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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롬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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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롬 11:36)


종교개혁이란 자기중심에서 벗어나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나의 이웃과의 관계를 어떻게 하면서 살아가느냐 하는 것에 관심을 둔 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대학의 젊은 교수였던 마틴루터(Matin Luther 1483-1546)는 비텐베르크 대학의 슬러쪄끼르 해문에 95개 조항을 내어걸고 당시의 부패한 로마가톨릭에 대항했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우리는 10월을 종교개혁의 달이라고 하게 되었고 금년에 492주년으로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종교개혁에 대해서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나름대로 많은 의견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뜻 깊은 달을 맞이하여 우리는 애써 새로운 시각으로 종교개혁운동을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종교개혁의 첫 번째 의의는 

Ⅰ. 영적 부흥운동(Spiritual revival movement)입니다. 

영적 부흥운동이라고 할 때 몇 가지 중요한 것을 함의합니다. 

1) 원시 기독교의 회복입니다. 
하나님의 법과 율법을 떠난 로마교회의 예전(Sacramental)과 교회가 스스로 만들어낸 율법주의(ecdesiastical legalism)와 같은 비 성경적인데서 벗어나 사도적 교회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종교개혁은 이탈이나 새로운 것의 창조라고 생각하면 크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오로지 사도적 신앙에로의 환원입니다. 
다시 말하면 초대교회 300년의 기나긴 박해 속에서 죽음으로서의 끈질기게 지켜온 사도들의 신앙고백을 찾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중심은 어거스틴 신학의 계승이며 바울신앙의 부흥입니다. 

2) 계시의존사색의 회복입니다. 
이것은 오랜 세월동안 제도화된 교회, 경직된 교회, 의식중심의 교회제도에서 벗어나자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영적영역을 극대화 시켜야 되겠다는 것이 그들의 중심이었습니다. 이 말은 저급한 신비주의를 말함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은 그 자체가 신비입니다. 당시의 개혁자들을 제외한 많은 사람들은 스콜라 철학에 매력을 느꼈습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은 영적인 것을 무시한 체 이성주의로 살아도 아무 탈이 없다고 하는 수렁에 깊이 빠져있었습니다. 고작 한다고 하는 것이 내용이 없는 형식주의로 영적인 만족을 과시하면서 자신은 속이는 유희를 하고 있었습니다. 
계시의존사색의 회복 없이는 영적인 부흥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착잡한 영적인 냉소에서 일어나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종교개혁의 두 번째 의의는 

Ⅱ. 바른 신학운동(The Theology movement)입니다. 

바른 신학운동이라고 할 때도 역시 몇 가지 중요한 것을 함의하고 있습니다. 

1) 성경의 재발견입니다 .
고린도전서 4장 6절에 『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 배워… 』라고 했습니다. 
성경의 권위를 최상에 두자는 것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원리를 재발견하는 것입니다. 로마교회는 교황의 포고문을 성경의 권위와 동일하게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개혁자들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부르짖었습니다. 오직 성경이라고 할 때 아래와 같은 몇 가지 요긴한 뜻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① 신구약 성경 66권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습니다(딤후 3:16 성경의 정경성과 그 범위). 

② 성경이 옛날 선지자와 사도들과 그 시대 사람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특히 후대 사람 곧 말세를 만난 우리에게 거울로 주신 줄 믿습니다(롬 15:4 성경의 영원성).

③ 성경 원본에 전혀 그릇됨이 없음을 믿습니다(딤후 3:12-17; 요 10:35; 벧후 1:20 성경의 완전성). 

④ 영감의 범위에 있어서도 기계적 영감, 동력적 영감, 언어적 영감, 사상적 영감, 부분적 영감, 도덕적 영감 등을 철저히 배제하고 완전영감을 믿습니다(완전축자 영감설). 

⑤ 사본과 사본들의 엄격한 전사를 믿으며 사본과 사본과의 차이는 있어도 원본과 사본과의 차이는 없다고 믿습니다(사본의 권위성). 

⑥ 성경이 신앙과 행위에 유일무이한 최종의 권위임을 믿습니다(성경의 유일성). 

⑦ 성경을 해석하는 무오한 법칙도 오직 성경 그 자체입니다(성경의 신임성). 

⑧ 모든 종교적 논쟁을 결정하고 또한 고대의 학자들의 의견과 인간의 교훈과 개인의 정신문제를 감독하고 판단하시는 최고의 심판자도 성령 안에서 말씀하시는 성경 외에 아무 것도 없음을 믿습니다(마 22:29-31; 엡 2:20; 행 28:25). 
초대교회 성도들은 초등학문인 세상지식에 의존해서 그것을 성경과 동일하게 취급하거나 우위에 두지 아니했습니다. 그들이 삶에 시작과 과정과 마침을 성경에 의지하고 성경을 위하여 살았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재발견하였고 설교는 예배의식에서 벗어나 본래의 위치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인간들의 완전하고도 철저한 변화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변화는 의식적 활동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타계에서 적극적으로 전해지는 복음으로만 가능합니다. 

① 성경의 원 저작자는 하나님 자신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 『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라고 했습니다. 

② 성경의 절대 권위는 계시의 완전 성취에 있습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에 『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라고 했습니다. 

③ 성경은 가감할 수 없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계시록 22장 18절에 『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라고 했습니다. 

④ 성경은 필연적으로 보존되고 계승되어야 합니다. 
기독교의 특색은 계시(성경)종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을 인생에게 알려주는 주권적인 행위입니다. 따라서 자연계시와는 구별됩니다. 

2) 믿음의 재발견입니다. 
로마서 1장 17절에 『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리라 』고 했습니다. 
이것은 오직 믿음(Sola Fide)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모든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롬 1:16). 그 능력의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믿음은 구원 얻는 길입니다. 당시 로마교회의 주장처럼 인간의 공로와 행함이 구원의 빙거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믿음으로만 산다는 것을 개혁자들은 성경에서 다시 찾아 주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잃어버린 귀중한 보석을 깊은 물 속에서 건져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3) 은혜의 재발견입니다. 
로마서 1장 7절에 『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고 했습니다. 
한결같이 우리의 구원은 오직 은혜(Sola Gratia)뿐이지 인간의 공로가 작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인간이 받을 수도 있고 받지 않을 수도 있는 알미니안주의 자들의 입장을 우리는 배격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불가항력적(Irresisteble Grace)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구원이 인간의 공로나 행함이 작용한다는 신인협동설(Syner gonism)을 배격합니다. 이유는 인간의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를 종교개혁을 통해서 다시 찾은 것입니다. 

4) 만인 사제직의 발견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하심이라 』고 했습니다. 
이것은 로마교회의 교황과 교권을 부인하는 동시에 그들의 비성경적인 계급제도에 항의하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의 큰 의의 중에 하나는 성직자(신부)와 성도(평신도)를 지나치게 분리시키는 것에 대한 항의입니다. 성직자가 중보자가 될 수 없습니다. 중보자는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디모데전서 2장 5절에 『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라고 했습니다. 
로마교회는 7성배를 통한 의식 활동으로 말미암아 사제주의로 교권을 유지해 왔으나 개혁자들은 이것을 통렬하게 비판해 왔습니다. 오히려 개혁자들은 주 안에서 성직자는 성직자가 받은 사명에 대하여 책임을 다하고 성도는 성도로써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성도는 누구나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형물에게 경배할 필요도 유물들을 숭배할 필요도 없습니다. 

면죄부를 사야할 필요는 도무지 없습니다. 더욱이 신부들 앞에 고해성사나 마리아를 통한 중재사역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육신을 학대하는 고행이 우리 구원의 빙거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여러 종류의 연보도 구원의 빙거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이미 구원 받은 백성들의 의무요 윤리적인 행위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부흥과 개혁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실체의 두면입니다. 그래서 여기에는 모순이 있을 수 없습니다. 
종교개혁은 사도적 신앙에로 돌아가자는 운동입니다. 하나님의 영역을 극대화 해보자는 운동입니다.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사명 완수! 이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오래 전에 이미 말했던 것입니다. 

Ⅲ. 종교개혁을 통한 우리의 임무

1) 종교개혁의 지속성입니다. 
개혁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단순히 16세기의 상황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종교개혁이 아니라 원시시대로의 복귀인 것입니다. 
다만 우리에게 개혁이란 『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 』(딤전 3:15)로 만들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의미합니다. 

2) 교리적 가르침의 부활입니다. 
지금 그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교회 안에 교리적 가르침의 부활입니다. 이 문제는 주로 교역자들에게 관계된 문제입니다. 
첫째로 교직자들은 성경의 교리적 진리를 다시 설교하기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교의를 단지 교의로써 가르쳐서는 안 되며 언제나 성경에 기초한 신앙의 교리를 설교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은 교인들의 신앙을 굳게 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입니다. 

교인들이 젖만을 받아먹으며 단단한 음식을 맛보지 못하는 경우가 빈번합니다. 
히브리서 5장 12-14절에 『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고 했습니다. 
성경에 계시된 진리체계에 관한 지식이 부족한 것은 유약한 설교가 빚어내는 비극적인 결과이며 이것은 매우 충격적인 일입니다. 

교리적 설교야말로 교인들로 하여금 믿는 것을 바로 알고 지키게 하는 유일한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사의 시초부터 그러하였습니다. 신약의 서신들을 연구해 보면 교리적인 면모가 전면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바울은 자기가 쓴 서신의 약 3분의 2를 신앙의 교리적 기초에 할애하고 나머지 3분의 1 부분에서 우리들의 매일의 생활과 행위에 대해서 말하였습니다. 

화란 개혁주의 교회들은 매 주일 오후마다 [하이델벨그]요리문답에 관하여 설교하는 것이 관례(慣例)가 되어있습니다. 특별히 52차 주일에는 주요 교리 전체(사도신경)와 윤리적인 것(십계명)과 헌신적인(주기도) 면모를 설교하였습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돌트]회의(1618-1619)로 말미암아 채택되고 전 세계 개혁주의 교회들 다수가 아직 사용하고 있는 예배모범(Church Order)제 68조는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습니다. "목사(교직자)들은 주일마다 하이델벨그 요리문답서에 포함된 교리와 개요를 간략하게 설명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3) 치리의 부활입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 치리를 부활시켜야 합니다. 현재 교회가 겪고 있는 난국의 주요 원인들 중에 하나는 치리를 무시한 결과 때문입니다. 
첫째로 교회는 사람들을 너무 쉽게 교회회원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1925년에 [J.그레샴 메이첸]교수는 "현재의 종교 생활의 가장 큰 악 중에 하나는 '나는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합니다.'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고 있다는 증거를 조금도 보여주지도 않으면서 이와 같은 말만 단순히 뇌까리는 사람들을 교회 안으로 받아들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관례의 결과로 많은 사람이 예수의 도덕적 성격에 대한 막연한 찬사 이상의 그 아무것도 아닌 것을 기초로 해서, 혹은 인도주의적인 사역에 종사한다는 막연한 목적을 기초로 해서 교회 안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말한 것은 매우 옳은 말입니다.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단순한 구두상(口頭上)의 신앙고백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것을 지적하였습니다.

치리가 등한시 되고 있는 두 번째 영역은 첫 번째 영역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습니다. 교인이라고 하면서 복음에 관심을 보여주지 않을 때에도 그들의 이름을 교회명부에 쉽게 올리는데 있습니다. 그들이 교회의 모든 행사에 불규칙하게 참석하거나 혹은 전혀 참석하지 않는 일도 빈번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교회의 신앙고백과 반대되는 견해를 공공연히 주장하거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미 정죄된 활동에 참여하는 일까지도 빈번합니다. 
교회는 이러한 일을 결코 허용해서는 안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명시된 규칙에 따라서 기독교적인 치리를 실천해야할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4) 정당한 항의입니다. 
개교회나 노회 안에 성경에 반대되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이 무엇이든지 거기에 대항하여 항의의 소리를 높여야 하는 것도 우리의 의무 중의 하나입니다. 
침묵은 공동책임을 뜻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확실히 깨달아야 할 때입니다. 항의 하는 일이 쉬운 일은 분명코 아닙니다. 우리는 열세(劣勢)일 때도 적지 않습니다. 개 교회에서나 혹은 노회에서, 총회에서 홀로 서지 않으면 안될 때도 있습니다. 
여기서 항의는 정당한 항의, 즉 성경적 항의를 말합니다. 성경적 항의는 교리적 항의로 집약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윤리적 항의가 대부분입니다. 여기에서 상황윤리가 탄생되어 교회를 어지럽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역사 속에 홀로 외로이 서 있었습니다. 특히 초기의 엘리야는 바알 앞에 머리를 숙이지 않은 칠천 명에 대해서는 조금도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할 말을 다하였습니다. 아모스와 예레미야, 세례요한과 신구약시대의 많은 선지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엘리야나 아모스나 예레미야나 세례요한과 같은 선지자가 아니다 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우리의 생각은 그릇되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다 선지자이기 때문입니다. 

[하이델벨그]요리문답서의 [주의 날] 제 12조는 "그대는 어떻게 기독교인이라 불리웁니까?"라고 묻습니다. 그 대답은 "주의 이름을 신앙고백하며 주님에게 나를 감사의 산 제사로 드리며 자유롭고 선한 양심을 가지고 금생(今生)에서 죄와 마귀에 대항하여 싸우며 내세(來世)에는 주와 함께 영원히 만물을 다스리기 위하여 나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한 지체요 이로써 주님의 성찬에 참여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상은 우리들도 모두 주님과 같이 선지자요, 제사장이요, 왕임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선지자들입니다. 요한일서 2장 27절에 『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리를 위해 싸우는 것은 예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에 『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현재 W.C.C.가 연합운동을 통하여 제의한 것을 보고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소극적인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보다 더 적극적인 태도로 대처해야 합니다. 스탠포드 차이드 교수의 말에 의하면 오늘날 예수를 믿는 성도들의 책임감 회복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루터, 칼빈, 크롬웰, 조나단 에드워드 같은 사람들은 교회가 박해 시대를 맞이하여 타락하는 것을 보고 이것을 비긴 게임이라고 말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가능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하여 진리 파수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싸웠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진리를 위해 싸우는 전사가 되었다는 것임을 깨닫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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