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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나라는 능력에 있다 (시 89:13~14, 고전 4: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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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나라는 능력에 있다 (시 89:13~14, 고전 4:19~21) 


태양의 능력이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태양은 인간이 역사상 사용한 것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1초 동안에 만들어냅니다. 태양은 현재 속도로 300억년은 더 타오를 수 있습니다. 태양은 1평방미터도 채 안 되는 면적마다 13만 마력의 힘을 방출합니다. 이 힘은 8기통짜리 자동차 엔진 450개와 맞먹는 힘입니다. 그러나 그 능력은 태양을 만든 하나님보다 더 크지 않습니다. 

태양의 힘은 태양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능력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태양과는 비교도 안 되며 하나님의 전능하심으로 만드신 세계에서 태양은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완전하신 분 즉 전능자이십니다(omni-potence). 
  
달의 능력이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다. 달의 질량은 지구의 약 81.3분의 1밖에 안 됩니다. 그러나 지구와 가장 가까운 천체이기에 지구에 크게 역학적 영향을 끼칩니다. 지구에서 태양까지의 거리는 약 1억 5000만 킬로미터입니다. 지구에서 달까지의 거리는 38만 킬로미터입니다. 달은 지구에서 가깝기 때문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데 가장 중요한 영향은 조석작용입니다. 달은 지구의 간만의 차이를 일으킵니다. 간조, 만조가 달의 힘으로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와 같이 오랜 농경사회에서는 달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농사짓는 데는 태양이 아니라 달의 힘이 더 큽니다. 양력이 아니라 음력을 가지고 농사를 짓습니다. 그러나 그 달의 능력도 하나님의 능력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아름다운 가을입니다. 단풍이 한참인 것 같습니다. 지구가 사계절을 가지는 것은 지구의 자전축이 23.5도 기울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자전축이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공전궤도가 타원형이 됩니다. 타원형이기 때문에 태양과의 거리와 각도가 달라지고 거리가 달라짐에 가까울 때는 여름이 되고, 멀 때는 겨울이 되고, 거리에 따라 사계절이 생깁니다. 단풍이 들고, 잎이 떨어지고, 눈이 내리고, 새싹이 돋고,  잎이 피고, 열매를 맺습니다. 누가 이런 자연을 운행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자연을 움직이고 있습니다. 
  
힘의 이동 혹은 권력이동이란 말을 합니다. 이전 시대에 힘, 능력이란 물리적 힘을 의미합니다. 많은 돈이다, 많은 인구, 큰 군사력이 힘이었고 이런 나라가 대국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에 능력이란 지식이나 정보의 힘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지식이나 정보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아무리 크다고 자랑해도 하나님의 지식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바울은 로마서 11:33에서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라고 합니다. 지식과 지혜가 있는 자의 감탄입니다. 바울은 지식이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지식 있는 자가 하나님을 볼 때 인간의 지식과 비교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지식이 없는 자는 하나님의 지식이 얼마다 되는지 그것도 모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나라는 능력에 있다고 합니다. 왜 하나님의 나라가 능력에 있습니까? 하나님이 능력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전지하시고 전능하시기 때문입니다. 전지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주권자이신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능력이신 하나님의 나라이기에 당연히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내 안에 있으면 내가 능력 있는 자가 됩니다. 
  
오래 전에 저의 동창생 목사님이 자신은 능력목회(Power Ministry)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분이 말하는 능력목회란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이런 유의 목회를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나도 능력목회 한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놀라면서 진짜냐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럼,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인데”라고 했습니다. 말씀 중심의 목회가 능력목회입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신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능력이시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인 우리가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습니다. 

20절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말이 중요합니다. 성경에서 말씀을 보세요.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도구인 말씀입니다. 세상이 알아듣는 말씀입니다. 말의 중요성을 성경은 가르칩니다. 그러나 말은 목적이 아닙니다. 말이 중요하지만 말이 목적이 아니며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말을 잘 한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고후 5:17)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능력 있는 삶(요 3:3-8)을 원합니다. 
  
‘말’은 헬라어로 ‘로고스’인데 이 말은 ‘능력’과 대조적인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참말이 아닌 헛된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헛된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언어학자들의 말을 빌리면 사람들은 하루에 14,000단어를 말한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여자가 남자보다 평균 2배 이상 많은 단어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자들은 남자보다 말을 더 잘 할 뿐만 아니라 거짓말에도 더 능숙하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습니다. 정신의학자 폴 투르니에는 말을 통해 남자는 생각을 표현하고 정보를 교환하지만 여자는 느낌과 감정을 표현한다고 하였습니다. 
  
독일의 히틀러는 연설을 통하여 게르만족을 흥분시켜 분노와 적개심을 일으키게 하였습니다. 그는 백성들을 충동하여 세계 제2차 대전을 일으켰지만 패배하였습니다. 반면에 영국의 윈스턴 처칠 경은 영감 있는 웅변으로 세계 대전에서 피곤한 영국인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그 결과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말은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칼보다 혀로 죽은 사람이 더 많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말의 중요성은 예로부터 강조되었습니다. 말의 위력을 강조하였습니다. “말 한마디로 천량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긍정적인 말 한마디가 사람을 살린다”, “부정적인 말 한마디가 사람을 죽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최근 우리 사회를 보세요. 사실무근인 말 한마디, 인터넷의 글 한 마디가 사람을 죽게 합니다. 배우 최진실씨의 자살도 그런 유의 죽음입니다. 말은 살리기도 하지만 죽이는 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진실이나 삶은 말에 있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샤르트르는 자신의 자전적 책인 ‘말’에서 자신이 자취를 남기지 않는 말들을 배열하는데 생을 허비했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였습니다. 쓸데없는 말로 우리의 삶을 낭비하겠습니까? 이렇게 삶을 낭비하면 아무 것도 듣지 못하고 되지 못할 것입니다. 
  
말 잘하는 사람과 일 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필요한 사람은 일 잘하는 사람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11-12에는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 하니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고 합니다. 일 만드는 자는 주로 말 많은 자입니다. 무책임한 말로 상처를 주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고린도전서 14:34에는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라고 합니다. ‘잠잠하라’는 말은 헬라어의 ‘시가오’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의 뜻은 입을 다물고 있으라는 말이 아니라 문제를 일으키지 말라는 뜻입니다. 말로 문제를 일으키지 말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말썽부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미국 작가 매튜 프라이어는 “제일 할 말이 없는 자들이 가장 말을 많이 한다”고 합니다. 말을 많이 하는 것은 그 자체가 이롭지 못하고 덕이 되지 못한 일입니다. 
  
모세는 말을 잘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모세가 말을 못했다고 하지만 바로 앞에서 가서는 모세가 말을 합니다. 모세의 형 아론은 말을 잘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형 아론과 함께 가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왜 하필 아론이 아니고 모세일까요? 말을 잘하는 아론이 간다면 훨씬 편하고 쉬웠을 것입니다. 성경에 보시면 아론은 애급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애급에 있는 아론이 애급에 있던 백성들을 데리고 오면 훨씬 간편할 텐데 하나님은 미디안광야에 있던 모세를 다시 애급에 보내 백성들을 이끌게 하십니다. 말을 잘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에 이로울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모세가 말을 못하기 때문에 보내신 것입니다. 
  
사도행전 14장에는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있었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발을 쓰지 못하는 사람을 고쳤을 때 사람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보고 신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말을 잘하는 바울을 헤르메스라 하였고, 바나바를 제우스라고 하였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달변가를 좋아했습니다. 웅변술을 강조하고 웅변가를 선호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에게 헤르메스라고 하는 말을 거절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록’이란 명사들의 말을 모은 것이 있습니다. 명사들이 한 일도 없이 말만 나열했다면 어록의 가치가 없습니다. 그들이 한 일이 존경받을만하기 때문에 어록이 가치 있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말은 무가치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말은 잘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 사람은 말과 행실이 일치되어야 합니다. 언행일치의 신앙이 존경받고 사랑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이 이러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나라는 능력에 있습니다. 

20절에는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 합니다. 능력이란 가시적인 능력 즉 기사와 표적 등을 의미합니다. 헬라나 로마에서는 웅변술을 소중히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공허한 웅변, 말, 지식을 앞세우는 영적 교만과 대조를 이루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구체적인 그리스도인의 변화된 삶을 의미합니다.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을 보세요. 성령 충만으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성경은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공회 앞에 잡혀 가서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전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을 때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고 합니다. 얼마나 위풍당당 합니까?  담대함이 돋보입니다. 내면에 무한한 힘이 있습니다. 
  
옛 속담에는 “말보다 행위가 훨씬 더 웅변적이다”라고 합니다. 말을 가지고 겁낼 사람은 없습니다. 열매 아메리카 산 짖는 원숭이는 정글에서 가장 소리가 큰 동물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장 힘이 센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소리를 키우지 말고, 말 잘할 생각하지 말고 성령의 힘을 키워야 합니다. 성령은 내재하시는 힘입니다. 
  
인간이 평상시에 쓰고 있는 능력은 전체의 10%에 불과합니다. 인간이 전체 능력의  20-30%만 활용해도 천재가 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90%의 자신의 능력을 써보지도 못한 채 이 땅을 떠납니다. 다른 사람보다 조금만 더 써도 탁월하게 되고 성공하게 됩니다. 
  
탈무드에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인간이며 자기가 하고자 하는 것을 바라는 것은 신이다”라고 합니다. 인간의 능력은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은 한계가 있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의 일을 가능하게 하십니다. 하나님 능력이 내 안에 있어야 우리의 일이 가능합니다. 
  
빌립보서 4:13에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합니다. 능력인 하나님 안에서 내 능력이 발휘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떠나면 내 안의 능력이 내게서 나가기 때문입니다. 능력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을 상실합니다. 
  
누가복음 9:1에는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시고”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를 삼으신 목적이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고, 죽은 자 살리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지만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 놀라운 일을 해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능력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백성은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능력을 잃으면 생명을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살아있는 물고기는 물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살아 있는 씨앗은 얼어 있는 땅을 뚫고 싹을 피웁니다. 살아 있고 능력이 있다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이스라엘의 포로기에 다니엘을 보세요. 다니엘은 능력이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소년 시절에 바벨론에 잡혀 갔습니다. 궁중에서 바벨론의 진미를 제공했지만 그는 진미 대신 유대인의 식사인 채식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이 훨씬 더 빛이 좋았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꾼 꿈을 해석하였을 때에 느부갓네살 왕이 다니엘에게 절하고(단 2:46), “너희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신들의 신이요, 모든 왕의 주재시로다”(2:47)라고 하였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인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하나님을 섬기다가 잡혀 불 풀무에 던져졌습니다. 그들은 머리카락 하나 타지 않고 하나님의 사자와 함께 있었습니다. 다시 건짐을 받은 다음에 왕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3:28), “이같이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이 없음이니라”(3:29)고 하나님을 인정합니다. 다리오 왕 때에 다니엘은 법을 어기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하다가 사자 굴에 던져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자의 입을 막아서 다치지 않았습니다. 그 때 다리오 왕은 “내 나라 관할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다 다니엘의 하나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할지니 그는 살아계시는 하나님이시오 영원히 변하지 않으실 이시며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그의 권세는 무궁할 것이며”(6:26)고 합니다. 다니엘의 삶의 결론을 보세요. “이 다니엘이 다리오 왕의 시대와 바사 사람 고레스 왕의 시대에 형통하였더라”(6:28). 정말 능력 있는 하나님의 사람의 모습이 아닙니까? 다니엘은 말 잘 하는 사람이 아니라 능력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참 하나님의 사람은 언제나 능력의 사람입니다. 이런 능력이 우리에게도 있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날에 구원 얻는 새 사람은 마가복음 16:18에 이렇게 말합니다.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뱀도 집습니다. 독을 마셔도 괜찮습니다. 병든 사람을 치유합니다. 이런 모습은 하나님의 능력의 대표적 상징입니다. 

결론 

짐 존스는 ‘인민사원’이란 사이비집단을 만들어 독을 마셔도 죽지 않는다고 현혹했습니다. 1978년 남미 가이아나에서 그를 따르던 914명이 독을 마시고 집단 자살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무엇인가를 오해하였습니다. 1987년 오대양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때는 32명이 자살하였습니다. 능력은 새 삶입니다. 구원자의 사명입니다. 아직 우리의 구원은 완전한 구원이 아닙니다. 

그래서 절대로 독을 마시면 안 됩니다. 그 용기 있으면 전도나 열심히 해야 합니다. 말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일 잘하는 성도가 되세요. 달변가가 아니라 능력가가 되세요. 세상이 감히 얕보거나 욕하지 못하는 능력을 가지세요. 구원의 능력 가지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성도가 되세요. 세상이 존경하고 따르는 지도자가 되세요. 그래서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힘 있는 백성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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