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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장례] 마지막 날 부활에는 (요 11:2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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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예배 설교(믿음의 가정인 경우)> 

제목: 마지막 날 부활에는(요11:24-27)   찬송:228, 545 
  

1. 부활을 보여주신 예수님 

오늘 화장예배 앞에 머리 숙인 우리는 다시 한 번 인생의 결과에 대해 예측해 보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11장에는 한 가정의 슬픔과 영원한 세계를 향한 소망의 빛줄기가 비추어지고 있습니다.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가정과 특별한 친분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부모 없이 3남매가 힘겹게 살아가는 가정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나사로는 병이 들었습니다. 슬픔을 감당할 길이 없습니다. 슬픔 가운데 두 자매가 생각해낸 것이 “예수님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시간을 지체하셨고, 그동안 나사로는 죽음의 늪으로 빠져들었습니다. 그 가정과 동네 사람들은 슬픔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늦은 시간에 마리아의 가정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가 죽은 지 나흘이 되었습니다. 그의 시신은 썩어 들어갔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얼마나 야속한 눈물입니까? 조금만 빨리 오셔도 충분히 살릴 수 있지 않습니까?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왜 이렇게도 짜증스러울까요?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날에 다시 부활하게 될 것을 믿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습니다. 너무 늦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에 가서 썩어진 육신을 다시 일으키십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묻혀 있는 무덤을 향해 “나사로야 나오라”고 큰 소리로 부르셨습니다. 놀랍게도 나사로는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이미 죽은 시신입니다. 이미 부패된 몸입니다. 그러나 죽음이 그를 붙잡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야 우리는 예수님이 왜 이렇게 늑장을 부리셨는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통해 ‘부활의 실체’를 확증시켜 주기를 원했고, 자신의 부활을 미리 보여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원했습니다. 


2.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예수님 

얼마 있지 않으면 우리의 아픔과 슬픔과는 상관없이 고인의 시신은 몇 줌의 잿더미로 우리 앞에 남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죄의 권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새로운 소망 가운데 설 수 있어야 합니다. 죽은 지 나흘이 된 나사로의 죽음 몸을 다시 무덤에서 나오게 하신 주님이 잿더미가 된 고인의 시신을 죽음의 늪에서 나오게 하시는 날이 있을 것입니다. 죽음이 저항할 수 없는 부활하신 주님의 권세가 우리를 영원한 생명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그분 안에 연합되어 있는 자들은 반드시 부활의 영광에 참예할 것입니다.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물론 불완전한 신앙고백이었습니다. 현재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주님에 대한 신앙은 저버린 채 마지막 날의 부활에만 국한한 신앙고백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간 다시 한 번 마지막 날의 부활 신앙을 붙잡아야 합니다. 고인을 부활체로 만들어 가시는 주님의 능력을 확신하면서 남은 생애를 믿음으로 걸어갈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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