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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 분 (마 8: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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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 분  (마 8:23~27)   
  

산상보훈을 마치시고 내려오신 예수님의 행적을 마태복음 8장에서 차례로 정리해보면, 1)나환자를 깨끗케 하시고 2)가버나움에 들어가시어 한 백부장의 중풍 병이 든 하인을 고쳐주시고 3)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시어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시고 4)소문이 많이 퍼져서 저물 때에 많은 귀신들린 자와 병든 자들이 몰려들자 역시 그들의 모든 병을 고쳐주셨고 5)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고 한적한 곳으로 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때에 한 서기관이 예수님께 나아와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서기관에게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따를 때의 고난과 치러야 할 대가는 생각하지 않고, 실리와 영예를 얻기 위해서만 따르고자 하는 서기관의 마음에 숨은 동기를 간파하신 주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러자 또 다른 제자 중의 하나가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 하옵소서” 라고 요청했습니다. 주님은 그 제자에게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따르는데 매우 우유부단한 그 제자의 중심을 아신 주님께서, 기회를 잃어버리지 말고, 결단할 것을 촉구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이 모든 사건과 일들이 모두 하루 동안에 일어났는지 단언할 수는 없지만, 하여튼 예수님의 하루하루는 무척 분주하시고 고달픈 나날들이었던 것만은 틀림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 없이 몰려오는 군중들과, 주님을 따르려는 그들의 동기와 목적이 대부분 육적이고 세상적인 것임을 아시고, 무리를 피하여 배를 타시고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게 되었습니다. 배에 오르실 때 제자들이 따랐다고 했습니다. 그 제자들은 서기관과 같은 제자도 아니고, 부친을 장사하고 따르겠다는 제자도 아니고,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던 열 두 제자였습니다. 

예수님과 열두 제자 일행이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게 되었는데, 그 때에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풍랑은 갈릴리 바다에서 흔히 있는 일이었습니다. 갈릴리 바다는 사실 바다가 아니고 호수입니다. 그러나 길이가 21 km, 넓이가 13 km가 되는 상당히 커다란 호수입니다. (사진-갈릴리 바다) 이 갈릴리 바다는 해면보다 200m나 낮다고 합니다. 

그 때문에 사방은 높은 산으로 에워싸여 있고, 바람은 갈릴리 바다에서 압축된 것처럼 되어서 맹렬한 세력으로 갑자기 호수에 불어 닥치므로, 고요하던 수면에는 순식간에 노한 풍랑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그래서 갈릴리 바다의 폭풍은 돌연히 들이닥치고, 맹렬한 것이 특징이라고 합니다. 갑자기 일기 시작한 돌풍은 갈릴리 바다를 들끓게 했고, 노도풍랑은 사정없이 주님의 일행이 탄 배를 금방이라도 뒤엎어버릴 것만 같은, 수장 직전의 위기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위태로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태연자약하게 주무셨다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을 향하여 침이 마르고 혀가 닳도록 천국복음을 전파하시고, 수많은 병자를 고쳐주시느라고 힘들고 고달픈 몸을 잠시 쉴 사이도 없이 동분분주하시다가, 배를 타시게 되자 주님도 인성을 가지신 분이신지라 피곤을 이기지 못하여, 그 불편한 자리이건만 단잠을 주무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주님의 모습에서 몇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으니 1)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똑같은 인성을 가지셨다는 사실과 2)인간의 연약함을 얼마나 불쌍히 여기셨는가를 알 수 있고, 3)인간을 위한 주님의 헌신적인 사역이 얼마나 고달프고 피곤한 것이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주님 안에 있은 놀라운 내적 평안을 엿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떠한 양심의 가책이나 죄책감이 없는 무죄 성결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 무서운 풍랑 속에서도 그토록 평안한 단잠을 주무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는 수십 년간 바다에서 생활한 베테랑급 어부들도 여러 명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처음에 자기들의 힘과 재주로 풍랑과 싸워보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상황이 되자, 곤히 주무시는 주님을 깨우며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라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그 요란스러운 행동이 눈에 선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이 얼마나 믿음 없는 행동입니까? 그들은 난치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온갖 이적을 행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목격한 자들입니다. 

말씀 한 마디로 죽어가는 백부장의 하인을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일으키신 주님을 목격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주님 앞에서 ‘죽게 되었다’는 말이 도대체 합당한 말입니까? 생명의 근원되시는 분을 바로 자신들 옆에 두고 죽음을 말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도 합당치 못한 불신앙의 행동인 것입니다. 더구나 죽음의 공포에 새파랗게 질려 요동하는 모습은 불신앙 그 자체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들 중에도 그 제자들처럼 생명의 주님을 모시고 살면서도, 걸핏하면 ‘죽겠다’는 세속적인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은 없습니까? 가정과 사업에 조그만 문제만 발생해도, 요동하는 모습을 불신자들에게 보인 적은 없습니까? 그리고 이와 같은 언행들로 인해 전도의 문이 막힌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어느 누가 조그만 일에도 요동하며, 죽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섬기는 신을 믿고 싶겠습니까? 그들이 볼 때에는 ‘예수 믿어도 별수 없구먼’이라든지, ‘예수님은 조그만 문제도 해결해 주지 못하는 신화 속의 인물’이라고 여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이제부터 우리 한국 사람의 큰 폐단인 ‘죽겠다’는 말은 아예 입 밖에도 내지 마십시오. 나폴레옹은 ‘내 사전에는 불가능이란 없다’고 큰소리쳤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 삶에는 죽음과 절망이라는 개념이 없다’는 것을 믿고 간증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어떤 시험이나 문제를 만나면 ‘죽겠다’라는 말 대신 ‘주께 있다’라는 고백을 하십시오. 우리 인생의 모든 해결책이 ‘주께 있음’을 믿고, 환난과 시련 중에도 의연한 자세를 지니시기 바랍니다. 그런 자세가 다른 성도에게도 힘이 되고, 불신자들에게는 무언의 전도가 될 것입니다.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라고 아우성치는 제자들을 향하여, 주님께서는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면서 책망하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벵겔은 “무서워하는 것과 믿음이 작은 것은 동의어이다.”고 했습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무서워하는 것, 의심하는 것, 염려하는 것, 이 모든 것은 믿음이 작은 것과 동의어인 것입니다. 제자들은 바로 얼마 전에 나병 환자와, 백부장의 하인,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 많은 귀신들린 자와, 각색 병든 자를 고치신 이적을 목격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실상 본 것만으로 믿는 신앙은 좋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런 믿음은 그 사건을 목도하는 현장에서는 신기함과 놀라움으로 큰 믿음에 들어가는 것 같지만, 실상은 어려운 문제에 부딪히면 전혀 쓸모없는 믿음이 되고 맙니다. 진정한 믿음은 말씀 안에서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과, 우리 안에 성령께서 내주하심으로 주님과 견고한 관계를 갖는 것입니다. 

제자들을 책망하신 주님께서는 다음 조치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셨다고 했습니다. 바람과 바다를 보고 꾸짖을 수 있는 사람은 반드시 둘 중의 한 사람일 것입니다. 1)미친 사람이거나 정신병자일 것입니다. 정신이 온전한 사람이라면, 비록 절대 권력의 독재자라도 바람과 바다를 꾸짖는 무모한 일은 결코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미친 사람이나 정신병자가 아무리 바람과 바다를 꾸짖을지라도, 바람과 바다는 요지부동 끄떡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2)실제로 바람과 바다를 꾸짖을 수 있는 권세가 있는 분일 것입니다. 미치광이나 정신병자가 천만 번 꾸짖는다고 해서 폭풍과 풍랑이 끄떡할 리 만무하지만, 그러나 주님께서 꾸짖으실 때 광풍노도는 순식간에 그치고, 바다는 아주 잔잔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큰 지진이 일어난 것 같은 바다가, 순식간에 유리알 같이 맑은 바다, 파문 하나 없는 잔잔한 호수가 된 것입니다. 제자들은 바람과 바다가 즉시 예수님께 순종하는 것을 보고 너무 신기하고 놀라워서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면서 경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배우게 됩니다. 

1. 세상은 갈릴리 바다와 같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성지 방문객들은 입을 모아 갈릴리 바다의 변덕스러운 환경을 체험했던 놀라운 경험을 증언합니다. 맑은 하늘에 갑자기 돌풍이 몰아쳐 텐트가 날아가는 일을 당한 사람도 있고, 호수에서 200m 떨어진 곳까지 물보라가 몰아쳐서 긴급 대피한 경험을 했던 성도들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갈릴리 호수를 사람들은 바다로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도 마치 갈릴리 바다와 같아서, 작은 파도, 큰 파도가 쉴 사이 없이 일어납니다. 파도 없는 바다가 없고, 바람이 불지 않는 무풍지대가 없는 것 같이, 근심걱정 번뇌와 고통 없는 사람이 없고, 시험과 환난이 없는 가정과 사회가 없다는 것입니다. 고요한 갈릴리 호수에 순식간에 돌풍이 들이닥치는 것처럼, 설령 오늘 순탄한 가정이라도 내일 어떠한 풍랑이 밀어닥칠지 전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고난이라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필연성을 가지고 우리를 찾아오는 불청객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계신 배에도 풍랑이 일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예수님이 계신 배에도 물이 가득 찼다면, 우리 인생에도 고난과 시련의 물결이 밀려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 줍니까? 이 사건은 예수님의 제자라고 해서, 이 세상의 고난과 시련에서 결코 제외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아니 제자의 길은 반드시 인생의 거센 풍랑과 위협적인 파도를 견뎌내야만 하는 것입니다. 제자의 삶은 고난이 불가피한 것입니다. 

2. 풍랑은 오직 주님께서만 잔잔케 해주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은 바로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자들입니다. 그러한 제자들이었지만, 키를 잡아보고, 돛을 올려도 보고, 내려도 보고, 온갖 노력을 다 기울여 보았으나 헛수고였을 뿐입니다. 인간 중 어느 누가 악천후를 바꿀 수 있겠습니까? 돈으로, 지식으로, 절대 권력으로, 도저히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큰 지진과도 같은 생의 풍랑이, 우리의 인생항해 중에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때에 우리는 과연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할 것입니까? 

한숨만 쉬고 있어야 하겠습니까? 무서워 떨고 어잠어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우리가 죽겠나이다.”고 했던 제자들처럼, “나는 이제 끝장이야, 나는 이제 죽어야 해” 하면서 절망에 빠져야 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사건은 풍랑이 일어날 때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가르쳐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단 한 번의 명령으로 바람과 바다는 순종하였습니다. 두려움과 무서움으로 겁에 질려 있는 제자들은, 이런 예수님의 이적을 보고 기이하게 여겼습니다. 고기잡이를 하면서 심한 폭풍을 여러 번 겪었지만, 사람의 명령으로 풍랑이 잔잔해지는 것은 처음 보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단순한 사람에 불과하다면, 이 기적은 절대로 설명되어질 수가 없습니다. 큰 풍랑 끝에 고요가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의 한 번의 명령이 성난 자연을 평정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은 풍랑도 잔잔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가정의 풍랑, 사회의 풍랑도 예수님께서 명하시면 순식간에 잔잔해집니다. 이러한 주님을 믿고, 풍랑이 일어날 때 믿음으로 답하면 풍랑이 도망가고, 기도로 소리치면 생의 파도가 잔잔해질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과연 믿음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주님께서는 바람과 바다를 꾸짖기 전에, 주님과 함께 하는 항해 중에서도 무서워하면서 죽겠나이다고 한 믿음이 작은 제자들을 먼저 꾸짖으셨습니다. 주님께 중요한 문제는, 제자들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불신과 두려움의 풍랑이 있으므로, 바다를 꾸짖기 전에 먼저 제자들을 꾸짖으시고, 그들 마음에 일어난 풍랑부터 잔잔케 하셨던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더 깊이 탐사해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주님의 전지성 곧 서기관의 마음의 숨은 동기를 간파하시고, 한 제자의 의중을 꿰뚫어 보시는 주님의 전지성을 살펴보았는데, 그렇다면 이렇게 전지한 주님께서 풍랑이 일어날 것을 모르셨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폭풍을 얼마든지 미리 막을 수도 있었을 것이며, 순탄한 항해를 명령하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랑이 있을 것을 아시면서도, 제자들을 데리고 배를 타셨다면, 거기에는 분명히 주님의 어떤 목적과 의도가 있으셨다는 것입니다. 

시 89:8-9에 “주께서 바다의 흉용함을 다스리시며, 그 파도가 일어날 때에 평정케 하시나이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바다를 잔잔케 하는 일이 곧 창조주 하나님의 하시는 일임을 가르쳐 줍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나, 기적을 행하는 하나님의 사자나, 잘 가르치는 랍비 정도로만 알아서는 안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주 예수님이 만물의 창조주이심을 알아야 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 한 마디에 풍랑이 멎는 것을 보고서 “이 어떠한 분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바람과 바다를 마음대로 명령하고 다스리실 수 있는 분, 바람과 바다가 순종하는 분, 그 분은 바로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이셨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것을 가르쳐 주시려고 바람과 풍랑을 잔잔케 한 기적을 행하셨던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인생은 항해와 같습니다. 평안하고 좋은 날도, 맑고 깨끗한 날도, 축복의 날도 있지만, 때로는 큰 환난과 풍랑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큰 태풍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또한 인생의 풍랑과 파도는 특별한 사람만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지구라는, 이 세상이라는 배에 올라탄 사람은, 어느 누구라고만 할 것 없이 모두 풍랑을 만나게 됩니다. 이 풍랑 앞에서는 특별한 사람이 없습니다. 잘난 사람도 없고, 대단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장비도 없습니다. ‘키미테’도 소용이 없습니다. 인생의 커다란 풍랑 앞에서 우리 인간이 가진 능력은 너무도 연약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그 어떠한 인생의 풍랑 중에서도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마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능히 여러분 마음속에 일어나는 풍랑과, 삶의 모든 풍랑을 잔잔케 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신 것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풍랑 만난 인생들을 부르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에 어떠한 풍랑이 몰려와도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이 타고 계시는 배도 풍랑을 만났으나 넉넉히 물리쳤습니다. ♬곤한 내 영혼 편히 쉴 곳과/풍랑 일어도 안전한 포구/폭풍까지도 다스리시는/주의 영원한 팔 의지해♬ 주님은 우리를 풍랑 중에서도 함께 하시고, 지켜주실 줄로 믿습니다. ♬큰 물결이 설레는 어둔 바다/저 등대의 불빛도 희미한데/이 풍랑에 배 저어 항해하는/이 작은 배 사공은 주님이라/나 두렴 없네. 두렴 없도다./주 예수님 늘 깨어 계시도다./이 흉흉한 바다를 다 지나면/저 소망의 나라에 이르리라.♬ 바람과 파도를 말씀 한 마디로 잔잔케 하신 주님께서, 여러분의 인생 항해 중에 만난 풍랑을 잔잔케 해주시고, 마침내 우리 모두의 소원의 항구인 저 소망의 나라에 이르게 해주시기를, 우리의 창조주시요 구원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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