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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불신자들에게도 칭찬받는 성도 (롬 14: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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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자들에게도 칭찬받는 성도 (롬 14:13~23) 

 
제가 어느 교회에서 고등부 교사로 섬길 때 고등학생 하나가 저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 왜 예수님은 그냥 어른으로 이 세상에 오시지 않고 아기로 태어나셨어요?” 저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질문이어서 대답을 잘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얼마 후 고등부학생회 토요집회에서 신앙토론회를 했는데 주제가 이런 거였습니다. “왜 예수님은 아기로 태어나셨을까?” 저는 다른 일로 그 집회에 참석하지 못했지만 나중에 들어보니 별다른 답은 나오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때 어른으로 오셔서 공생애 사역만 하시지 않고 굳이 아기로 태어나 30년을 사신 후에 사역하시는 방법을 택하셨을까요? 이것은 예수님이 아기 때부터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까지 하신 일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게 어떤 것들입니까? 

 예수님은 아기 때 헤롯이 죽이려고 해서 애굽으로 피난하여 위기를 모면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험한 인생을 사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 예수님은 12살 때 성전에서 유대 선생들과 토의하셨는데 이때 사람들이 예수님의 지혜에 놀랐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어렸을 때부터 말씀을 가까이 하고 성경에 통달하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 예수님은 자라면서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더 사랑스러워가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괴팍하거나 모난 분이 아니라 사람들과 화목하게 지내시는 분이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어려서부터 험한 인생을 사신 것, 성경에 통달하신 것,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사랑스러워가신 것, 이 세 가지 모습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아주 중요한 메시지를 줍니다. 

 먼저, 예수님이 어려서부터 위험을 피해 다니며 험한 인생을 사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사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아지셔야 우리의 약함을 아시고 우리의 진정한 구주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어릴 때 고통까지 체험하기 위해 아기로 오신 것입니다. 여러분 요즈음 상담학이나 심리학에서 많이 하는 말이 뭡니까? 어렸을 때 고통을 당해 상처 입은 것이 평생 간다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상담을 통해 어렸을 때 입은 상처를 치유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린 시절에 어려움을 겪으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정말 우리의 모든 고통을 체험적으로 아시며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라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또 예수님이 어렸을 때 성경을 많이 아신 것은 우리가 예수님처럼 되기 위해서는 어려서부터 성경을 가까이 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사랑하며 예수님처럼 되어 예수님과 가까워지려면 예수님처럼 성경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어려서부터 성경을 가까이 하면 가장 좋습니다. 혹시 우리가 어렸을 때 그런 기회가 없었다면 지금부터라도 성경을 가까이 하고 통달해야 합니다. 성경에 익숙해지지 않고 예수님처럼 되며 예수님과 가까워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들에게서 사랑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 사랑을 받으신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고 성경에 통달하고 죄 없이 사셨으니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으셨다는 것은 좀 특별하게 보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나중에 사람들로부터 고난을 받아 죽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예수님이 자라실 때 하나님과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삶이 기본적으로 사람들에게서도 사랑받는 삶이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사실 세상에 악이 가득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또 예수님은 고난을 받으셔야 하기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특별한 경우 외에 기본적으로는 예수님이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까?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종려주일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아니 고난주간에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 많은 사람들이 그 말씀을 들으면서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미움을 받고 죽으신 것은 예수님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잘못된 기대, 즉 예수님이 로마를 물리치고 나라를 구해줄 것이라는 기대를 저버린 것과 종교지도자들의 선동에 의해 마지막 순간에 그렇게 된 것일 뿐입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시면서도 죽임을 당하신 것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가르쳐줍니다. 첫째, 우리도 기본적으로는 사람들로부터 사랑받을만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세상에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이 있어 끈질기게 우리를 미워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에게 큰 박해를 가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사셨기에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셨습니까? 하나님의 구원을 베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크게 세 가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첫째, 예수님은 사람들을 받아주셨습니다. 남들이 다 받아주는 사람만 받아주신 게 아니라 남들이 다 기피하는 사람까지 받아주셨습니다. 죄인도 받아주시고 가난한 사람도 받아주시고 환자와 장애인들도 받아주셨습니다. 이것 때문에 당시 사회의 다수를 차지하던 어려운 사람들은 예수님을 무척 좋아하며 따랐습니다. 다만 종교지도자들이 시기심으로 예수님을 싫어하거나 예수님의 가르침이 자기들의 전통과 다르다고 싫어했을 뿐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사람들을 도와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계셨는데 항상 그것을 어려운 사람 돕는 데만 쓰셨습니다. 여러분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하면서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했지요. 예수님은 40일이나 금식하고 시장하셨지만 자기 배를 위해서는 돌로 떡을 만들어 먹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굶주린 무리를 위해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결혼식에서는 포도주가 떨어져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주셨습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시험도 받으셨지만 뛰어내리지 않으셨습니다. 자기 명예나 인기를 위해서는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을 구하기 위해서는 풍랑을 잠잠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으로만 역사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에 대해 아주 중요한 것을 하나 가르쳐줍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사람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행동하셨기 때문에 칭찬을 받은 게 아니라 순수하게 사랑으로 행동하셨기 때문에 칭찬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은 사람들을 진리로 가르쳐주셨습니다. 유대종교지도자들의 잘못된 가르침 때문에 마음이 억눌리며 답답하게 살던 사람들에게 진리를 가르쳐주셔서 자유와 기쁨을 맛보게 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종교지도자들의 잘못된 것을 꾸짖고 바른 가르침을 주실 때마다 사람들은 즐겁게 들으며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어쩔 줄 몰랐습니다. 한 회당장이 안식일에 병을 고치지 말라고 하자 예수님이 그를 꾸짖으시며 안식일에 사람을 구해주는 것은 옳은 일이라고 알려주실 때 사람들이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릅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사람들로부터 칭찬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의 칭찬을 받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도 칭찬을 받기 위해 기적을 행하지는 않지 않으셨습니까? 더욱이 사람들의 칭찬을 바라고 살면 사람들의 칭찬은 받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칭찬은 받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그러셨지요. 구제할 때 사람들이 칭찬해주기를 바라며 하면 사람들 칭찬받은 것으로 끝나고 하나님의 칭찬은 전혀 받지 못한다구요. 하나님의 칭찬을 받지 못하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는 칭찬을 받으려고 하지 말고 오직 예수님을 닮으려고만 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예수님처럼 살기만 하면 하나님의 칭찬은 물론이고 사람들의 사랑도 저절로 받게 됩니다. 물론 악한 사람들의 미움을 받거나 심지어 박해를 받을 때도 있겠지만 괜찮습니다. 그게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고 하나님의 칭찬을 받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이 중에 예수님처럼 살아 사람들로부터도 사랑과 칭찬을 받는 모습을 좀더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닮으려면 먼저 우리도 사람들을 받아줘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게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가르쳐주는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본문이 뭐라고 합니까?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 서로 판단하지 않는 게 뭡니까? 서로 받아주는 것 아닙니까? 

 본문에서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않는 게 뭔지를 이해하려면 본문의 문맥을 좀 살펴봐야 합니다. 당시 교회에서는 음식 문제, 특히 고기를 먹어도 되느냐 먹지 말아야 하느냐는 문제로 논란이 있었습니다. 왜 고기 문제가 논란이 되었느냐 하면 당시에 시장에 나와 있는 고기들은 대개 우상에게 제사로 바쳐진 고기였습니다. 그래서 교인들 중에는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일까봐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반면에 교인들 중에는 고기가 우상의 제물이었다고 해도 우상은 원래 아무것도 아니니까 고기에 아무 영향도 못 미친다고 믿어 아무렇지도 않게 고기를 먹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러는 중에 고기를 먹는 사람은 먹지 않는 사람을 믿음이 약하다고 비난하고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은 먹는 사람을 우상의 제물을 먹는다고 비난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형제 앞에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을 두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바로 고기를 먹는 사람이 먹지 않는 사람에게 고기를 먹으라고 권하거나 그 앞에서 고기를 먹음으로써 그를 시험에 들게 하는 것입니다. 

 또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이 먹는 사람에게 고기를 먹는 것은 우상숭배라고 하며 먹지 못하게 강요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두지 말라는 것은 고기를 먹는 사람은 먹지 않는 사람을 그대로 받아주고 먹지 않는 사람은 먹는 사람을 그대로 받아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웃을 받아줘야 한다고 해서 누구나 다 받아줘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사람을 다 받아주셨지만 예수님을 찾지 않는 사람은 받아주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배척한 유대종교지도자들은 받아주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만 받아주셨습니다. 물론 여기서 받아준다는 것은 음식을 대접하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해준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만 음식을 주신 게 아닙니다. 믿는 자와 안 믿는 자 모두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해주시는 것은 오직 믿는 사람들만 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제하고 도와주는 것은 신자나 불신자나 다 해주지만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해주는 것은 아무나 해주는 게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는 사람만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줍니다. 그런데 일단 예수님을 믿으면 그 다음에 나타나는 웬만한 차이는 다 서로 이해하고 받아줘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서는 고기를 먹는 사람이나 먹지 않는 사람이나 서로 받아줘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이것을 이렇게 가르쳐줍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음식 문제는 하나님 나라의 본질이 아니고 성령 안에서 의롭게 살고 평화롭게 살고 기쁘게 사는 게 하나님 나라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면 반드시 성령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음식 문제로 서로 다투며 남을 정죄하고 받아주지 못해서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지 못하면 절대 안 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교회에서 사소한 일로 다투면 사랑이 식지요? 그것은 바른 삶이 아닙니다. 의가 없는 것입니다. 서로 다투면 평화가 사라집니다. 그러면 기쁨이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괴로움뿐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섬기는 교회가 당회를 할 때마다 사소한 일로 자꾸 다퉜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나중에는 담임목사마저 교회생활이 괴로워졌다고 합니다. 

 교회에 다툼이 있으면 교회를 가장 사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담임목사마저 교회생활에 기쁨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투는 교회의 교인에게 무슨 기쁨이 있겠습니까? 교회에서 비본질적인 것으로 다투느라고 교회의 본질인 의와 평강과 희락을 잃어버린다면 이보다 더 슬픈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본문이 말하는 음식문제는 종교의식적인 문제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음식은 종교적으로 악한 것이기 때문에 먹으면 안 된다고 하는 문제입니다. 오래 전에 어느 교회 중직자 두 분이 이단이 만드는 음료수를 두고 논쟁이 붙었습니다. 한 사람은 이단이 만든 음료수니까 먹으면 안 된다는 것이고 다른 사람은 먹어도 된다는 거였습니다. 우연히 제가 그 분들 옆에 있었는데 두 사람이 논쟁을 벌이다가 끝이 안 나니까  “그러면 목사님에게 물어보자.”고 하면서 저에게 오는 겁니다. 큰일 났습니다. 두 분 다 교회의 중직자들이고 또 각각 자신만만하게 자기 말이 맞다고 하면서 저에게 물어보는데 뭐라고 대답합니까? 둘 중에 한 분이 맞다고 했다가는 저하고 원수가 되게 생겼더라구요.

 다행히 하나님이 지혜를 주셔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음료수 자체로 보면 다 하나님이 주신 거니까 먹어도 됩니다. 그러나 그 음료수를 팔아주면 그 이단이 부흥하도록 도와주는 결과가 되니까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랬더니 먹어도 된다고 한 분이 금방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렇지요. 저는 그 음료수 자체가 무슨 부정한 것이나 악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먹어도 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자 먹으면 안 된다고 한 분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그걸 먹으면 이단을 도와주는 거기 때문에 먹으면 안 된다고 한 거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두 분 다 같은 생각을 가지고 계셨는데 음료수를 보는 각도에 따라 먹어도 된다는 주장과 먹으면 안 된다는 주장을 하셨던 겁니다. 그러면서 논쟁이 심해지니까 나중에는 서로 정죄하며 험악하게 논쟁을 했던 겁니다.

 세상에는 그 자체가 악하기 때문에 우리가 피해야 하는 음식은 없습니다. 마가복음 7:18-19를 보면 예수님은 음식에 대해 이렇게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이는 마음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에 들어가 뒤로 나감이니라.’ 하심으로 모든 식물을 깨끗하다 하셨느니라.” 

 음식 외에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피조물 중에 그 자체가 악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 4:4-5는 이렇게 가르쳐줍니다.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그러나 한 가지 유의해야 할 게 있습니다. 그것은 선한 것도 오용하면 사람을 해치고 도덕적으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도 오용하지 않도록 절제해야 하고 이웃에게도 절제하도록 권해야 합니다. 종교의식적으로 사람을 정죄하며 못하게 하는 것은 남을 판단하고 거치는 것을 남 앞에 놓는 행동입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해가 되기 때문에 못하게 하는 것은 사람의 유익을 위하는 행동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일하셨던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이웃의 유익을 위해 일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의로운 행동이며 사람들 사이에 평화를 이루는 행동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의 행동을 그대로 허용하지 않고 그에게 절제를 강권해도 그의 유익을 위해서 하면 이것은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의 행동인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의 삶은 예수님처럼 이웃의 유익을 위해 일하는 삶이고 이렇게 살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칭찬을 받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종교의식과 형식을 가지고 서로 정죄하거나 비난하지 말고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기쁨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은 진리입니다. 교회가 이런 진리를 가르치면 교인들의 삶이 자유를 얻고 평강과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도 교회가 이런 진리를 바로 가르치면 교회를 칭찬하게 됩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의 존재나 예수님의 십자가 같은 교회의 참 진리 자체를 배격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참 진리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교회의 외적인 모습을 보고 교회를 평가합니다. 교회가 종교의식에만 열중하고 자기 의를 세우기에만 열중하고 자기 업적을 높이기에만 열중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교회를 비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교회가 서로 경쟁하고 분쟁을 일으키기 때문에 비난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서로 판단하지 않고 서로 받아주는 진리의 모습을 보여주고 또한 교회가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사랑을 베푸는 모습을 보여주면 이런 비난은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고 반대로 칭찬이 많아질 것입니다. 

 우리의 목적은 사람을 기쁘게 하고 사람의 칭찬을 받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의 칭찬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 뜻을 따르다가 사람들로부터 박해를 받아도 기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교회의 본질적인 신앙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는 게 아니라 다툼이나 사랑 부족이나 아집으로 미움을 받는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사실 하나님의 뜻은 이웃을 사랑하며 예수님처럼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며 예수님처럼 살면 대체로 사람들로부터도 사랑과 칭찬을 받습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닮아 진리도 아닌 것을 고집하며 다투는 게 아니라 참 진리 안에서 사랑으로 이웃을 받아주고 이웃의 유익을 구해주며 의와 평강과 희락의 삶을 사는 가운데 천국의 축복도 누리고 하나님과 사람으로부터 칭찬도 받는 복된 삶을 살 수 있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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