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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교개혁]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눅 2:4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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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눅 2:41~52)


10월 마지막 주일은, 종교개혁기념주일입니다. 종교개혁은 1517년 10월 31일, M. Luther가 로마천주교회의 면죄부판매에 반대하는 95개조의 논제를, 독일 비텐베르크의 슐로스교회(Schlobkirche zu Wittenberg)의 한 문(後日에, ‘논제의 문’)에 게시하면서부터 일어난 운동입니다. 

레오 10세(Pope Leo Ⅹ; 1513-1521재위)가 당시 재임교황이었는데, 그는 전임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시작한 ‘성 베드로성당’ 건축사업을 인수했습니다. 막대한 건축자금이 필요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레오 1 0세는, 재임기간 중 교황청 재산을 축제와, 전쟁, 놀음과 사냥으로 탕진해버린 게으르기 짝이 없는 교황이었습니다(현, 베네딕토 16세: Joseph Ratzinger).

당시 로마천주교회의 성직은, 金權의 자리였습니다. 대주교가 되기 위해서, 천문학적인 돈을 썼습니다. 경쟁자들보다 교황에게 더 많은 돈을 내 놓아야 했습니다. 당시 독일교회를 좌지우지하던 자리인, ‘마인즈(Mainz)의 대주교’ 에 오른 ‘알브레히트’라는 인물이, 그런 인물 중 으뜸이었습니다. 자신의 교권과 베드로성당 건축비로 교황, 레오 10세에게 보낼 큰돈이 필요하자 도미니칸 수도회 수도원장이었던 요한 테첼(Johann Tetzel)에게 면죄부판매책을 위임합니다. 그 반작용으로 종교개혁의 물꼬가 터졌습니다(중세의 대주교는 투자의 귀재; 요즘으로 하면, 워런 버핏과 같은 사람). 

요한 테첼은, 신체가 크고 건장했고, 언변이 능하고, 박식하고, 세련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설교와 면죄부 판매에 혹하여 빠졌습니다. 위세가 대단했습니다. M. Luther가 일하고 있던 비텐베르크 城 가까이까지 와서 면죄부 판매를 벌이자, 면죄부 판매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M. Luther가 슐로스교회 문에다 95개조의 논제를 내 건 것이, 종교개혁운동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종교개혁운동은 순식간에, 불어권으로 퍼져나갔고 존 칼빈이 ‘스위스 제나바’를 중심으로서 또 개혁운동의 불길을 당겼습니다(원로정치, 대의정치). 

종교개혁하면, 주로 M. Luther를 많이 생각합니다. 그러나 칼빈의 영향력 간과할 수 없습니다. 칼빈의 신학사상 중, 우리가 특별한 관심을 가져야 할 한 가지는, 그가 말한 ‘어머니 교회론’입니다. 칼빈은 교회를 ‘어머니’라고 했습니다. 그의 이 신학은 “당신이 교회를 어머니로 모시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 없다”는, 초대 교부이자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의 감독이었던 키프리아누스의 견해를 발전시킨 신학입니다. 

성경적인 근거로 갈라디아서 4, 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는 말씀을 그 근거로 두고 있습니다. 여기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란 그리스도의 신부인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가리킵니다. 바울에 의하면 교회는 ‘하갈’과 같은 여종이 아니라 ‘사라’와 같은 자유자이며, 성도들의 어머니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성도들의 어머니가 된다’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교회는, 새로운 생명이 孕胎되고 태어나는 곳이라는 겁니다. 교회공동체는 ‘생명공동체’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성령으로 거듭나서, 새로운 생명들로 태어나는 곳이 교회공동체입니다. 그렇게 새로 태어난 생명체들은, 세례성례전을 통하여 교회 공동체의 지체로 공식적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또 교회는, 새로 태어난 생명들에게 신령한 젖을 먹이는 공동체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는, 성도들의 어머니입니다. 갓난아기가 엄마의 젖을 먹지 않고서는 건강하게 자랄 수 없듯이, 영적으로 새로 태어난 생명도 교회를 통하여 공급되는 ‘신령한 말씀의 젖’을 공급받아야 건강하게 자랄 수 있습니다.

교회가 성도들의 어머니인 것은, 영적으로 어린 생명들을 양육하고 훈련시켜서 그리스도인으로 자라게 하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어머니가 우리를 낳아주실 뿐만 아니라, 돌보시고 길러주시지 않습니까? 교회공동체도, 영적 어머니로서 우리를 낳고, 돌보고, 길러줍니다.

또 육신의 어머니는 자녀가 장성하면, 분가시켜 사회인으로 살아가게 합니다. 교회도 양육한 그리스도인들을 세상으로 파송합니다. 교회 안에만 머물러 있게 하지 않습니다. 흩어지는 교회로, 성도들을 가정과 직장, 일터로, 삶의 자리로 파송하여 내 보냅니다.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아가게 합니다. 선한 영향력을 끼치게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어머니가 된다는 것입니다. 

492년 전, 어머니와 같은 당시 16세기의 로마천주교회는, 사람으로 말하자면 말기 암환자와 같이 중병에 들어 있었습니다. 그 중병을 치유하기 위해 M. Luther를 비롯한 사람들이, 개혁운동을 일으킨 것입니다. 개혁운동은, 병든 교회에 대한 치유운동이었습니다. 오늘, 한국교회는 세계 교회 앞에도 수많은 자랑거리를 가지고 있는 교회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크고 작은 병이 있습니다. 중세로마천주교회와 같이, 선천적인 유전병을 물려받은 거지요.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병든 한국교회를 비난만 하고 있을 수도 없는 입장입니다. 병든 교회라고 하여도, 포기할 수 없지 않습니까?

이유가 무엇입니까? 한국교회가, 이 자리에 계신 우리 모두를, 친히 낳아 주고 길러준 교회 아닙니까? 육신의 어머니가 병드셨다고 해서, 자기 어머니를 버리는 자식은 불효자식입니다. 병든 영적인 어머니를 버리는 것, 역시 영적인 불효자입니다. 병든 영적인 어머니이지만, 부둥켜안고 병의 근원을 치유하기 위해서, 자기희생을 하는 자가 영적인 효자 아니겠습니까? 
교회가 병들었다는 말은, 저와 여러분이 병들었다는 말입니다. 교회는, 우리가 지체가 되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우리들이 영적 효자가 되는 길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본문의 배경은, 예수님께서 열두 살 되시던 해, 유월절입니다. 그 해 유월절이 되자 어머니 마리아, 아버지 요셉, 나사렛에서 사는 친족들, 이웃들이 함께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여자들은, 의무가 없음; 랍비 Hillel). 

열두 살 되신 예수님도, 예루살렘에 함께 올라가셨습니다. 유대인 남자아이에게 ‘열두 살’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유대인 남자아이가 13살이 되면 ‘바르 미츠와’(הוצמ רב, ‘계명의 아들’)라고 합니다. 그때부터 율법을 지켜야 하는 의무가 주어집니다. 그러면서 ‘成人’으로 인정을 받게 됩니다. 보통은, 바르 미츠와’가 되기 1년 전부터, 하나님께 서원을 한다든지, 율법을 미리 공부하기 시작합니다. 열두 살 되신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도,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유월절을 마치자 예수님 부모, 친지들, 이웃들이, 함께 나사렛으로 귀갓길에 올랐지만, 아이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머물러 계셨습니다. 하룻길을 가도록, 그 사실을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동행 中에 있는 줄로만 생각했습니다. 하룻길을 가고서야, 아이 예수님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았지만, 찾지 못합니다. 가던 길을 돌려,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서 하룻길 내내 찾았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3일째 되던 날, 성전에서 아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가서 보니, 놀란 가슴으로 애타게 찾던 ‘아이 예수님’이 선생님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고 묻기도 하셨는데,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메시지가 있습니다. 당시, 생존해 있던 저명한 랍비들은, ‘힐렐’, ‘샴마이’, ‘가말리엘’, ‘요나단’, ‘시므온’, ‘니고데모’ 등이 있습니다. 이들 중, 한 두 분이 참석하지 않았을까 짐작됩니다. 열두 살 밖에 되지 않은 어린아이 예수님이, 당대의 석학들과 마주 앉아 듣기도 하고 대답도 하셨는데, 예수님의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겼다 합니다(하나님 말씀의 핵심을 꿰뚫는 상상을 초월하는 식견과 통찰력으로, 질문도 하시고 대답도 하셨다). 

여기 「놀랍게 여겼다」는 헬라어 ‘엑시’스테미’는 ‘놀라서 정신이 나갔다’는 의미입니다. 문법적으로 미완료시제를 쓰고 있는데, 한두 번도 아니고 계속해서 정신이 나갈 만큼 놀랐다는 겁니다. 공생애 이전, 예수님 유년시절의 공식적인 예수님의 첫 등장입니다. 이 점을 주목하십시오. 이 놀라움의 사건은 비유하자면(비유가 될 수도 없지만) 492년 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슐로스교회의 ‘논제의 문’에 M. Luther가 내다 건 95개조항의 논제와도 같다 하겠습니다.

우리가 산상수훈 결론부인 마태복음 7, 28-29이나 마가복음 1, 22말씀에서 보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았던 무리들이 ‘놀랐다’(엨세플레손토)합니다. 본문의 랍비들이 예수님의 질문과 대답에 계속해서 정신이 나갈 정도로 놀랐다는 말씀과 똑같은 반응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았던 무리들도, 18년 전 유월절, 예루살렘 성전에서 열두 살 어린아이 예수님에게 놀랐던 랍비들처럼, 정신이 나갈 정도로 계속해서 놀랐습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권위가 있었고, 그 가르침의 식견과 통찰력은, 그들의 랍비였던 서기관들의 가르침과 달랐기 때문에, 그들은 정신을 잃을 정도로 놀랐습니다. 

여기에 종교개혁기념주일,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랍비들과 무리들에게 놀라움을 줄 수밖에 없었던 예수님의 그 말씀에, 우리가 집중하는 일입니다. 말씀회복이, 종교개혁의 메시지입니다. 말씀회복에 “마음을 다해야 합니다.” “뜻을 다해야 합니다.” “목숨을 다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라”하셨습니다(요 14, 15). 

종교개혁기념주일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회복입니다. 병든 로마천주교회를 고치고자 했던 종교개혁자들이 내건 첫 번째 슬로건이 '하나님 말씀의 회복운동이었습니다(Sola Scriptura!). 

열두 살, 아이 예수님 앞에서 유대종교의 대석학들조차도 정신이 나갈 정도로, 혼이 빠질 정도로, 예수님의 식견과 통찰력, 하나님 말씀의 진수를 꿰뚫는 질문과 대답에, 계속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당시 유대종교를 향하신 예수님의 첫 번째 메시지였습니다. 유대종교가 말씀에, 많이 벗어나 있었다는 것이지요. 

유대종교는, 율법주의에 중병이 들어 있었습니다. 자기들이 만들어 놓은 온갖 율법 해석과 규례들을 잘 지키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노동’(일)이라 생각했습니다. 그 노동의 ‘대가(품삯)’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구원’(영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마다 자기 義를 자랑하기 바빴습니다. 자기가 남보다 공로가 더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어야만 했습니다. 기도 많이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줘야 했습니다(길 어귀, 시장,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두 손을 높이 들고, 기도하는 것을 즐겨했습니다. 웃지 못 할 일입니다. 예수님은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앞에, 골방에서 기도하라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오늘의 교회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하나님 말씀보다, 교회의 전통을 앞세웁니다. 교회마다 형성된 전례가 있는데, 그것이 하나님 말씀보다 더 중요한 기준입니다. 거기서, 교권주의가 생깁니다. 율법주의가 생깁니다. 세속화가 일어납니다. 

유대종교의 랍비들도, 당대의 석학들도, 예수님께서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 말씀의 식견과 통찰력, 진수, 질문하시고 대답하시는 그 복음말씀 앞에서 놀라야만 했습니다. 계속해서 정신이 나갈 정도로 놀랐습니다. 우리도 랍비들처럼, 무리들처럼, 예수님 말씀 앞에서 정신이 나갈 정도로 놀라지 않으면, 안됩니다. 

작년 시월에, 미국의 윌로우크릭교회 담임목사인 빌 하이벨스 목사님이, 지나간 32년간의 윌로우크릭교회 목회를 돌아보면서, 자신의 목회가 잘못된 목회였다는 폭탄선언을 했습니다(주일예배 회집수로,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교회). “우리는 실패했다”고 고백했습니다. 교인들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서 수많은 프로그램을 만들어, 그 필요들(need)을 채워주었지만 돌아다보니, 그것이 교인들의 ‘영적 성숙함’을 보장해주지는 못했다며, 목회실패를 선언했습니다. 

‘우리가 실수하였다’고 고백하면서 유명한 말로 결론을 맺었습니다. “넓이는 1마일인데(1마일, 약 1.6km) 깊이는 1인치(2.54cm)”라는 말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우리는 왜, 주일예배에 나와 예배합니까? 빵을 얻기 위해서입니까? 예수 믿으면, 하나님께서 일용할 양식, 빵도 주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덤’입니다. 빵을 구하기보다는, 빵을 주시는 하나님을 갈망하십시오. 각종, 은사를 구하십니까? 은사보다, 은사를 주시는 ‘성령하나님’을 갈구하십시오. 

무리들이 날마다, 예수님을 찾아 헤매고 다니자,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요 6, 26-27).

예수님을 그저, 열두 살 어린아이로만 여기고, 찾아 나섰다가 성전에서 만나자, 그 부모들이 보고 놀라며, 어머니 마리아가 책망하듯이 이릅니다.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심한 정신적인 충격) 너를 찾았노라”. 그 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눅 2, 48-49).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예수님의 이 말씀은, 종교개혁492주년기념주일을 맞은 우리에게, ‘하나님 말씀회복’을 위하여 우리가 마땅히 ‘하나님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것을, 너희는 어찌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여기느냐는 도전의 말씀입니다. 우리도, 수십 년, 평생 나름대로 예수 믿었습니다. 예수 믿는 관록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말씀에 놀라면서(정신이 나갈 정도로) 말씀회복이 내 안에 일어난 적이 있으신지요? 관록은 1마일인데, 하나님 말씀을 깨닫는 지혜의 깊이는, 혹 1인치밖에 되지 않는 것은 아닌지요? 

금년에는, 10월 31일 종교개혁기념일을 앞두고 내일저녁부터 수요일저녁까지, 말씀목회에 진력하셨던 이연길 목사님과 함께 가을부흥사경회를 준비했습니다. 말씀을 집중적으로 듣는 기회입니다. 이번 기회가, 12살 되신 아이 예수님에게 놀랐던 율법학자들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의 진수 앞에서 놀라움을 회복하는 `도전과 축복의 기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도 말씀하시는 하나님으로 찾아와 주옵소서. 열두 살, 아이예수님의 질문과 대답에 정신을 잃을 정도로 놀랄 수밖에 없었던 유대종교의 랍비들의 놀라움이, 우리의 놀라움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말씀에 기초한 우리 신앙의 깊이가 1인치가 아니라 1마일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모두 다 그 복의 주인공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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