이념으로 삼아<이신득의(以身得義)>의 교리를 들고 종교개혁을 한 사람입니다. 그는 더 큰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는 철저히 성경에 의지해서 믿음을 얻었고 믿음을 신학 화 했고 무엇보다도 믿는 대로 살았습니다. 말하자면 믿음을 생활화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도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그 믿음이 구체화 되어서 신앙생활로 나타나야합니다. 그리고 그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는 영광을 누리면서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 된 우리들의 합당한 생활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무서운 함정이 몇 가지 있겠습니다만 가장 중요한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 하나가<주관적 신앙>입니다. 굉장히 위험한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생겨난 신앙이 아니고, 순전히 내 마음과 내 생각을 믿음으로 여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형식일 뿐입니다. 내 느낌이 중요하고, 내 상식에 적극적으로 의지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신앙적 차원에서 무엇이라고 하느냐가 아니라 인간적으로 교회가 이래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나고 보면 그것은 내 불평이요, 내 불만일 뿐이지 결코 신앙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내 나름대로는 그것이 믿음이라고 착각을해서 낭패를 보는 이런 주관적 신앙, 신앙의 주관화가 참 무서운 것입니다.

두 번째 신앙의 무서운 함정은 <신앙의 추상화>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신앙을 지식으로만 생각합니다. 성경을 많이 읽고, 성경말씀을 많이 기억하면 이것을 마치 믿음인 줄 압니다. 일 년에 성경을 몇 독했다고 거창하게 표를 만들어 놓고 자랑스럽게 벽에다가 떡 붙여놓고는 그것을 자신의 신앙인양 의기양양합니다만 이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을 때마다 진리에 감격해서 눈물을 흘리면서 그것을 믿음인 줄 아는데 그것도 믿음이 아닙니다. 그건 그야말로 지식일 뿐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백날 눈물만 흘리면 무엇 합니까? 구체화 된 신앙의 모습이 없는데...말씀을 들으면서 아무리 고개를 끄덕 끄덕해도 그 깨달음이 그의 삶에 나타나지 않는 사람을 보고 믿음 있다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합리적 이해로 끝나는 것은 지식일 따름이지 그것이 결코 신앙의 전부일 수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종교개혁주일을 맞이한 오늘 우리들은 자신의 믿음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의 무서운 함정에 빠진 채로 아직도 그것이 내 훌륭한 믿음인양 무지 속에 살아가고 있다면 변화하는 신앙으로 개혁을 일으켜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 히브리서 11장은 여러분이 잘 아는 것처럼 믿음의 장이라 부르는데 성경역사 속에서 믿음으로 살아간 사람들의 모습을 설명하면서 오늘 우리에게 요구 되는 믿음이란 어떤 것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본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가치관이나 기본적인 생활철학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철저하게 그 가치관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을 봅니다. 그것을 보면 그 사람의 전부를 알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들인데 어떤 사람은 만사에 돈만 생각하는<경제형의 사람>이 있습니다. 언제나 계산이 앞섭니다. 모든 논리가 타산적입니다. 타산에 맞으면 실행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조금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또 자기 논리에 맞아야만 받아들이려고 하는<이론형의 사람>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자신의 지식 속에 이해가 되어야만 한다는 주의의 사람이고, 어떤 사람의 기준은 항상 아름다움입니다. 보기 좋은 떡이 맛도 좋다고 보기에 괜찮아야 한다는 감상에 젖어 사는<심미형의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사람은 반드시 남을 지배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남을 지배해야 내가 행복하지 그 외에는 행복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을<권력형 인간>이라고 부릅니다. 또한 어떤 사람은 많은 사람과 더불어 사귀고 친교 하는 그것을 최고의 인생가치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런 사람을<사회형 인간>이라고 합니다. 자 이제 중요한 인간형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믿는 우리들이 추구해야 될 가치관은 어떤 것일까요? 바로<종교형인간>입니다. 종교형인간이란 항상 하나님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범사에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삽니다. 먹으면서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잠자리에 들 때도 감사합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종교형인간입니다. 우리가 추구해야할 종교형인간의 모습입니다.

오늘 말씀처럼 믿음이라는 것은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듣지 못하는 것을 듣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하루하루를 삽니다. 비록 내가 죄인이었지만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우리가 믿음으로 고백하고 그 아들을 받아들이기만 했더니 우리를 의롭다고 하신 그 놀라운 진리 안에 살아갑니다. 

여러분, 죄의 문제는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맡겨야 할 문제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스스로 벗길 수 없는 죄인의 모습으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해결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함을 얻는 그 길밖에 없습니다. 

종교 개혁자[루터]나[깔뱅]이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어느 전승이나 어느 교황의 말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성경을 통해서 성경 안에서 해답을 얻으려고 했고 또 얻었습니다. 이것이 종교 개혁자의 신앙입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며 그 속에서 해답을 얻습니다. 오늘 우리 안에도 개혁이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서야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받고 순종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그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에 우리는 단지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래서 믿음이란 하나님의 의를 수용하는 것입니다.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된 것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확증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그대로 수용하여 의롭다함을 얻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의인이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죄인은 여전히 죄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사랑으로 덮어서 의롭다 하실 때에 그 사랑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마음이 믿음이요, 이것이 종교 개혁적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의롭다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의롭다 하실 때 그것을 아니라고 하지 말고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의롭다 하심의 문제는 우리에게는 수용만 있을 뿐이지 내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게 은혜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생각해 봅시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구체적인 믿음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을 통하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먼저 노아는 어땠습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120년 후에 이 세상을 홍수로 멸하리라.”그런데 그 말씀을 들은 노아가 방주를 지었다고 했습니다. 그것도 바닷가가 아닌 산꼭대기에다 무려120년에 걸쳐서 많은 비난을 받으면서 당장도 아닌 120년 후에 있을 홍수를 대비해서 방주를 예비합니다. 왜입니까? 사실 노아에게는 정확하게 120년 후에 홍수가 올까 오지 않을까가 중요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방주를 만드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오늘 나의 생활을 지배했단 말입니다. 믿음이란 이런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잘 아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네 고향과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성경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무작정 떠났다고 했습니다.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고, 자녀를 주시겠다고 약속합니다. 땅과 자식이라고 하는 것에는 공간과 시간적인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시공간을 막론하여 이루어주시는 약속입니다. 

자, 그런데 보세요. 약속의 땅에 흉년이 듭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그 땅을 지키지 못하고 애굽으로 피난을 갑니다. 자식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한 10년 기다려도 아이가 없자 하나님이 이거는 잘못 말씀하셨을 것이다 여겼던지 첩을 얻어 가지고 떡하니 아들을 봅니다. 

그로부터 13년 후 그러니까 처음 아들을 주겠노라고 약속하신 지 24년 째 되던 해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 하라!”고 책망하십니다. 휘청거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내년 이 맘 때에 약속한 아들을 주겠다.”고 하십니다. 그 동안 아브라함이 흔들리고 기다리지 못하고 사실이지 믿음을 똑바로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다시 받아들이기엔 자격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쑥스럽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들이자 하나님은 그 믿음을 의롭다 하십니다. 모든 것을 다 사하시고 자식을 주십니다. 자신의 부족함 속에서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만은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이 그에게 커다란 복이 된 것입니다. 자신의 부족한 허물을 그 약속 안에 소화해 버립니다. 이게 하나님이 의롭다 하신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또 오늘 본문에 강조된 것은 사라입니다. 아브라함과의 사이에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아들을 낳게 되는데 생리적으로 도무지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90세가 된 할머니가 어떻게 아이를 낳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래서 처음에는 사라도 마음으로 웃으면서 속으로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창18장11절,12절을 보면 이런 얘깁니다.“하나님도 참 아, 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요. 별 볼일 없는 사람들한테 하실 말씀이 따로 있지.”

그런데 21장에 보면 하나님의 약속하신 그대로 이삭이 탄생합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다시 합방을 했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육체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약속을 믿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리하여 약속의 자녀를 얻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입니다. 이것이 으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는 바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자기의 약점과 인간적인 모든 부족한 것이라도 믿음으로 다 극복했다는 중요한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사라의 믿음이 칭찬 받는 것은 한계를 뛰어넘어서는 위대한 믿음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종교개혁이란 것은 교회가 세속화되는 것을 재정비하는 것이요, 신앙의 개혁이라는 것은 죄 된 나를 돌아보아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에 맡기고 믿음으로만 살아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의 삶에 생활화하는 것입니다. 머릿속에만 머물러 있는 신앙이 아닙니다. 실제의 구체적인 생활 속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고로 하루하루 믿음으로 진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곧 우리의 신앙개혁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러한 신앙개혁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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