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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용서하는 제자 (마 18: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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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하는 제자

우리 몸에 불필요한 것을 내버리는데 아까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땀 흘린 것을 보고 아까워서 섭섭해 하거나,  대소변을 보고 ‘어머 아까워라’ 미련을 갖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것들은 더 많이 버려야  건강해 집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감정의 찌꺼기가 남아 우리를 건강하게 하지 못하는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  제자 베드로에게 주님은  용서하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는 용서하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요 13:34-35에서도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라고 말씀하심으로  서로 사랑하면 예수님의 제자인 줄 알게 된다고 했습니다.  

제자는 먼저 자신이 온전히 건강해야 합니다. 그래서 용서는 알고 보면 남을 위한 일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1999년 보스턴에서 열린 미국심리학회 세미나가 있었는데, 한결같이 "남을 용서할 줄 아는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정신건강이나 육체건강이 더 나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연구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원한 등의 감정을 품은 사람은 심장 박동수와 혈압이 올라간 반면 용서하겠다고 한 사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해서 혹은 미움과 증오 때문에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하고, 번민하고, 아파하는 것 그 자체가 바로 용서하지 못하는 것에 따르는 심판입니다. 용서하면 자기가 삽니다.  그래서 용서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용서하면 하나님으로부터도 용서를 받습니다.  본문 (마 18:35, 개정)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라고 말씀하고 계시고,  주님 가르치신 기도에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고 기도함으로 우리에게 먼저 용서 할 마음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용서가 없는 마음은 더욱 죄를 짓게 만듭니다.  가인은 자기 생각에는 자기도 똑같이 예배를 드렸는데, 동생 아벨의 제사를 열납한 것을 보고 미움과 증오, 시기의 마음이 들었습니다. 결국 그 감정을 처리하지 못하고 동생을 돌로 쳐 죽이는 더 큰 죄를 지었습니다.  죄를 더 짓고는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엡 4:32에서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들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용서는 주님 닮는 일입니다.  제자는 주님을 닮습니다. 
용서를 490번하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491번째부터는 용서하지 말라는 말씀입니까?  만약 숫자를 세면서 용서를 한다면 더 신경 쓰이고 더 화가 치밀 것입니다.  음식을 먹을 때 30번 씹으면 건강하다고 합니다.  30번 숫자를 세면서 씹어 보았습니다.  밥 먹는 것인지 답답하고 한심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30번 씹으라는 말은 30번만 씹으라는 말이 아니라, 30번 씹다보면 이미 다 가루가 되어 저절로 목으로 넘어갑니다.  위에 부담이 되지 않고, 위에 음식이 찼다는 신호가 오니 과식도 하지 않게 되니 건강하게 됩니다.  490번 용서하려고 하면 이미 예수님 닮아져 있어 가장 복 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용서합시다!”라고 하면 잘 안됩니다.  
그 이유의 첫 번째는 용서하라는 말이 별로 다가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인처럼 사람 죽이거나 다치게 한 것도 없는데 ‘용서하라’는 말이 잘 와 닿지 않습니다. 이제 1년이 되어가는 전도사님이 그랬습니다.  “서연교회는 다 마음들이 착하고 악한 사람들이 없네요!”  맞습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들이  불신자보다 평균적으로 더 선합니다.  거기다가 우리 성도는 믿는 사람 중에서도 더 선합니다. 그러니, 용서하고 자시고 할 것도 별로 없습니다. 구태여 뭘 자꾸 용서하라고 하는지, 잘 와 닿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고, 소소한 의견의 차이 때문에 생기는 감정의 골들이 동산을 허는 여우처럼 삶의 풍성함을 망가트립니다.  죽이고 싶도록 밉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살벌해서 어디 살겠습니까?  그냥 보기 싫습니다. 그냥 만나는 것이 별로 즐겁지 않습니다.  마지못해 교회오고, 마지못해 같이 신앙생활합니다.  결혼하고도 마지못해 같이 삽니다.  기왕 같이 신앙생활하고,  기왕 같이 살 것인데 마지못해서 하는 것처럼 재미없는 것도 없습니다.  “서로 사랑하라. 이로써 내 제자인 줄 알리라”는 말씀은  소소한 감정의 처리를 잘해서,  용서하고 훌훌 다 털어 버려서  서로에게 주님 주신 사랑의 감정이 깊이 일어나, 천국을 경험하도록 하시는 축복의 말씀입니다. 

용서가 잘 안되는 두 번째 이유는 용서는 희생이기에 별로 마음 쓰기 싫고 외면하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2번 아픔을 경험합니다.  상처를 받아 첫 번째 아프고,  그 상처가 있는데도 없는 것처럼 아물기 위해서 또 아픕니다.  아프긴 한데 병원을 가서 병명을 알면 더 놀라고 힘들고 치료과정을 거치기에 아예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처럼 미련한 것도 없습니다.  상처 난 채로 둘 수 없습니다.  아물면 안전합니다.  항체가 생기면  병원체가 들어와도 넉넉히 이깁니다.  

용서는 주님을 닮아가는 과정입니다.  우리 주님은 2번 희생하셨습니다.  첫 번째는 하늘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사람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두 번째는 십자가에 죄도 없으시면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들을 죄 가운데 용서하시며 구원해 살려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잘 안되는 용서 주님의 마음을 품고 주님을 닮아가면 됩니다. 

(빌 2:5-8, 개정)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주님의 마음은 자연스럽게 자신이 낮아집니다.  주님의 마음은 억지로 하지 않아도 용서합니다. 

순간순간 일어나는 온갖 부정적인 감정처리, 또한 2번 아픈 용서, 주님을 바라보면 되어집니다. 
(히 12:2, 개정)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주간 동안 기도하며, 자신을 돌아보며, 아버지의 마음을 생각하며 닮으려고 기도했습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기도하니,  주님은 제 자신의 부분 부분을 보여주셨습니다.  너무 안타까워 말씀을 전하면서 강조하다가 보니, 설교가 길어지는 것이 보였습니다.  자꾸 설명하다 보니 인간적인 말들이 들어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주님은 나에게 ‘주님에게 맡기지 않고 자기가 애쓰고 수고함으로 목회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전했으면,  살아 있는 하나님 말씀이 알아서 성도들 속에서 역사하실 것이라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또한 주님은 용서도 마찬가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용서도 내가 하려니 힘듭니다.  그 힘든 것을 했는데 상대방과 사람들이 안 알아 주는 것 같으니까, 손해만 보는 것 같아 나 혼자만 손해 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용서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십자가에서 주님은 자기를 비웃으며 희롱하고 못을 박고 입으신 옷도 혼자 가지려고 제비를 뽑고, 백성들을 그 모습을 구경하고 있는 광경을 보시면서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눅 23:34, 개정)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주님의 용서는  알아주고, 무엇을 바라고  하는 용서가 아닙니다.  다만,  죄인지도 모르고 죄를 짓고, 그 죄에서 죽어가고 있는 그 모든 것을 보면서 마음 아파하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계산하는 마음으로는 절대로 용서가 되지 않습니다.  무엇인가 이렇게 해 주어야 한다는 마음으로는 용서했다고 해도 상대방을 다시 보면  또 용서해 줄 수 없습니다.  용서의 숫자만 세고 있는 것이고,  숫자가 늘어가면서 그러니까 용서해 줄 수 없다는 결단만이 더 해질 뿐입니다. 

진정한 용서는 아버지 긍휼의 마음입니다.  십자가에서 드린 주님의 기도에 나타난 오직 영혼에 대한 사랑의 마음입니다.   아버지 마음, 주님의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내힘으로 목회하니 힘이 든 것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또한 그 힘든 목사를 보면서 힘들어 하는 성도들이 보였습니다. 

내힘으로 하는 목회,  내힘으로 하는 신앙생활,  내힘으로 하는 공부, 내힘으로 하는 직장과 사회생활,  그리고 내힘으로 하는 모든 만남이 오히려 되어지지는 않고 힘만 듭니다.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마음을 품으면 되는 것을! 

(빌 2:5)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우리 가운데 주님의 마음이 품어지고 주님의 마음이 되어지면 그 다음은 하나님께서 일하실 차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살려 주시고, 그리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혀 주셨습니다. 

남아공의 만델라 대통령은 27년 동안 외딴섬의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는 최악의 정치범인 D급 죄수였습니다. 면회는 6개월에 한 번, 편지도 한 통밖에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독방에 갇힌 지 4년째 되던 해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이듬해에는 큰 아들마저 자동차 사고로 죽었습니다. 물론 장례식에도 참석할 수 없었습니다. 아내와 딸들은 영문도 모른 채 강제로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그의 앞엔 절망의 절벽만 놓여 있는 듯 했습니다. 

14년 동안이나 보지 못한 맏딸이 자식을 낳았다고 찾아와 "아버지, 그때 편지로 말씀드린 제 딸의 이름은 정하셨나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쪽지를 내밀었습니다. 딸은 그 쪽지를 조심스럽게 펼쳐서 보고는 종이에 얼굴을 묻고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참아낼 수 없었습니다. 종이에 묻은 잉크가 눈물로 얼룩지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적혀 있는 글자는 '아즈위(Azwie, 희망)였습니다. 

만델라에겐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의 희망대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만델라는 대통령이 되어 데스 몬드 투투 대주교를 위원장으로 하는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설치하여 복수의 악순환을 끊었습니다. 

규칙은 간단했습니다. 백인경찰이나 군인이 자발적으로 고소자들 앞에서 범행에 대한 진실을 밝히면 그 범죄로 인해 재판을 받거나 처벌받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청문회 자리에서 반드 브렉이라는 경찰관이 자기의 죄의 진실을 털어 놓았습니다.  자신과 동료들이 18세 소년을 총으로 쏘고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시신에 불을 질렀습니다.  8년 후 반드 브렉은 다시 그 집으로 가서 소년의 아버지를 체포했는데, 불쌍한 그 아내는 경찰관들이 남편을 장작더미에 묶어놓고 몸에 휘발유를 끼얹은 뒤 불을 붙이는 광경을 강제로 지켜봐야 했습니다. 

아들과 남편을 차례로 잃은 노부인에게 법정에서 말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판사는 물었습니다. “반드 브렉 씨에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그녀는 남편의 장례를 제대로 치를 수 있도록 부탁한 후 한 가지 요구 사항을 추가했습니다. “반드 브렉 씨는 제 가족을 모두 데려갔습니다.  그러나 저에겐 아직도 그에게 줄 수 있는 사랑이 많습니다.  제가 엄마 노릇을 할 수 있도록 한 달에 두 번 우리 집에 와서 시간을 보냈으면 합니다. 나는 반드 브렉 씨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다는 것과  나도 그를 용서한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합니다. 나는 내가 정말 용서했다는 것을 반드 브렉 씨가 알 수 있도록 그를 안아주고 싶습니다.”

(요일4: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

(요 13:34-35, 개정)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이명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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