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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 충성, 열매 (마 25: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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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충성, 열매 (마 25:14~30)
 
 
1. 충성 

여러분, “충성”이라는 말을 들으시면 어떤 생각이 나십니까? 저의 경우, 군대 경례 용어가 먼저 떠오릅니다. 3사관학교에서 훈련 받을 때, 광주 상무대에서 훈련 받을 때, 그리고 자대로 갔을 때, 모두 경례 구호가 “충성”이었기 때문에, 군 생활 41개월 동안 “충성”만 외치다가 제대했습니다. 그래서 제게 “충성”은 군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충성”하면, 나라를 위하여 자신을 바친 안중근 의사와 같은 救國烈士들을 떠올리실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분들은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지요. 

옛날 어떤 마부가 주인 가족이 탄 마차를 몰고서 날이 저물어가는 시간에 깊은 숲속 길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고 있는데, 갑자기 말들이 날뛰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일인가?’ 하고 살펴보니, 마차의 뒤편에서 수많은 이리떼들이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점점 어두워져 가는 시간에 깊은 숲속에서 이리떼를 만난 것이 얼마나 위험한 지를 잘 아는 마부는 더 빨리 달리고자 네 마리의 말들을 채찍질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리처럼 빨리 달릴 수는 없었지요. 

어느새 이리떼들은 마차에 바짝 붙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마부가 총으로 맨 앞에 달려오는 놈들을 쏘아 죽였지만, 이리떼들을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마차에 달라붙었습니다. 그때 마부는 꾀를 내어 말 한 마리를 떼어 놓았습니다. 그러자 이리떼들은 번개같이 달려들어 그 말을 잡아먹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뿐이었습니다. 말 한 마리로 만족하지 못한 이리떼들은 다시 마차를 추격하여 달렸고, 금방 따라 잡았습니다. 그래서 마부는 다시 말 한 마리를 떼어 내었습니다. 

그러자 이리떼들은 그 말 역시 후딱 잡아먹고는 다시 마차를 추격했습니다. 그런 중에 저 멀리 마을의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으나, 마을에 도착하기 전에 이리떼에게 변을 당할 것임을 마부는 알았습니다. 더 이상의 말을 떼어 낼 수도 없는 처지, 그래서 마부는 주인에게 말했습니다. “이 말을 빨리 몰아 마을로 들어가십시오. 저는 남아서 놈들과 싸우겠습니다.” 마부는 마차에서 뛰어 내린 후, 총탄이 다 떨어 질 때까지 이리 떼와 싸우다가 결국 자신도 희생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주인 가족은 무사히 마을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자신에게 맡겨진 일과 사명에 생명을 바쳐 최선을 다하는 것, 바로 이것이 충성입니다. 오늘 본문도 이와 같은 충성에 관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2. 종, 주님을 사모하고 천국을 기다리는 자 

오늘 본문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달란트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에 관해서 비유를 드신 것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것이며, 당신의 뜻과 계획을 성취해 가시는 현장을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천국은 바로 지금 여기입니다만, 그 완성은 장차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입니다. 

이러한 천국의 특성을 가르치기 위하여 예수님은 비유를 많이 사용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비유의 대부분은 예수님께서 예기치 않은 시간에 다시 오실 것이라는 점, 그렇기 때문에 항상 깨어 있고 늘 준비하는 자세로 살아야 한다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청지기의 비유, 열 처녀의 비유 등이 그 예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인 이 <달란트 비유>는 기다리는 것보다 기다리는 동안 성도들이 성실히 살아야 한다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천국은 한 사람이 타국으로 떠나면서 그 종들에게 자기 재산을 맡긴 것과 같습니다. 주인은 특별한 일로 일정한 기간 동안 집을 떠나 다른 나라로 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떠나기 전에 종들을 불러서 자신의 여행 계획을 밝히고, 재산을 정리해서 종들에게 나누어 맡겼습니다. 주인의 재산은 모두 “금 여덟 달란트” 정도였습니다. 물론 그 이상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오늘 본문대로만 보자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 금액을 주인은 종들의 능력에 맞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종들이 받은 달란트는 어느 정도의 금액이었을 것 같습니까? 

➊ 달란트는 당시 이스라엘 기준으로 약 33kg 정도 되었습니다. 이러한 한 달란트의 가치는 상당히 큰 액수였습니다. 당시, 금 1 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이었는데, 하루 품삯이 1 데나리온이었기 때문에, 6천 데나리온은 6천일의 품삯이었습니다. 이것을 요즘 시세로 계산하면, 일반 직장인의 20년 치 연봉에 해당하는 액수인데, 최소 연봉 2천만 원으로 할 때 곱하기 20년을 하면, 최소 4 억 원 정도 되는 엄청난 액수였습니다. 

➋ 그런데 이것이 잘못된 계산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6천 데나리온이 1달란트라고 할 때 그 달란트 “은”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금 1달란트는 은 1 달란트의 15배에 해당하기 때문에 본문에 나오는 금 1 달란트는 ‘4억 곱하기 15’를 해야 맞다는 주장입니다. 

➌ 이런 연봉 계산식과는 달리 금 1 달란트를 순금의 현 시가로 따져보았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약 33kg인 금 1 달란트의 가치는 현재 순금 시세가 그램당 약 4만원이기 때문에, 금 1 달란트 즉 순금 33kg의 가격은 약 13억2천만 원이라는 엄청난 금액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금 1 달란트는 생각보다는 정말 큰 액수이지요?

주인은 이렇게 거액의 돈을 종들에게 맡겼습니다. 첫 번째 종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두 번째 종에게는 두 달란트를, 세 번째 종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었습니다. 주인은 자신이 떠나 있는 동안 종들이 그것을 잘 관리하고 불려서 자신이 돌아올 때 돌려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타국으로 갔던 주인이 돌아왔습니다. 돌아온 주인은 종들에게 맡긴 돈을 결산하기 위해서 종들을 불렀습니다. 그러자 각 종들은 주인에게 받은 돈과 그 결과에 대해서 보고했습니다. 첫 번째 종은 자신이 받은 다섯 달란트 외에, 장사를 해서 번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왔습니다. 그는 주인에게 모두 열 달란트를 돌려주었습니다. 

두 번째 종 역시 자신이 받은 것의 배를 남겨 주인 앞에 내놨습니다. 이렇게 두 사람은 자신들을 믿어준 주인에게 두 배의 열매로 보답했습니다. 그때, 주인은 충성되고 신실한 종들을 아낌없이 칭찬하면서 적절한 상급을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주인은 두 종들에게 “잘했다”고 칭찬했으며, 그리고 그들을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 종들에게 “많은 것을 맡길 것”을 약속했고, 마지막으로 종들을 만찬에 초대하여 “주인의 기쁨에 참여할 수 있게” 했습니다.

세 번째 종이 주인과 결산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 종은 자신이 받은 한 달란트 그대로를 주인에게 내놓았습니다. 자신은 다른 종들처럼 장사를 하지 않고 주인에게 받은 돈을 그대로 땅에 묻어두었다가 가져왔노라고 했습니다. 그는 다른 종들처럼 주인의 관대함을 찬양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주인을 완고한 사람이라 했습니다. 심지어 주인은 돈에 눈이 멀어 씨를 뿌리거나 심지 않고 거두는 자, 즉 불로소득을 원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즉 주인이 자신들에게 달란트를 맡긴 것은 자신들을 이용하여 돈을 벌려는 것이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반감을 가진 그는 열심히 일할 생각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세 번째 종의 말을 들은 주인은 대단히 화를 내었습니다. 주인은 그 종을 가리켜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면서 그 종에게 말했습니다. “정말로 내가 불로소득을 원하는 자라고 여겼다면, 그 원금을 은행에 맡겨서 이자라도 받게 했어야 하지 않는가?” 주인이 돈에 눈이 먼 사람이라고 여겼다면 최소한 은행에라도 맡겨 이자 수익이라도 올리게 해주어야 하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종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보면, 그는 자신의 소심함과 나태함을 핑계하기 위하여 주인을 들먹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인은 그 종을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 불렀습니다. 그의 태만과 불충을 책망했으며, 그가 가지고 있던 한 달란트를 빼앗아 다른 사람에게 주었습니다. 즉, 주인은 열심히 일해서 많은 것을 남긴 자는 더 많은 것을 받아 풍족하게 해주었고, 게으르고 나태하여 이익을 남기지 못한 종은 가졌던 것까지 빼앗아 버렸습니다. 그 후 주인은 자신에게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하는 그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아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슬피 울면서 자신의 미련함을 후회하게 만들었습니다. 

여기서 질문이 하나 생깁니다. 왜 누구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누구에게는 두 달란트를, 그리고 누구에게는 겨우 한 달란트만을 주었느냐는 것입니다. 주님은 스스로 공평하신 분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공평입니까? 어째서 모든 사람들에게 똑 같은 달란트를 주지 않으시고, 누군 더 주고 누군 덜 주시는 것일까요? 그리고 또, 오늘 본문에서 주인이 종들에게 각각 그 재능대로 나누어 주었다고 말하는데요. 

“재능대로” 주었다는 말의 뜻은 각자 그가 지닌 역량만큼 주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도 차별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누구는 더 큰 능력을 주었고, 그래서 거기에 걸맞게 더 많은 달란트를 준 것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재능에 따라 차이 나게 맡겼다고 해도, 그 재능 자체를 차이 나게 주신 분이 바로 주님이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결국 주님은 차별하는 분이라는 말이지요. 여러분, 맞는 말입니까? 틀린 말입니까? 당연히 틀린 말이지요. 사람마다 개성이 있고, 각자에게 주어진 재능 역시 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에게 음악적인 재능을, 어떤 사람에게는 미술적인 재능을, 어떤 사람에게는 돈을 잘 버는 재능을, 어떤 사람에게는 봉사를 잘 하는 재능을 각각 다르게 주셨습니다. 각자가 다를 뿐이지 많고 적음의 차이나, 크고 작음의 차이, 잘 나고 못 나고의 차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각자에게 가장 적합한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종종 우리는 자신의 용량보다 더 크고 많은 것을 요구합니다만, 하나님은 우리 각자의 용량을 너무나 잘 아시고 그에 맞게 주셨음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자신이 1톤짜리 트럭인데, 분수도 모르고 5톤의 짐을 실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트럭은 출발은 고사하고 견디지 못하여 주저앉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자신의 분량만큼 주님으로부터 받았다고 여기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절대로 누가 더 크고 누가 더 작고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달란트 비유는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고 기다리는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비유에 나오는 종들은 주인이 없는 동안 주인을 위해서 최선을 다 했습니다. 이러한 종들의 모습은 종말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받은 은사를 가지고 충성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즉 장차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그리고 여러분이 주님 앞에 섰을 때, 여러분들은 받은 은사와 재능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결산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주님은 신실하고 충성된 종들은 칭찬하면서 더 많은 것을 맡겨 주실 것이며, 주님과 함께 영원한 즐거움을 누리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지 못하고 게으르게 살던 사람들은 책망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어두운 곳으로 내던져 질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그곳에서 슬피 울면서 자신들의 어리석은 행동을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종말을 살아가는 모든 성도에게 주님은 재능을 주셨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는 천국을 위하여 일하도록 주님께로부터 무엇이든 한 가지 이상은 다 받은 분들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가지고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충성스럽게 일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가진 것으로, 여러분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충성을 다하여, 마지막 때에 주님께 칭찬 들으시고, 더 많은 것을 받으며, 주님과 함께 영원한 천국 잔치에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3. “악하고 게으른 종”

이상이 달란트 비유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 가운데서 한 달란트를 받은 후 주님으로부터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을 들은 사람으로부터 여러분이 반드시 배워야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대로 한다면, 악한 것은 착한 것의 반대이고, 게으른 것은 충성된 것의 반대입니다. 주님을 향하여, 그리고 자신의 삶과 사명을 향하여 충성하는 사람은 착한 사람이요, 주님과 자기 인생과 사명에 대해 게으른 사람은 악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 번째 종, 즉 주인으로부터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처음부터 악하고 게으른 종이었을까요? 그것은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악하고 게으른 종이었다면 주인이 달란트를 맡기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원래 괜찮은 이 사람이 어쩌다가 이렇게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되었을까요? 처음에는 주인이 믿고 신뢰했던 사람이었는데, 어쩌다가 결과가 이렇게 되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답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1) 첫째는 이 사람이 주인을 잘 몰랐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그는 자기 주인을 향해 뭐라고 말합니까? 24, 25절,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➊ 이 종은 주인을 “굳은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자기가 아는 주인은 아주 엄격한 사람, 거칠고 잔인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➋ 그리고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는 주인을 불로소득을 취하려는 사람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아는 주인은 투자도 하지 않고, 또 아무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남의 것을 강탈해서라도 제 이익을 채우는 사람이라는 평가입니다. 

➌ 그렇기 때문에 “나는 당신이 두렵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➍ 이러한 악평이 자신이 다른 종들에 비해 비교적 적은 “한 달란트”를 받았기 때문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➎ 그러나 오늘 본문의 정황 상 분명한 것은 그는 주인을 비난함으로서 자신의 불충을 합리화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은 사람과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의 결산에서 드러나는 차이는 주인에 대한 이해와 지식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두 사람은 달란트를 받자마자 곧바로 가서 열심히 장사하여 두 배를 남겼고, 주인이 돌아오자 즐겁게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들이 수고한 것을 내 놓았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행동은 주인에 대한 지식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우리 주인이 나를 이렇게 믿어주니 얼마나 감사한가! 나 같은 것에게 다섯 달란트라는 거액을 맡겨주다니 …! 이런 주인을 세상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이런 사람을 주인으로 둔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믿고 맡겨주니 나도 그 믿음에 보답하자.’ 반면에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의 주인에 대한 지식과 태도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그는 주인을 “굳은 사람”으로 알았습니다. 주인을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사람으로 알았습니다. 바로 이 지식 때문에 자신은 주인이 두렵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불충하는 삶을 살게 했고, 그것 때문에 그는 모든 잃고 내어 쫓기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주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있습니까? 세상 지식도 때로는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며, 좋은 정보와 지식은 사람을 부자로 만들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말이죠!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지식은 얼마나 놀랍고 크고 많은 것을 여러분에게 안겨 줄 지 모릅니다. 바른 주인 지식, 즉 바른 하나님 자식 안에 거하여 그로 말미암아 상 받고 복 받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 두 번째로 이 종에게는 자신이 받은 것에 대한 감사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이 종이 자기보다 더 많이 받은 동료들을 보면서, 상대적으로 자신이 적게 받았다고 여겼습니다만, 사실 그는 적게 받은 것이 아니잖아요? 13억! 직장인의 20년 치 年俸, 아니 平生 輸入, 그 이상이 될 수 있는 돈입니다. 사실 말이지, 아예 ‘너희들에게 다 주마’하지 않으시고, ‘이것을 잘 관리하고 불려서 나중에 돌려다오’라고 하셨기 때문에, 저 같으면 적게 받는 것을 택하겠습니다. 왜요? 많으면 부담스럽습니다. 그것도 주인의 재산인데, 그것 관리하기가 쉽지 않은데 가능하면 적게 받아서 관리하는 것이 낫지 않습니까? 

여러분, 높은 자리, 많은 돈 등을 너무 그렇게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자신이 받은 것만큼 장차 주님 앞에서 결산할 날이 올 텐데, 많이 받은 사람들은 결산할 시간이 얼마나 많이 걸리겠습니까? 13억짜리 장부가 간단하겠습니까? 26억짜리, 혹은 65억짜리 장부가 간단하겠습니까? 여러분, 적게 받아, 많이 받은 사람보다 조금 편하게 살다가 주님 앞에서 간단하게 “통과”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고, 내가 그 정도 분량밖에 안 되니까 그만큼 주셨을 것 아닙니까? 결국 나중에 가면 다 똑 같다니까요! 적게 받은 사람이든 많이 받은 사람이든 모두 다 주님 앞에 내려놓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에게 가장 적합하게, 자신의 분량만큼, 자신의 능력만큼 주셨다고 믿고 감사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제발, 여러분! 한 달란트 받은 종처럼 자신이 어떤지, 즉 자신의 분량이나 몫을 생각하지 못할 뿐 아니라, 주인이 준 그 거금에 대한 감사가 없는 그런 삶은 절대로 피하시기 바랍니다. 

결론적으로 이 악하고 게으른 종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는 주인을 잘 몰랐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잘 몰랐습니다. 그래서 주인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지 못했고, 불평과 불만으로 자신의 시간을 허비했을 뿐입니다. 그가 주인을 사랑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가 자신이 받은 것에 감사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는 받은 달란트에 충성했을 것이고, 열매를 거두었을 것이며, 그의 복은 그 다음으로 이어졌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주님을 잘 알고 계십니까? 여러분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은 여러분에게 가장 적당한 것임을 인정하십니까? 그래서 여러분에게 달란트를 맡겨주신 것에 감사하면서 충성을 다 하고 있는지요? 그렇게 살 때, 여러분의 인생은 열매 맺는 인생이 될 것이고, 주님의 복이 지금부터 영영토록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4. 믿고 맡겨 주셔서 감사, 그래서 지사충성(至死忠誠)

말씀을 맺겠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성공과 실패의 기준이 무엇이냐에 따라 달라질 수는 있습니다만, 그런 세속적인 성공과 실패가 인생의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최선을 다하면서 그리고 성실하게 적극적으로 살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주님께서 장차 여러분을 결산하실 때의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살이, 신앙생활, 그리고 교회 생활에서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고, 뜻과 목숨과 정성을 다하여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만약 소극적으로, 불성실하게, 불만을 쏟아내면서 살아가는 인생이 있다면, 그는 자신이 가진 것을 다 빼앗길 것이고, 사랑과 축복의 울타리 밖으로 쫓겨나서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면서 자신의 삶을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어둠 속에서 이를 갈며 슬피 우는 인생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인생이 아닙니다. 

주님은 복 주시고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기쁨과 감사함으로 살아가도록 각자의 믿음의 분량에 맞춰서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할 일은 그 달란트를 가지고 충성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이 사회에서 …. 

그것을 위하여 여러분이 기억할 첫 번째는 주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신다는 것, 그리고 여러분도 주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맡겨주신 달란트에 대해 지사충성, 즉 죽도록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그렇게 충성하여 열매맺는 인생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그리하여 장차 주님으로부터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는 칭찬과 그에 따른 복을 누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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