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마 5:10~12)

  • 잡초 잡초
  • 700
  • 0

첨부 1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마 5:10~12) 
 
 
❚진정한 영웅은...

저는 어려서부터 책 읽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만 해도 꽤 옛날이라 집에 변변하게 읽을 책이 많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아이들을 위한 좋은 책들이 얼마나 많이 나왔는지 몰라요. 그런데 그때만 해도 60년대 말, 70년대 초니까 아이들이 읽을 만한 책이 별로 없었지요. 그래서 어렸을 때 몇 번이고 읽고 또 읽던 책이 바로 나관중이 쓴 <삼국지>(三國志)입니다. 어린 마음에 유비, 관우, 장비 세 영웅이 도원결의를 하고 망해가는 한나라를 이어 나라를 세우는 이야기, 그리고 이들을 돕는 수많은 영웅호걸과 그들에게 맞서는 조조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참 흥미도 있고 가슴도 뛰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 지금도 기억에 남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 장수가 진정한 영웅인가 아닌가는 싸움터에 나가보면 금세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평상시 아무리 자기가 영웅호걸이라고 큰소리를 쳐도 정작 싸움터에 나가면 그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바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삼국지에 보면 싸움을 할 때 꼭 이런 방식으로 합니다. 먼저 양쪽 군대가 마주보고 섭니다. 그리고 양쪽 진영에서 장수 한 사람씩 나와 자웅(雌雄)을 겨루게 됩니다. 이때 상대방 진영에서 나오는 장수를 보고 어떤 반응을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진정한 장수는 상대방이 좀 만만하고 싸움 못하는 장수일 때 버럭 화를 냅니다. 아니,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만만하고 나보다 싸움 못하는 장수가 나오면 얼마나 좋아요? 쉽게 이겨버리면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화를 냅니까? 한 마디로 나를 뭐로 보냐는 것입니다. 나를 얼마나 우습게보았으면 저런 별 볼 일 없는 장수를 내 보내냐는 것입니다. 비록 싸우다가 내가 질 수도, 죽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진정한 영웅은 한 번 제대로 된 적수와 맞서 싸워보고 싶은 법입니다. 그러니 상대방에서 나오는 장수를 볼 때 정말 싸움 잘하는 훌륭한 장수가 나올 때 겁내고 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오늘에서야 한 판 제대로 붙어볼만한 장수를 만났구나” 하고 기뻐할 수 있어야 진정 영웅인 것입니다. 그런 위험을 견뎌내고 그런 험한 싸움을 여러 번 거치면서 그는 비로소 세상이 알아주는 위대한 영웅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게 된 후 어느 날 야고보서를 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서 1장 2~3절을 읽는 순간 저는 탁 무릎을 치면서 “바로 이거로구나!”하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한 번 같이 찾아볼까요?

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아니, 시험을 당하는데 왜 기뻐하라는 말이냐? 시험 당하면 힘들고 괴로운데 왜 온전히 기뻐하라고 하셨을까? 얼핏 이해가 안 가는 대목이지만 삼국지를 열심히 읽은 저는 그 뜻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진정한 영웅은 한 판 제대로 붙어볼만한 훌륭한 장수를 만날 때 두려워하거나 피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한다고 했지요. 왜? 

그것은 그만큼 나를 알아준다는 뜻이기도 하고 또 그런 사람을 만나야 나도 제대로 싸워서 진정한 영웅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싸우기 쉽고 이기기 쉬운 만만한 상대를 만나면 오히려 불쾌해 하는 까닭이 이것입니다. 시험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시험은 두려운 것입니다. 

시험 때문에 내가 쓰러지거나 망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시험을 만나서 그 시험을 극복하고 이겨낼 때 우리는 비로소 위대한 신앙의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3절도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고 한 것입니다. 삼국지 열심히 읽기를 잘했지요? 어렸을 때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만날 삼국지 같은 것만 보냐고 저희 어머니가 핀잔 많이 하셨지만 이게 다 나중에 쓸 데가 있더라는 말입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

오늘은 예수님의 팔복설교 가운데 맨 마지막 여덟 번째 복인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의 복”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지금까지 일곱 가지의 복을 선포하셨습니다. 기억나십니까? 기억하신다면 대단한 분입니다.

첫 번째 복(3절)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두 번째 복(4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세 번째 복(5절)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네 번째 복(6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다섯 번째 복(7절)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여섯 번째 복(8절)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일곱 번째 복(9절)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그런데 맨 마지막인 여덟 번째 복은 조금 특수한 상황을 말씀하십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나아가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건 도대체 무슨 말씀일까요?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앞으로 다가올 일을 예견하신 말씀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런 뜻입니다. “너희가 나를 믿고자 하느냐? 

내가 말한 팔복대로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이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려고 하느냐? 참 잘 하는 일이다. 그런데 한 가지 알아둘 일이 있다. 나를 제대로 믿고 제대로 된 크리스천으로 살려고 하면, 팔복을 지키며 살려고 하면 앞으로 반드시 너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다. 그것은 바로 박해(迫害)다. 

사람들이 너희가 예수 믿는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말로 너희를 모함하게 될 것이다.” 정말 그렇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 12절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고 하신 말씀처럼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을 닮아가려 하면, 어떻게든 바르게 믿고 경건하고 살려고 하면 반드시 우리에게 박해가 주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 살아계실 때부터 유대인들이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박해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습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그 제자들도 박해하고 죽여서 열두 제자들 가운데 요한 한 사람만 빼고 모두 순교했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의 박해를 받았고 돌로 맞아 거의 죽을 뻔 하고 매 맞고 감옥에도 수없이 갇히다가 결국 순교했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네로 황제를 비롯해 로마의 황제들은 기독교를 핍박하고 예수 믿는 자들을 가두고 죽였습니다. 

그들의 재산을 빼앗고 관직을 박탈하고 가족들을 끌고 갔습니다. 원형경기장에서 짐승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사자에게 갈가리 찢기게 하고 네로는 그리스도인들을 십자가에 매단 뒤 그 몸에 기름을 발라 불태우고 그 빛 아래서 만찬을 즐기기까지 했습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박해의 역사였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예수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얼마나 많은 이들이 박해를 받아 재산과 자유를 빼앗기고 목숨까지 잃었는지 모릅니다. 

유럽에서, 아메리카에서,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그리고 우리 조선 땅에서까지 말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일이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납니다. 저 이슬람 국가에서, 불교 국가에서, 공산 국가에서 예수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처참한 죽임을 당하는 일이 아직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미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제대로 믿고 살려면 틀림없이 앞으로 계속해서 박해를 받게 될 것이라고 예견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격려와 용기를 주기 위해 이 여덟 번째 복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의(義)를 위하여, 즉 바른 신앙과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박해를 받으면 복이 있다, 왜냐하면 천국이 너희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가 나 때문에 욕먹고 박해 받고 온갖 거짓과 모함에 시달리게 되면 복이 있다. 그러니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크기 때문이다. 옛날 선지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너희가 받는 박해가 크면 클수록, 너희가 욕을 먹으면 먹을수록, 너희를 핍박하고 못살게 구는 일이 심하면 심할수록 너희가 하늘에서 받게 될 상은 점점 더 커진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이런 말씀입니다. 그래서 아마 앞에 나온 일곱 가지 복과 달리 이 여덟 번째 복은 10절과 11절에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이 두 번 나온 모양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하나님을 위해, 신앙을 위해 박해와 고난을 받는 자는 앞의 일곱 가지 복보다 두 배의, 갑절의 복을 받을 것이라는 약속이라 믿습니다.

❚네 믿음이 진짜냐?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예수 제대로 믿는 사람은 반드시 박해 받습니다. 예수 믿으면 복만 받는다고 듣고 교회 나온 분들은 좀 당황스럽겠지만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예수 제대로 믿으면 반드시 박해도 받고 손해도 봅니다. 그런데 손해 안 보고 박해도 안 받는 방법이 하나 있기는 합니다. 적당히 믿는 것입니다. 세상과 악과 적당히 타협하는 것입니다. 절대 손해 안 봅니다. 예수도 세게 믿으면 박해 받고 손해 보지만 적당히 믿으면 그런 일 없습니다. 얼마나 쉽습니까?

우리가 초등학교 때 쓰던 ‘리트머스(litmus) 시험지’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종이를 알칼리성 용액에 담그면 푸른색으로 변하고 산성 용액에 담그면 붉은색으로 변하기 때문에 산성과 알칼리성을 아주 쉽게 판별하는 데 사용됩니다. 박해는 바로 우리 신앙의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어떤지 겉으로 볼 때는 잘 모릅니다. 겉으로 잘 꾸미기만 하면 제법 좋은 신앙인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내면이, 우리의 신앙이 진정한 것인지 아닌지는 박해를 보면 금세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의 신앙이 진정한 신앙이며 예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사는 신앙이라면 반드시 박해가 있고 손해가 따르게 마련입니다. 왜냐? 세상이 우리를 가만히 놔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우리를 그렇게 편하게 잘 믿도록 내버려 둘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신앙이 적당히 타협하는 신앙이라면 우리는 절대 누구에게도 박해를 받지 않습니다. 손해 볼 일도 전혀 없습니다. 

빌립보서 1장 29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고난을 받고 박해를 받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예수를 제대로 믿는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우리 신앙이 제대로 된 신앙이라는 증거인 것입니다. 

반대로 여러분이 지금까지 예수 믿어오면서 한 번도 반대나 방해를 당한 적이 없다, 한 번도 안 믿는 사람과의 관계가 껄끄럽거나 힘든 적이 없었다면 내 신앙을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나는 진짜 크리스천인가? 아니면 교회는 오래 다니고 직분도 얻고 겉보기에는 제법 잘 믿는 것 같지만 늘 타협하고 적당히 믿어온 무늬만 크리스천인가? 하고 말입니다.

존 맥아더 목사는 이 부분에서 참 날카로운 지적을 합니다. 요즈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제 세상의 태도가 변했다고 생각한답니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정치인도 나오고 인기인도 나오고 세상의 인정도 받게 되었으니 오히려 예수 믿는 것이 손해가 아니라 좋은 이력이 되는 시대라고 말입니다.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합니다. 적어도 포항에서 한 자리 하려면 교회 다녀야 한다는군요. 

포항 출신 대통령도 나왔지만 여러분 아시다시피 두 분의 국회의원 모두 장로요 시장이나 경찰서장이나 주요 관직에 있는 분이 다 크리스천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이렇게 옛날에는 예수 믿는다고 핍박 받았지만 이젠 세상이 바뀌어서 오히려 예수 믿어야 잘 되는 세상이라고 말입니다. 개인적으로도 내가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박해는 물론 사람들과 부딪힐 일도 별로 없고 손해 볼 일도 별로 없습니다. 아니, 그렇게 보입니다. 

그러나 존 맥아더 목사님은 분명히 지적합니다. 세상은 절대 안 바뀌었다고 말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던 2천 년 전이나 크리스천을 태워죽이고 찢어죽이던 로마 시대나 지금이나 세상은 전혀 바뀐 것이 없다고 말입니다. 세상이 바뀌고 우리에게 더 관대해 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바뀐 것이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세상과 좀 더 친해지고 좀 더 잘 타협하고 좀 더 느슨하게 예수 믿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라고 말입니다. 참 날카로운 지적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예수 믿는다고 화형에 처하고 야수의 밥이 되게 하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화형 당하는 것보다 주일성수 하는 것 때문에 직장에서 진급에 지장을 받거나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학교에서 따돌림 당하는 것을 더 무서워하는지도 모릅니다. 예수 믿는다는 소문이 나서 만만하게 보일까봐 손해 볼까봐 더 무서워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손해 볼 정도로는 안 믿고 적당히, 적절히 타협하고 어울리면서 그들의 눈 바깥에 나지 않는 수준에서 믿기 때문에 마치 세상이 우리에게 관대한 것처럼 보이는 지도 모릅니다. 충격적인 사실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이렇게 믿는 사람은 편할지는 모르지만, 그들이 바라는 대로 손해는 안 볼지 모르지만 결코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주님은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나도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눅 9:26)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오히려 ‘하나님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고 욕하고 핍박하고 나를 중상 모략하더라도 더 기뻐하고 즐거워 할 수 있는 것은 세상에서는 힘들지만 하늘에서 우리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 제대로 믿는다는 것이 쉬운 길이 아닙니다. 쉽게 생각하고 오셨다면 여러분 실수하셨습니다. 후회되십니까? 예수 제대로 믿고 하나님 뜻대로 사는 길은 참 힘들고 외로운 길입니다. 예수 잘 믿으면 세상 사람들이 싫어하고 자꾸 나에게서 멀어져 갑니다. 자기들한테 잘 안 끼워주고 왕따 시킵니다. 그래서 참 외롭습니다. 그들은 예수 믿는 사람을 왜 그렇게 싫어하는 것일까요? 술 안 먹는다고요? 자기들하고 같이 행동 안 한다고요? 아닙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부서진 도자기 조각(Ostraca)에 추방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적어 가장 많이 나온 사람을 10년 동안 추방시키는 ‘도편추방제’(Ostracism)라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요즈음으로 치면 일종의 정치인 탄핵입니다. 그런데 당시 아테네에는 아리스티데스(BC 525~465)라는 뛰어난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페르시아 군대를 물리치고 아테네를 그리스 전체의 지도자 국가로 올려놓은 훌륭한 지도자였고 너무나 공평한 정치를 했기 때문에 별명이 ‘정의로운 사람’ 즉 ‘의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테네 시민들이 도편추방제에 따라 도자기 조각에 그의 이름을 써서 그는 아테네에서 추방당하게 됩니다. 왜 그토록 훌륭하고 의로운 사람을 추방하기로 시민들이 결의한 것일까요?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사람이 나쁜 짓을 한 것은 하나도 없소. 하지만 나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의인(義人)이라고 부르는 것이 너무 꼴 보기 싫었기 때문이오.” 만약 아리스티데스가 적당히 타협하고 적당히 부패한 정치인이었다면 이렇게까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요? 사람들이 나와 같은 부류의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관대하게 대했겠지요. 기억하십시오. 이것이 이 세상의 본질입니다. 세상은 우리가 그냥 싫은 것입니다. 자기들과 다르게 살고 다른 가치를 가진 것이 꼴 보기 싫은 것뿐입니다. 예수 믿고 행복하다고 하는 꼴이 보기 싫은 것입니다. 우리가 의롭게, 바르게 살려고 하는 것이 꼴 보기 싫은 것뿐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들에게 안 찍히고 함께 잘 사는 길은 의롭게 안 살고 그들과 같은 부류가 되어 적당히 함께 죄 짓고 적당히 타협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았다면 우리는 반드시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깨달은 바대로 적당히 믿고 적당히 타협하며 세상과 잘 지낼 것인가? 아니면 그렇게 될 줄 뻔히 알면서도 우리 신앙을 제대로 지켜서 박해도 받고 손해도 보고 따돌림도 받을 것인가? 그런데 후자를 선택하는 바보 같은 사람들에게 오늘 본문 12절에 주님은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여기서 ‘상’(賞)은 헬라어로 ‘보상’이라는 뜻입니다. 

‘보상’의 무슨 뜻입니까? 손해 본 것을 되갚아주는 것입니다. 손해 본 것을 충분히 메우고도 남을 만큼 다시 갚아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직하게 신앙을 지키는 바보 같은 성도들을 기뻐하셔서 천국을 상으로 주실 뿐 아니라 그 모든 박해와 손해와 따돌림을 충분히 보상하고도 남을, 아니 절대 비교할 수도 없는 상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하늘의 상입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결코)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