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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직 성경 Sola Scriptura (딤후 3: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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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성경 Sola Scriptura (딤후 3:16~17) 

  
종교 개혁은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비텐베르그 대학교의 캐슬교회(Castle Church) 문에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붙인 사건에서 발단 되었습니다. 개신교는 그 날을 기념일로 삼았습니다. 기념되는 개혁자들의 사상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으로 요약됩니다. 우리 교회는 종교개혁 기념주일을 별도로 지키지는 않지만 ‘다섯 개 오직’(Five Solas)의 의미를 한번쯤 돌아보는 것이 유익하리라 생각합니다. 오늘은 ‘오직 성경’과 관련하여 성경의 속성들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2005년에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춘계 정기총회에서 한국 천주교회 공용으로 승인한 성경책이 있습니다. 목록을 보면 개신교 성경에는 없는 7권의 히브리 문인들의 작품이 있습니다. 그리고 목록에는 없지만 에스더서의 끝부분에 ‘에스더 첨가서’를, 그리고 다니엘 3장 23절과 24절 사이에 ‘아사랴 기도서’(3:24-90)와 12장 끝에 ‘수산나’와 14장에 ‘벨과 용’이라는 문학작품들을 포함시켰습니다. 이 11권의 문학작품을 외경이라 부릅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은 외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용한 적이 없었습니다. 개혁자들이 ‘오직 성경’이라 했을 때는 이 11권의 외경은 제외됩니다.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영감된 66권(구약 39권과 신약 27권)을 의미합니다.

‘오직 성경’을 말하려면 66권의 기록된 성경 외에 더 이상의 계시가 없음도 말해야 합니다. 성경은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히 1:1-2a)라고 증언합니다. 예수님은 계시의 정점이시며 계시의 완성자이십니다. 그분께서 친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요 15:15)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유 1:3)라는 표현도 더 이상 덧붙일 것이 없음을 가르쳐줍니다. 꿈이나 환상 등으로 계시되던 과거의 방식은 이제 종결되었습니다. 더 이상 성경의 권위를 가진 계시란 없습니다.

‘오직 성경’의 첫 번째 의미는 ‘절대적 필요성’입니다. 로마 가톨릭은 교회가 정경을 판단하고 결정하기 때문에 교회는 정경의 모체라고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교회 회의와 그 회의의 수장인 교황의 권위로 성경에 진리를 추가하거나 뺄 수 있었지요. 반면 내면의 빛을 강조했던 신비주의자들은 객관적으로 제시된 성경보다 주관적으로 마음에 깨닫게 하시는 성령님의 빛을 참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았습니다. 로마 가톨릭이든 신비주의자든 그들에게는 성경이 언제나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개혁교회에서는 성경이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유일하고도 정확무오한 법칙이기 때문에 재림의 때까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여기고 있지요.

물론 성경만이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연과 역사, 인간의 양심과 본성 등을 통해서도 신적인 존재를 감지할 수 있습니다(시 19:1; 롬 2:12-15). 하지만 이런 ‘일반 계시’는 정죄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계시되었지만 진리 불의로 누르는 죄 때문에 하나님의 성품과 목적과 계획에 대해 충족하게 알려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경과 같은 ‘특별 계시’가 필요하지요. 성경은 하나님에 대한 모든 것을 계시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백성의 구원과 삶에 필요한 것을 충분히 그리고 오류 없이 말합니다. 만일 성경에서 벗어난 신적 존재를 신앙한다면 하나님이라 부를지라도 그것은 우상숭배입니다. 성경의 절대적 필요성이 여기에 있습니다.

‘오직 성경’의 두 번째 의미는 ‘최종 권위성’입니다. 로마 가톨릭의 주장처럼 교회가 성경에 권위를 부여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성경 자체에 신적 권위가 있음을 발견하고 인정했을 뿐입니다. 신학에서 주관적 체험을 판단의 최종 권위로 삼으면 신비주의로 흘러가고, 이성을 판단의 최종 시금석으로 여기면 자유주의로 흐릅니다. 신앙에서 체험과 이성은 매우 중요 하지만 신적 권위를 가질 만큼 무흠하지 않습니다. 신적 권위를 가진 것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성경뿐이지요(딤후 3:16a). 따라서 체험과 이성이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항상 성경의 최종 권위를 인정하고 성경의 지도를 받아야 합니다. 오류가 없으려면 철저히 성경 의존적이어야 하지요.

성경은 하나님께서 삼위일체로 존재하심을 증언합니다. 그분은 시간과 공간이 존재하지 않을 때에도 스스로 존재하신 분임을 알려줍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온전한 신성과 동시에 온전한 인성을 가지셨음을 가르쳐줍니다. 중생한 사람은 이러한 성경의 증언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신앙과 행위의 인식적 기초로 삼습니다. 하지만 성경의 최종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자연인으로서는 도무지 깨달을 수 없는 신비한 진리들이지요. 하지만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거나 체험으로 경험될 수 없으면 진리가 아니라는 주장 자체가 오류입니다. 이성과 체험 자체가 완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오직 성경만이 진리를 판단하는 최종 권위를 가졌음을 확고히 해야 할 것입니다.

‘오직 성경’의 세 번째 의미는 ‘명료성’입니다. 성경에는 알기 어려운 것도 더러 있습니다(벧후 3:16). 명료하다는 말은 쉽다는 뜻이 아니라 불명확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구원의 진리를 결코 애매모호하게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배움이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순종하려는 자세로 성경을 읽으면 구원의 진리를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을 만큼 명료합니다. 구원의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 신학자가 되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여 그 생각과 말과 행동에 있어서 부끄러움 없는 일군으로 하나님께 드려지기 위해서 학자의 자세를 가지고 성경을 부지런히 연구할 필요가 있는 것이지요.

신학에서 특별계시의 역사인 구약과 신약을 공부하는 것을 성경 신학이라 합니다. 과거의 교회가 어떻게 성경을 해석하고 적용했으며 그 결과 어떤 교회가 있어왔는지를 공부하는 것이 역사 신학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주제별로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 조직 신학입니다. 이렇게 배운 바를 현장에 적용하기 위해 준비시키고 적용된 것을 이론적으로 검토하는 것이 실천 신학입니다. 바르게 가르치는 좋은 신학이 있고 잘못 가르치는 나쁜 신학이 있을 따름이지 신학을 신앙과 분리시키거나 신학 자체를 부정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우리의 관심은 언제나 최선을 다해 바르게 배워서 최선을 다해 바르게 실천하는데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성경의 가장 좋은 해석자입니다. 명료하지 못한 본문을 만났을 때는 명료하게 표현된 다른 본문을 참고하여 해석하면 됩니다. 성경이 성경을 해석하게 하는 것이지요. 이런 점에서 ‘오직 성경’은 그 자체에 ‘전체 성경’(Tota Scriptura)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셈입니다.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를 인정하는 사람 중에는 안타깝게도 어느 한 구절만 보고 오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른 본문들에서는 같은 주제를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종합적으로 살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장님이 코끼리 만지듯 잘못 해석하지 않으려면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알아야 합니다. 이점에서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주제별로 정리해 놓은 교리 공부는 대단히 유익합니다.

‘오직 성경’의 네 번째 의미는 ‘충족성’입니다. 로마 가톨릭은 트렌트 종교회의 때 성경만으로는 우리의 신앙과 행위의 법칙으로 불충분하다고 강력하게 선포했습니다. 전통으로 성경을 보충하는 것이 필수적이라 보았지요. 반면 신비주의는 내면의 빛이 성경보다 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봅니다. 하지만 성경은 성경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딤후 3:17)한다고 했습니다. 또한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고 했습니다(고전 4:6). 예수님께서는 전통으로 성경을 범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것이라 하셨지요(마 15:3, 6). 성경은 결코 성경만으로 충분하지 못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장 6절에는 “하나님 자신의 영광과, 인간의 구원, 신앙과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에 관하여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는 모든 계획은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거나, 아니면 선하고 적절한 논리에 의하여 성경에서 연역될 수가 있다. 그러므로 이 성경에다 성령의 새로운 계시에 의해서든지 혹은 인간들의 전통에 의해서든지 아무 것도 어느 때를 막론하고 더 첨가할 수가 없다”고 고백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성경 외에서 신앙과 행위에 관한 전통을 세우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으로는 불충분하여서 심리학이나 경영학으로 보충해야 할 것처럼 생각하지요. ‘오직 성경’의 구호가 참으로 절실한 때입니다.

심리 상담학이나 경영학이 도무지 무익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직 성경만 읽으면 된다는 뜻도 아닙니다. 중생한 자도 심리적인 치료를 받아야만 성숙하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라는 뜻입니다. 경영학을 도입하지 않고서는 교회성장이 안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적어도 현대 사회에서는 그러한 것들이 필수라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지요. 성경을 보다 철저하게 공부하는 것보다 그러한 것들을 도입하는 것이 훨씬 효과가 있고 능력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성경의 충족성과 권위성을 부인하는 것과 같습니다. 실제로는 말씀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말로만 ‘오직 성경’을 말한다고 해서 개혁자들의 후손일 수는 없겠지요.

루터는 20세가 되기까지 성경을 한 번도 읽지 못했습니다. 당시 성경은 대단히 값비싼 것이어서 일반인들은 소장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그는 도서관에서 성경 한 권을 발견하고서 읽고,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의 스승이 깜짝 놀라기까지 계속 읽었습니다. 성경 연구를 통해 하나님과 복음에 대해 바르게 알게 되었지요. 이와 함께 로마 가톨릭의 가르침이 잘못되었음을 알고 복음을 변호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논쟁을 시작했었습니다. 성경의 중요성을 알았던 루터는 성경을 번역했는데 그가 번역한 신약 성경은 1522년부터 10년 동안 85판이 인쇄되었습니다. 루터와 종교 개혁자들의 오직 성경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배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오직 성경’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잘 생각해보는 한 주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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