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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교개혁] 나사렛 예수 다윗의 자손 예수 (막 10:4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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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렛 예수 다윗의 자손 예수 (막 10:46~52)


오늘은 우리 개신교회가 지키는 종교개혁주일입니다. 1517년 10월 31일 독일의 마르틴 루터는 로마가톨릭교회가 가지고 있던 부패와 부정, 신학적인 오류에 대하여 지적하면서 95개조항의 반박문을 비텐베르그 대학성당 문에 붙인 것이 종교개혁의 불씨가 되어 타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개신교회에서는 10월 마지막 주일을 종교개혁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16세기 초에 이런 종교개혁이 일어난 것은 14-15세기에 걸쳐 교황권의 몰락과 타락에서 그 원인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또한 르네상스-문예부흥이 일어나면서 전 유럽에 확산된 인문주의 운동은 교회에 대한 자성과 회의에 빠지게 하였습니다.   영국에서 위클리프가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면서 개혁하려고 일어났습니다.  보헤미아의 존 훗스가 일어나, 순수한 말씀으로 돌아가자고 외쳤지만, 그의 개혁운동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그래도 그런 선각자들이 있었기에 교회의 근본적인 개혁을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성직자들 중에는 소명감에서 성직을 받은 사람도 있었지만, 어떤 이들은 성직매매를 통하여 성직자가 된 사람들이 있었는데, 소명감은 하나도 없고, 먹고 살기 위한 직업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에 대하여 무지하였고, 교회의 행정에 대하여 무능하였습니다.  일부 성직자들은 윤리 도덕적으로 생활이 문란하였고, 부패하고 타락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로마 교황청은 안일에 빠져 있었고, 사치하였습니다.  성직자들은 그의 배만 불리려 하였고, 성직을 매매하고, 수도원이 타락하고, 고위 성직자들의 부패하고 타락하여 더 이상 교회를 방치할 수 없을 정도에 이르렀습니다.  

반면에 일반 교인들은 신앙심이 높아서 순례를 다녀오는 이들도 있었고 금욕적인 생활로 고행을 하였고, 성경에 대한 간절한 열망도 있었습니다.   파리대학을 중심으로 하는 교수들이 모여서 교회를 정화하기도 했습니다.  

교황 줄리우스 2세는 퇴락한 성 베드로 대성당을 증축하여 그 위엄성을 온 천하에 과시하려고 하였으나, 도중에 세상을 떠나고 레오 10세에게 그 완공의 책임을 넘겨야 했습니다.  레오10세는 베드로 대성당 건축을 마치기 위하여 막대한 돈이 필요하였습니다.  

로마가톨릭교회는 그들이 주장하는 7가지 성례 중에 고해성사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죄를 지은 자가 신부에게 죄를 고백하면 그것을 듣고 보속을 하는데 찬송을 많이 부르게 하거나, 기도하게 하거나,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노동을 시키거나 헌금하는 것으로 용서해주었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속죄의 의무를 대신할 수 있는 면죄부를 구입하면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레오10세 교황은 완전한 면죄부의 발매령을 내리고, 독일의 총 판매권을 부란덴버그의 귀족이며, 막데버그의 대주교를 맡고, 할버스타트 주교서리에 있는 연소한 알브레히트에게 위임을 했습니다.  이 알브레히트라는 대주교는 공석중인 마인쯔 대주교구를 차지하기 위하여 재벌가인 푸거에게 돈을 차용하여 일부를 바쳐 교황청의 허락을 받아내었습니다.  그는 독일 여러 지역의 대주교를 겸임하는 정치적인 수완이 있었습니다.   알브레히트는 8년 동안 면죄부를 판매하는 권한을 받아서 절반은 그가 갖기로 하고, 나머지 절반은 교황청에 보내기로 하였으나, 일반 백성들에게는 전액 대성당건축비로 들어간다고 둘러대었습니다.

알브레히트는 면죄부 판매의 경험이 많은 도미니칸 수도사인 텟젤에게 면죄부를 파는 일을 맡겼습니다.  텟젤은 면죄부의 효능을 설명하고 다닙니다.    이번에 교황청에서 판매하는 면죄부는 성베드로 대성당을 건축하기 위한 것인데, 이번에 성전을 짓는 것이 얼마나 큰 공력이 있는지, 살아있는 모든 자에게는 그가 지은 모든 죄를 사함 받는다, 그리고 연옥의 형벌을 다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고백신부를 택할 수 있다.  

세상을 떠난 부모와 형제들을 위하여 이 면죄부를 사기만 하면, 그들이 지금 어디에 있든지 다 천국으로 들어간다고 하였습니다.   면죄부를 사기 위하여 헌금 궤에 돈을 넣는 쩔그렁하는 소리와 함께 연옥에 있는 영혼들이 천국으로 들어간다고 외쳤습니다.   텟젤이라는 수도사는 말도 잘 했습니다.   물을 쏟아놓듯이 면죄부의 효능을 설명하는데, 사람들의 가슴을 미치게 하였고, 자기 자신을 위하여, 그리고 죽은 부모와 형제들을 위하여 무슨 짓이라도 해서 면죄부를 사려고 하였습니다. 

이때에 나선 사람이 비텐베르그 대학교수이며, 신부인 마르틴 루터였습니다.  그는 이런 면죄부를 파는 것은 잘못된 신학에서 나온 것이며, 면죄부 판매는 옳지 못한 동기에서 나온 것이라고 반박하는 95개 조항의 항의문을 대학성당의 문 앞에 내어 붙였습니다.  이 95개 조문에서 핵심적인 조항은 32문, 36문과 37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2조, “면죄부에 의하여 자신의 구원이 확실하다고 스스로 믿는 사람은,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들과 함께 영원히 저주를 받는다.”라고 했습니다.  면죄부 한 장을 샀기 때문에 당연히 구원받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저주를 받으라는 말이었습니다.  

36조 입니다.   “어떠한 그리스도인이든지 그의 죄에 대하여 뉘우치고 진정으로 회개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면죄부가 없더라도 죄와 형벌에서 사함 받을 수 있는 완전한 권리를 가진다.”   그가 죄를 진정으로 회개하고 구원하시는 주님을 영접하였다고 하면 면죄부가 없어도 용서받고 구원받습니다.  

37조입니다.  “모든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산 자나 죽은 자나 간에 면죄부가 없어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모든 영적 은혜에 참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은혜는 면죄부를 통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지는 것입니다. 

루터는 면죄부를 완전히 부인하지는 않았습니다.  교인들이 이 세상을 살면서 범하는 범죄에 대하여 형벌을 내리고, 그가 뉘우칠 때에 해벌할 수 있는 권리를 당연히 교회가 가지는 것으로 인정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발견한 복음은 진정한 회개가 없는데도 성자들의 공덕에 의한 면죄부를 사는 것으로 구원 받을 수는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가 95개조문의 항의문을 내어 걸 때까지도 로마교회를 개혁하겠다는 생각은 조금도 없었습니다. 대학에서 하는 학문의 방법으로 토론의제를 내어걸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주일이 못되어 전 독일에 이 항의문이 퍼져나갔고, 한 달이 못되어 전 유럽에 퍼져나갔습니다.  종교개혁의 모든 과정을 다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루터는 ‘죄’라고 할 때에, 로마교회가 가지고 있는 죽음에 이르는 죄와 사함 받을 수 있는 죄로 나눌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모든 죄는 다 죽음에 이르는 죄였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죄들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짓는 것이며, 하나님을 반역하기 때문에 범하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은 원죄와 자범죄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 정죄를 받았습니다.   

바르게 살고 싶고 구원받고 싶은 사람, 루터에게는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운명, 죄 가운데서 죽어야 하는 두려움, 확실치 않는 구원의 문제, 이런 것이 루터를 괴롭힌 것들입니다.  

루터가 21살 되던 해 초여름에 방학이 되어 집에 갔다고 절친한 친구와 함께 대학으로 돌아가던 중에 심한 폭우와 우레를 만났습니다.  당장이라도 세상을 뒤집을 듯한 뇌성병력, 벼락이 치는 순간 그는 땅에 엎드렸습니다.   그는 졸도하였다가 깨나고 보니 친구는 죽어 있었습니다.  그는 의식을 회복하면서 말할 수 없는 두려움에 쌓였습니다.  하나님의 진노하심, 절박한 죽음의 공포, 여전히 죄인인 자신의 모습, 해결하지 못한 죽음의 문제, 그의 앞에는 캄캄한 죽음의 문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무의식중에 수도사가 되겠다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면 안심이 되고 구원받을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어거스틴파 수도원에 들어가서 수도사가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의롭게 살아갈 수 있는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즐겁게 대할 수는 없는가?  죽음을 희망으로 맞이할 수 있는가?   하루에 일곱 번씩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성가를 부르고, 거룩하게 명상하고 세상의 정욕을 떠나보려고 힘을 다하였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죄로 가득한 그는 어떻게 거룩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가를 생각하였습니다.  잠시동안 가지고 있던 마음의 평화는 다 사라지고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그는 고행에 고행을 거듭했습니다.  엄격한 기도, 금식기도, 성구암송, 장시간의 명상, 그렇게 많은 고행이 죄를 속할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 의의 하나님, 범죄한 자를 찾아내서 심판하셔야 하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는 1510-11년 사이에 수도원의 대표로 로마에 파송되었습니다.  그는 꿈에도 그리던 영원한 도성 로마였습니다.  그는 웅장한 교황청이 자리잡은  라테란 궁전의 닳고 닳은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 올라가며 계단마다 입을 맞추어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렇게도 갈망하는 구원의 빛을 볼 수 없었습니다.  수많은 성소를 방문하고 성자들의 유물을 경배하였지만, 모두 다 허공을 치는 것에 불과하였습니다.    나는 과연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나는 구원받도록 예정된 사람인가?  이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나아갈 것인가?  

수도원에 돌아와 극단적인 고행으로 자기를 다스리면서 고민하고 있을 때에 수도원 대리원장으로 계시는 스타우피츠(Johann von Staupitz) 박사는 그에게 큰 위로를 주었습니다.   “만약 그대가 예정되었는지 의심이 나거든 하나님의 예정으로 죄인들을 대신하여 고난 받으신 그리스도를 마음에 새기라”고 구원으로의 예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루터는 로마서를 연구하면서 구원은 자신의 행위나 선행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은총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내신 유일한 구원의 주님이신 예수님을 믿는 신앙으로만 그 구원이 주어지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루터에게 있어 신앙의 근거는 하나님의 은총이었습니다.  우리가 믿는다, 믿음을 가진다고 할 때에 그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었고, 하나님의 은총이었습니다.  루터는 우리 주님이 지신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보았습니다.  온 우주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은 죄인을 반드시 형벌하실 수밖에 없는 심판의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죄 없으신 당신의 독생성자 예수님을 모든 죄인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내어주시는 말로 다할 수 없는 큰 사랑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셔서 당신의 독생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대속의 피를 흘려 죽게하셨고,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사랑 때문에 아들을 십자가에서 속죄의 제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보면서 회개하지만, 십자가에 숨어있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진노와 십자가에 숨겨진 사랑을 받아들이는데, 이것은 전적으로 믿음으로만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믿음을 통하여 진노의 배후에 숨겨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이요,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신뢰였습니다.   믿음이란 신뢰요, 완전한 의탁이요, 백기 들고 투항하는 것이요, 다른 방법이 없음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이 믿음은 오직 순종이요 아멘이요, 우리의 생명을 걸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오직 소망은 하나님의 사랑뿐이기에 그 사랑을 받아 감격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사람의 이성이나 체험에 근거한 것이 아니요, 아들을 내어주시면서 다 용서하시기로 작정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믿음, 생명의 말씀을 주시고, 아들을 주시고, 그 아들 안에서, 그 아들을 주님으로 영접하고, 그 아들이 나의 죄를 대속해 주셨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오로지 믿음뿐입니다. 

구원을 받았느냐, 구원을 얻었느냐 하는 것을 마르틴 루터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 편에서 보면 구원은 수동적인 것으로, 받은 것으로 보았습니다.  동시에 체험하는 것을 보면서 또한 칭의는 능동적인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죄인으로 아파하고 회개하면서 아들을 내어주시며 용서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주님을 영접하는 것으로 칭의는 능동적인 경험이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믿은 것 같고, 내가 주님 앞에 나아갔으나, 알고 보니 그런 믿음은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것이요, 나는 다만 기쁨으로 받은 것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수동적으로 받은 것입니다.   내가 믿은 것 같은데, 믿어진 것이요, 그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우리들이 잘 믿은 것 같은 그 믿음, 열정적인 신앙, 교회 생활에 익숙한 많은 시간들- 모태신앙이나, 유년주일학교 출신의 신앙, 좋은 일을 많이 한 사람, 인심 좋은 사람, 천사표의 선행,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것, 기독교인답다는 것이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은총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아닌지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십자가의 사랑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게 된 것이 나의 열정적인 신앙, 신실한 교회생활, 모태신앙, 좋은 일, 좋은 사람, 인심 좋은 사람, 천사표의 선행,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그런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생각하면서 금욕 생활을 하였고, 고행을 밥 먹듯이 하였고, 교회를 위하여 많은 기여를 하였고, 주님을 사랑하면서 가진 열정, 그런 것들도 하나님이 아들을 내어주시는 그 큰 사랑, 우리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당신의 생명도 아끼지 않고 내어주신 그 은혜와 사랑에 무엇인가 모자라는 듯이 보태거나 도움을 주었다고 하면 그건 구원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오직 사랑, 오직 말씀, 오직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철저한 죄인이, 사랑하는 아들, 죄 없는 아들 독생자 예수를 무서운 심판대에 내어주어 모든 죄인을 대신하여 형벌하시는 그 큰 사랑만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죄인 중의 괴수요, 죄인 중에 죄인이요, 하나님 앞에서 벌 받아 마땅한 죄인인데, 우리 주님이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고, 사랑하는 하나님이 아들을 내어주시면서 우리를 용서해주신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에, 하나님은 그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 여겨주셨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보니, 그 믿음마저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었고, 만세 전부터 택하신 은혜라고 생각하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중세교회는 교인들에게 당신은 구원을 받았다고 말해주지 않고, 늘 부족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구원 얻기 원하면 무엇인가 더 해야만 한다고 말했습니다.   더 많은 사역을 감당한다고 헌금하게 하였고, 사제에게 복종하게 하였고, 교회 생활에 열심을 내어야 구원 얻는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신앙의 선배요, 귀한 하나님의 종인 루터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바울 사도의 말씀으로 이신칭의의 구원관을 확립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오직 의롭다 여김을 받은 의인이라도 그 믿음으로만 살아가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면서 나사렛 예수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바디메오는 나사렛 예수시라는 말을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였지만, 더욱 크게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마지막 예수님은 바디메오의 눈을 뜨게 하시면서 하신 말씀이 중요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의 병을 고쳤다고 하지 않고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이 시간 나사렛 예수를 다윗의 자손 예수, 만왕의 왕, 만주의 주, 나의 주님이라고 믿음으로 영접하면서 고백하여야 합니다.    삶의 변화와 기적을 가져오고 구원하는 신앙은 이성에 있지 않습니다.  제도나 어떤 직분에 있지 않습니다.   그의 온전한 고백, 자기를 완전히 내려놓고 하나님만 신뢰하는 믿음에 있습니다.  

바디메오의 간절함이 주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것 분명하지만, 나사렛 예수가 아니라, 다윗의 자손 예수라는 고백을 기뻐하셨습니다.  바른 신앙고백이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오늘 본문의 바디메오는 주님을 만나서 구원받은 감격을 가지고 눈을 뜨게 되었고, 길에 예수님을 따라나서게 되었습니다. 

종교개혁의 정신은 항상 개혁해야 한다는 정신입니다.  나는 어떻게 구원받았는가?  나를 구원해주신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과연 누구인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우리 주님의 구속하신 은혜 아래서 날마다 기뻐하며 말씀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개혁과 혁명은 다릅니다.  혁명은 다른 사람을 쳐서 고치고 제도를 바꾸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혁은 자기를 쳐서 고치는 것입니다.  개혁의 중심은 항상 나에게 있습니다.  

개혁이라고 하니 새로운 것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훼손되고 오염되고 변질된 것이 있다면 원래로 돌아가고 본질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예수님으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씀으로 돌아가야겠습니다.  바른 신앙을 확립하여 항상 감격 속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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