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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자 (창 28:3~4, 고전 6: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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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자 (창 28:3~4, 고전 6:9~10)


오늘은 우리 교회 창립 115주년을 맞는 주일입니다. 지난 115년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며,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우리 교회의 역사는 사회에 대한 사명이며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그림자입니다. 우리들은 115년의 역사 속에서 신앙의 유업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 교회가 지난 주일에 출판감사예배를 드린 ‘연동교회 애국지사 16인 열전’도 그런 의미에서 신앙의 유업을 이어간 우리 믿음의 선조들입니다. 역사와 신앙의 사람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수한 신앙의 유업을 받은 우리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난 115년 동안 많은 유업을 주셨습니다. 앞으로 올 시대에도 많은 유업을 받을 만 한 자가 됩시다. 우리에게 주신 유업을 잘 이어가는 자가 됩시다. 저의 선친이 세상을 떠나신 지도 10년이 지났습니다. 이제 저의 선친 얘기를 좀 해도 될 듯합니다. 저의 아버님께서는 책을 많이 저술하셨습니다. 당시만 해도 책이 잘 팔려 돈을 조금 모으셨고, 돈으로 땅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1984년,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시절에 전 재산을 시무하시던 교회에 다 헌정하셨습니다. 그 때 아들인 제게 아버님께서 헌정에 대한 동의를 해 달라고 편지를 하셨습니다. 

그 때 저는 너무 감사했습니다. 아버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재산에 관심도 없었고 아버님께 받은 믿음의 유산이 더 귀한데 돈이 문제이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그 때 감사하는 마음으로 아버님의 헌정을 동의했습니다. 돈이란 유산은 받지 못했지만 최고의 유산을 받았습니다. 믿음이란 유산이며, 목사라는 유업이며, 하나님의 나라라는 위대한 유산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교회가 많은 유산을 받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유산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유산이 얼마나 더 많은지 모릅니다. 믿음의 유산을 받았고, 역사의 유산을 받았고, 좋은 전통의 유산을 받았고, 하나님의 나라를 받았습니다. 
  
성경에는 유업, 기업, 분깃 등의 단어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자녀의 권리, 하나님의 백성의 권리, 지파별로 나누어주는 땅 그리고 정신적 권리 등을 말할 때 이런 단어들을 사용합니다. 유산이란 단어는 구약에는 ‘나할’ 혹은 ‘야라쉬’라는 말입니다. 상속을 물려주는 것보다 소유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들은 창세기, 출애굽기 보다 민수기, 신명기에 더 많이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구약의 유산, 유업이란 재산보다 가나안이란 거처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가장 귀한 유산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이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전승에서 장자는 다른 아들보다 두 배의 유산을 받았습니다. 아들이 없으면 딸이 유산을 물려받았습니다. 딸이 없으면 형제가 물려받았습니다. 형제가 없으면 아버지의 형제가 물려받았습니다. 아버지의 형제가 없으면 다음 친척이 물려받았습니다. 이런 상속법은 재산이 다른 족속에게 흘러들어가지 않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신약에는 ‘클레로노모스’라고 합니다. ‘클레로스’(제비)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신약에서 유산이라는 단어는 그리스도께서 유산의 상속자이심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21:38에는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산을 차지하자 하고”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유산의 상속자이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복을 유산으로 받아 전달하는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신약에서 유산이란 물질적이며 동시에 영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유업이 없는 사람은 참 불쌍합니다. 유업이 없는 듯이 많은 것이 좋습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돌아와 성곽을 수축할 때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느헤미야는 그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공사가 진행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2:20에는 “내가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를 형통하게 하시리니 그의 종들인 우리가 일어나 건축하려니와 오직 너희에게는 예루살렘에서 아무 기업도 없고 권리도 없고 기억되는 바도 없다 하였느니라”고 합니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 확장에 열심히 일하여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이 있게 하고, 권리가 있게 하고, 유산이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 불의한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합니다. 

9절에는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 합니다. ‘아디코이’란 단어는 ‘불의한 자’ 즉 의롭지 못한 자를 의미합니다. ‘악을 행하는 집단’이 아니라 악의 성격 때문에 하나님 나라와 대적 관계에 놓인 자들을 의미합니다. 
  
왜 불의한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합니까? 하나님은 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의로운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인 성품을 보세요. 사랑, 선, 의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영원, 창조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마귀는 어떻습니까? 미움, 악, 불의가 마귀의 성품입니다. 마귀는 숙명적이고, 피조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아예 불의가 없고 악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합니다. 
  
로마의 네로황제는 악정의 대표자입니다. 기독교 박해를 시작한 악한 왕입니다. 그러나 그도 처음에는 사형집행 후에 “내가 차라리 글을 안 배웠더라면 좋았을 것을”하고 후회하였다고 합니다. 세계를 대전으로 몰았던 히틀러도 “정치를 떠나 그림을 그리며 살았으면 좋겠다”고 하였다고 합니다. 원래 사람의 모습은 의롭고, 천사처럼 순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한 모습은 마귀의 모습입니다. 불의한 모습입니다. 악마처럼 변한 모습입니다. 
  
로마서 14:17에는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의와, 평강과, 희락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의가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불의는 하나님의 나라의 것이 아닙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합니다. 
  
불의한 자는 하나님의 나라의 유업이 없습니다. 반면에 의로운 자를 보세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고 합니다. 의로운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습니다. 의로운 자를 박해하는 자는 불의한 자입니다. 이런 자에게는 하나님의 나라는 없습니다. 
  
존 오트버그는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의로운 행동을 하게 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를 도와 우리가 의로운 백성이 되게 하는데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의로운 백성이 되게 하시는데 왜 의로운 백성 되게 하십니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기 위하여 의로운 자가 되게 하십니다. 불의한 자는 못 들어가므로 의롭게 하여 들어가게 하십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목사와 변호사는 하나님의 나라에 없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간 어떤 남녀가 결혼을 하고 싶었습니다. 하나님께 “우리 결혼할래요”라고 했답니다. 하나님은 “여기서는 결혼이 없다”고 했더니 “왜요?” 라고 되묻습니다. “여기에는 목사가 없어 결혼 주례할 사람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그냥 둘이서 결혼하고 살았습니다. 한참 살다보니 싫증이 나서 다시 하나님께 왔습니다. “하나님, 저희들 이혼할래요”. 하나님은 “이혼할 수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왜요?” “이곳에는 변호사가 없어서 안 된다”. 왜 이런 얘기가 나올까요? 목사들, 변호사들이 다 여러분 보다 죄가 많다고 생각하세요? 아닙니다! 누구보다 목사나 변호사가 더 의롭기를 기대한다는 말입니다. 
  
불의를 가지고는 절대로 하나님의 나라의 유업을 받을 수 없습니다.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불의의 보응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절대 발을 붙일 수 없습니다. 골로새서 3:25에는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심이 없느니라”고 합니다. 불의의 보응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빼앗기고, 음부에 빠지는 것입니다. 지옥불이 보응입니다. 
  
사랑장인 고린도전서 13:6에는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라고 합니다. 진짜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그 자체가 의로운 행위입니다. 의롭지 못하면 더 이상 사랑은 아닙니다. 
  
유산을 다 주면 굶어죽고, 절반만 주면 볶여서 죽고, 안 주면 맞아죽는다는 말이 있네요. 하나님께는 유산을, 유업을 못 받으면 완전히 죽습니다. 믿음으로 받는 하나님의 나라의 유업이 있는 우리가 되고, 우리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미혹을 받지 말아야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습니다. 

9절에는 “미혹을 받지 말라”고 합니다. 미혹이 무엇입니까? 음행하는 자, 우상 숭배하는 자, 간음하는 자, 탐색하는 자, 남색하는 자, 도적, 탐욕 부리는 자, 술 취한 자, 모욕하는 자, 속여 빼앗는 자를 미혹을 당한 자라고 합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고 합니다. 모든 형태의 성적 타락을 하나님의 나라는 배격합니다. 우상숭배란 이방 신전을 통해 많이 나타났습니다. 이방의 우상숭배는 성적 타락과 깊은 연관을 가졌습니다. 탐색이란 ‘여자 같은’의 뜻입니다. 미혹을 받지 말라는 말은 갈라디아서 6:7에서 말한 것과 같은 ‘스스로 속이지 말라’는 뜻입니다. 
  
성적인 유혹은 가장 강하고 성공할 때 많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도 “주여, 정절을 지키게 하옵소서. 하지만 지금이 아니고 나중에요”라고 기도했습니다. 성적 욕구는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단지 이 욕구가 유혹되지 않게 잘 다스려야 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두 가지로 사람을 속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안 계신다고 속입니다. 둘째는 만약 하나님이 계신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 라고 합니다. 마귀는 그 본질이 시험하는 자입니다. 넘어지게 하는 자입니다. 미혹은 사탄의 전용물인 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시험에 들지 않고 죄 짓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라고 기도를 가르치십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절실한 기도입니다. 우리에게 시험이 있지만 시험에 들지는 말아야 합니다. 마귀가 미혹 하지만 미혹을 받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노무라 마사키는 ‘내 하루의 도둑맞은 58분’이란 책에서 술자리에서 악마의 유혹만큼 위험한 세 가지 ‘더’가 있다고 합니다. ‘한 잔만 더’, ‘한 집만 더’, ‘한 곡만 더’입니다. 왜냐하면 ‘더’라는 말이 나올 때가 가장 기분이 좋은 상태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저는 경험이 없지만 그렇다고 하네요. 미혹을 받지 않으려면 절제해야 합니다. 여러분 잘 아시지요? 절제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절제할 수 있습니다. 
  
간디가 어느 날 기차를 타다가 승강장에 신발 한 짝을 떨어뜨렸습니다. 기차가 이미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기차가 움직이기 때문에 신발을 주울 수 없었습니다. 그 때 간디는 다른 한 짝도 신발이 떨어져 있는 곳에 던졌습니다. 같이 있던 사람이 깜짝놀라서 물었습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누군가 가난한 사람이 저걸 줍는다면 짝이 맞아야 신을 것이 아닙니까.” 적어도 간디에게는 세 가지 선택이 가능했을 것입니다. 첫째는 신발을 주우러 내리는 것입니다. 둘째는 신발 한 짝만 두고 갈 수 있습니다. 셋째는 그가 했던 것처럼 한 짝마저 던질 수 있습니다. 아마 순간적인 판단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순간적 유혹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평소의 마음, 신앙, 인격, 하나님의 나라가 있어야 이런 선택, 판단이 가능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항상 미혹을 당합니까? 항상 악합니까? 아닙니다. 순간적, 충동적 미혹을 피하기 위해서는 평소에 수련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교회 안에서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직장에서, 사업장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드러나야 진짜 그리스도인입니다. 
  
요즘 우리가 사는 세상나라가 왜 이럴까요?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상실한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24에는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라고 합니다. 26절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내 버려두셔서 죄지은 상태로 살게 되고 세상의 온갖 미혹을 당하고 사는 것입니다. 
  
지난주의 신문에 보세요. 왜 그렇게 성폭행 기사가 국내외에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한국의 조두순 사건뿐만 아니라 외삼촌이 조카딸을 여러 해 동안 성폭행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외숙모도 옆에서 구경하며 조카딸을 달랬다고 하네요. 미국에서는 19년 만에 ‘짐승을 잡다’라는 기사가 났습니다. 제니퍼 슈에트라는 여성은 8세 때 성폭행을 당했는데 지금 27세가 되어 범인을 잡았습니다. 요즘 자살이나, 음주나, 흡연 등을 보세요. 흡연의 나이가 낮아집니다. 요즘에는 초등학생까지 흡연하고 있습니다. 자살의 주요인도 이전에는 생활고였지만 최근에는 가정파괴라고 합니다. 미혹하게 하는 것들이 너무 많은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미혹에서 벗어나야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습니다. 왜요? 짐승은 못 가니까요. 에서와 야곱을 보세요. 에서는 미혹을 받았습니다. 어떤 미혹입니까? 팥죽 한 그릇 때문에 장자권을 동생에게 팔았습니다. 얄팍한 현실적 배부름에 자신의 명분, 권리를 팔아먹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은 의가 아닙니다. “숭고한 학은 천리를 날아 지쳐도 오동나무에 앉지 않고 아무리 주려도 좁쌀은 먹지 않는다”고 합니다. 의는 바른 판단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소홀히 여겨 미혹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결론 

알렉산드리아의 키루스는 정욕의 유혹을 받지 않는 사람은 희망이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유혹을 받지 않는 까닭은 이미 죄를 짓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를 범하고 있는 사람은 미혹을 받지 않습니다. 이미 마귀의 수하에 있으면 마귀는 미혹하지 않습니다. 가장 큰 유혹은 유혹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가장 큰 공격은 공격을 전혀 받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믿음의 유산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요건들을 제거합시다. 115주년을 지나 120주년, 200주년에 이를 때까지, 그리고 예수님 다시 오실 세상 끝까지 하나님의 나라를 잘 이어가는 유업을 잇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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